성지순례(20) - 2024 .02. 17(목)-18(금) |
이번 순례는 20차이다. 원래의 완주 계획이 40차라면 이제 절반에 해당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일단 시작을 하고나니 반환점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순례에 따르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에 비해 더 많은 기쁨과 보람을 얻어가고 있다면 일단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큰 중단할 만한 큰 문제없이 진척이 되는 것에 대해 하느님, 그리고 가족이나 교우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2024. 2. 17(토) 아침 7시 30분 성당 출발. 겨울 날씨 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다만 내일 일기예보에 서해안 일부에 약간의 비가 있다고 하나 크게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아내 실비아는 접이식 우산을 챙겨서 가방에 넣어놓았지만 필요가 없을 듯하여 꺼내려고 하다가 그대로 넣은 채 나섰다.
자비로운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한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시어,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심을 깨달게 하시고,
길에서 얻은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항상 출발 전 기도문에 나오는 길에서 얻은 기쁨을 본당 고우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순례의 기록을 정리하는 노력은 하지만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에 되어 가는데 간접적인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번의 코스는 수원교구와 접하는 대전교구의 북쪽, 흔히 말해서 내포지역의 위쪽 지역이다. 이 지역은 수도권에서 삼남 지방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천주교 신앙이 일찍이 받아들여져 타 지역에 확산시키는 거점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번 코스는 오랜만에 1박2일로 계획을 했기에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남방제, 원머리, 솔뫼 성지, 합덕성당, 황무실 성지, 신리성지, 여사울 성지, 배나드리 이렇게 10군데나 된다. 처음엔 정거리 운전의 부담도 있어 KTX와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나 경비의 효율성을 생각하여 어려더라도 승용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순서는 이들 중 가장 북동쪽에 떨어져 있는 성거상 성지를 처음으로 하고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여 공세리와 남방제, 그 다음으로 나머지 성지 순서이다. 성거산 성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지가 한 곳에 밀집되어 있어 그만큼 편하다.
성거산 성지 - 박해시대 산간 교우촌이며 외국 선교사의 피신 거점 |
성지 주소는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394
성거산 교우촌의 형성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할 무렵 전국을 다니다가 천안의 직산 수헐원에서 잠시 쉬었다. 그때 마침 동쪽에 있는 한 산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영롱하였다. 그리하여 그 산을 ‘신령(神靈)이 사는 거룩한 산’이라 하여 성거산(聖居山)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친히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종대왕도 이곳과 가까운 온양 온천에 행차했고 그때 역시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은 높이가 해발 579m나 되며 그 아래에 수많은 계곡이 있어 신자들이 숨어 살기에 적합하여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성지인 경기도 베티 성지와도 가까워 선교사들의 신앙 거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있다고 생각 못할 높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였다고 추정된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어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초기에는 산발적으로 한 가구, 두 가구 모이기 시작하여 1830년대에는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1860년대 극심한 박해시대를 거치면서도 8개의 교우촌이 유지되어 1920년대까지 신앙의 터전을 지켜왔다. 물론 지금은 송전(먹방이) 공소 이외는 모두 없어졌다. 8개의 교우촌은 다음과 같다.
1) 소학골 교우촌 공소(1888년, 두세 신부) (신자수 114, 북면 납안리)
2) 서들골 교우촌(1884년, 두세 신부) (목천면 송출리)
3) 먹방이 교우촌 공소(1884년, 두세 신부) (신자수 128, 목천면 송전리)
4)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목천면 송출리)
5)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신부)
6)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 베드로 신부) (신자수 112, 목천면 석천리)
7) 도촌 교우촌(1919년, 공 베드로 신부) (신자수 110, 북면 납안리)
8)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 베드로 신부) (신자수 51)
[출처 : 성거산 성지 홈페이지]
특히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1827년 무렵 고향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으로 이주한 곳이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도 이곳 백부의 집에 와서 성장했다.
성거산 성지의 선교사들
1840년 대 후반부터 성거산 교우촌은 이웃한 배티 교우촌과 함께 다블뤼, 최양업, 페롱, 프티니콜라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지역 본당이 설립되는 1861년 10월 이후로는 조안노, 페롱, 칼래 신부 등이 이들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게 된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4년 여름 이래,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부 지역을 관할하는 칼래 신부의 사목 중심지가 되어 병인박해 때까지 안전한 안식처요, 여름 휴식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거산 교우촌 사제 순방
【1851-1861.10】
【1861.10-1866.10】
병인박해 이후 성거산 뜨락의 주위 8개의 교우촌은 점점 교우촌 수가 줄어들면서 통 폐합되다가 1920년에 사라지게 된다. 이들 교우촌이 사라지기까지 이 교우촌에서 성사 및 신자들을 돌본 선교사 신부들을 보면 베르모델 신부, 두세 신부, 드비즈 신부, 퀴틀리에 신부, 공 베드로 신부를 들 수 있다.
성거산 성지의 순교자들
성거산 지역(목천)에는 병인박해 무렵에 교우촌이 발각되면서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제일 먼저 소학골과 서들골 교우촌이었다.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 교우촌이 포졸들이 들이 닥쳤다.
10월 8일(양력11월14일)에 배문호(베드로)와 고의진(요셉)이 체포되었고, 이틀 뒤인 10일에는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형제와 채서방 며느리 등 5명이 체포되어 모두 목천현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공주 진영(충청도 우영)으로 압송되어 끝까지 신앙을 증거 한 뒤 11월 8일(양력 12월 14일) 다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소학골은 배씨와 고씨, 최씨, 채씨 등이 신앙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목천 흑성산 자락의 장자동에서도 신자들이 체포 되었다. 곧 1866년 말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서완순(스테파노)과 청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아들 서상옥(프란치스코) 등 2명이다. 따라서 박해 초기인 병인년에 성거산 소학골과 이웃 장자동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들은 모두 7명이다.
◈ 병인년의 소학골· 장자동 출신 순교자
병인년 박해가 정묘, 무진 박해로 이어지면서 소학골은 물론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도 계속해서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 수는 모두 8명이 있다.
◈ 정묘년 이후의 목천(성거산) 출신 순교자
◈ 목천(성거산)교우촌 출신의 타지역 이주 순교자
이상과 같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에서 발생한 순교자는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을 합하면 모두 23명이다.
◈ 목천(성거산) 교우촌 23명의 순교자들 거주지
◈ 목천(성거산) 교우촌 23명의 순교자들 처형지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여 4시간이나 소요하여 성거산 입구 소성당에 도착했다. 네베게이션에 나오는 예상 소요 시간은 3시간 남짓이지만 중간에 휴게소에서 두 번이나 쉬고 간단한 아침식사도 하면서 오다 보니 도착 시간은 11시 30분이나 되었다.
소성당
주차장에 도착하니 조그만 조립식 건물인 사무실이 있고 성당 건물이 있다. 예상 외로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었다. 나중 알고 보니 11시 미사 중이었다.
성거산 성지가 579m 성거산의 거의 정상 위치에 있어 눈이 오는 겨울철에는 통행이 어려워 부활대축일부터 11월말까지만 성지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12월 이후 겨울철에는 이곳 소성당을 이용한다고 한다.
마당에는 높은 철간(鐵竿) 십자가가 솟아 있고 계곡 쪽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그 사이에 미사를 마치고 신자들이 밖으로 나왔는데 주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곳에 마을이 없으니 대부분 순례객들로 추정된다.
성당 건물은 지붕이 널찍한 맞배지붕의 단층 시멘트 건축물로서 매우 소박하다.
성당 안에 들어가니 제대 전면은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자연 풍광이 모두 실내에 들어오는 개방형이었다. 정면에는 팔을 벌리고 있는 바깥 예수님 십자고상이 안에 비치고 제대 좌우에 성요셉상과 성모상이 배치되어 있다. 성당의 왼쪽 벽에는 십사처가 기둥에 붙어 있고 오른쪽 벽은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 있어 좌우 벽이 비대칭의 조회미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밖에 나와 미사를 마친 신부님께 성지로 가는 방법을 물으니 얼마 전까지도 눈이 쌓여 통행이 어려웠는데 오늘 아침에 차가 올라갔으니 갈 수 있다고 한다. 어제까지는 차가 다니지 않았단 말로 들려 퍽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님 말씀은 일단 오르막길로 승용차를 타고 제1줄무덤을 순례하고 올라와 다시 차를 타고 제2주차장에 가서 주차를 하고 제2줄 무덤과 성모광장에 걸어내려가 순례하고 올라와 다시 차를 타고 정상을 향하여 얼마간 오르면 마지막으로 성지의 본성당인 병인박해 기념성당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교학골 교우촌도 몇 채 복원되어 있다고 일러준다. 성지 순례 안내도대로다.
자료로 작성한 성지 안내도를 보며 신부님이 안내해 준 대로 코스를 확인하고 출발했다. 일단 제1줄무덤 → 제2줄무덤 →성모광장→병인박해 기념성당→교학골 교우촌을 코스로 한다.
제1 줄무덤
안내도만 보면 해발 500m 산 위로 간다는 사실을 잊고 평지거니 생각했는데 오르막길을 올라보니 예사가 아니었다. 험하기는 석굴암 오르는 석굴로보다 더했다. 이 길을 굽이굽이 돌아 3km를 올라가야 한다.
길옆 공간에 주차를 하고 제1줄무덤으로 내려간다. 입구에는 성거산 성지 안내판과 표지석이 있다. 안내판에는 앞에서 정리한 대로 초기 교우촌의 형성과 외국 선교사의 방문과 거주, 그리고 박해 상황과 순교자에 대한 내용이다.
입구에서 산 아래로 들어서자 제1줄무덤으로 가는 순례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 되어 묵상하며 걷기에 아주 좋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드디어 제1줄무덤 안내판이 나타나고 따뜻한 양지쪽에 무덤군이 나타난다.
제1줄무덤은 병인박해시 소학골 교우촌에서 체포된 하느님의 종(복자 이전 단계) 다섯 순교자 배문호(베드로 24세), 고의진(요셉 24-25세), 최천여(베드로 55세), 최종여(라자로 42세), 최씨 며느리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38기이다. 이들 중 이름이 전하는 위의 다섯 순교자는 1866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목천현을 거쳐 공주 진영에 압송되어 많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1월 8일(음력)에 교수형을 받았다. 기록에는 이들의 시신은 청주 절골에 사는 강치운씨가 운구하여 이곳 소학골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병인 치명 사적) 그 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여기에 묻혔다는 증언이 있다.
어느 것이 하느님의 종 다섯 순교자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는 자신들만 순교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죄스러워 무명 순교자와 함께 하려는 뜻일는지 모른다. 자신의 이름마저 하느님께 봉헌한 순교자 면모가 더욱 돋보인다.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는 영원한 것이니 어찌 잠시를 살기 위해 주님을 배반하겠느냐?”며 일갈을 놓은 최천여 순교자, 그리고 “만 번 죽어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며 소리 높이 외치던 배문호 순교자의 늠름한 자세가 오버랩된다. 이들의 천상영복을 기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안내판을 보니 여기서 여기서 500m만 가면 바로 제2줄무덤으로 갈수도 있다. 그러나 제2줄무덤에 갔어도 어차피 차 있는 곳까지 걸어와야 하므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로 제2줄무덤으로 이동했다.
차로 한참을 올라가니 제2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제2줄무덤 내려가는 길이 갈리고 오른쪽으로 정상을 향하여 바로가면 성가산 테마임도가 나 있는데 지금은 통제되어 있다.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제2줄무덤을 향해 내려간다.
순교 조각상 하나가 나타난다. 제목은 순교자의 길. 2010년 고영환(토마스) 작으로 순교의 상징인 2개의 팔마 잎에 싸인 성거산 순교자 5인의 얼굴을 조형했다. 그리고 대좌에는 “나는 훌륭히 싸웠으며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1티모 4,7-8)라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삶을 제자 티모테오에게 이르는 말이 새겨져 있다.
성모광장
제1줄무덤에서와는 달리 성모광장에 이르니 눈이 가득히 쌓였다. 온통 설국(雪國)이었다. 같은 계곡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성모동산의 입구에 또 하나의 순교자를 기억하게 하는 조각품이 나타난다. 형구를 형상한 이 작품은 2010년. 김희상의 작이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6, 17)
낙인(烙印)이 무엇인가? 어디 가서도 죄인임을 나타내기 위해 불 꼬챙이로 몸을 지진 형벌, 곧 포락형(炮烙刑) 자국이다. 이 구절은 바오로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구절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했다. 세상에서는 형벌의 자국을 치욕이 하겠지만 바오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영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순교자들도 이와 같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이 바보처럼 보였겠지만 순교자 입장에서는 세상 사람이 바보 같다고 여겼지 않았겠는가?
성모광장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야외 제대가 있고 그 앞에 많은 수의 스탠드식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제대 뒤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방금 날아서 이곳에 임하신 듯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모두가 자연친화적이다.
안내판을 보니 성모광장은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으로 통하는 교차점이 되는 곳이며 제1줄무덤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이 잇달아 제2줄무덤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계속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간다.
다시 눈길이다. 음지를 간다는 말이다. 길바닥에 눈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은 양지냐 음지냐의 차이이다. 목적지에 갈려면 양지가 나타나면 양지를 걷고 음지가 나타나면 음지를 걸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배제할 수가 없다. 이것이 삶의 길이다.
제2줄무덤
드디어 제2줄무덤이다. 역시 제1줄무덤과 다르게 흰눈으로 덮여 있다. 나무에만 눈이 없다뿐이지 지상은 온통 눈이다. 묘지 뒤쪽에는 대형 십자가가 있고 묘지 앞쪽에는 돌제대가 있다.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화약종이가 생각난다. 노랗거나 빨간 종이에 화약을 넣어 볼록볼록하게 만들어서 문방구에서 팔았는데 볼록한 부분을 돌로 충격을 가하거나 장남감 총에 넣어 터뜨리면 굉장한 소리가 나서 짖궂은 아이들은 이것으로 다른 아이, 특히 여자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제2줄무덤 역시 흩어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아 이곳에 이전 안장한 것으로 봉분의 수는 36개로, 38개를 가진 제1줄무덤과 비슷하나 여기는 모두가 무명 순교자의 묘다. 숫자로 보면 제1줄무덤과 제2줄무덤을 합하면 74기이지만 무덤을 정비할 때 시신들이 겹쳐 묻히기도 하여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묘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이전 성거산 정상에 미군기지가 들어서서 도로를 개설했는데 그 당시 있었던 무덤은 107기였지만 이장 과정에서 일부가 손실됐다고 한다. 그동안 안보시설로 접근이 어려웠던 성거산 성지 순교자의 무덤은 이름 없는 들꽃과 함께 침묵 속에 숨겨진 역사적 의미가 조명되어 1998년 천주교 성지로 승인되고, 200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됐다.
제2줄무덤에서 바로 소학골 교우촌으로 넘어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리고 순교자의 일그러진 모습을 한 청동 조형물이 하나 나타나는데 앞에 나온 김희상(2010)의 작품이다. 대좌에 새긴 성경 구절은 마모되어 읽을 수가 없다. 불과 10여년 전에 건립한 것인데 글자도 읽을 수 없도록 했다니 졸속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학골 교우촌이라고 하면 성거산 성지의 중심인 대성당(병인박해 기념성당)이 가까이 있는 곳이다. 그 길을 순교자의 길이라고 했다.
약 2.1㎞의 ‘순교자의 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시작으로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 성지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등과 순교 관련 조형물이 구비마다 순교의 여정으로 이어져 있다. 봄에는 피는 이름 모를 야생화는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기에 적합하다.
처음 계획은 제2줄무덤에서 다시 차를 세워준 능선 위의 주도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내고 성당에 갈 예정이었으나 일단 눈이 쌓인 순례자의 길을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길옆에 눈이 덮인 직사각형 안내판 같은 것이 바닥에 놓여서 무언가 있을 것 같아 시린 손을 불어가며 눈을 떨어내었더니 103위 순교성인과 순교자에게 바치는 기도문이었다.
눈 녹은 길 따라 마지막 고개에 올라서니 넓은 지역이 펼쳐지는데 그 아래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걸어 내려 갈 수도 있으나 어차피 소학골 교우촌으로 가려면 차가 있어야겠기에 다시 제2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인박해 기념성당
성거산 주 능선길에서 갈라져 성당으로 내려가는 입구에는 성거산 성지 표지석과 순교자 조형물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조형물은 죄인을 구금하는 ‘칼’에다 못 박힌 두 발을 새겼다. 이는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교자의 거룩한 행보를 상징한다.
표지석 대좌에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서 6, 13) 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이 구절은 바로 위 12절의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는 구절을 보면 욕망과 환락을 좇다가 몸을 망치는 일이 없이 의로운 일에 몸을 바치라는 뜻이다. 바로 세상의 부귀공명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몸을 바친 순교자의 삶이 그렇다.
아직도 눈이 쌓인 산에 난 도로를 내려가니 눈이 다 녹은 곳에 성당이 나타난다.
성전 입구 축대 위에는 성모상이 서 있다. 그 옆에 성전이 있고 십자가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십자가가 이렇게 높은 이유는 이 성당의 제대가 소성당처럼 통유리로 되어 있어 십자고상을 안에 달지 못하고 바깥의 십자가를 유리를 통해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아쉬운 것은 성당문이 잠기어 이런 제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당 바깥 안내문에 의하면 이 성당에서는 부활대축일부터 10월말까지만 미사를 봉헌하고 11월 부터는 산 아래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고 안내되어 있다.
성당 마당 앞에는 옛날에 교우촌 터임을 알 수 있는 넓은 터가 있다.
소학골 교우촌
마지막으로 박해시대 성거산 지역 여덟 교우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소학골 교우촌에 갈 차례다.
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 · 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칼래 신부의 서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목이 있다.
이곳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로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칼래 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소학이란 아무래도 ‘학의 보금자리’를 뜻하는 ‘巢鶴’(소학)이 아닌가 한다. 소학골 교우촌 표지판이 길 입구 높은 곳에 서 있고 입구에는 소학골 교우촌 안내판과 여기서도 순교자 조각상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소학골 교우촌의 문화재로서의 가치(기념물 제175호)와 교회사적으로는 외국 신분의 거주지이며 다섯 복자를 위시한 많은 무명 순교자를 배출한 곳임을 밝혔다.
조각상은 순교자들이 죽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의지를 야생화의 강한 생명력과 접목시켜 제작한 작품으로 꽃 수술로 순교자를 의인화하여 전교의 의미를 나타냈다는 설명이 있다.
입구 고갯마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이쪽 양지에서부터 맞은편 눈 쌓인 음지를 한 바퀴도는 순례길(둘레길)을 조성하여 놓았다. 다리를 만들고 계단길도 설치하였다.
교우촌 가는 길는 십자가의 길이다. 그리고 한 곳에는 역시 순교자 조각상이 또 하나 있다. 2010년 고영화(토마스)의 작으로 제목은 ‘길’이다. 마음속에 간직한 십자가의 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저마다 십자가의 길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것이 마음이 아니겠는가?
교우촌의 집은 딱 3채가 복원되어 있다. 문은 물론 잠겨 있다. 칼래 신부님이 문을 열며 인근 교우촌의 소식을 물어 올 것만 같다. 맞은편 입구 쪽에는 조그만 예수성심상이 이쪽을 건너다 보신다.
벌써 낮 1시 반, 점심 때를 훌쩍 넘겼다. 다음 행선지인 아산 공세리 성당이어서 일단 공세리 성당이 있는 아산시 인주면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 시간 가까이 소요되어 면소재지 정도 되는 곳에 와서 식당을 찾아보니 눈에 띠지 않는다. 한참을 찾다가 수제 돈까스 전문점이라는 상호를 발견하고 들어가서 오랜만에 스테이크를 주문하여 식사를 했다. 13,000원이라는 금액에 비해 가성비가 높다.
식사 후 공세리 성당에 가는 데는 10분쯤 소요. 3시가 조금 지나 도착했다.(다음 회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