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27. 안식일의 주인 (눅 6:1-5)
◆ 바리새인들의 문제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 생밀을 비벼서 먹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절대 쉽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우리나라 법에는 남의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비벼서 먹는 것은 용납되지 않지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밭의 이삭도 따먹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다만 낫을 대지는 못하게 했다(신 23:25). 따라서 제자들의 이 행위는 불법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이날이 안식일인데, 제자들이 노동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안식일을 범한 것일까?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노동일까? 사실 이것은 지나친 트집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매우 엄격하고, 늘 트집 잡는 분이었다. 인간들의 부족함이 못마땅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노심초사하면서 비위를 맞추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하실 때 한 달란트 맡은 자는 그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마 25:24)라고 했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은 그를 향해서 말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을 이미 만난 자이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안다. 하나님을 그렇게 굳고 메마른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들도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을 곡해하는 사람에게서 계속 배우게 되면 결국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성도가 이런 자들에게 눌려서 비참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마 23:4)라고 했다.
◆ 제자들을 변호하심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트집 잡는 바리새인에게 즉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이시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이 사람은 내가 십자가의 피로 그의 죄를 모두 처리한 자입니다'라고 변호하시는 분이시다(요일 2:1). 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하실 때, 구약의 한 예를 드셨다. 다윗이 성전에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게 된 진설병(성전 안의 상에 놓여진 빵)을 먹었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배고파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법전을 들이대면서 따지시는 융통성 없이 꽉 막히고 메마른 분이 아니라, 자비하신 분이시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도 법만 따지는 종교인처럼 무자비한 자들이 없다. 우리는 어려움에 부닥친 형제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메마른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 안식일의 주인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변호하시면서 그들의 행위가 용납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대신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슨 의미일까? 누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5)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숫양 둘의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하나님께 드렸다(민 28:9-10). 양을 잡고 각을 뜨고 내장을 씻은 후 이것을 모두 제단에 올려서 태우는 일은 상당한 노동이다. 밀을 비벼서 먹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었다. 즉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은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성립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면서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라고 하셨다. 즉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안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식일을 범해도 문제가 안 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무척 충격적인 말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일은 재해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안식일의 참된 실체이심을 드러내신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아주 잘 해석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즉 안식일의 주인이란,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실체가 되신다는 의미다. 특정 요일을 지정해서 지키는 안식일 준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림자가 다가오면 즉시 눈을 들어 그림자를 만든 실체를 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그림자인데 그 실체는 보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를 붙잡을 것인가, 실체를 붙잡을 것인가?
만일 어떤 성도가 속죄받겠다고 양으로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우리는 말려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실체다. 마찬가지로 어떤 성도가 구약적 의미로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하면 말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림자이기 때문이며, 그림자를 붙잡는 순간 실체를 놓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요일을 지키는 안식일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안식일 준수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모든 요일을 똑같이 여길 수도 있다(롬 14:5). 많은 사람들이 신약적 안식일 개념을 모르니 요일 가지고 다툰다. 안식교에서는 토요일을, 개신교에서는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우기며 싸운다. 그러나 둘 다 틀렸다. 참된 안식일은 요일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아무리 안식일을 잘 지켜 보았자 바리새인 수준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안식일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뻐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힘쓴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요일을 안식일로 간주하고 율법적으로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날들이 안식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그날에 등산을 가거나 돈을 버느라 바빠서 예배 빠지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둘 다 틀렸다. 그들은 안식일의 실체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없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실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안식일의 실체를 아는 자들은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를 예배하는 것을 참된 안식일 준수라고 믿는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주 예수님, 저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주신 안식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평생 안식일의 실체 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겠습니다.
28.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 (눅 6:6-11)
◆ 고칠 것인가 말 것인가?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회당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심각한 장애다. 이를 고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연히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가려고 돋보기를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은 절대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놓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치면 예수님은 당시 종교 세력을 쥐고 있는 자들로부터 이단, 사이비로 판정될 것이다. 고치시는 것을 내일로 미루시면 안 될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엉터리 논리에 동조할 생각이 없으셨다. 오늘날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엉터리 기준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자매가 기독교 계통 학교의 교사 지원을 했다. 면접관이 어떤 교회를 다니냐고 물었다. 교파를 묻자, 교파가 없는 교회라고 하자 즉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계속 추궁하자 자신을 사이비 신자 취급하는 것이 서러운 이 자매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하긴 워낙 이 세상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많으니 그 면접관의 의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자기의 엉터리 기준을 가지고 이단과 사이비를 판정하는 것은 참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성가대가 없다는 사실에서 사이비라고 판정하고, 어떤 사람은 성전 건물이 아닌 곳에서 모인다고 올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판정한다. 교파가 없다는 이유로,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이단, 사이비 판정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 어디 있는가? 성경적으로 하자면 교파가 있는 것이 더 문제다(고전 1:12). 이러니 사람들이 큰 교회, 유명한 교회를 선호하게 된다. 그냥 큰길,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꿋꿋이 진리를 따르는 자들이야말로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몫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본을 보여주셨다.
◆ 진리에 굳게 서서 행하심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은가? 말할 것도 없이 전자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왜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는지를 물을지도 모른다. 내일로 연기하는 방법은 없는가?
만일 당신이 매몰된 탄광에 갇혀있다고 하자. 당장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일할 수 없는 날이니 하루 더 기다려달라고 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거기에 있어서 익숙할 테니 하루 더 견디는 것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하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행치 않으면 그게 곧 죄다(약 4:17).
사실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엉터리 교리와 논리가 많다. 교회사를 보면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은 일반인보다 더할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종교가 그들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이 종교를 자기 권력과 탐욕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든 논리에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진리에 당당하게 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주님께서 진리를 행할 때 당당하셨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늘 두려움에 휩싸여 산다.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휘둘린다.
어떤 분이 상담하러 왔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이상하여 떠나려고 하니 그 교회 목사가 자기 교회를 떠나면 저주받는다고 해서 두렵다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이토록 두려움이 많다. 나는 이 사람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맞불을 놓았다. "거기를 안 떠나면 저주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기 종으로 삼는 지도자가 정상적인가? 그들이야말로 사이비요, 이단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담대하게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요 8:32).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당대에 존경받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진리 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은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도 범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 자존심, 시기, 질투, 세력 다툼에서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변할 수 있다.
주님, 내 논리, 내 이론에 빠져서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시기와 질투 때문에 눈이 멀지 않게 하시고, 자존심 때문에 형제를 공격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 명성이 깨지고 망신당할지언정 오직 진리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하겠습니다.
29. 예수님께서 철야기도를 하시다 (눅 6:12-19)
◆ 예수께서 기도하심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주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셨다는 이 말씀은 기도 무용론을 외치는 사람들을 심히 당황하게 한다. 하나님과 수시로 교통하시는 주님께서 밤새 따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마 6:8). 그냥 믿음으로 살면 되지 기도가 무엇이 필요하랴. 그런데 주님께서 밤을 새워서 기도하셨다. 그럴싸하게 세워놓은 이론을 따를 것인가,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를 것인가?
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말을 신용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매일 학문이란 이름으로, 그리고 그럴싸한 논리로 성경 여기저기 쑤셔대지만 정작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영적 실체를 모르고 세상 철학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설사 사람들이 구원을 말하고, 올바른 복음을 말할지라도 정작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다면 그들의 믿음이 단순히 지식에 불과함을 방증하는 것일 수 있다. 즉 그들의 믿음이 진리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그냥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이 정말 구원받았다면, 정말 그들 안에 성령이 계신다면 기도하게 된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호흡하지 않는 것이 호흡하는 것보다 어렵듯이, 거듭난 성도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매일 매일 닥치는 일에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밤새워 기도하는 본을 보여주심으로써, 기도하지 않고 이론만 늘어놓는 우리에게 닥치고 기도할 것을 무언으로 교훈하셨다.
그러나 기도를 무언가 필요를 구해야 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그렇게 밤새워 기도할 재료가 없다. 기도 시간을 늘리기 위해 중언부언하며 말을 늘릴 것인가? 기도는 필요를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도는 예배이며, 찬양이며, 감사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만히 앉아서 그분을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밤새 이런 시간을 가지셨을 것이다.
지나가다가 청춘 남녀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만 잡고 행복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한참 후에 뒤돌아보았는데 여전히 침묵하며 손만 잡고 있었다. 너무나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다. 그것도 멋진 교제다.
성 프랜시스가 밤새워 기도한다고 하자 호기심이 가득한 수도사가 몰래 엿보았다. 도대체 무슨 기도를 밤새도록 할까? 그런데 그 수도사가 들은 내용은 오직 하나였다. 높은 톤의 '주여~'와 낮은 톤의 '주여~'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란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밤새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새벽에 제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은 꽤 많았던 듯하다. 그중에서 12명을 추리셨다. 그리고 '사도'라고 칭하셨다. 이들은 영광스러운 선택을 받았다.
열두 사도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서로 형제지간이고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지간이다. 동명이인도 많다. 야고보는 둘이나 되고, 시몬과 유다도 둘씩이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요 1:45),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마 10:3)로 불려지기도 했다. 셀롯은 당시 극단적인 애국정당의 이름이라고 한다. 셀롯 시몬은 여기에 속했던 사람인데,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자인데, 가룟 유다(유단 이스카리오텐)는 '카리옷의 거민 유다'란 의미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기도 한듯하다(막 15:40).
선택된 면면을 보면 지파별 안배나 신분별 안배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은 정확했다. 후에 이들은 주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만 빼고 모두 주님을 위해서 진정한 헌신을 했으며,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두가 전원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도들의 일생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해 보였다. 헐벗고 굶주리며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으며 만물에 찌끼처럼 여김을 당하는 인생이었다(고전 4:9-13). 그렇지만 사도 중에 단 하나도 그러한 삶을 불행으로 여긴 자는 없었다. 모두가 영광스럽게 생각했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열두 기초석이 있는데, 그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계 21:14).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에게는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다(계 2:17).
우리 주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틀림없다. 나의 부족함, 나의 결점을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택하심은 절대로 실수가 아니다. 더는 자책하지 말고 내가 지금 예배하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자. 기뻐하자. 이것이 주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다.
주 예수님, 주님께서 저를 제자로 불러주셨음을 감사합니다. 기도와 말씀 속에서 임재하시고, 믿음이 더욱 뿌리를 내리게 해주십시오.
30. 너희 가난한 자여, 복이 있다 (눅 6:20-25)
◆ 너희 가난한 자여!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는 헬라어로 '프토코스'인데 이 말은 웅크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프토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굽실거리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 한마디로 비굴한 거지를 의미한다. 상대적인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이다. 단순히 돈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한 빈곤이다. 부자 집 문 앞에서 빌어먹는 거지 나사로를 가리켜 이 단어를 썼다(눅 16:20).
사람은 언제 거지가 되는가? 돈이 하나도 없으면 거지가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존심이 있는 한 굶어 죽을지언정 절대로 거지 노릇은 안 한다. 사람이 거지가 되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부터다. 더는 자기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자기에 대해서 절대적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는 거지가 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거지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거지가 된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부자를 선망하고 독립적으로 일을 잘 해내는 것을 칭찬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말은 불편을 넘어서 모욕처럼 느껴진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란 결코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 가난한 자들이여'라고 하셨다. 제자 중에는 베드로나 야고보처럼 배를 가지고 있는 자산가들도 꽤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물질적이 아닌 영적인 의미다.
사람이 언제 구원받는가? 영적으로 절대적 빈곤을 느낄 때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한 자인가를 깨달았을 때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인정했을 때다.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예수님을 만났다. 집은 가난했어도 마음만은 부자였다. 나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기도 했고, 힘센 아이 앞에서는 비겁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자존심은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자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다. 큰소리 내며 울었다. 과거의 무슨 죄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썩은 생선같이 냄새나는 존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그날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체면을 다 버린 거지였다. 구걸하는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정직하게 나를 대한 날이었다. 그날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내 아버지가 되어주셨다.
진정으로 영적인 거지가 되어본 적이 있는가? 여전히 그런 말이 불편하다면 당신은 아직도 부자며, 진짜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지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거지는 무엇을 수행할 능력도 없다. 그냥 도와주어야 그나마 연명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아신다.
하나님 앞에 갈 때 우리의 체면, 자존심은 쓰레기통에 버려라. 그런 것은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나 할 수 있는 겉치레일 뿐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솔직하고, 한없이 겸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정하시든 '옳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선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렇게 평소에 도도하고 자존심이 센 어느 여선생님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기도가 시작되자 갑자기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우는 모습은 전혀 평소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듯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정상이다. 그게 진정으로 가난해진 자의 모습이다. 그게 오히려 아름답다. 거지가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꼴불견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한없이 낮추는 게 비굴해 보인다고? 이 사람아, 당신이 아무리 낮춘들 아직 낮아진 게 아니다. 당신은 아직도 멀었다. 당신은 하나님도, 자신도 모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 상상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하신 대단한 분이시다.
사람들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우울해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우울해한다. 더구나 배신당해본 사람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더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한다. 어떤 분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이 큰 죄책감으로 남았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고 산다. 마치 하나님을 부정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일종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토록 꽁꽁 쥐고 있는 자존심, 체면 모두 소용없다. 내려놓자.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자. 그분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냥 주님 앞에서 '주님, 아시지요? 저를 아시지요? 제 마음 아시지요?'라고 하면 된다. ‘하나님, 저는 거지입니다’라고 하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상하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냥 은총과 긍휼을 베푸실 뿐이다.
거지가 된 탕자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
나는 거지로 나아왔지만, 하나님은 나를 아들로 받아주셨다.
◆ 지금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오늘 본문에 '지금'이란 단어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기회가 없을 것이다. 지금 회개하고,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야 하지,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상황이 좋아지면... 하고 미루면 안 된다. 지금 울지 않고 웃으면, 나중에 통곡할 것이다. 지금 배고프지 않고 배부르면, 나중에 굶어 죽을 것이다. 지금 주님께로 나아가자. 그분께 엎드리자. 은혜가 임할 때 은혜를 받아야 하고, 구원의 날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받아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더욱 풍성하게 해주십시오. 제 언어를 진실하게 하시고, 아버지를 경외함과 사랑함이 더욱 굳건하게 해주십시오.
31.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화가 있다 (눅 6:26-31)
◆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의 인생관은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이다. 진리를 말하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며 무엇이 진리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느 것이 다수가 지지하는 사상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평생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과연 '착한 사람'일까? 아마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평가될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충격적인 판정을 하신다. 그런 모습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란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사람들은 화들짝 놀랄만한 경고다. 이 말씀은 나의 인생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하는 인생관인가,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는 인생관인가? 진리를 위해 비난받을 것도 불사할 사람인가, 아니면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진리마저 내던질 사람인가?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조금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고 뛰어나게 해석한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했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인생관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닮아가고, 그를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아멘.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는 기대를 버려라. 아니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안 된다. 그것은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하며, 관계가 불편해질 각오가 되어야 한다. 심약한 마음을 버리고 믿음으로 단단히 서 있으라.
◆ 그러나(But)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며
26절과 이어진 말씀에 '그러나'로 시작하는 내용이 문맥에 맞지 않아서 어색하다.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화가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이 너희를 비난하면 복이 있다는 식이 되어야 문맥이 맞다. 그런데 주님은 엉뚱한 말씀을 하신다. 갑자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무언가 생략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반드시 대적하는 사람이 생기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 우리도 똑같이 그를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따르는 자임을 더욱 분명히 해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러나'로 문장이 시작된 것이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고 하지 말라는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한다면 사기꾼의 사기나, 보이스피싱도 기쁨으로 당해주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리석게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 완전하신 주님도 어떤 도움 요청은 단호히 거절하셨다(눅 12:14).
이 말씀은 신앙과 진리 때문에 심히 조롱당하고 몹시 핍박받을 때, 신앙 때문에 내 겉옷을 빼앗기는 일을 당할 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행하는 자에게 관용을 보여야 함을 말씀하심이다(빌 4:5). 이러한 관용은 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일깨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욕당하시고, 뺨을 맞으셨으며, 겉옷뿐 아니라, 속옷마저 빼앗기셨다(요 19:23).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오늘 말씀의 완벽한 본을 보이셨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우리가 어떻게 본받을 수 있을까? 내 결심과 노력으로는 어림없다. 그런 것은 자기 의에 불과할 뿐이다. 오직 주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여 주님의 어떠하심을 맛봄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닮을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안 만큼만, 주님을 믿은 만큼만 실천이 가능한 자임을 잊지 말자. 오늘 본문의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후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님 말씀을 실천했고, 다른 제자들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더욱 알려고 하며, 더욱 깊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자.
주 예수님,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주님을 배움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해주십시오.
32. 제자는 세상 사람과 달라야 ... (눅 6:32-36)
◆ '너희' 와 '죄인'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와 '죄인'이 대비되고 있다. 주님께서 '의인'과 '악인'으로 대비하지 않고, '너희'와 '죄인'으로 대비하심을 주목하라. '너희'는 그리스도께 속한 제자들을 가리킨다(눅 6:17). '죄인'은 세상에 속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교과적인 윤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이다. 즉 제자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어야 하고, 차별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제자의 삶이 어떠한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지 오늘 말씀하신다.
◆ 가치관이 다르다.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한 사람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모두 바뀜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없던 세계관이 하나님이 계신 세계관으로 바뀌고, 과거에 가치 있게 생각하던 것을 이제는 무가치하게 여기고, 오히려 관심이 없었던 영적인 것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긴다. 과거에는 인생의 목표가 돈 버는 것이나 유명해지는 것이나 쾌락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갖는 보람과 우리의 보람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선행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주님께서는 제자 된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분명히 일깨우신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35)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진다.
◆ 그리스도 제자의 탁월함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어떤 형제가 독거노인을 돌보았는데, 처음에는 무척 고마워하던 분이 점점 익숙해지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도움에도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모르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것이 권리가 되어서 더 요구하고 짜증을 내는 단계까지 되었다. 이쯤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장 그만두겠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투정을 받아주면 돌보겠는가?
필립 얀시의 아내는 노인보호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했을 때, 종종 봉사하는 사람을 마치 돈 주고 고용한 사람 대하듯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쳐갔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런 문구를 보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자들은 고맙다는 말 대신에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람들에게서 대가와 보람을 찾으려고 하면 지치고, 점점 위선적으로 되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선행의 동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니, 우리도 그를 닮아갈 뿐이다. 그게 우리의 보람이고 힘이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그것을 배우고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배은망덕한 수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햇빛과 비를 내리시며, 심지어 하나님을 모욕하며 온갖 건방을 떠는 자에게도 살길을 열어주시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
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한 번이라도 맛본 자라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자비를 사람에게 베푸셨는지를 알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여전히 봉사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진짜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자며,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에서 자랑할 간증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인내한다면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자다. 단지 세속적 가치관에 종교적인 색만 입혔을 뿐이다.
어떤 분은 조그마한 선행을 해도 꼭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떠벌린다. 그것이 주님을 증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마음이지만, 사실 그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된다. 사람들은 '생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선교 원칙 중에 선행과 선교를 분리하라는 말이 있다. 선교적 목적으로 선행을 하면 사람들이 별로 감동하지 않는다. 선행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힘써 선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자가 혹 내 신분을 알고자 하면, 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을 도울 때 가급적 '익명'으로 하고, 어떤 생색도 내지 말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섭섭해하지도 말자. 내 도움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배은망덕한 자'라는 건방진 말도 하지 말자. 진짜 배은망덕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는커녕, 툭하면 트집 잡고 원망하는 '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조차도 사랑하셨다.
우리의 보람은 하나님을 닮아감에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아멘.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를 닮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더욱 알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이 제 안에 거하고 뿌리내리게 해주십시오.
33.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눅 6:37-42)
◆ 비판하지 말라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내 친구가 어느 신문사 기자로 있을 때, 목사들이 모이는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제법 잘 나가는 목사들이 모여서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걱정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비판한 것이 목사들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백 명이 모이면 백 명이 모두 비판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회개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회개하기는 싫어하지만, 비판하는 것은 무척 즐긴다. 비판은 일종의 판사 놀이다. 법정에는 죄인과 판사로 나누어지는데, 비판하는 순간 자신은 판사석에 앉는 셈이니 구미가 당기지 않겠는가? 잠언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라는 말씀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그것을 얼마나 실감했으면 두 번이나 중복해서 썼을까?
많은 사람이 '비판은 나의 목자시니 나를 높은 판사석으로 인도하리라'고 굳세게 믿고 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신문에서도 온통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비판인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비판은 옳다. 그래서 더 문제다. 없는 것을 누명 씌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사람은 더욱 확신 가운데 광분하며 열을 올린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선 내 자신이다. 하나님께서는 비판받는 대상과 비판하는 당신을 비교할 때 누구 편에 서실까? 누구에게 손뼉을 치실까? 세리의 탐욕보다 그것을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교만과 고집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역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눅 18:9-14)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마 18:3), 어린아이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선배가 있는데, 글이 날카롭고 깨달음이 제법 깊다. 감탄이 나올 적이 많다. 이분은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지만, 이분 앞에서는 왠지 불편하다. 이분 앞에서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하면 즉시 거부감을 나타낸다. 무슨 말만 하면 잘난 체, 자랑하는 것으로 간주하니 불편할 따름이다. 또 다른 선배가 있는데, 이분은 어떤 판단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분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그래서 편하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 것을 말하고(롬 14:13),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고전 4:5). 판단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누구라도 나를 편하게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판단과 분별
그런데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분별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늑대를 조심하라고 하셨는데(마 7:15), 이것은 전적으로 분별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거짓 선지자와 우리를 속이려는 자를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목숨과 관계있다. 도대체 설교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고 목사가 말하니 무조건 진리라고 믿는 자가 어떻게 천국에 무사히 갈 것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판단과 분별은 무슨 차이일까?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별해야 한다.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한 죄성에 근거한다. 분별은 객관적이지만, 판단은 매우 주관적이다. 분별은 여러 가지 데이터가 종합되어야 결론을 내리는 데 반해, 판단은 한 두 가지 데이터로 자기 멋대로 결론 내린다.
상대방의 몸짓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파악하기와 같은 책들이 제법 인기가 있지만, 그런 것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메마르게 하는지 아는가? 도대체 상대방의 말 한마디로 어떻게 그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하나님인가? 서로 판단하는 사회는 지옥이다. 서로 받아주고 용납하는 사회가 천국이다.
형제가 자기 자랑을 할지라도 받아주는 것이 아름답다. 그것을 교만하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가 혹시 깊은 열등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인 줄 누가 알겠는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오만하고 성급한 판단에 상처받고, 희생되고 있다.
무엇이 분별이고 무엇이 판단인가? 분별은 지혜와 지식에서 비롯되고, 판단은 교만한 죄성에서 비롯된다. 나의 비판의 출처를 살펴라. 형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은 지혜이지만, 그런 동기 없이 멋대로 하는 평가는 교만이다.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 그런 분별도 없으면 어떡하는가? 그러나 나에게 실천 의지가 있는가를 살피고 그것이 없이 단지 비판하는 것뿐이라면 삼가라. 그것은 단지 교만한 죄성에서 비롯된 판단일 뿐이다.
주님, 저에게 분별과 판단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영을 분별하는 데는 날카롭게 하시되 형제를 판단하는 데는 무디게 해주십시오. 아, 주님, 판단하기 좋아하는 악한 습성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그래서 어떤 형제라도 저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34. 비판하지는 말되, 반드시 분별하라 (눅 6:43-49)
◆ 분별하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는 조금 전에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이제 다시 분별할 것을 말씀하신다. 형제를 비판하지는 말아야 하나, 나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끼려고 하는 사람은 분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큰 손해를 입거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분별은 무엇으로 할까? 주님께서는 '열매'로 분별하라고 하신다. 초보자들도 분별할 수 있는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이다. 뛰어난 자는 나뭇잎만 보아도 사과나무인 것을 알지만, 무지한 자는 사과가 맺힐 때, 사과나무인 것을 안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자가 있다. 무화과가 맺혔는데도 나무 표지판이 포도나무라고 되어 있다고 포도나무로 믿는 자들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일까, 미혹된 가르침의 결과일까?
많은 교인의 분별법을 보면 바로 그런 어리석음이나 미혹의 수준이다. 그들은 열매로 분별하지 않고, 타이틀을 보고 분별한다. 목사니까, 선교사니까, 장로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통 신학교를 나왔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언제 그런 분별법을 가르치셨는가?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열매'를 보고 분별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 당시에도 랍비라는 타이틀로, 대제사장이란 타이틀로 사람들을 미혹했고, 그 타이틀로 사람들을 선동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마 7:15)에서 양의 옷이란 그런 타이틀이다.
중국 산동의 어느 교회의 목사가 거짓말하고, 돈을 횡령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그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은 비판 대상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니까 우리는 절대 판단하지 말고(?) 그냥 따르는 것이 성도 된 도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본으로 모세를 비난하다가 문둥병이 걸린 아론과 미리암 예를 들었다(민 12:1-10). 이들은 어리석은 것일까,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된 것일까?
일단 모세는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냥 아론과 미리암이 자기들 기준에서 못마땅했던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판이 용납될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모세는 선지자와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자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꿈이나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자라는 것이다(민 12:8).
그런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목사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세와 동급이라고? 차라리 왕과 동급으로 놓는 것이 백배 더 겸손하다. 목사나 선교사라는 타이틀이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보증이 아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판단이 어디 있는가? 물론 우리가 목사나 선교사, 장로는 주님의 사역자와 교회의 어른으로서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겠지만, 무조건 타이틀에 굴복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가 '열매'로 분별할 것을 명령하셨다. 물론 모두가 부족한 마당에 사역자들도 트집 잡으려면 한이 없는데, 그러한 부족함을 열매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다만 그의 삶의 방향이 주님이 아닌, 세상 야망이나 탐욕이나 권력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의 열매는 드러난 셈이다.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이 가득한 것이 드러났는데,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계속 쫓는다면 결국 그에게 이용만 당하고, 당신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이 될 것이다. 헌금 내고 시간과 노력을 다 바쳐서 하나님 나라를 역행한 사람이 되다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분별하지 않은 대가다.
◆ 실천하지 않는 자의 최후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하나님 말씀은 매우 신비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킨다. 생수가 터지듯이 목마름을 사라지게 하고, 더러운 사상을 씻어내며, 심령을 강하게 한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은 자는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눅 8:15).
그러나 믿음으로 받지 않고 단지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자는 결국 그 지식이 그를 파괴한다. 각종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이 싹트게 되고 트집 잡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교회에서는 성경 지식이 많다는 이유로 선생 노릇을 할지 모르나 그의 삶은 위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성경 지식은 많지만, 각종 어두운 생각에 시달리는 이유가 바로 실천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실천 없는 성경 지식은 오히려 그의 영혼에 큰 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즉시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유창하게 설교하는 사람이 별것도 아닌 것에 무너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훈을 듣고 행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단순히 어떤 율법적인 실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주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실천 과정을 아주 체계적으로 잘 설명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주여 주여하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해야 한다. 즉 그 말씀을 지극히 존중하며 따르는 삶이다. 주님을 묵상함과 기도 없이는 주님 안에 뿌리를 박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자. 주님 안에 뿌리 박을 때 겉치레가 아니라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행동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누가복음 6장에서 주님께서 하신 교훈이 무엇인가? 성도로서 세상 사람과 다를 것과 형제를 비판하지 말 것, 제대로 분별할 것 등이다.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자.
주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거짓된 것은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주님의 교훈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의지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