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고 싶은 인연
이지연
빈번한 만남이 없어도 마음이 가는 이가 있다. J가 그런 사람이다. J와는 1년에 한두 번 만났는데 내가 그녀의 커피숍으로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 봄에 전화 통화를 할 때 그녀는 일요일마다 팔공산 사찰에 간다고 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를 하는 큰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우리 아들도 시험을 앞두고 있는 형편이라 가끔 동행하자고 했었다.
J의 큰아들은 몇 년 전부터 해마다 7급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J는 긍정적인 기대를 하며 묵묵히 뒷바라지하였다. 아이를 안타까워했지만(,) 본인의 속상한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J와의 첫 만남은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부모회의 때였다. 미소를 머금은 사람 좋은 인상이라 첫눈에 나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J와 나는 서로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반찬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2년 동안 같은 반에서 수학하였고, 둘 사이가 친했기에 우리도 더 자주 소통하였던 것 같다. 아들의 친구들은 착하고 성실하여 모두가 사랑스러웠지만(,) J의 아들에게는 특별히 더 정이 갔다.
J의 남편은 오랜 공직 생활로 연봉이 꽤나 많았고, 통신사에 근무하는 J의 월급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J는 부동산 투자에도 능하여 당시 꽤 많은 부동산을 꽤나 소유하고 있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천성이 넉넉하고 사람 좋은 J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으면 언제나 먼저 계산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부터는 만남이 뜸해졌지만(,) SNS나 아들을 통해 J의 근황을 듣곤 했다. J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몇 년 전 가을이었다. 아들로부터 친구 아빠 ‘부고’ 소식을(를) 들었다. 바로 J의 남편이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갑자기 왜? 아들의 말에 의하면 (알고 보니) 급성 간염으로 진단을 받았으며 3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J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난다.
J는 남편의 병명을 듣고 (병을 알고) 회사에 사직서를 낸 후 병수발(시중)에 매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기껏 3개월이라니.(,) 너무도 허망하게 남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조문을 갔을 때 J의 큰아들이 내 테이블로 와서 접객을 했다. 아빠가 안 계시니 본인이 가장(家長)이라며 공무원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기고 믿음직스러운 아들이었다.
J는 남편과 이(사)별 후 수입원을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많이 고민)한 듯 했다. J의 (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형편을 헤아려 임시직으로 근무하라는 전갈을 하였지만 (권유가 있었으나) 자존심이 상해 거절하였다고 했다. 그 후 J는 친구가 운영하던 조그마한 커피숍을 인수(넘겨)받아 여태껏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가게가 잘되기를 바라며(,) 복을 부른다는 ‘마네키네코’ 고양이 인형을 주문해 주었다(선물했다). 커피숍을 방문할 때마다 카운터에서 복 고양이가 기분 좋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있어 기분이 좋다.) 가끔 가게로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하면 J는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했다. 가게로 들어서는 내게 함박웃음을 지어주고 (지으며) 온몸으로 반겨주었다. 한번은 아르바이트생이 쉬는 날이라 종종거리는 그녀를 도와 주스를 만들고 서빙을 하며 도운 적도 있었다.
J는 우리 아들이 로스쿨에 입학하였을 때에도 자신의 일처럼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를 멀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J의 큰아들이 독서실로, (이나) 서울 학원으로, (또는) 사찰로 이동하며 (을 전전하며) 시험 준비를 하는 기간이 기약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우리 아이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서였을까. (과 등용이 예정되어 있어선지 모르겠다.)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가끔 기도하러 같이 가자고 말하고서 함께 간 건 고작 한 번 뿐이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하여 108배를 하던 J는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었을까. 그러고도 불편한 내색 한번 보이지 않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였어도) 나를 보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느낌)이 새삼 들었다.
하루빨리 J의 큰아들이 등용할(될) 날을 기다린다. 그때가 되면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해오지 않을까. J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사람 좋은 그녀의 남편이 옆에 없는 게 아프고, 아들을 위한 기도가 길어지는 게 아프다. J의 기도가 빨리 이루어져 음식 값을 서로 계산하겠다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다. J가 무척이나 그립다.
알람
권 자이
시간은 내 지주支柱다. 인간은 환경이나 사람으로부터 길들여지고 길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태어나서 바로 한국으로 입양한다면 겉모습만 다를 뿐이지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인연을 만나고 어떤 환경이 주어지는가에 따라 성격이나 모습까지도 다르게 형성 되어간다. 그러다가 배우자를 만나면 또 다른 환경과 인연에 길들여져야 (어야) 하고 길들 일(이)려고 한다. 마치 두 개의 돌아가는 톱니가 서로 잘 맞물려야 원활한 힘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니까. 삶이 단순한 것 같아도 인간은 생각의 동물이라 미묘한 감정에 얽혀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나는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 난 후 홀로의 삶을 선택 했기에 누구로부터 속박되거나 누구를 구속해 본적이 없다. 그러니 야생마처럼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홀가분하다면 홀가분하고 자유롭다면 한없이 자유로운 삶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자유를) 누리고 싶어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그저 나답게 살기 위함이었다. 그러자면 내가 나를 길들여야 만했다. 그것은 누구로부터 길들려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먼저 육체를 길들여야 했다. 그러자면 필요한 것이 시계의 알람이었다. 생활에 기본인 잠을 자고, 일어나고, 세끼 밥 먹는 시간이 매번 정확해야 한다. 이걸 실천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현상적(눈)으로 보이거나 금방 어떤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매일 반복해야하는 일이다. 이럴(를) 테면 운동이나 명상 (또는) 봉사하는 일등이다. 이런 몇 안 되는 일들을 길게는 삼십 수년 짧게는 십 수 년을 (오랫동안,) 마치 밥을 먹듯이 반복하면서 시계의 알람을 의식하는 것처럼 나를 깨워야만했다. 일상이 나 자신과의 싸움 이었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 인가 내 몸뚱어리가 알람이라 느껴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이제 내 무의식에 알람이 나를 지배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에서도 (으뜸이) 시간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돌아보니 때로 시간의 노예가 된 것 같기도 해서(하다.) 긴 세월 시간과 공간이란 날줄과 씨줄에 자신을 묶어 놓고 또 다른 내가 시험을 한 것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도 있어 쉬어가고 싶은 생각도 했었다. (기도 했다.) 그러나 습관이란 무섭고 마음은 간사한 것이라 생각에만 둬야했다. (그쳤다.) 이렇게 반복하며 길들이다보니 이제 내가 시간에(의) 지주支柱가 되어간다(.) 건강이 좋아졌고 일상이 단순해졌으며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오늘도 내 몸이 알람을 울리니 어제의 일들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다.
○ 문단 모으기
시기리야 (?)
엄영희
(‘관광의 섬 스리랑카 디폴트 선언… (/) 갚을 돈 8조 원, 가진 건 2조 원’)
조간신문의 기사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관광의 섬 스리랑카 디폴트 선언…갚을 돈 8조 원, 가진 건 2조 원’ 관광산업 의존도가 컸던 스리랑카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고 외화 부족으로 원자재 수입에 차질이 생기면서 민생경제가 파탄 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올해 갚아야 할 대외부채가 외화 보유액 보다 4배나 많다고 한다.
기사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구레나룻 수염이 멋지게 어울리는 산다루완이다. 스리랑카 여행을 할 때 현지 가이드인 그를 처음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연수한 기간이 1년 정도였음에도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는 첫 눈에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원색의 사리와 거리마다 쏟아지던 사람들과 혼란스러운 인도의 거리풍경에 지쳐있을 즈음 방문한 스리랑카였다. 자연을 잘 보존하고 있는데다 사람들의 밝은 미소와 불교사원을 방문할 때 흰옷을 입는 풍습 때문에 깨끗하고 맑아 보였다. 산다루완 때문에 더 친근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의 한국어는 현장감이 있었고, 경어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겸손하면서도 배려하는 마음이 보였다. 간간이 유머를 섞고 구김살 없어 보이던 그가 하루 사이 말수가 줄고 얼굴에 근심이 엿보였다. 5세기에 지어진 세계문화유산인 시기리야 고대유적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자산(獅子山)이란 뜻을 가진 시기리야는 중부의 정글에 요새처럼 우뚝 솟은 화강암인데 스리랑카를 대표할 만한 유적지이자 랜드 마크이다. 높이 180m의 바위산에는 카사파 1세(Kassapa Ⅰ)가 건설한 성채도시 유적이 있고, 산기슭에는 정원과 담장들로 둘러싸인 시가지 유적과 유명한 벽화가 있다. 높이 약 200m, 넓이 약 2ha인 평평한 산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작은 길을 연결하여 궁전·저수지·정원 등을 세웠으나, 지금은 벽돌로 된 기단만 남아 있다.
카사파 1세는 왕이었던 아버지를 산 채로 묻어버리고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형제들도 죽였다. 살아남은 동생이 자기를다시 죽이러 올까봐 피해망상증에 빠진 그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바위 위에 왕궁을 만들었다. 권력을 찬탈했지만(,) 다시 빼앗길까봐 불안하고 예민했던 왕이었다. 본인의 위세를 높이기 위하여 바위 아래 사자 발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그러고도 불안에 떨었던 왕은 동생이 요새를 방문하자 자기를 죽이러 온줄 알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 사이의 계단을 타고 한 시간 가까이 올라가야 정상에 있는 왕궁 터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이 살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 위치와 조건임에도 왕위를 가지기 위하여 바위 위에다 터를 잡은 어리석은 왕이었다.
바위산을 내려온 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하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생후 8일 된 딸이 아파서 걱정이라고 했다. 처음 소개할 때 딸이 있다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어린 딸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증상을 들어보니 여자아이에게 흔히 오는 요도염이었다. “‘항생제 치료를 하면 잘 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더니 한결 얼굴이 밝아졌다. 귀국 후 딸의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안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딸이 건강하게 퇴원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대구에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할 때 그가 안부를 물어왔다. 한국의 상황은 그의 수입을 좌지우지한다. 우리나라에서 관광객이 많이 가야 산다루완의 수입도 늘어날 것이다. ‘스리랑카에는 코로나 환자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한 명 발생했는데 중국인 여행자.’라는 답이 왔다.
그로부터 2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쓰는 사이 손님이 없어서 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뭄에 콩 나듯 개인여행 온 한국인을 안내하고 있는데 여행자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산다루완에게 안부와 함께 조간신문에 난 스리랑카의 디폴트 소식을 링크해서 보냈다. 저녁뉴스에서는 족벌 정치인들이 스리랑카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소식과 시민들의 데모소식을 방영했다. 카톡이 발빠른 소리를 울렸다. 생활이 어렵지만 버텨내고 있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나라를 계속 말아먹고 있는데 국민들이 그만두라고 항의하는 중’이라며, (한다.) 부인과 함께 수도 콜롬보 항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가는 중이라는 답신이 왔다.
며칠 전 받은 카톡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스리랑카 경제가 완전히 망가져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한국에서 취업을 하고 싶다는 그의 소식이다. 한국어를 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도록) 도와 달란다. 젊은 부인과 어린 딸을 둔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타국에 나가 일을 찾으려고 할까. 소상공인들 앓는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무겁다.
세계가 한 집안처럼 가까워졌다. 스리랑카 데모뉴스가 TV에 방명(영)되면 그의 얼굴을 찾게 된다. 나만 잘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가 하나의 유기체로 묶여있는 지구촌인 것을 더 실감하게 되었다.
역사 속에 있던 왕은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도(이) 아니고, 권력에 눈 먼 정치인들은 어디에나 있다. 흔들리는 세상이다. 시기리야 요새같은 피난처는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초들 마음에 지어야 될 것 같다. 선그라스를 끼고 멋진 포즈로 프로필을 장식하고 있는 산다루완이 그와 그의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사자발처럼 튼실한 버팀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원한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킬 수 있기를….(2022. 5. 7/ 15.7매)
○ / : 대응, 대립되거나 대등한 것을 함께 보이는 단어와 구, 절 사이에 씀.
○ 제목 검토
반월당역 1번 출구
배정행
노숙자를 한자로 쓰면 露宿者인데 여기서 '露'는 이슬 露 묵을 宿' 로' 자다. 길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리라). 집 없이 떠도는 사람, 한데서 자는 사람이라는 뜻의 (정처 없이 떠돌며 한데서 자는,) 노숙자가 되는 건 누구에게라도 찾아올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기도 하다. 시동생 중 한 명은 (○째 시동생은) 하던 사업이 부도나서 빚쟁이 피해 다니느라고 노숙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도 부부 싸움하고 맨 몸으로 나와 갈 곳이 없어 하마터면 노숙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친구 덕에 그런 최악의 상태는 모면했지만 (말이다.)
(노숙자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반월당 주변에서 산 적이 있는 나는 지하철 역을 배회하는 노숙자를 자주 보았다. 지하도가 길고 출입구가 많이 있어서 추위도 피할 겸 그곳으로 많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구청에서 단속반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복지 차원에서 이들을 쉼터로 안내하기도 하고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자들 중 대다수가 쉼터로 가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규칙이 엄해서 합숙소 생활을 하게 되면 (규칙이 엄해서) 자유를 억압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어떤 교수는(가) 노숙자 체험을 해보기 위해서 잠시 노숙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할 때 많이 망설였다고 하는데 무한한 자유의 맛이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노숙의 맛에 취하여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유혹적이라 하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것,(은 해방이다.) 지켜야 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는 무소유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반월당 주변에 살 때의 일이다. 한번은 동창 모임에 나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막차 놓치고 친구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반월당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야 우리 아파트 앞인데 직진하게 되었다. 친구가 집에 가는 길에 방향이 같아서 얻어 탔던 것인데 좌회전하게 되면 그 친구가 돌아가야 하니까 미안해서 그냥 직진하라고 했던 것이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거기서 지하도로 내려가 맞은 편으로 가야 했다. 반월당역 1번 출구로 나가면 우리 아파트로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도 다니지 않는 지하도엔 무서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종종 걸음으로 뛰다시피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내 발자국 소리에 내가 놀라 뒤돌아 보곤 했다. 꼭 누가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교통신호가 엇갈려 반대편 쪽에 내린 나는 (탓으로) 지하도를 내려가(거쳐) 1호선 출입구 쪽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출입구는 지하철 1호선 개찰구 쪽에 있는 출입구였다. 그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온 몸이 덜덜 떨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출입구 셔터가 내려가 있어서(져 있어) 밖으로 (뛰쳐) 나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벽 쪽으로 머리를 두고 일렬로 누워 있었다. 말로만 듣던 노숙자들이었다. 때는 겨울, 막차가 떠난 후에 지하도 난방 장치를 꺼도 온기가 남기 때문에 추위를 피해 (남은 온기로) 노숙을 하기에 거기만큼 좋은 곳이 없었으리라. 평소에 노숙자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지나가면 심한 악취가 나기도 하고 불쾌한 행색 때문에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혹시 시비라도 걸까봐 피해 다니기도 한다.
출입구가 막혀 당황하고,(막힌데다) 그들이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에 충격 받아 나는 어쩔줄 모르고 잠시 서 있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해도 다리가 후들거려 발걸음이 떼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여자 혼자서 여길 오다니 간도 크지.' 이런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데) 못하고 서 있는데 그들 중 장발의 한 남자가 말을 걸어 왔다. 나는 겁이 덜컥 나서 못들은 척 하고 돌아 나오려고 했다.
"아줌마, 여기 막차 떠나고 나면 셔터 내려요. 위로 나가려면 다른 출구로 가야 해요."
뜻밖의 친절한 말투에 놀라 쳐다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 인상이 온순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도 싫었던 그들이었기에 그 느낌은 새롭게 나에게 다가왔다. 말썽만 일으킬 것 같은 거리의 부랑자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들은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늘 조심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같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모두 웃는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는 (그랬다,) 모두 내 이웃이었다가 여러가지 말못할 이유로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우리들 중 누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갑자기 (어쩌다) 모든 걸 다 잃고 또한 모든 걸 다 (대책 없이 삶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들에게선 무소유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한 도인 같은 눈빛이 느껴졌다.
다른 출입구를 찾아 그 자리를 떠나는데 그들이 모두 눈으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 눈빛의 의미가 집으로 돌아가는 자에 대한 부러움인지 아니면 삶의 전쟁터로 돌아가는 사람에 대한 염려(연민)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꿈 속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찾았을까?
(그들 모두 집으로 오르는 사다리 꿈을 꾸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교설(敎說) : 가르치고 설명함. ×
○ 생각이 든다 : 가능한 한 피함.
나눔의 사랑
이형국
왔다! 신록이 왔다. 차가움의 (운) 나날을 마스크에 의지한 체(채) 자나 깨나 5월을 기다렸다. 무슨 선물이 있어 기다린 건 아니다. 계절의 여왕이 온다니, “호산나!” 내 겉옷을(외투를) 바닥에 깔아 드리고파 기다렸다.
사랑이 넘치는 달, 붉은 장미가 꽃길을 치장하는 달. 다시 장가가고(도) 싶은 달이다. 길은 눈이 부셔 빈손을 들어야 (손 가리개를 해야) 할 만큼 햇살로 가득하다. 가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반짝반짝 수많은 금색 꽃마차가 햇 줄기를 (햇살을) 타고 내 가슴 향해 파고드는 환상에 빠진다.
100주년 어린이날은 목요일이고, 어버이날이 일요일이니, 징검다리 연휴가 된다. 거기에다 2년 만에 마스크 없는 어린이날이어서인지 아이들도(나) 부모들도 한껏 들뜬 모습이다. 전국 지역마다 어린이 잔치를 벌였다. 청와대에서도 벌였단다.(청와대는 물론 지역마다 어린이 잔치로 떠들썩했단다.)
어린이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대부분은 ‘이 연휴를 어떻게 짜임새 있게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겠는가.
우리 집 아이들도 저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연휴 일정을 계획한 (짠) 모양이다. 큰 애 집(맏이네) 큰 손녀(장녀)는 스스로 이제 청소년이라며, 그 일정에(서) 빠지겠다고 했단다. 동생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 사주라고 했다. 어버이 전날에 외가에 할머니 할아버지 (어른들이나) 뵈러 가겠다고 했다.(는데,) 이제 제법 자리를 가릴 줄 알 만큼 성장한 게 대견했다.
울산에 거주하는 (사는) 둘째 애는 (딸은) 10살, 7살인 (어린) 두 딸의 (손녀의) 요구에 따라 거창하게 일정을 짰단다. 사위가 회사에 하루 휴무(가)를 신청할 정도로 애들의 성화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리한테는 어버이날 전날 찾아뵙겠다고 벌써 약속해둔 상태였다. 손주(들)끼리도 아마 어버이날 전날에 할머니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둔 것 같(았)다. 톡방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그런데, (사위가) 오후에 수영장에 갔다가 사위가 미끄러져 엉덩이 근육을(를) 다쳤다 했다. 병원에서는 좀 심한 타박상이니, 시간이 약이라 했다. 서 있기만 하든지, 눕기만 하든지만 할 수 있고 앉은 일은 불가능했다. 나는 사위에게 한의원에 가서 침 맞는 것이 효과 있을 거라고 전화를 넣었다. 병원에선 일 주일분 처방전을 주고는 끝이었다 한다. 이러면 둘째와의 약속은 물 건너갔다. 손주끼리의 계획도 망가졌을 거다. 큰 손녀가 알아서 하겠지.
막내아들은 담당 부서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며느리도 어린이집 교사를 하면서(하는 터라) 오히려 5월 한 달은 무척 바쁘다고 한다. 어린이날이니 애와 꽃구경이라도 가야 하는데, 둘 다 심신이 지치니 어디 멀리 갈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처가로 가서 장모나 찾아뵙고 애와 놀다가 오자고 했다. (사시는 처가댁에 갔더니) 가보니 그 애 장모도 고된 일에 시달려 끙끙대며 앓고 있었다 (한다). 그 애 장모도 어린이집 관련 일을 하고 있기에 (계셔서) 며느리와 같은 상태였던 거다.
저물녘에 며느리의 전화를 받았다. 조금은 처진 음성이었다. 서진이 하고 어디 갔더냐며 운을 띄웠다. 서진이는 4살 된 막내 손녀다. “애가 예쁜 꽃구경 가자고 칭얼대어서 지금 공원 놀이터에 와 있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물쭈물하더니, “어머니 좀 바꿔주실래요.(?)” 했다. 길고 긴 통화가 진행되었다. (통화가 길어질 낌새였다.) 곁에 서 있었더니, (있으려니) 손을 저었다. 어디로든 사라지라는 뜻이리라.
(속닥속닥 통화를 끝낸) 아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왔길래) 늙은 나이가 뭔 일이 있을 것도 아니기에 눈짓으로 왜Why 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 물었다.) (아내가) 내 눈치를 살피며 찬찬히 말했다. 고된 일과 원장의 도가 지나친 성화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라) 도저히 올 수가 없다고 하더란다. 아내는 피곤하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신경 쓰지 말고 건강이나 챙기라며 전화를 끊었다 했다.
돌아서는 눈 속으로 그늘이 지나갔다.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섭섭한가 보다. 내 마음도 그렇다. 자식 손주를 옛말로 눈 곪도록 (자식 손주를) 기다리고 있는 판에 오지 않는다니. 그래도 큰애와 손주 둘은 오지 않는가.
아내는 아내(나름)대로 손주 준다고 선물을 마련해놓았다. 다섯 손주 중에 막내 둘만 목걸이를 해주지 못했다고, 전전긍긍하더니만 결심했는가 보다.(했었다.) 아내가 숨겨놓았던 (아내의) 금붙이들로 (을 금은방에 맡겨 마련한 눈물겨운 선물이었다.) 만들어 놓았다. 그 중엔 내 넥타이핀과 실 가락지도 들어갔다. (있다.) 나머지(다른) 손주에겐 현금으로 준다고 찰랑찰랑한 (빠닥빠닥한) 지폐도 준비해 놨다. 순간적으로 (그랬는데 이게 뭔가,) 쑤욱- 하고 가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버이날에 가족이 함께하지 못한 것도(지가) 2년째이다. 코로나 후유증인가. 이제는 우리 모두 ‘모임은 가도 좋고 가지 않아도 되는 예사로운 일’쯤으로 여기게 되었나 보다.
어린이날에(엔) 작은 선물이나 놀이 밤엔 케이크 촛불로 내가 가진 사랑을 조금 나눠준다. (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누는 게 예사다.) 어버이날에는 카네이션 하나로 자식과 손주들의 사랑을 나눠 받는다. 물론 자식들에겐 그들의 피와 땀, 그리고 사랑이 빚은 하얀 봉투도 받는다.
이번 어버이날은 부처님오신날이어서 더욱더 풍성한 자비와 사랑을 주고받게 됐다. 다음 주는 스승의 날이다.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무엇으로 보답하더라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 이달에는 부부의 날도 있다. 세상의 부부들이여, 내가 먼저, 네가 먼저 할 것 없이너와 나 사이에는 사랑을 아끼지 말자. 줄 수 있는 사랑도 받을 수 있는 사랑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시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랑은 나눔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눔도 없다. 주고받다 보면 사랑은 저절로 내 숨길 따라 스며든다. (주고받는 선물 속에 이룩되는 사랑이다.)
○ 손 가리개(?)
군고구마 찐고구마
엘리
친정아버지와 엄마는 진정한 로또 부부다. 평생을 두 사람(분)은 맞는 게 별로 없다. 4남매 두고 90(이) 넘도록 해로하는 거(모습을) 보면 정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테다. 하지만) 어찌 저리도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이 없을까? 저러는 줄은 남들은 아무도 모른다. 출세한 아들을 둔 걱정 없는(고) 의 좋은 노부부인 줄 안다. 매일매일 크고 작게 짜그락거리며 사는 줄은 자식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엄마는 아버지를 평생 못 마땅해 하면서도 매일 아버지께 전화를 한다. 주간보호센터에 가서(도) 집에 있(계시)는 아버지한테 점심 먹었는지 잊지 않고 전화한다(챙긴다). 센터에 갔다 대문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아버지부터 찾는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면 아버지 흉을 보기 바쁘다.
어느 날 남편이 아버지 모시고 병원에 갔다. 요양보호사가 일이 있어 일찍 가야한다고 해서 나는 친정에 있었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면서 이문 저문 열며 아버지부터 찾는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엄마부터 찾는 거와 같았다. 아버지가 없으니 울 듯 한 엄마의 얼굴이다. 안 계신다 하는데도 (병원에 가셨다는데도) 울먹이며 계속 부른다. 때 맞춰 힘없는 다리로 다급하게 들어오는 아버지는 어린애 달래듯이 엄마를 달랜다. (다독인다.)
“내 여있다. 와 카노 여 있다카이(.)”
참으로 난해한 부모님의 의식세계다.
벚꽃 구경하러 두 분 모시고 나들이를 했다. 식당에서 메뉴 때문에 서로가 언성을 높였다. 냉면을 드시겠다는 아버지와 냉면 싫다, 돼지고기도 싫다는 엄마. 아버지와 남편은 냉면을, 우리 모녀는 전골을 먹자고 내가 중재를 했다. 나도 냉면이 당기는데 전골은 일인분(주문)이 안되니 하는 수 없다. 냉면에 들러리로 나오는 돼지고기 수육 몇점에 엄마의 젓가락이 먼저 닿는다. 돼지고기 안 먹는다고 큰소리치더니 (허 참.) 수육은 수육(일뿐)이지 돼지고기가 아니란다. 엄마가 집은 떨리는 (의 떨리는 손으로 집은) 수육에 겉절이(를) 척 걸쳐주는 아버지다. 엄마 먹으라고 흐뭇하게 바라만 보며 (정작 당신은) 안 드신다. 남편 몫으로 나온 수육을 (아버지께) 슬쩍 건네줬다(드렸다).
“안 서방은?”
“안 서방은 엄마 전골 나오면 더 비싼 쇠고기 줄라꼬(.)”
60대 딸의 흰머리는 당연하게 여기며 엄마의 흰머리와 주름살에 마음 아파하며 애잔한 눈길을 보내는 아버지다. 그런 광경을 보면 분명한 환상의 커플(이 분명할진 데) 인데 왜 매일 어(으)르렁거리는지 (원)…….
엄마만 모시고 나들이 갈라치면 (갔다 올 양이면) 꼭 아버지 드실걸 사온(산)다. 근처 마트에 다 있는 거라고 그냥 가자고 하면 나한테 소리 부터 지른다. 어째 너아부지(너희 아버지) 한테 빈손으로 가냐고 해서 천하의 불효막심한 딸로 만드는 재주꾼 엄마다. 얼마 전에도 엄마랑 외삼촌을 모시고 외할매(머니) 산소에 갔다 왔다. 오는 길에 직지사 들렸다 왔다. 아버지 반찬 한다고 직지사 입구의 할머니들 한테 봄나물도 사고(이랑) 군밤도 사왔다. 집에 들어서며 아버지를 부르며 군밤봉지를 들이민다.
"직지사서 당신 줄라꼬 사왔어요. 고추장 발라 구워줄라고 더덕하고 두릅도 사고."
(그뿐이랴.) 주일(말)에는 꼭 친정에 가야한다. 가서 (들어서기 바쁘게) 안방 냉장고부터 점검한다. 냉장고에 상한 음식을 혹시 모르고 드실까봐. 지난 겨울부터 냉장고 안에(엔) 고구마가 꼭 두 종류가 들어있다. 요즘은 고구마로 밤참을 먹는단다. (드시는데) 엄마는 찐고구마, 아버지는 군고구마를 드신다. 도우미가 힘드니 통일을 하라고 내가 권했다. 엄마가 입을 콱 다물며 강한 어조로 말한다.
"고구마를 구워서 우예먹노(.)"
내가 구우면 더 달고 맛있다해도 (맛있대도) 싫다고 고개를 흔든다.
“그럼 아버지가 찐 고구마 드시면 어때요?”
“해 주기 귀찮으면 치아라(.)”
고구마! 그 까짓 것이 (그까짓 게) 뭐라고 서로 한 치의 양보도 못하노(나). 군고구마나 찐고구마나 고구마는 고구마지. 내 목(속)이 고구마 10개 (잔뜩) 먹은듯 답답하다.
엄마,(와) 아버지는 절대 만날수 없는 영원한 기찻길이다. 생각의 일치를 못 보는 평행선이다. 오손도손 정다운 부모 모습은 포기한 지 오래 되었다. 극을 달리지는 (극한 상황에 이르진) 않으니 고맙고 감사 할 일(따름)이지. 오늘도 한 치의 양보없이 일 주일간의 일을 나한테 일러주며 티격태격하는 걸 보며 생각해 본다. (엄마 아버지 모습에 나를 돌아본다.)
“(‘)우리부부는 어떤 모습으로 자식들한테 비칠까?”(’)
○ ‘’ : 마음속 말을 적을 때 씀.
교육방식 겨루기
이광조
자존심이 상했다. 학생 엄마가 아이들 지도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슬쩍 시비를 걸었다. 아이가 집에 와서 하는 말을 듣고 초임 교사에게 한 수 지도하러 온 품새였다. (교편 잡고 있었을 때의) 자기 아이 반 담임처럼 애들 기분을 맞춰가며 살살 다뤄야 교육효과가 높을 거라며 나를 코너(구석으)로 몰았다. 중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아이들 잘 다루었노라고 경력까지 내세우는 그녀 앞에서 교단생활 한 달도 못 되는 신출내기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천방지축 나대는 아이를 제 엄마 원하는 대로 비위만 맞춰 줄 수는 없지 않는(은)가. 그럭저럭 지내다가 선을 넘었다 싶으면 확실하게 꺾었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못 본 척 하면서 내버려두는 다른 선생들에 비해 꼬장꼬장하고 인정머리 없는 인간으로 학모 레이더에 포착되었(을)게 뻔하(했)다.
그런데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다. 그 아이가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내 반에 배치(정)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배정받은 교실로 들어서는 녀석의 표정이 영 아니었다. 내 반 학부모가 되어서 다시 만난 그 아이 엄마도 1년 전 나에게 충고를 해대던 의욕 넘치는 모습은 아니었다.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저지르는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남편이 주말이 되어야 집에 오는 관계로 아이 관리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본래는 심성이 고운 아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대중교육이어서 다른 아이들한테 너무 많은 피해를 입히는 건 곤란하다는 말로 내 입장을 내 비치며 거리를 두었다.
까칠한 담임을 만난 탓으로 제 딴에는 조심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육상부 학생이 교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나를 찾았다.
“우리 감독(체육선생)님이 선생님 오시라고 합니다. 선생님 반 허 민 형이 감독님한테 대들고 있어요. 빨리 가셔야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무단으로 교문을 빠져나가려는 놈을 운동장(에) 있던 체육선생이 제지하자, 이놈(녀석)이 감독멱살을 맞잡으며 덤볐다는 것이었다.
멱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분기가 확 치솟았다.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녀석)이라고 열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완력 있는 체육선생 멱살을 맞잡는 되잖은 놈(녀석)이 담임이라고 나를 겁낼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놈(녀석)을 어정쩡하게 내버려두면 체육선생 체면은 뭐가 되며, 앞으로 누가 저놈(녀석)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한 수가 절실한 순간이었다.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복도 한쪽에 세워둔 봉걸레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라고 여기며 걸레를 제거한 다음 봉만 들고 뛰기 시작했다. 체육실 문턱을 넘으면서 대각선 방향 구석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놈(녀석)을 향해 돌진했다.
“이 나쁜 새끼(자식), 이리 나와. 끝장내 버리겠어!”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자 감독(체육)선생이 나를 막아서려고 양팔을 벌리면서 육상부 아이들에게 외쳤다.
“야, 선생님 막아. 몽둥이 붙잡아.”
아이들과 감독(체육)선생을 피하면서 놈을 향해 봉을 휘두르는데, 녀석이 잽싸게 아이들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한 녀석이 내 허리를 껴안고 버티는 바람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들고 있던 몽둥이를 그 나쁜 놈(녀석)을 향해 집어던졌다. 빗나간 몽둥이가 벽에 부딪쳐(혀) 요란하게 소리를 냈고, 감독(체육)선생이 앞에서 나를 꽉 껴안으며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너 같은 놈은 없어져야 해! 대가리를 깨 버릴 끼다. 이 나쁜 놈의 새끼 ”
당황한 녀석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죽을죄를 지었다며 빌었다. 감독의 지시로 육상부 아이가 봉걸레 자루를 치웠고,(다.) 감독(체육선생)에게 팔을 붙잡힌 채 숨을 고른 나는, 바로 퇴학시켜서 본때를 보일 테니 일단 참으시라고 그를 위로 했다.
퇴학시키겠다는 내 통보를 접한 아이 엄마가 대구에서 택시를 타고 학교로 달려왔고,(다.) 녀석은 체육선생 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으면서 용서를 빌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퇴학시켜도 좋다는 각서와 함께 본인과 부모 지장이 찍힌 자퇴서를 받아 서랍에 보관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다. 한 번은 눈감아 준다며 체육선생이 아량을 베푼 덕분에 학생과로 넘기지는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학모(아이 엄마)가 자주 전화를 걸어왔고, 집에서는 감당이 안 되니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 날도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아침에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를 달래자, 물 한 그릇을 떠다 주면 마시고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란다. 물을 가져다 줬더니 마시고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며 집을 나서더라고.(네.)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건 잠시,) 방으로 들어가 깔고 자던 요 밑에 넣어둔 손지갑을 뒤졌더니 텅 비어 있었다는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지갑에 손대는 기미가 있어서 막으려고 요 밑에 깔고 잤는데 그걸 눈치 챈 놈(녀석)이 제 엄마가 자리를 뜨게 만든 다음 도모(슬쩍)한 것이었다. 공납금 한 번은 낼 수 있는 큰돈인데, 어쩌면 좋으냐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를 불러서 전화를 바꿔주겠다고 했더니, 그렇게(리) 되면 집에 와서 난동을 부릴 거라며 연락받은 티가 나지 않게 처리해달라고 했다.
조회시간에 교실에 들어가 학급에 담배가 돌아다닌 다는 첩(제)보가 있다며, 모두 일어서게 한 다음 열중쉬어 자세로 눈을 감게 했다. 눈을 뜨거나 움직이면 바로 범인으로 인정하겠다며 엄포를 놓고는 한 사람씩 소지품 검사를 해나갔다. 녀석 차례가 되어 가방을 뒤지자 그 돈이 나왔다.
큰돈에 화들짝 놀라면서 (짐짓 놀라는 척하며) 조용히 녀석을 데리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돈을 손에 움켜쥔 채, 다른 아이한테서 훔친 돈이면 일이 커지기 전에 실토를 해야 담임이 보호할 수 있다며 다그쳤다. 대답이 궁했던 녀석이 공납금 낼 돈이라고 둘러댔다. 천하명답이라고 여기며(쾌재를 부르며) 서무실로 가서 녀석이 보는 앞에서 공납금으로 납부해버렸다. 아직 고지서도 발부되지 않은, 다음 분기 공납금 선납이었다.
내리 2년 그 아이 담임을 했다. 한 건 한 건 (사건을) 치를 때마다 아이 엄마와 통화가 잦았고 대화 시간도 길어졌다. (아이 엄마는) 울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하소연하기도 했고,(다.) 아이 성질과 기분(까지) 존중하면서 정성을 다했던 본인 교육방식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억울해 (하기도) 했다. 얕잡아 보고 충고까지 했던, 초짜 선생의 꼬장꼬장한 우격다짐이 신통하게도 먹혀들어 아이가 겁을 낸다며 고마워했다.
여차하면 선을 넘는 아들을 어떻게 하든지 졸업이나 시키려고 담임 비위를 맞추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이가 졸업하던 그 겨울 내 결혼식장을 찾아와 내민 축의금이 당시 평균 축의의 두 배쯤 되었고, 졸업시킨 뒤에도 더러 통화를 했었던 걸 보면.
(아이가 졸업하던 그해 겨울 나의 결혼식에 아이 엄마가 하객으로 왔다. 축의금이 보통 평균치의 두 배쯤 들어있었다. 졸업 후에도 더러 안부 전화가 오갔다. 그로 미뤄볼 때, 사고뭉치 아들을 어떡하든지 졸업이나 시키려는 목적으로 담임 비위를 맞추진 않은 것 같았다.)
* * *
아직 군대물이 덜 빠진 선생이 신군부 독재 분위기에 편승하여 조폭처럼 설쳐대지나 않았는지 뒤돌아 보인(본)다. 연합고사에 떨어진 죄로, 집을 대구에 두고도 아침저녁 한 시간씩 스쿨버스에 시달리며 시골 신설 학교를(에) 다녀야 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불쌍한 아이들한테 고등학교 졸업장을 준답시고 거드름을 피웠던 젊은 날의 치기가 새삼스레 부끄러워지는 5월이다. (22년 5월 9일, 18매)
첫댓글 다듬어진 글을 읽으니 글이 부드럽게 읽힙니다. 좋은 문우님들과 공부하는 것에 감사하고 재능 기부하시는 김 쌤께도 항상 감사합니다 ~^^
맺은 인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내로라할 만한 재능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시다니 다행입니다.
건강들 하시자고요. ^^
늘 감사합니다^^ 제가 김상영샘의 글을 닮아간다니
기분이 좋아요
저 닮아서 좋을 거 없을 겁니다.
고운 맘씨 빼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