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민춘지의 시 세계
자연 교감을 통한 순정적 시미학(詩美學)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나’와 삶과의 화해
현대시의 구도는 대체적으로 시적 상황(situaion) 설정에서부터 전개 과정과 주제의 투영까지 그 시인이 체험한 절실한 한 부분이 이미지로 발현(發現)하는 경우를 흔히 대하게 된다. 이는 시인이 간직한 삶에 대한 경험이 곧 일상적이거나 보편성을 초월하지 않는 정서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인들은 이와 같은 체험의 범주(範疇)에서 추출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이미지로 형상화하거나 나아가서는 주제로 승화하는 경향을 즐겨 취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체험은 바로 인생 경험이며 인생의 행로와 직결되는 그 시인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민춘지 시인이 상재하는 제2시집『물 같은 사랑』을 일별하면서 먼저 시인들의 체험론을 상기하느냐 하면 민춘지 시인의 사유(思惟)나 정서의 근간(根幹)은 바로 그가 살아오면서 체험한 일생의 단면들이 시적 발상이나 시적 구도(構圖-planning)로 다양하게 투영하면서 그의 시적 진실을 탐색하고 ‘나’와 ‘삶’과의 화해의식으로 작품들이 전개되고 있어서 서정성을 포괄하는 인생론을 예견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민춘지 시인은 그가 추구(追求)하고자 하는 시적 원류에는 그가 지금까지 천착(穿鑿)해온 고향과 가족들의 정감에서부터 시간성인 계절 그리고 산천경개의 자연에 까지 그의 심연(深淵)에 잠재(潛在)한 ‘나’와 ‘삶’에 관한 인식이 그의 시적 진실로 탐색되고 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시인의 말’에서 ‘유년시절 조용하고 아늑한 농촌에서 /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느끼며 자란 / 추억들이 떠올라 나이 들어 시작한 / 글쓰기에 끊임없는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라고 토로(吐露)하면서 일찍이 자연과의 교감에서 생성된 추억이 글쓰기의 자양분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돌담에 초록 이불
태풍이 불어도 장대비가 와도
손 놓지 않네, 인내심
실낱같은 핏줄 애워 싸고
청라언덕 절벽 같은 곳에도
손잡고 담을 기어올라 넘어 가네, 성공
넝쿨 잎이 햇살 휘감으며
삼복더위도 공해도 이겨내며
단결심 생명력 또한 대단하구나, 참을성
뿌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
그 푸른 돌담 이불 여름이면
푸른 바다 바람처럼 시원하네, 영원함
넝쿨나무가 나를 가르친다
--「담쟁이 넝쿨」전문
이 작품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담쟁이 넝쿨’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삶을 통해서 거쳐야 한 통과의례 같은 주제를 포괄하는 하나의 절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시법(詩法)에서 ‘인내심’, ‘성공’, ‘참을성’, ‘영원함’ 등으로 분류해서 ‘담쟁이 넝쿨’의 한 생애를 조감(鳥瞰)하는 전개 방식으로 우리들의 공감을 유로(流路)하고 있다.
민춘지 시인은 결론적으로 ‘넝쿨나무가 나를 가르친다’라고 자연의 묵언(黙言)을 수용하고 긍정하지만 그는 이러한 모든 생존의 과정이 인간의 ‘생명력’에 다름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를 현실적인 삶(real life)에 비유함으로써 그는 ‘인내심’과 ‘영원함’으로 병치(倂置)시키고 있다.
어느덧 세월은 흐르는 강물같이
짝궁과 함께 한 오십 년 평탄한 길
깊은 뿌리가 알찬 열매를 맺는다
남부럽지 않은 삶 열심히 살았다
자식들이 정성껏 준비한 이번 여행은
오래오래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둘 것이다
--「즐거운 날들」중에서
그는 이와 같이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만끽(滿喫)하고 자아(自我)를 반추(反芻)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깊은 뿌리’이며 ‘알찬 열매’임을 자인(自認)하면서 시간(세월)과의 공유(共有)에서 정감의 언어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는 ‘평탄한 길’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위해서는 그의 내면에 깊숙이 내재(內在)해 있는 심원(心願)의 간절한 인생관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어머님의 대를 이어 찾아간 만어산 만어사 (萬漁寺) / 스님의 염불소리에 두 손 모아 합장하고 / 한 가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 / 새색시 지극 정성 기도한 곳(「고운 눈빛」중에서)’이거나 ‘입구에서 합장(合掌)하고 / 앞을 보니 높은 계단 하늘은 숲으로 가리고 / 가야산이 품어 안은 비탈진 언덕에 / 천년의 사찰 고풍이 아름답고 경이로워 / 흐르는 목탁소리 희석되는 향 내음 / 속세의 찌든 때 벗겨 던지네(「가야산 해인사」중에서)’라는 화자(話者)의 어조(語調)와 같이 그의 불성(佛性)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시적 자양을 추출하고 분사(噴射)하는 동인(動因)은 ‘암자의 염불소리 바람에 실려와 / 숲의 향기와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 /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주네(「송추 계곡」중에서)’와 같이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주’는 신심(信心)이 그의 삶에의 충전과 휴식과 기원 등의 의식으로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민춘지 시인의 삶과의 화해는 결국 ‘삶이란 / 들국화 같이 / 아름다운 꽃인가 봐(「들국화」중에서)’ 그리고 ‘겨울 광 속 항아리에 넣어 두었다가 / 밤에 꺼내 먹던 달콤한 추억 // 언제 홍시같이 단맛 나는 시를 쓸 수 있을까?(「홍시」중에서)’와 같이 행복한 삶의 고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2. 자연 서정과의 조화
민춘지 시인은 온화하면서도 지적인 삶을 염원하는 시적 자양분의 충족을 위해서 만유(萬有)의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서정은 우리 시인들이 추구하는 시미학(詩美學)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 시인들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탐구해온 인간미(人間美)의 창출(創出), 곧 인본주의(humanism)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자연 서정도 동시에 구가(謳歌)하는 문예사조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동질적인 존재의 방식과 공생(共生)의 실질적인 기원이 함축되어 있어서 요즘 와서 조화의 해법을 탐색하는 시법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마음이 울적하면 연못가 오솔길 걸어본다
심심하면서도 외롭지 않다
수면에는 둥근 푸른 방석 겹겹이 쌓이고
연분홍 꽃봉오리가 긴 목을 내밀고
처녀 젖가슴처럼 몽실몽실 꿈을 꾼다
달빛이 오늘밤 애인되어
그림자같이 따라 다닌다
달빛의 은빛 금빛 연꽃과 연잎에 내려앉고
하얀 물안개가 연못에서 피어오른다
수양버들 가지가 처녀 머리댕기처럼
길게 늘어지고
달빛이 그네를 탄다
만월(滿月)이지만 수양버들 그늘에 가려
환하게 비추지 못하는 것이
아름다운 흠이다
--「연못에 달빛」전문
그렇다. 민춘지 시인은 우선 자연과의 상호 교감에서 ‘연못에 달빛’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보편성의 사물을 적시(摘示)함으로써 친자연적인 흡인력(吸引力)으로 이미지를 확충하고 있다.
그는 ‘연못가 오솔길’이나 ‘달빛’, ‘연꽃과 연잎’, ‘하연 물결’, ‘수양버들 가지’와 ‘만월(滿月)’ 등의 익숙한 사물 언어들이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서 그 사물이 함유(含有)한 이미지의 범주는 무한하다는 심연에서 응시(凝視)하게 하고 있다.
대체로 시론가나 시학론자들은 자연과의 교감에서는 두 가지의 대응 방법으로 탐색하면 이해가 빠르다고 한다. 그것은 자연의 인격화이다. 첫째 동화(同化-assimilation)라고 해서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으로 인격화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투사(投射-project)라 해서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존재를 채우는 것, 곧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를 낭만적인 자연관이라고 한다.
이것을 시학적으로 말하면 비정적(非情的) 타자(他者)에서 감상적 오류(誤謬)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만월(滿月)이지만 수양버들 그늘에 가려 / 환하게 비추지 못하는 것이 / 아름다운 흠이다’라는 어조로 보아서 동화의 방식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하늘과 산이 내려와
시화(詩畵) 상(床) 차린 산수화
바람이 한 수 읊으면
나뭇잎 화답 하네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산새들 울음소리
풀벌레소리
야외
음
악
당
이 되어주네
--「산정호수」전문
그의 자연관에는 혜안(慧眼)으로 동화와 투사를 반복하고 있다. 여기 ‘하늘과 산이 내려와 / 시화(詩畵) 상(床) 차린 산수화’라는 사물적 언어는 동화이며 ‘바람이 한 수 읊으면 / 나뭇잎 화답 하네’는 투사의 시법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야외음악당’은 시각적인 효과와 청각작인 효과를 동시에 구상한 특이한 구도로써 자연에 대한 이미지의 효율성을 제고(提高)하고 있어서 서정적 정서의 중심축을 확대하고 있다.
그가 취택하는 자연 서정의 향기는 다양하게 현현되고 있는데 대체로 살펴보면 ‘초록의 향기가 숨쉬는 소리(「외도」중에서)’이거나 ‘잔잔한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 / 한 폭의 산수화로 떠오르네(「호명산 호명호수」중에서)’, ‘소나무 숲 사이로 아침 햇살 / 생명의 핏줄 가슴에 꽂힌다(「뒷산」중에서)’ 그리고 ‘곁에 선 목련나무 은빛 털 / 눈 뜬 봉우리에 / 봄 햇살이 입맞춤한다(「춘설」중에서)’ 는 등과 같이 대자연과의 대화를 통해서 생명력을 제공하고 있다.
3. 계절과 시간의 향연
민춘지 시인은 다시 그 자연 속에서도 시간성과 밀접한 상관관계로 접근하면서 계절적인 향연(饗宴)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계절의 정취(情趣)와 그 정감에서 분출하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기다림이거나 그리움의 순정적인 미학이 풍겨나고 있다.
햇살 눈부시게 넘치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녘
파란 하늘에 종달새 그림을 그리듯
노래하며 하늘에 감돌고
보리밭 위에서 파도타기 하는 봄바람이
노란 유채꽃 향에 취해 머뭇거리며
쑥 냉이 민들레 캐는 아가씨 콧노래 부르고
김매는 농부들 새참 오기만 기다린다
--「들녘 1(봄)」중에서
우선 ‘봄’의 정경(情景)에서 감응(感應)할 수 있는 향연은 민춘지 시인의 ‘들녘’에는 낭만적인 요소가 충만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한 폭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것 같고 한 소절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는 봄 들녘에서 회상할 수 있는 유년의 추억들을 그림 그리듯이, 또는 콧노래 부르듯이 맑은 언어로 묘사하고 있어서 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펼치고자 하는 인생의 향연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은 바로 그가 그 자연의 현상들에서 심취(深趣)한 체험들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밤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친구들과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하늘에 수많은 별을 헤아리며
견우직녀 은하수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칠월 칠석 밤인가 봐
저 별은 내 별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있어도 같은 별을 보고 그리워하며……
캄캄한 밤일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개똥벌레는 불을 켜고 들녘 위로 날아 다닌다
--「들녘 2(여름)」중에서
여기 여름 들녘에서도 동일한 정감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견우직녀 은하수 오작교에서 / 만난다는 칠월 칠석 밤인가 봐’라는 여름 전설과 함께 ‘모깃불’, ‘개울물’, ‘수많은 별’ 그리고 ‘개똥벌레’ 등 지난날의 추억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적시되고 있어서 그의 향연은 그리움으로 승화하는 시적 진실이 포괄하고 있다.
산비탈 알밤송이 갑옷을 입고
싸우다가 데굴데굴 풀밭으로 숨고
사과나무 빨간 추로 매달린 능금
계절을 저울질 하네
서리 햇살에 물든 감, 가을을 재촉하며
빨간 주둥이로 사랑을 알알이 토해내는 석류
그 사람 보고 싶은 그리움
--「들녘 3(가을 풍경)」중에서
역시 가을 들녘에서도 ‘알밤송이’와 ‘능금’, ‘감’, ‘석류’ 등의 사물 이미지가 분사하는 ‘가을 풍경’이 결국 ‘그 사람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어쩌면 민춘지 시인이 간직한 전원에서의 추억들이 끊임없이 실타래로 풀려나오고 있다.
하얀 들녘
아무도 걷지 않은 깨끗한 길로
뽀드득 뽀드득 걸으며 힘들어도
그대와 손잡고 설봉(雪峰)까지 오르고 싶어라……
--「들녘 4(겨울 눈)」중에서
그렇다면 겨울 들녘은 어떠한가. 이 작품에서도 겨울의 계절적인 이미지가 그의 기원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얀 들녘 / 아무도 걷지 않은 깨끗한 길’이라는 순수 서정이 청정(淸淨)하게 설정되어 있고 이 ‘길’을 ‘그대와 손잡고 설봉(雪峰)까지 오르고 싶’다는 간절한 여망이 바로 계절의 향연이다.
이렇게 민춘지 시인의 계절(혹은 세월)은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기원의 의식이 흐르고 있다. 때로는 자연 변화에 따른 풍경화를 감상하는 순수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 서정에서 발원(發源)하는 시적 원류는 바로 감응(感應)이 넘치는 미학을 전제로 하는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 밖에도 작품 「단풍」에서도 ‘노란 국화꽃보다 / 더 아름다운 오색 단풍길 / 너를 닮은 찬란한 황혼 / 이 가을 외롭지 않다’거나 작품 「겨울나무」에서 ‘하얀 이불로 대지를 덮어주면 / 겨울 꿈에 깊이 잠들어 / 바람도 구름도 햇살도 스쳐간 자리 / 나뭇가지들은 단물을 먹고 / 생명의 눈으로 잉태한다’라는 화자의 어조가 정감(情感)적인 면과 시적인 주제의 창출면에서 ‘찬란한 황혼’이라는 어쩌면 우리 인생론에 접근하면서 ‘생명의 눈’을 탐색하고 있다.
4. 가족과 고향의 정감
민춘지 시인의 다른 시적 면모는 가족과 고향 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가족과 고향에 대한 동경(憧憬)이 없겠느냐마는 한 시인이 절규하듯이 그리워하고 동화하려는 시법은 독특한 일면을 응시하고 있다.
개울물 모여서 강물이 되고
강물이 부딪치며 굽이굽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너와 나의 만남
만어사(萬魚寺) 깊은 산 속 깨끗한 물처럼
철모를 때 맺어진 인연아
복사꽃 만발한 산허리길
포도넝쿨 어울린 비탈진 산 능선
외로움 달래며 넘나들던 추억의 길
지금은 찻길이 대문 앞까지 들어오네
사기점 큰댁에서 어려웠던 지난 일들
군복무 마치고 돌아오기를
하루를 한 달같이 지낸 세월이
지금은 마음의 고향이 되었네
맑은 날 구름 낀 날에도
그때가 힘이 되어 수레를 끌고
열매 맺어 씨 뿌리는 동안
머리에는 흰 눈이 내렸네
세월은 바다에 다다르니
서로 건강 챙겨주고 의지하며 살다보니
바다 속 깊은 물같이
맑고 푸른 정이 깊어만 가네
우선 이 시집의 표제시가 되는「물 같은 사랑」 전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서 사랑이 물처럼 흐르고 있다. 이러한 정서의 원천(源泉)은 고향과 가족이라는 상대성이 많은 작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론적으로 ‘지금 마음의 고향’이며 ‘서로 건강 챙겨주고 의지하며 살다보니 / 바다 속 깊은 물같이 / 맑고 푸른 정’으로 환치(換置)되고 있는 것이다.
민춘지 시인의 사유에는 고향의 강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있다. 그가 현현하는 고향 이미지는 ‘고향을 찾으면 마을을 지키던 / 흔적은 보이지 않고 / 푸른 산처럼 푸르며 / 옛이야기로 바람타고 흘러간다(「당산나무」중에서)’거나 ‘금잔디 마당에는 가지각색 꽃들의 향기 / 고향마을 이른 아침 참새 소리는 옛날과 다름없네 / 시냇물 위 백일홍은 곱기도 하다(「고향 마을」중에서)’ 그리고 ‘인생도 구름처럼 떠돌다가 //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 한줌의 흙으로 // 고향 길 가는 길 멀기도 하다(「구름」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옛 정취가 물씬 풍기지만, 옛 고향의 정서는 세월따라 어쩔 수 없이 낯이 설어 보인다.
그리고 민춘지 시인의 가족 정서는 다양하다. 주로 ‘어머니’를 비롯해서 손자에 대한 실질적인 정감이 넘치지만 온 가족의 형상화도 그의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하고 있다.
창가에 내려오신 달빛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 생각
보름달만 보면 흘러간 세월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네
빌딩 숲속에 중천에 뜬 싸늘한 임
내 가슴에 깊이 묻어 주었던 사랑
그리움 하나
--중략--
어머님 생전에 달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자주 보았기에
달나라에 계실 것 같아서……
--「달」중에서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그가 ‘보름달만 보면 흘러간 세월’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다. 그러나 지금은 ‘달나라에 계실 것 같아서..’ 보름달을 응시하면서 모정(母情)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장독대 위 정한수 / 한 그릇에도 보름달이 담기면 / 어머님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 / 저 둥근 달은 그때의 추억을 거울같이 비추네(「한가위 보름달」중에서)’와 같이 ‘달=어머니’라는 등식으로 시적 모태(母胎)로 발전시키는 특성이 있다. 이와 같은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 시적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것은 민춘지 시인 자신도 이제 그 어머니와 동일한 인생행로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감회(感懷)는 새로우면서도 시의 전개는 진지(眞摯)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시숙님이 돌아가시고 창원 장조카가 제사를 모셨다 / 돌담 얼싸 안은 담쟁이 넝쿨 / 달 밝은 보름밤이면 / 도랑물 조잘대는 깊은 산골 / 어두운 밤이면 별들 많이 쏟아지는 한적한 곳, / 형님은 사기점으로 시집와서 / 그 시골에서 한평생 사시다가 / 9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 지금은 텅빈 집만 숨 쉬고 있는 큰댁(「추석」중에서)’ 그리고 ‘불볕 햇살 아래 벌초를 하면 /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 불평 없이 자손 된 도리를 열심히 하는 모습 / 온 집안의 화목을 만들어가네(「고향」중에서)’라는 가족들의 넘치는 우애(友愛)로 가득해진다.
이제 민춘지 시집『물 같은 사랑』읽기를 마무리해야 하겠다. 그는 한 인생으로서의 삶과 한 시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한 가치관으로 화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을 탐구하면서도 자연 서정과의 조화를 심연에 정서의 원류로 형성하려는 그의 심중이 잘 현현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융합(融合)이나 동일성(동화나 투사)을 구현하려는 궁극적인 시법을 창출하면서 다시 시간(세월)과의 향연을 기원하는 보편적인 관념의 아늑한 시편들을 대할 수 있어서 우리 독자들은 그 공감의 영역에서 민춘지 시미학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또한 이러한 정서의 근원에는 ‘인연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 할머니로 손주를 봐주며 바쁘게 살아온 세월.’을 재음미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 가슴속으로 늘 따뜻하고 맑은 샘이 흐르고 있다고 / 말로 표현하며 자기 그릇 만큼의 꽃을 피워 / 열매를 맺는 것이다.(이상 ‘시인의 말’ 중에서)’라는 진솔한 그의 언어와 같이 그의 내면에는 가득찬 시심(詩心)이 지향적인 고차원의 인생관으로 새롭게 정립하려는 염원의 광채(光彩)가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시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항상 그 자체 속에서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의 안식처가 되고 비약(飛躍)의 가치관으로 유로하여 시의 위의(威儀)와 본령(本領)으로 영원히 간직하려는 여망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제2시집 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