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3.1운동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다. 불교 2명은 만해 용운스님과 용성스님이다. 불교는 일제 식민지 시절 기독교나 천도교에 비하면 일본 통치에 순응하여 안주한 면이 없지 않다. 조선시대의 불교 억압이후 1895년 일본 세력에 의해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용되고, 일제 시절에는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조선 불교의 대처 허용과 일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일본 통치에 협조하는 양상이 지배적이었다.
다행히, 만해 용운과 용성스님이 항일 운동에 앞장을 서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아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있어 불교의 체면을 다소 세워준 셈이다. 또한, 만해의 요청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용성 스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 불교 진흥에 더욱 매진한 선각자이다. 물론, 이 두 스님이외에도 일제에 항거하여 조선 불교의 정신을 지킨 스님들이 적지 않으나 , 이 두 분의 치열한 투쟁 정신과 실천은 오랫동안 기리고 칭송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여러번 종로를 지날 때마다 대각사를 들려보려 하였으나 시간을 못 내다가 마침내 2019년 3월 21일 방문하게 되었다.
3월 하순 꽃샘 추위에 바람도 세차게 불어 퇴근시간인 6시경인데도 종로 거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종로3가 지하철역 7번 출구에서 돈의동(창덕궁) 방향의 종각 담장쪽으로 한 5분 걸어 가면 대각사가 보인다. 대각사는 종묘 담장 바로 옆에 있다.
대각사는 일주문, 범종각 과 3층 법당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전각들은 1986년에 새로 지은 건물인데 이 곳에서 보는 일주문 팔작지붕의 정면 , 범종각 모임지붕, 법당 팔작지붕의 측면의 높낮이와 그 모양이 잘 어울린다. 도심 한 가운데인데도 아직 전봇대와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용성스님 (1864 - 1940)은
1) 사회적으로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한용운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한 후 옥고를 치루었고, 그 후에도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끝까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로 평가되지만
2) 불교지도자로서 불교 혁신운동, 불교의 대중화 그리고, 불교의 일본화 저지를 위해 불교 경전의 한글화, 거리포교, 어린이법회, 찬불가 등을 도입하였으며, 불교 사원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농장경영, 선농일치 등도 추진하였다.
3) 용성스님은 제자 동헌/도문/법륜, 동산/성철/법전, 고암/대원, 인곡/혜암으로 이어지는 법맥 즉 대각회, 정토회, 범어사, 해인사 법맥의 제일 큰 스님이기도 하다. 용성문도는 덕숭총림 만공스님의 제자들과 함께 한국불교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대각사는 용성스님이 불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1911년 창건한 최초의 도심 포교당 사찰이다. 1928년에 대각일요학교 설립, 1929년에 선회 설립, 1930년에 대각성전과 요사채를 설립하였고, 1939년에는 조선불교 선종총림으로, 1944년에는 경성포교당 대각선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곳 대각사는 1945년 12월 12일에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봉영회가 마련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김구선생은 용성스님 진영에 예를 올리고, “큰스님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시어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셨으며,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1969년에는 동헌완규, 고암상언 등 용성스님 제자들이 대각회를 설립하였고, 1986년에 현재의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른다.
용성스님은 불상보다는 석가모니의 깨달음 (대각)을 더 중시하여 대각사라는 이름을 지었고 그 제자들이 그 뜻을 받들어 1969년에 대각회를 설립하였다. 현재 대각회 산하 사찰은 150개 이며 대각회 승려는 약 400 여명이라 한다. 대각회 산하 사찰로는 대각사, 법안정사, 광덕스님의 불광사/불광법회, 법륜스님의 정토회, 대성사, 도피안사, 한암사, 석종사, 죽림정사, 룸비니 대성석가사 등이 있다. (주3)
용성스님은 유훈으로 10가지를 당부하였는데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 ‘경전 100만권 번역과 배표’, ‘100만명에게 불교의 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사찰을 건립할 것’등 으로 제자들은 그 뜻을 이어 서울 우면산 대성사(백제 불교 전래지), 구미 아도모례원(신라 불교전래지), 창원 봉림사(가야 불교전래지)를 세워 성역화하였고, 부처님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동산에 대성사를 지어 운영하고 있다.
용성스님은 또한 선수행에도 뛰어난 대선사로 임제선풍의 자각을 중시하여 많은 선원과 참선회를 설립하고 지원하였다. 특히 일반인과 부인들에게도 참선을 지도하여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였고, 기존 불교를 개혁하는데 매진하였다. 이는 대각회가 전통 사찰의 사세에 의존하지 않고 도심지에 신생 사찰을 세워 포교하는 바탕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대각회 소속 사찰 중 서울 송파 잠실의 불광사 ( 108 사찰 순례기 36번에 수록 )와 서울 양천 목동의 법안정사가 서울 종로 대각사와 비슷한 도심형 포교 사찰이다. 그리고 법안정사는 대각회 중앙본부가 있는 사찰이기도 하며 필자의 자택 근처이라 필자가 자주 들리는 사찰이기도 하다.
정사(精舍)는 수행처를 뜻하는 용어이다. 부처님 재세당시 최초로 세운 사찰이 죽림정사이다. 사(寺)는 중국에서 관청을 의미하였으나 나중에 사찰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 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을 때, 후한에서는 외국인인 두 스님을 관례에 의해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그대로 그곳에 머물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중국 사찰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
상세한 순례기는 아래글을 눌러 읽어 주세요.
https://blog.naver.com/oldbond/221528756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