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다음 시를 못 쓰게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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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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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내용은 형식이 되고 형식은 내용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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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무용론은 시인의 최고의 혐오인 동시에 최고의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시인은 언제나 이 양극의 마찰 사이에 몸을 놓고 균형을 취하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정치가에게 허용되지 않는 시인만의 모럴과 프라이드가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 이다. 연애에 있어서나 정치에 있어서나 마찬가지. 말하자면 진정한 시인은 선천적인 혁명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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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글만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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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선은 우리 시단이 해야 할 일은 현재의 유파의 한계 내에서라도 좋으니 작품다운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춘수의 부르주아적인 것도 좋고, 장호의 서민적 경향도 좋고, 김구용의 실험실적 경향도 좋고, 마종기의 경향도 좋고, 유경환의 경향도 좋다. <한양>지의 평론가가 말하는 것 같은, 반드시 사회참여적인것이나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도 좋다. 나의 소원으로는 최소한도 작품다운 작품이라도 많았으면 좋겠는데, 지난 1년의 작품을 훑어보아도 그런 작품이 실로 미미하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시인의 양심이 엿보이는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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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를 문화에 독단적으로 적용하려고 드는 것은 종을 가지고 주를 바꾸어 보려는 우둔한 소행이다. 주를 바꾸려면 더 큰 주로 발동해야 한다.
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 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이 수정의 작업을 시인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서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름다운 낱말들, 오오 침묵이여, 오오 침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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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불평의 나열에는 진력이 났다. 뜨거운 호흡도 투박한 체취해도 물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평이 아니라 시다. 될 수 있으면 세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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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에서 가장 오래 신세를 지다가 뒤늦게 ‘아리랑’으로 옮겨 와서 최근에 ‘파고다’로 옮겨 온 메모의 배경의 정다운 역사. 그리고 펜에서 만년필로 변했다가,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변한 도구의 정다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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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 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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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19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자유독립’ 그것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나의 온몸에는티끌만 한 허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 입디다. ‘자유’ 입니다......
‘4월’의 재산은 이러한 것이었소. 이남은 ‘4월’을 계기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하고 있소. 맹렬히 치열하게 작열하고 있소. 이북은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작열’의 사실만을 알아 가지고는 부족하오. 반드시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은 안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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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의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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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빈약하고 불성실한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의 책임을 과람하게 우리 시단에다 쏟았는지 모르고, 정치인의 영역에 속하는 책임을 성급하게 시인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시대착오를 범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뒤떨어진 미숙한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시인의 현실적 책임이 시의 기술 면에만 치중될 수 없는 애로와 불행이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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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현실참여시인쯤으로 떠받드는 일은 문학적 날조다. 훌륭한 리얼리스트는 자신의 모더니티를 이용해 자신의 리얼리즘을 증명하고, 훌륭한 모더니스트는 자신의 리얼리티를 동원해 자신의 모더니즘을 실현한다. 후자가 시인 김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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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억의 고통들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무엇을 자신의 가장 큰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우리 각자 인생의 정체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가장 큰 괴로움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명동의 위스키바에서 영미와 유럽의 현대문학에 관해 고매한 토론을 일삼고 거리로 나섰을 때, 비 내리는 비포장 진창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새삼 화들짝 마주해야 하는 그 고통이 김수영에게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한반도 문학과 자신과의 수준 차이에 치를 떨었고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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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상처를 안 입고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상처들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문인은 세상의 적이다” 라고 주장했던 것은 보들레르였으니, 이 책은 그 증거이자, ‘세상의 적들의 경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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