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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년시절
태어난 곳
포로 로마노 남쪽에 있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서면, 온갖 건물로 메워져버린 탓에 명확히 더듬을 수는 없지만, 2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는날에도 로마의 일곱 언덕이 있는 위치를 대충은 어림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심장부였던 포로 로마노(라틴어로는 포룸 로마눔)를 중심으로 하면, 바로 서쪽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이 있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퀴피날레 언덕, 비미날레 언덕, 에스퀼리노 언덕, 첼리오언덕이 차례로 이어지며, 남쪽에는 대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을 사이에 두고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이 놓여 있다.
이 언덕들을 둘러싼 성벽은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제6대 임금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건설했는데, 이 '세르비우스 성벽'(무라 세르키아나)은 카이사르 시대에도 건재했다.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카피톨리노 언덕인데, 이곳은 높이가 기껏해야 해발 50m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나머지 여섯 언덕보다 높은데다 언덕 마루의 넓이가 다른 언덕들보다 좁은 탓도 있어서, 건국 당시부터 신들의 거처로 알려져 있었다.
덕분에 나머지 여섯 언덕에는 사람이 살아도 되었다. 로마의 일곱 언덕은 서로 떨어져 우뚝 솟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아래 골짜기가 좁거나 깊지도 않다. 야트막한 구릉이 서로 이어져 있을 뿐이니까. 고지대는 주거지로, 저지대는 물을 빼서 공공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그리하여 저지대에는 포로 로마노가 생기고, 대경기장이 세워지고, 태베레 강가에는 선착장과 시장 등이 생겨났다.
로마인들은 다신교를 믿는 만큼 신전의 수도 많은데, 그 수많은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비좁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다 세울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스인이라면 당연히 높은 지대에 신전을 짓겠지만, 신전도 공공 건물의 하나로 여기는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들어서지 못한 신전들도 태연히 저지대에 지었다. 층계를 20개쯤 올라가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신전을 지은 것은 신들의 거처이니까 당연할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카피톨리노 언덕을 제외한 로마의 도심에서 비교적 고지대는 개인용으로 쓰이고 저지대는 공용으로 쓰였다. 그런데 여섯 언덕 가운데 입지조건이 가장 좋은 곳은 건국자 로물루스가 최초의 주거지로 정했다는 팔라티노 언덕임이 분명하다.
우선 언덕 마루가 비교적 넓어서, 면적이 10ha나 된다. 그리고 고지대에 있으면서도 물이 풍부하다. 또한 완만한 비탈만 내려가면 도심 속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로 곧장 갈 수 있다. 게다가 테베레 강 바로 옆에 위치한 만큼, 강을 건너 불어오는 서풍이 상쾌하다. 겨울보다 여름을 염두에 두고 집을 지을 필요가 있는 로마에서는 최상의 주거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없이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포로 로마노의 유적을 구경한 뒤 팔라티노 언덕에 오르면, 여기가 과연 로마인가 싶을 정도로 서늘하고 푸른 초목에 둘러싸여 있어서, 저지대의 떠들썩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 팔라티노 언덕은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가 거처를 정했다는 이유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저택을 지은 뒤로는 황제들의 궁전으로 메워지게 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황제가 없었던 공화정 시대의 팔라티노 언덕은 유력하고 부유한 로마 시민들의 저택이 늘어선 고급 주택가였다.
로마사에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발레리우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스, 파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같은 명문 귀족들도 대대로 팔라티노 언덕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그라쿠스 같은 평민 귀족 출신의 영웅도 본가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었다. 로마 최고의 부호라고 일컬어지는 크라수스도 당연히 팔라티노 언덕의 주민이었다. 지방에서 로마로 상경하여 변호사로 출세한 철학자 키케로도 빚까지 얻어서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을 손에 넣었다.
팔라티노 언덕만이 아니라 고지대인 다른 언덕들도 고급 주택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은 로마의 기후를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마르케 지방에 드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의 로마 가처는 첼리오 언덕에 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대통령 관저는 퀴리날레 언덕에 있는데, 이는 옛날 로마 귀족의 대저택 위에 세워진 중세 로마 교황의 궁전을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 접수한 것이다.
그러면 부자가 아닌 서민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그들은 완만한 비탈 아래쪽에 찰싹 달라붙듯이 집을 짓고 살았다. 이런 집들은 로마의 일곱 언덕 아래쪽에는 어디에나 있었다. 신들의 거처로 되어있는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쪽도 서민층의 집들로 메워져 있었다. 요컨대 하나의 언덕 아래쪽에서저지대로 들어가 또 다른
언덕 아래쪽에 이르는 지역에 서민층의 주거지가 밀집해 있었던 셈이다.
한편, 서민들의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지역도 있었다. 이런 지역들 가운데 도심과 가장 가깝고 포로 로마노와 거의 맞닿아있다고 해도 좋은 지역은 '수부라'라고 하여 예로부터 유명했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와 더불어 하루가 시작되는 언덕 위의 고급 주택가와는 달리, 수바라에서는 일출과 함께 시작되는 직공들의 작업장에서 나는 소음으로 눈을 뜬다. 곧이어 생필품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상점에는 서민들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언덕 위의 부자촌에서 물품을 사러 내려오는 노예들까지 가담하기 때문에, 좁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해가 높아질수록 늘어나게 마련이다. 상점만이 아니라 작업장들도 길가에 면한 문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음량으로는 수부라가 로마 제일이었을 것이다. 서민층이 모여 사는 동네인 까닭에, 이빨 뽑는 사람이나 이발사나 수상쩍은 오리엔트산 향미료를 파는 장사꾼처럼 길거리에서 영업하는 행상들도 대저택의 하인들에게 무전박대당할 염려 없이 장사에 전념할 수 있다. 도대체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자들도 여기서는 의혹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의심쩍고, 좋게 말하면 활기에 넘치는 곳이 수부라였다.
지금은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포룸' 배후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높은 석벽을 지금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수부라에서 자주 발생한 화재가 널리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지책이다. 이 수부라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민층 저주지여서, 에스파냐 광장 부근의 레스토랑에서는 7만 리라인 음식 값이 옛날의 수부라, 오늘날의 카부르 거리 일대에서는 2만 리라밖에 안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바로 이 부수라에서 태어나, 37세의 나이로 최고 제사장에 뽑혀 포로 로마노 안에 있는 관저로 이사할 때까지 수부라에서 살았다.
집안 배경과 환경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 국가 요직을 차지한 적이 있는 인물이라면, 대부분 몇 대 전까지 가계를 더듬어 올라갈 수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정관(콘술)을 지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그라쿠스 형제는 물론이고,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도 아버지가 집정관이었다. 이런 인물들은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낸 집안 출신으로, 이름 바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반면에 지방 출신으로 군대에서 출세하여 집정관에 일곱 번이나 선출된 마리우스, 마리우스와 동향 출신이지만 변호사로 입신하여 출셋길을 개척한 키케로 같은 이들의 경우에는 족보를 따질 수 없다. 가계가 당대부터 비롯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당시 로마에서는 '신참자'(호모 노부스)라고 불렀다.
당대 이전으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사람으로는 술라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술라는 '신참자'가 아니다. 그는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 로마의 명문 중의 명문 귀족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에 속한다. 그런데도 술라라는 가문 이름은 그가 활약하기 이전의 로마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른바 몰락한 귀족이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세 부류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율리우스 씨족은 코르넬리우스나 아피우스나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맞먹을 만큼 오래 전까지 가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명분 귀족이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어머니는 알바롱가의 공주이고, 율리우스 씨족은 이 알바롱가의 유력자이다.
그러나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이후 로마의 세력은 계속 강성해져, 1세기 후인 기원전 650년 무렵 로마는 과거의 모태인 알바롱가를 공격한다. 이 범위가 당시 로마인들의 행동반경이었다.
소풍에 불과한 원정이라도 해도, 제3대 임금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침공은 성공하여 로마군이 승리했다. 알바롱가는 철처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이주 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 이주한 것이 아니다. 로마인들은 나중에 플루타르코스가 칭찬해 마지않는 통치방식, 즉 '패배자로차도 로마화 시키는' 방식을 그때부터 이미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로 강제이주 당하긴 했지만, 승자와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고 로마 시민이 된 이들은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첼리오 언덕을 주거지로 제공받았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자들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각 가문의 대표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제공되었다. '옛 패배자'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것은 로마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로마의 역대 통치자들은 거의 대부분 '옛 패배자'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 씨족도 공화정 초기에는 상당히 활약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300년 가까이 소식이 완전히 끊긴다. 로마의 공식 기록인 '최고 제사장 연대기'에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제2차 포에니전쟁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로마가 한니발을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던 그 시절,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는 한 인물이 카르타고 군대를 무찔러, 그 공로로 카이사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별칭이 결국 가문 이름으로 정착된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카르타고 말로 '코끼리'를 뜻한다. 별칭이 가문 이름으로 바뀌는 예는 로마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또다시 율리우스 씨족도 카이사르 가문도 완전히 소식이 끊기는 상태가 재연된다. 이 시대에 수십 명씩이나 집정관을 배출한 코르넬리우스나 클라우디우스나 파비우스 씨족에 비해, 율리우스 씨족 전체가 배출한 집정관은 1세기 동안 고작 한 명뿐이었다. 집정관이 매년 두 명씩 선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시원찮은 명문 귀족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1세기에ㅐ 접어들어 집정관이 한 명 나왔지만, 이 사람(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은 우리의 주인공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지낸게 고작이었다.
법무관(프라이토르)은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다음의 중요한 공직이다. 해마다 6명이 민회에서 선출된다. 자격 연령은 40세, 원로원의 우이라야 출마할 자격이 있었다. 법무관으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속주의 한 곳에 총독으로 부임한다. 이 공직을 역임한 뒤에야 비로소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경력이 법무관으로 끝난 것은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카이사르는 유력자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라와는 달리, 선대까지 가계를 더듬을 수 있는 것은 카이사르의 아버지가 법무관까지 지냈고 어머니의 친정이 이름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는 저명한 법학자로서 집정관을 지낸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누이동생이었다.
카이사르 집안이 검소하게 살았던 이유는 비록 명문 귀족이긴 해도 위세를 떨치는 인물이 오랫동안 배출되지 않았고, 따라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로마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다. 오로지 실력으로 출세한 마리우스가 배경을 얻기 위해 아내로 맞아들일 여자는 카이사르의 고모뻘 되는 율라 였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 코타 집안은 아무리 학자 집안이라 해도, 이 집안사람들은 집정관을 비롯한 로마 요직에 자주 선출되었다. 그런 집안의 영특한 규수를 가난뱅이 귀족한테 시집보낼 리는 없다. 따라서 술라와는 달리, 카이사르가 태어난 가정은 검소하게 살기는 했을망정 가난하지는 않았다는 고대 역사가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록 팔라티노 언덕에 살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해도.
또한 수부라에 살았다는 것 자체가 서민층과 같은 수준의 집에 살면서 그들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성벽 밖에 개발된 시가지라면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사는 것이 보통이지만, 고대의 도심(오늘날의 구시가)에서는 경제력이 다른 집들이 모여 사는 일도 드물지 않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상황이 싹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 이유는 아마 같은 집에 대대로 눌러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팔라티노 언덕에 대대로 사는 것과 수부라에 대대로 사는 것의 차이는 역시 뚜렷했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였다. 수도 로마는 이주자들을 수용하느라 항상 골치를 앓는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당시 로마인들이 도읍으로 여겼던 '세르비우스 성벽' 안쪽은 면적이 5㎢ 정도에 불과했다. 재산이 변변찮은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자연히 건물을 고층화할 수밖에 없다. 4~5층에 이르는 임대용 공동주택을 로마인들은 '인술라(섬)'라고 불렀는데, 술라도 청년 시절까지는 이 '인술라'에서 살았다.
카이사르가 인술라에서 살았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만약 그랬다면 누군가가 기록을 남겼을 텐데,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비록 수부라의 주민이라 해도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고대에도 카이사르의 '생가터'는 확실치 않았으니까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연구자들이 만든 '로마 시내 단독주택의 원형'이 상상의 출발점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로마의 주택이라 해도 고대의 주택과 현대의 주택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대의 집들이 안쪽으로만 열려 있었던 반면에 현대의 집들은 반은 안쪽으로 열리고 반은 창문 등을 통해 바깥쪽으로 열려 있다는 점일 것이다.
고대 주택이 바깥쪽을 폐쇄하고 안쪽으로만 열려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한정된 토지에 많은 사람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단독주택이라 해도 바깥벽은 이웃집과 바로 맞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안전 대책이고, 세 번째 이유는 로마의 기후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번화가에 살더라도 외부와 내부를 차단함으로써 집 안의 조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르네상스 이후에는 로마 주택도 벽에 창문을 내거나 하여 외부와도 통하게 되었지만, 아래층 창문은 쇠창살로 보호되어 있고, 햇빛을 직접 받는 위층 창문은 쇠창살로 보호되어 있고, 햇빛을 직접 받는 위층 창문은 여름철에는 아침 9시만 되면 유리창뿐 아니라 그 바깥쪽에 달려 있는 덧문까지도 닫아야 한다.
그 창문은 해가 진 뒤에야 다시 열린다. 그만큼 로마의 햇빛은 강렬하다. 벽의 두께는 최소한 50㎝는 되니까, 햇빛을 차단해 버리면 집 안은 뜻밖에 서늘하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안쪽으로 열리는 로마식 주거양식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절반이나마 답습되어왔다고 생각한다.
고대에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은 석조 건물이 보급되기 이전의 벽돌건물도 외벽이 상당히 두꺼웠다고 한다. 그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는 기본적으로는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다. 좌우가 균형이 잡혀 있는 것은 거기에 사는 사람의 정신 균형과도 연결되는가. 또한 균형 잡힌 아름다움, 즉 균형미는 고대의 미적 가치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이기도 했다.
균형미에 충실했다고나 할까. 고대 로마에서는 중상류층 정도의 사람도 자기가 사는 주택에 점포를 만들어 임대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이 임대 점포도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임대인은 그 집의 주인이다. 다만 애초부터 임대를 작정하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집주인의 처소와 임대 점포는 외벽과 같은 두께의 벽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은 대부분 이런 유형의 복합주택이었다. 물론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들은 복합주택이 아니다. 첼리오 언덕에 있었던 폼페이우스 저택도 그 호화로움으로 유명했으니까. 집의 일부를 점포로 빌려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네 집은 수부라에 있었다. 그 집이 '주상 복합주택'이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좌우 양쪽의 점포 사이에 뚫려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아틀리에의 어운인 아트리움, 즉 안뜰이 나온다. 안뜰이라 해도 정원이 있는 것은 아니고, 천장 중앙이 뚫려 있어서 거기로 햇빛을 받아들이는 공간에 불과하다. 사방이 원기둥으로 떠받쳐진 지붕 한복판이 뚫려 있으니까 비라도 내리면 온통 물바다가 되겠지만, 로마에는 비가 내리는 날이 적다. 이 안뜰 중앙에는 빗물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관상의 이유로 작은 연못이 있는 게 보통이었다. 그 주위에 회랑이 있고, 좌우에는 방문이 늘어서 있다. 바깥벽에 창문이 없으니까, 방으로 들어가는 빛은 안뜰에서 들어가는 빛뿐이다. 햇빛이 워낙 강렬해서,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트리움 건너편에는 타불라리움이라는 방이 있다. 말하자면 집주인의 응접실이다. 집주인이 명문 귀족이거나 유력자라면, 로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간관계였던 '파트로네스'(보호자)와 ' 클리엔테스'(피보호자 내지후원자)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보통이니까. 로마의 웬만한 집에서는 아침마다 온갖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오는 클리엔테스를 접대하기 위한 방이 필요했다. 따라서 현관에서 아트리움을 거쳐 타불라리움에 이르는 이 부분이 집 안에서는 공적인 구역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매사에 개방적인 로마인들이 그처럼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기후 덕분이다. 응접실에는 문이 없다. 응접실로 쓰이고 있을 때는 이 방의 앞뒤를 커튼으로 가릴 뿐이다. 쓰이지 않을 때는 커튼을 열어둔다. 따라서 아트리움에 들어서면, 타불라리움을 통해 그 안쪽에 있는 안뜰, 꽃들이 피어 있고 푸르름이 가득한 안뜰까지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게다가 그 풍경은 응접실의 기둥들과 그 위를 가로지른 상인방에 둘러싸여, 마치 액자 속의 그림이라도 보는 것 같다.
이처럼 로마에서는 웬만한 집들도 공적인 구역과 사적인 구역을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구분은 되어 있었다. 사적인 구역도 지붕이 없는 부분을 중심으로 회랑을 둘러치고, 그 배후에 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공적인 구역과 마찬가지이나, 중앙은 작은 연못 대신 정원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안뜰 주위에서 있는 원기둥의 수도 많고, 그 옆은 여인들이 일하기에 좋은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에세드라'라고 불리는 곳에는 이 집의 수호진, 예컨대 카이사르 가문이라면 미의 여신 베누스를 모시는 제단이 있고, 그 옆에는 조상들도 모셔져 있다. 공적인 구역의 안뜰이 아트리움이라고 불린 반면, 사적인 구역의 안뜰은 페리스틸리움이라고 불렸다. 손바닥만 한 안뜰에는 꽃과 나무를 심고, 그 한구석에는 물이 졸졸 흐르는 조각 분수까지 있었다.
또 고대 로마 주택의 실내 장식에 관하여 유럽 연구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 로마인이 온갖 세간으로 가득 차 있는 현대 유럽의 주택을 본다면 곳간으로 생각할 게 분명하다고. 고대 로마에서는 실내에 놓여 있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침실에도 침대와 작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정도였다. 식당에는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는 관습 때문에 침대식 긴 의자가 한복판을 둘러싸고 놓여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평소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가까이에 두는 대신, 벽과 바닥을 아름답게 치장했다. 바닥에는 치수가 일정하고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돌을 깔거나 선명한 무늬의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대리석이나 다채로운 색깔의 모자이크는 제정 시대에 접어든 뒤에 사용되었고, 공화정 시대에는 모자이크 색깔도 흑과 백 정도에 불과했다.
벽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인물화가 아니라 풍경화가 일반적이었다. 인물을 그리는 경우에도 풍경의 일부로 그렸다. 이 풍경화가 어떤 느낌의 것이었는가 하면, 오늘날 에스파냐 광장 근처에 있는 '호텔잉기텔라'(영국호텔)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헤밍웨이도 묵은 적이 있는 이유서 깊은 호텔의 식당 이름이 '로만 가든'인데, 그렇다고 해서 고대 로마식 정원에 면해 있는 것은 아니다. 지하 1층에 있는 이 식당은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불과하다.
다만 사방 벽은 온통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담쟁이로 뒤덮인 돌담이나 초상들이 그려져 있고, 그 너머에 보이는 언덕 위에는 신전 같은 형상도 그려져 있다. 이 식당에 앉으면 옛날 로마의 정원에서 식사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식당 이름이 '로만 가든'인 것이다.
고대 로마 주택의 실내 벽화도 이런 식의 것이었다. 원근법까지 구사한 화법으로 해변 별장까지 그렸으니까. 로마 시내에 있으면서 바깥세상과의 연결도 즐길 수 있다.
도심에 위치한 단독주택은 이층이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이탈리아에서는 오늘날에도 천장 높이가 2.5m를 넘지 않으면 방으로 치지 않는다. 미니 이층이랄까. 다락방 같은 공간은 있었다. 지붕과 천장 사이에 공간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추위와 더위가 한결 누그러진다. 이런 다락방들은 전체적으로 네모꼴을 이루는 집의 아트리움과 페리스틸리움 부분, 즉 지붕이 없는 부분과 그것을 둘러싼 지붕을 제외한 모든 구역을 덮고 있었다. 다락방들은 노예들의 거처나 곳간으로 쓰였다. 불필요한 물건을 실내에 놓아두지 않으니까, 평소에 쓰지 않는 물건들은 이런 다락방에 넣어둔다. 또는 셋방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가 인디오니시오스도 그리스에서 처음 로마에 왔을 때는 이런 다락방에 세 들어 살았다.
이상으로 로마 시내의 단독주택을 대충 살펴보았다. 부잣집의 경우에는 아트리움과 페리스틸리움이 훨씬 넓어지고, 그에 따라 이런 구역을 둘러싼 방의 개수도 늘어나고, 사적인 구역 안쪽에 넒은 정원을 또 하나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언덕에 있는 고급 주택이 아니면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다. 하지만 그런 대저택이라도 기본 형태는 마찬가지였다.
주거의 편의성을 생각하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외부와 차단되어 조용한 이런 구조가 로마의 기후에도 맞고 로마인의 기질과도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북유럽에서 거주할 필요가 생기자 로마인들은 난방설비를 고안하지만, 수도 로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한 경제력이 별로 없는 집이라도, 로마 도심에서 20~30㎞쯤 떨어진 곳에 별장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푸른 초목으로 둘러싸인 전원생활을 즐긴다기보다는 농업국가 백성의 전통이나 습관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별장은 도회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농업 생산기지였고, 올리브유나 포도주, 치즈나 과일도 직접 생산한 것을 좋아했다. 수수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 밖에 갖지 못했던 카이사르 집안도 별장을 한두 개는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별장을 장만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별장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로마가 건국된 지 653년, 서력기원으로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수바라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갑자기 밝아진 별이 내려왔다는 전설이 따라다니게 마련이지만,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없다.
그의 탄생은 당시 로마의 평범한 사내아이의 탄생과 다를 바 없었고, 부모와 어린 누나, 일가친척들과 집안 노예들이 그의 탄생을 축복했을 것이다. 몇 년 뒤에 누이동생이 태어났으니까. 카이사르는 누나와 누이 사이에 낀 외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는 어머니의 애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평생 동안 그를 특징지은 것은 하나는 아무리 절망적은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나이에게 최초로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머니의 애정이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면, 자연히 자신감에 뒷받침된 균형감각을 얻게 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적극성도 어느새 저절로 몸에 배게 된다.
제2장 소년시절
가정교사
고대 로마에서도 자녀 교육은 6, 7세부터 시작되었다. 공립학교는 없었고, 일반 가정에서도 아이들은 사설 학원에 다녔다. 부모가 교육을 베풀 수 있을 만한 지적 수준을 갖고 있으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직접 가정교사 역할을 맡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10세 무렵까지 계속되는 초등교육은 읽기, 쓰기, 주판이었으니까, 기초 정도는 부모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우이렐리아는 학자 집안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 출신이었고, 교양 있는 여자로도 이름나 있었다. 그런 만큼 아들의 초기 교육은 그녀가 직접 맡을지도 모른다. '학우'는 누나와 누이동생, 그리고 집안 노예들이 낳은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여자에게 교육을 베풀지 않았던 아테네와는 달리 로마에서는 여자한테도 초등교육까지는 시키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관습이었다. 또한 노예의 자식들을 주인집 아이들과 함께 가르치는 것도 로마에서는 양반집 일수록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다.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으니까. 어른이 된 뒤에는 공직에 취임할 운명이다. 수족처럼 따라줄 비서가 필요하다. 로마의 요인들과 마지막까지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는 노예가 많은데, 이는 어릴 적부터 함께 배우면서 함께 자라고 평생 동안 고락을 함께 나눈 사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인들은 인도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자기 집 노예의 자식들한테도 동등한 교육을 베풀었다.
로마의 양반집에서는 기초 교육이 끝나는 8, 9세 무렵부터 자녀 교육을 가정교사한테 맡기는 것도 관습이었다.
교육에 열심이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유모부터 그리스 여자를 고용하고, 그 후에도 줄곧 아테네에서 배운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자녀에게 붙여주었지만,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집은 그라쿠스가문과 아이밀리우스 가문처럼 경제력도 있고 자녀에게 교육을 무엇보다 중시한 가정이거나, 로마 제일의 부호라는 체면 때문에 급료가 비싼 그리스인 교사를 많이 고용하는 등의 허영을 부린 크라수스 가문 같은 경우뿐이다.
어쨌든 당시의 교사는 그리스인의 독점 시장이었고, 그중에서도 '고급 브랜드'는 아테네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었다. 그 다음이 페르가몬을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서해안이나 로도스 섬에서 공부한 그리스인이다. 그라쿠스 형제나 크라수스나 폼페이우스의 가정교사는 물론 그리스인이었지만, 이들보다 훨씬 명문가라도 경제력이 뒤떨어지는 카이사르 집안에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년 카이사르의 가정교사가 된 삶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갈리아인이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그리스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안목도 갖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어머니가 갈리아인을 고용한 것은 내실을 중시하는 실질주의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 카이사르는 모국어인 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도, 당시의 국제어였던 그리스어를 모국어만큼 완벽하게 습득하는 것도 갈리아인한테서 배우게 되었다.
초등교육 후기부터 고등교육 초기, 나이로 치면 8, 9세부터 16세까지 배우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문법.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
이 일곱 과목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다.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의역하면 인간이 제구실을 하는 데 필요한 '교양학과'가 된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어의 '아르테 리베랄레', 영어의 '리버럴 아츠'로 남아 있다.
이 일곱 과목을 한 사람의 가정교사가 모두 가르친다. 그렇게 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교육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로마에서는 기초 과정을 마친 뒤의 수업은 선인들이 남긴 글을 읽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문법, 수사학, 변증학, 역사, 지리 모두 호메로스나 투키디데스나 플라톤이나 대카토의 저술을 읽음으로써 배워 나간다. 다시 말해서 '교재'는 선인들이 남긴 문장이고, 학생들이 쓰는 '공책'은 밀랍을 먹인 목판이다. 여기에 철필이나 상아펜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 밀랍 목판은 학생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수첩'으로 사용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한 명의 가정교사가 전 과목을 가르치면 학과를 과목별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도 모든 과목을 서로 관련지어 배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교사의 자질이 더욱 중요해진다. 로마 사회에서 가정교사의 자질이 더욱 중요해진다. 로마 사회에서 가정교사의 지위가 높고 급료를 많이 받은 것은 이런 수요를 반영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일곱 과목의 교양학과 이외에 천문학이나 건축이나 음악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리스 문물에 상당히 심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음악 교육을 중시한 것은 악기를 다루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보다는 조화의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인들에게 대학 진학은 아테네나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섬에 유학하는 것이었지만, 거기서 배우는 주요 과목은 수사학과 변증학 및 철학이었다. 법학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만, 로마인들은 법률을 가정의 식탁에서 화제로 삼을 정도였다. 변호사를 지망하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고명한 변호사 밑에서 수업을 받으며 기능을 익혔는데, 법학은 이런 과정을 통해 터득하는 실무적인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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