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박한남(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안양도 내시였다는데
일반적으로 내시라고 하면 국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전달하는 거세된 남자인 환관을 연상하게 된다. 궁중사극에 감초로 등장하는 환관은 쪼그라진 어깨에 음흉한 눈초리와 가냘픈 목소리를 가지고, 오아실 내부의 패권다툼이나 국왕의 향락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였던 국왕의 곁에는 환관이 있었던 예가 많다.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과 김자원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예이다. 고려 의종 때에는 정함, 백선연 등과 같은 환관들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파행적인 정치 운영을 부추겼던 결과 마침내 무인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처참히 살해되었다. 또 공민왕도 환관 김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그가 추진했던 반원개혁 정치가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왕조의 재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온몸이 찢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연산군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간언하였던 김처선 간은 환관도 있고, 중국에는 종이를 발명한 채륜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환관이 있었다. 또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이방인이 이디오피아 간다게 여왕 때의 환관인 유우너커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군주의 곁에는 그의 심복으로서 환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환관이 있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고려에서는 환관과 내시가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즉 고려의 내시는 환관 즉 남성이 제거된 고자가 아니고, 오히려 대개가 귀족 자제로서 용모가 단정하거나 유학적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선발되었다. 내시는 여러 시종들과 함게 왕의 행차에 동행한 것은 물론 왕명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국가 기무를 관장하고 때로는 유교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내시의 선발기준
고려시대에 내시가 언제 어떠한 직급으로 설치되었는지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918년(태조 1)에 오늘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광평시랑 직예를 내시서기로 삼았다는 기록에서 당시 내시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 내시의 선발기준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준은 문정 때에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최사추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종은 재능과 공로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용모가 수려한 사람 20명 정도를 내시로 뽑아 자신을 시종하게 하였으며 그 수고의 대가로 별사미를 주었다. 이러한 원칙은 그 후 인종 때까지 준수되다가, 의종 때에 이르러 귀족자제로 구성된 좌번내시와 유신으로 구성된 우번내시의 이원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내시의 선발기준이 주로 가문과 재능 및 용모를 중시하였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근시직인 만큼 내시가 되는 첫째 요건은 국왕의 총애가 우선이었다. 과거합격자로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가문이 뛰어난 집의 자손이 대부분이었으나, 과거합격자는 아닐지라도 서리직에 있으면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의 병을 치료하였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또는 오늘날의 폴로경기와 같은 격구 등의 잡기에 재주가 있어 내시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가진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국왕의 측근에 있으면 기회를 포착하여 잘만 하면 뜻밖의 출세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풍류를 즐겼던 의종 때에는 각종 행사비용을 후원했던 부유층의 자제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종 때 내시들 가운데에는 왕의 선정을 위하여 좋은 정책을 입안하는 경우보다는 왕의 향락과 사치를 부추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일부 내시들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빚까지 얻어 자금을 마련하였다가 이를 갚지 못해 빚쟁이들이 궁궐까지 찾아와 성토하는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시의 일반적인 성격을 유학자로서의 면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인(정과정)을 지은 정서를 들 수 있다.
내 님 그리워 우니나니
옷깃 적시지 않은 날 없어라.
봄 밤 깊은 산속의 두견새야
내 신세도 꼭 너 같구나.
묻지 말아라 사람들아
지난 날 나의 잘못을.
다만 내 가슴 알아 주는 것은
저 조각달과 새벽별뿐이리.
이 고려가요에서 정서는 깊은 산속에 홀로 떨어져 슬피 우는 두견새에 자신을 비유하며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려 다시 국왕이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그리고 있다. 정서는 동래 정씨 문벌출신으로서 의종의 이종사촌이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내시로 발탁된 정서였지만 의종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내시는 국왕의 측근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남보다 승진을 빨리 할 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자가 될 소지도 적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문신에 한정되었던 내시의 자격은 1170년 무인정변후 변화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에게도 내시직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여 비로소 무신들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최씨 정권 하에서는 최충헌의 사위나, 혹은 최충헌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 또 최충헌의 총애를 입은 사람들이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고려 내시직이 두드러지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라 하겠다.
13세기 이후 100년간의 원나라에 의한 정치 간섭과 그에 따른 정치조직의 변질, 각종 전란은 고려의 정치구조와 국가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몰락하는 문벌가문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예전에는 출세의 꿈도 꾸지 못했던 하층신분 사람들에게 내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제 내시가 되는 길도 가문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았다. 항몽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군인들,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실력을 발휘한 몽고어 통역자들과 환관들이 내시로 선발되었고, 때로는 군역 기피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까지 하였다. 특히 홀치. 필자적 등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같은 원나라 숙위기구가 수용되면서 고려 고유의 여러 근시기구가 변질되는 것과 함께 고려 내시는 잊 출발 초기에 보여 주었던 소수의 엘리트집단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1391년에는 개선책을 마련하여 호적이 분명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글씨, 셈, 활쏘기, 말타기 가운데 한 가지라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좌, 우번에 각각 50명씩 두어 둥중 숙위를 맡게 하였다. 원래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로 구성되었던 내시가 고려 말에는 여러 궁중 숙위군의 하나로 변질된 것이다.
내시와 국왕의 관계
고려시대 내시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몇 사람의 사례를 들어 내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정서의 아버지 정항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고을 원님으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왕명을 작성하는 한림원의 직책을 맡았다. 예종은 이러한 전력을 높이 여겨 다시 내시로 선발하여 국가 기무를 관장케 하였다. 특히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에게도 사정의 칼을 휘두르다 오히려 외직으로 좌천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림함으로도 이름이 높아 1125년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집에 쌀 한 말도 모아 놓은 것이 없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30년 근시오, 11년 승제를 지낸 사람이 이렇게 가난하게 지냈으니 진실로 가상하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규정상 내시의 임기는 9년을 상한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정항이 30년 동안 역임했던 것처럼 한번 내시적에 오르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계속 겸임할 수도 있었다.
한안인은 과거에 급제한 뒤 한림원의 말단직을 거쳐 예종 때 내시가 되었다. 이후 그는 가문의 배경도 없으면서 눈부시게 출세하고 신진관인들을 규합하여 당시 회척이었던 이자겸과 권력을 다툴 정도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내시로서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할 수 있었고, 국왕에게 업무 추진능력과 충성심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이 결집되면서 이자겸 세력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평소 한안인의 득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이자겸은 왕의 외할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를 역모죄로 몰아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곧 죽여 버렸다. 당시 한안인과 함께 숙청된 사람들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20여 명의 상당수가 한안인과 마찬가지로 내시직을 거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들은 한안인을 중심으로 하여 국왕 측근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던 것이다. 비록 한안인은 외척이자 당대 최대 문벌세력이었던 이자겸과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지만, 한미한 출신이었던 그가 기존의 문벌기존세력과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을 성장 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전기 내시의 정치적 위상을 잘 살필 수 있다.
유응규는 여러 차례의 응시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려한 용모와 문장력을 높이 산 인종에 의해 내시로 발탁되었다, 그는 내시로서 매상에 정확한 판단력으로 매끄럽게 일을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후에 지방관이 되었을 때에도 진정으로 주민들을 아끼는 청백리라고 명성이 높았다. 때문에 무신란이 일어나 많은 문신들이 숙청되었지만 그의 명망을 아끼는 명종에 의해 내시로 활동할 수 있었다. 특히 유응규는 명종이 금나라 황제로부터 왕위 계승을 승인받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금나라 조정에서는 무인정권이 마음대로 국왕을 갈아치운 것을 빌미로 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고려에서 보낸 공문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하면서 회신을 거부한 것이다. 이 때 사신으로 갔던 유응규는 이 문제를 타결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것은 왕명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하며 죽을 각오로 단식투쟁을 하였다. 이에 놀란 금나라 조정에서는 회유와 협박으로 죽이라도 먹이려 하였으나 그는 단식을 계속하였다.
1주일 단식으로 의식조차 희미해진 그를 본 금 황제는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명종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답장을 써 그를 귀국시켰다. 따라서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신들조차 유응규가 금나라 조정에서 보여 준 행동이 아니었다면 자신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유응규의 이러한 행동은 사신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명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내시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왕과 내시와의 상호 신뢰관계는 희종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는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종 때 내시 왕준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당시 무인집정인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모의 가담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고 희종 역시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려시대 환관은 어떠하였나?
은나라 갑골문자에도 보이고 있는 환관제도가 우리나라에서는 826년(신라 흥덕왕1)때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환관이 있었으나 그 정원은 10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특별히 왕의 총애를 받아 승진한다 하여도 7품까지 밖에 오를 수 없었다. 당시 이들의 역할은 궁중 청소나 내명부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원래 환관이란 고자 또는 환자. 엄인으로서 궁궐에 입사한 사람을 일컫는 호칭이다. 중국은 형벌로 궁형을 받은 죄인이나 전쟁포로를 거세시켜 환관직에 투입하였으며 환관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들을 양성하는 학교도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궁형제도도 없고 전쟁 포로를 환관으로 삼지도 않았다. 따라서 성불구자로 태어났거나 사고로 고자가 된 천인들이 환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는 임백안 독고사, 방신우, 고용보 등과 같이 원에 끌려갔다가 타고난 수완으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오히려 고려 정국을 흔들 정도의 권세를 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는 농장의 확대와 조세의 가중으로 살길이 막연해진 일반 양인들이 신분을 낮추어 세금착취를 당하지 않는 노비의 길을 택하든지, 스스로 거세하거나 자식 또는 동생을 고자로 만들어 환관으로 삼아 팔자를 고치려는 경우가 많았다. 수수 후 상처가 아물기까지 걸리는 100일 동안의 고통과 고자라는 평생의 수치심보다도 관리의 횡포와 배고픔의 고통을 더 견딜 수 없어 택한 길이었다.
이렇게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환관들의 권력이 증대하고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공민왕 때에는 내상시, 내시감, 내승직, 내급사 등 그들만의 독자적인 관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1356년(공민왕 5)내시가 설치되어 정2품으로부터 종9품에 이르기까지 121명의 환관들이 정식 공무원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환관들로만 구성된 내시부가 출범한 것에 비하여, 내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여러 기능 가운데 궁중 숙위의 기능을 갖는 성중애마의 하나로 위축된 채, 조선 전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세종 때에는 이 내시가 환관내시와 용어상 혼란을 야기 시킨다는 이유로 내직으로 개칭되었으며 이것마저 1466년(조선 세조 12년) 완전히 폐지되어 그 소임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 충찬위에서 대신하게 하였다. 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의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