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스의 성격에 대한 연구 방법은 인간 성격의 본질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치료의 형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프랭클과 마찬가지로 어떤 치료 형식이든 그 기초는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에 두고 있다.
"게슈탈트(Gestalt)"라는 말에서부터 그의 연구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이 말의 설명은 그의 치료법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게슈탈트(Gestalt)"는 원래 독일말로 형태, 모양, 체제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에는 전체 혹은 완전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은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싹튼 이론 심리학 분야에서 사고하는 학파를 기술(記述)하는 데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위의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우리들이 조직된 전체나 유형에 의하여 지각한다고 믿는다.
펄스의 게슈탈트 치료는 직접적으로 게슈탈트 심리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은 아니다.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다같이 사용했다는 것 이외에는 이들 사이에 공통성은 거의 없다. 펄스는 몇몇 초기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의 업적에 감탄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은 없고 몇 개의 논문만을 읽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순수 형태주의자(pure Gestaltist)"는 아니고 이론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단지 게슈탈트라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했다. 펄스는 모든 유기체는 전체로 완성하려는 경향성이 있다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기능성의 법칙만을 의미하는 말로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썼던 것이다. 이 게슈탈트(혹은 종결로 향함)를 막는 것은 모두 유기체에 해롭고 따라서 미완성 상태(unfinished situation)라고 펄스가 부른, 물론 완성되어야 하는 상태를 (전체가 되거나 완전성을 이룬다) 요구한다.
한 인간의 모든 국면들이 게슈탈트를 형성하고 형태를 종결할 수 없을 때, 인간 성격의 전체성은 파괴되고, 하나 하나의 부분들은 의미를 잃고 만다.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 유기체 내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 균형이 흔들리면 - 게슈탈트의 형성을 막으면 - 부적응이라는 형태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불균형을 경험할 때는 그것을 수정하려는 동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펄스는 프로이드가 지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이론을 제시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이 다양한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펄스는 미완성된 상황이나 불완전한 게슈탈트(프로이드와 새롭게 대결하고자 하는 자신의 오랜 욕구와 같은 것)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우리들 각자는 여러 가지 - 아마도 수백 가지의 - 미완성 상태를 내부에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희망도 없이 혼란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를 몰아대는 그렇게 많은 미완성 상태에서 한꺼번에 여러 방향으로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중요성의 위계질서(hierarchy of importance) 식으로 그 불완전한 형태들을 배열하기 때문에 중요성의 순서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가장 긴박한 상태가 우선 그것이 만족될 때까지 행동과 사고의 지배적인 통제자이며 관리자가 된다. 그러고 나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타나고 그리고는 그 다음 그 다음 - 이러한 식으로 일어난다.
펄스는 자기 강연 도중 불이 났다고 가정하여 예를 들었다. 그 불은 곧 자기 강연 내용보다도 그 순간에는 더 긴박한 것이 될 것이다. 그 불은 미완성의 상황에서 가장 지배적인 혹은 가장 중요한 욕구(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가 되었다. 이제 불에서 재빨리 도망쳐 나왔을 때는 숨이 몹시 찬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미완성 상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화재의 위험보다는 산소 공급이 보다 다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숨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그 순간의 관리자가 되고 통제자가 되는 것이다.
미완성 상태를 처리하는 한가지 중요한 양상이 자아조절(self-regulation) 대(對) 외부조절(external regulation)이다. 건강한 사람은 타인의 욕구나 요구, 사회규범의 구속 같은 외부의 힘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자아 인식만이 건강한 성격의 발달과 성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자아의 완전한 인식으로써 우리는 유기체(마음과 몸)를 이어 받을 수 있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유기체의 지혜에 의지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펄스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사회로부터 충동을 억제해야 된다고 배워왔고 그 결과 자기를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억제된 충동은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실지의 예로 좌절된 공격성은 틱(tic ; 신경성 국부경련)으로, 경쟁심은 궤양 증세로, 성적(性的) 욕망은 적당한 예의로, 의존의 욕구는 단순한 혹은 몇 가지가 겹쳐진 공포증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충동을 표현하는 대신에(그래서 게슈탈트를 완성하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투사(project)한다. 우리는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타인이 하면 그들을 비난한다. 소심한 사람은 타인을 공격적이라고 비난하고, 금욕적인 사람은 청년의 부도덕성을 힐난하고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은 젊은이의 장발에 대해 공격하며 동성연애를 하는 것 같다고 비난한다. 이와 같은 경우, 용납될 수 없는 충동들이 다른 이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펄스는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는 이러한 투사가 우리의 내적 감정을 나타내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외부의 규제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욕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펄스가 말하는 뜻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에 대해 힐난하고 있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원칙에 부합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펄스의 인간 성격의 연구 방법의 다른 한 면은 현재를 유일한 현실로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여기 그리고 지금"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역시 현재의 시기에서 경험된다. 마치 아직도 과거 속에 있는 듯 살아가는 사람, 미래가 오늘 벌써 와 있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은 균형 잡히지 않은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거나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에 살며 그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과거와 미래로 도피하려는 충동이 생긴다. 이 두 가지 움직임이 모두 완전한 인간 발달에 해(害)가 된다. 우리가 과거에서 산다면(회고적 성격, retrospective character) 일생의 어느 기간에 대하여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거나 모든 것에서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펄스에 의하면 비극적 실책(失策)이고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지니는 미완성 상태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부모를 비난하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아동으로서 생각한다. 게슈탈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모에의 의존을 몰아내고 실제로 "나는 이제 성인이고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내게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래 속에서 사는 전망적 성격(prospective character)도 똑같이 완전한 인간 성장의 면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환상이 과거의 기억보다 더 현실적일리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재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미래를 경험할 수도 없다. 단지 이 시기, 즉 현재의 영상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의 소망과 전망 등이 실현되지 않으면 낙담하고 불행을 느끼며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타인이나 환경, 또는 "불운(不運)"을 탓할 것이다. 역시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 다른 것에 전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가 과거 쪽이나 미래 쪽에 향하고 있다면 현재라는 시간과 함께 그 순간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희생시키게 된다. 여기에 있는 현재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실이므로 매순간 완전히 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경험에서 무엇인가 얻어내야 할 책임을 갖는다.
펄스는 우리는 완전히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기억 속의 것이나 미래에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자고 변호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우리가 종결지어야 하는 미완성 상태와 회상하여 즐거운 경험들, 또 현재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험들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인식은 하되 그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되 -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으므로 - 현재의 대용으로 그 계획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펄스의 인간 성격에 대한 연구의 본질이다. 내적 균형을 조정하려는 것이 인간 성격의 동기가 된다. 다시 말해서 미완성 상태를 완성하려는 것이 동기가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동과 욕망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인생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리고 여기, 즉 현재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점은 바로 자아에 있음을 주시하자. 우리 자신만이 생을 조정할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