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회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
안녕하세요. 마음공부를 안내하는 최경도 교무입니다.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보고 듣는 것에 호기심이 생기고 의문이 일어난다. 왜 바람이 불고 비가 올까? 가족은 어떻게 될까?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의심에 대한 답은 배워서 알아지기도 하나 모르고 넘어가는 수도 많다. 나이 들면서 부모 형제 되는 내역과 촌수와 거기에 대한 도리를 알면 차차 철이 나는 것이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인이 차차 공부가 익어가는 것은 불보살 되고 범부 중생되는 내역과 자기와 천지 만물의 관계와 각자 자신 거래의 길을 알아 가는 것이라 하였다.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 자성의 원리를 알면 진리를 깨쳐 아는 것이 된다. 이러한 진리를 위대한 스승님의 깨침에 의해 정리해 놓은 것이 [정전]에 있는 “일원상의 진리”이다. 오늘은 “일원상의 진리”와 그 진리를 믿는 “일원상의 신앙”과 그 진리를 믿는 동시에 체 받는 “일원상의 수행”에 대하여 소개 하겠다.
먼저 나의 어머니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름은 숙타원 한 대숙이다. 청주 한씨로 3남3녀 6남매 가운데 첫째인 장녀로 1924년에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어 중앙여고보를 졸업 하고 전남 광주 사람인 아버지와 서울에서 혼인 하였다. 성격은 조용한 가운데 강단이 있었으며 6·25에 남편이 행방불명되니 삼남매를 데리고 고향인 광주로 피난하여 혼자서 키웠다. 말년에는 나와 함께 익산에서 살다 2014년 3월에 열반에 드셨다.
저의 어머니에 대한 설명을 대강 들으면 어머니에 대한 개념이 생긴다. 우리는 사물에 대한 성질을 하나하나 알면 개념이 형성되어 이해가 되듯이 어머니를 설명하는 사항들이 모여 어머니를 개념화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 자연의 진리에 대하여도 여러 개념을 하나하나 정리하면 이미지가 생긴다. 이때 어머니의 사진을 보면 조금 더 쉽게 다가와 처음 만나도 알아볼 수 있듯이 소태산 대종사께서 촬영한 진리의 사진인 일원상을 보고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물을 설명할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생각이 달라진다. 진리를 설명할 때 변함이 없는 유상이라는 관점과 변함이 있는 무상이라는 관점과 관점이 없는 직관이라고 하는 관점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원상 서원문”에는 세 가지 관점을 설정하고 있는데 ‘직관’과 ‘유상’과 ‘무상’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무량세계를 전개 하였다’고 하였다.
[정전]에 보면 “일원상의 진리”는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하였다.
앞의 세 가지 관점에서 진리에 관한 개념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 교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정리해 놓은 “교리도”에는 “일원은 법신불이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직관에 의한 개념이다. “일원상의 진리”에서 ‘없는 자리’는 일체 모두가 텅 비었다는 무라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무의 자리에서 유의 세계가 생겨나게 되는 데 이때 생겨나는 이치에 조물주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난다 하였고 이를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라고 하였으며 이와 같이 유와 무로 돌고 도는 변화를 ‘진공묘유의 조화’라고 하였다.
‘일원’은 소태산 대종사께서 깨친 후 붙인 진리의 이름이고 ‘일원상’은 그 깨친 진리를 사진 찍어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진리를 좀 더 쉽게 신앙하고 그 진리를 체 받아 수행하도록 하게하기 위하여 진리의 이름인 ‘일원’을 둥근 원으로 상징하고 이름을 ‘일원상’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제시하여 둥근 원으로 시각화 하였다. 그러므로 “일원의 진리”와 “일원상의 진리”는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일원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위하여 ‘일원상’앞에 ‘법신불’을 붙여 “법신불 일원상”이라 하였다. 곧 일원은 법신불이다.
[정전]에 보면 “일원상의 신앙”은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이니라.” 하였다.
원불교의 신앙은 일원상 신앙이다. 일원상의 신앙은 “일원상의 진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이 많으나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믿음이다. 믿음은 만사를 이루려할 때 마음을 정하는 힘이기 때문인데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목표와 행동과 결과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신앙은 사람의 정신생활에 근본이 되는 요건으로 정당한 믿음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일원상의 신앙”은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 진리를 믿어 복락을 구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을 대하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부인들에게 원만한 신앙과 사실적 신앙을 하게 하였다.
[정전]에 보면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 하였다.
원불교의 수행은 일원상 수행이다.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 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방법은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로·병·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이 없고 애욕과 탐착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 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원상의 수행”을 구체적으로 “삼학”을 설명 하고 있으나 [정전] “일원상의 수행”에서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양성하고 사용하자’고 한 마디로 정리 할 수 있다. 이는 서로 같은 내용을 수행과 활용이라는 입장에서 서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공부를 지성으로 하면 학식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총명 있고 없는 데에도 관계가 없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성불함을 얻는다.” 하였다.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하는 공부인으로서 반듯이 일원상을 집어 삼켜 내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일원상을 내 것 만들지 못하고 하는 마음공부는 빈 수레 소리만 요란하다.
오늘은 “일원상의 진리 신앙 수행”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지금까지 정신개벽의 노래 제4장 낙원가는 길을 소개 하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제5장 저절로 될 때까지에 속하는 “염불법”을 소개 하겠다. 오늘도 마음공부 잘 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