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6일 하늘언어교회
성경봉독: 누가복음 4장 17절-19절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설교: ‘무한치료’ 조영찬 전도사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장애인, 나병, 죽은 사람 등을 고치고 치료하고 살리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보통은 문제가 있는 개인들을 고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인화해서 해석하면 그 문제와 무관한 사람들 즉 장애도 없고 병도 없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이런 얘기들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는 남이사 눈을 뜨던 말던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 냉소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식의 해석은 약자인 당사자들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숱하게 치료 기적이 일어났는데 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반문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류의 설교를 접하면 은혜를 받기보다는 기분이 싸하게 가라앉을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너무 상투적인 해석은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적 설화들은 성경에서 아무 데나 마구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무에서 유를 나타나게 하신 것이 이적의 거대한 서막을 연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수백만의 유대인을 탈출시키신 일 또한 엄청난 이적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수백년간 이렇다 할 이적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남북 분열 후로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불세출의 초능력자들이 나타나서 여러가지 이적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이 떠난 뒤로는 다시 이적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남북왕국이 모두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고 나서 선지자마저 끊기고 수백년동안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출현해서 폭발적인 이적들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에서도 이적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처럼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임을 증명하는 표시로서 이적들이 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그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큰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활동하실 당시에도 이적을 행하신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에 수많은 장애인과 나병환자들이 창궐했는데 이적을 경험한 사람은 몇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전 세계로 확대한다면 그 퍼센티지는 훨씬 더 미미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 삼위 하나님 중 제2위이신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치고는 의외로 조촐하고 소박하기까지 한 이벤트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적 설화를 가지고 설교하면서 감동을 쥐어짜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쉽습니다. 그보다는 이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적이란 그 자체가 복음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봐라 하늘나라가 이렇게 가까이 왔다! 그러니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바로 이런 뜻으로 이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특정인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그 특정인으로 대표되는 인류 전체를 향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이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영적 시각장애인 상태에서 구출 받아서 새롭게 영적 눈을 뜨게 되는 것의 상징입니다. 나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영적인 나병에 걸린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메시지와 이적은 하나같이 보편타당한 진리로 선포되고 인류 전체를 위한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축소하고 개인화시켜서 실제로 기적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전부 은총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리는 심각한 해석의 오류가 만연해 있습니다.
제가 육체적으로는 두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무한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결핍의 무한성은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거나 만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무한치료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무한치료를 베푸셨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마다 문제의식의 정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이나 난치병자는 자기들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나 외식자들은 자기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고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사실은 무한한 문제가 있음에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어서 무한치료를 거부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분통을 터뜨리신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진리를 거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와 지적장애와 모든 질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줄 알고 교만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직 회개나 중생의 과정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구원의 확신부터 주입하는 것은 심리조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입니다.
무한치료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치료를 총동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고치신 것은 의학적 치료이고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심리적인 치료입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책망하고 분배적 정의를 명령하신 것은 사회치료를 하신 것이고 귀신을 물리치신 것은 영적 치료를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나 뿌리 깊어서 한두 가지 치료법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거대한 산입니다. 그리고 치료자들이 모두 불완전하기에 다양한 전문가들을 찾아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문제로 병원에 간다면 적어도 세 군데의 병원을 가 보는 것이 좋습니다. 치아 문제가 있다면 세군데 이상의 치과를 가 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심리치료도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교회도 세군데 이상을 가보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은 경제적 여력과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게 다양하게 치료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다양한 책과 유튜브와 교양강좌 등 다채로운 콘텐츠들을 통해 본인의 문제들을 다층적인 각도에서 접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한정되고 불완전한 치료들을 통해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진정으로 본질적인 무한치료는 오직 무한자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한 치료들을 받으면서 무한치료를 기다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들입니다.
공동체소식
1. 책 소개
경품에 당첨되신 분들중에 책을 선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책에 대해서는 제가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이왕이면 좋은 책을 찾아보려고 나름 애를 썼습니다. 너무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책이란 아무리 훌륭해도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무난해 보이는 책 3권을 선정해보았습니다.
1) 도서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저자: 마커스 J. 보그/김태현 옮김
2) 도서명: 손해의 낭만
저자명: 김창현
3) 도서명: 공감의 반경
저자: 장대익
이상의 서적들을 책을 선택하신 분들께 우송해드리겠습니다.
혹시 이미 소장하고 있거나 읽으신 책이 있을 시 카톡 주시면 다른 것으로 교체해드리겠습니다.
2. 윤금련성도님 여행일정
윤금련성도님께서 다음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백두산 여행을 다녀오시게 되었습니다.
여행코스는 백두산정상, 두만강나룻배, 압록강단교 등으로 잡혔다고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 되도록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3. 함께 읽기
저희같이 육체적 경제적인 많은 기회들을 하늘은행에 맡겨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낙을 주는 벗이 있다면 다름아닌 책입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책의 풍요로움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말 최중증의 시청각장애인들은 언어가 형성되지 못했기에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데이터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동영상과 미디어에 팔려서 책의 소중함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함께 읽을 만한 거리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속도와 모든 면에서 느리고 뒤처지는 언어의 약자들과 함께 읽기 위한 것들이니 이들의 외로움을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함께 읽기
추억의 만화 주제가 은하철도 999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외로웠던 것 중 하나가 만화책과 티브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렴풋이 볼 수 있었는데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안 되어서 만화영화를 보면 주제가, 그것도 가사의 일부 외에는 거의 알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목도 노래방으로 검색하기 전까지는 ‘은하철도부부부’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 세상에는 그런 불완전한 시력이나 청력조차 전무한 분들이 많고 그래서 노래말의 일부나마 들을 수 있는 것조차 감사해야 함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억의 만화 노래를 떠올리면 슬프면서도 감사한 심정으로 복잡한 상념에 젖게 됩니다.
2740 만화영화주제가 – 은하철도 999
작사 작곡 김관현, 노래 김국환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엔 햇빛이 쏟아지네
행복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
기차는 은하수 건너서 밝은 빛의 바다로
길없는 레일위에 햇빛이 부서지네
꿈을 쫓는 방랑자의 가슴에선 찬바람 일고
엄마 잃은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
추억의 명시 청포도
저는 고향에 대한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가 거의 없습니다. 뚜렷하게 보고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보였던 것은 한겨울의 함박눈과 바둑알의 흑백과 태극기의 문양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읽으면서 고향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재구성함으로서 정서적인 아쉬움을 달래보기도 하고 상상을 통해 자기치료를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청포도(이육사)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