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수봉의 노래는 사람의 감정을 휘 젖는 묘한 힘이 있다.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면 소공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소공자는 심수봉의 이와 같은 노래를 싫어 했는가 보다.
심수봉의 자서전에 의하면 소공자는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생활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수봉이 밤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막았다 한다.
‘니가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가 청승맞은 인생을 불러온다’ 것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현장에 있게 된 것도 그 이후 심수봉의 인생이 기구하게 펼쳐진 것도 다
심수봉이 부른 노래들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른바 끌어당김의 법칙을 소공자가 말한 것이다.
2.
심수봉의 30주년 기념 콘서트 기사가 실려있는 신문기사를 며칠 전 보았다.
사진속의 심수봉은 여유롭고 넉넉한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스님과의 교류를 통한 불교 신앙,그리고 소공자와의 만남,
정신병원 입원,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과의 만남,기독교신앙이 가져다 준 안정,
심수봉의 인생을 상상으로나마 더듬어 보았다.
3.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할 일이 없고 갈 때도 없어 책방순례를 다니던 이십 대 시절,
대형서점에 가면 종교서적 코너가 있었다.
나는 주로 불교서적 코너를 기웃거렸다.
불교서적코너라고 해서 불교서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교과 함께 증산도 같은 민족종교나 명상서적들이 구분 없이 진열되어 있기도 하였다.
옆에는 기독교서적 코너가 있었다.
각각의 코너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불교서적이나 명상 이런 코너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주로 나 처럼 약간은 칙칙해 보였다.
무언가 아직도 찾고 있는 자의 불안과 노곤함이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서적 코너의 사람들은 달랐다.
훨씬 밝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서적 코너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신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독교서적을 읽는다.
그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지고 안정된다,그리하여 주예수를 찬양하는 노래를 즐겁게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겉모습으로도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면 불교는 신앙을 가진 종교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답이 없는 가운데 스스로 찾아가 자신을 밝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불교이다.
그러니 오랜 방황을 동반하게 된다.
방황하는 자는 언제나 지치고 찌들린 모습을 갖게 된다.
나는 아직도 방황하는 자인가?
4.
어제 비 맞으며 산을 내려오다가 비에 젖어 산에 젖어 감상에 젖어 가수 배호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오늘 구성진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라는 노래를 찾아서 들었다.
그리고 떡볶기를 먹으며 심수봉의 노래를 듣고 있다.
심수봉의 노래를 들으면 소공자 생각이 난다.
소공자는 첫사랑처럼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마 어린 시절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소공자의 책은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었는지 모른다.
그의 책, 그의 모습,그의 음성들이 첫사랑처럼 가슴에 남아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들으면 생각나곤 한다.
휴일 모처럼 음악을 들으며 청승을 떨다.
첫댓글 기독교인이 행복하고 밝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고난과 문제를 든든한 하나님과 예수에 의지하여 놓아 버림으로써 얻는 상태이고, 불교도들도 부처님에게 그러하신 분들은 밝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의지처를 믿음으로 두느냐 마냐 차이일 뿐인 것 같습니다. 다만 기독교는 그러함을 최대한 강화시켜 최대화 시켰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발전이나 깊이가 없어지는 면도 있지요.
나를 믿고 살아도 밝고 안정적일 수 있어요. 저 봐요...ㅎㅎ
소공자님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분이지요. 그냥 그저 이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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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세계최고의 빽이 있다". ^^
심수봉 부인도 그런 종교적인 사연이 있었구나...
소공자는 누구지? 거리 이름 소공동은 아닌것 같고... 소공동에 사는자 ?
교회 댕기시는 분덜 생기가 돌더군여. 근데 끼리끼리가 심해요. 근래는 마녀사냥 따위는 좀 뜸합니다만, 형제자매 아님 베풀 생각이 없으시고, 창씨개명 유도할 목적의 베품이 아니라면 분명 선을 긋더군여.
믿음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타력에 의존하는 모습에 다름아니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지요. 확실히 유순해질 수 있어요. 세상에 자발적인 믿음이 가능할까요? 있다고 하신다면 그건 거래라고 정의하고 싶구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