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대동여지도(옛길을 찾는 문화탐방)◆ 小窓 차문성 ▶영남대로 옛길을 찾아 나서다.(영남중로;문경새재 길)
1.영남대로의 가치 조선에는 6개의 간선도로가 있다. 이 도로에 관한 상세는 백두대간에서 없어서는 안될 산경표의 저자 신경준 선생의 "도로고"에 나타나 있는데 첫째가 의주로요, 둘째가 경흥로, 셋째가 평해로 넷째가 동래로 다섯째가 제주로,여섯째가 강화로라 하였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에는 동래로를 "경상충청대로"라 하였다. 바로 이 길들을 오가면서 과거와 현재에도 길이 이어짐을 새삼 느끼었다. 돌무지.정자목,당집,장승,토후와 지금도 살아 있는 지명들을 보면서 전율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앞으로 지면을 통해 두고두고 41개의 옛 길을 말하고 싶다. [그림1:동여도] 먼저 옛길을 찾아야 하고 그 길에 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는 이 길을 통해 사람들의 교류가 생겼고 문화가 전해지고 물산이 왕래하고 전시에는 군사들의 이동로 로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옛길을 찾아내고 보전하는 것은 몇몇의 전문가의 일이 아니라 옛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이 영남대로를 오간 선각자는 당연히 옛 선인들일 것이며 특히 사행록등의 기록물을 기록,정리한 사람일것이다, 그러나 日人들이 20C초에 신작로를 내고 옛길을 허물어 경지정리를 한 이후에도 이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영남대로의 저가 최영준 선생과 영남대로 종주기를 쓴 일본인 도도로키씨의 노력이 뒤 따르고 있다. 내가 이 길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7년 조선통신사 일본답사를 하기전 천리안 문화유산답사동호회의 소모임 "얼아름"에서 국내의 사행길을 답사하자고 문경조사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바삐 다녔으나 성과없이 소일하느라 이제사 그 일을 다시 찾아 보게 되었다. 글이 거듭되므로 내용이 보완되겠지만 과연 이 길들이 어떻게 남아 있고 그 교통로에는 어떤 문화가 발생했는지 옛길을 통해 다시금 그 역사적 가치를 알아 보자.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은 과거 삼국시대부터 교류가 있어 왔다고 한다.
[그림2:탄금대] 신라의 8대 왕인 아달라 이사금이 계립령을 열었다는 것(AD 156)을 보면 사람들의 인적교류가 있어온길을 하나의 인적,물적 교통로로 개발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길은 고려때도 세미수송로로 죽령과 계립령이 이용되었고 조선때는 역참제의 확립으로 소위 영남과 호남의 교통로가 이 길을 통해 이용되었으며, 수로를 이용한 연결 역시 물류이동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기나가(소서행장)가 일본군을 이끌고 이곳 조령을 통과하기 위해 정탐을 하던중 새가 조선군이 세워둔 허수아비에 앉은 것을 보고 이곳에 매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령을 통과하여 일사천리로 한양으로 향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과 일본이 평화회담을 위해 오간 회답겸 쇄환사 일행이 이곳을 지난후 조선통신사의 12회에 이르는 사행이 이뤄지는 동안 260년간 이용을 하였고 (사실 통신사 이전의 조선초기의 신사 역할을 상고해 보면 그 기간은 훨씬 오래되었다) 일본의 사신 역시 이 길을 이용해 동래부에서 한양으로 이동을 하였다,
또한 이길은 봉수대와 역,참,원이 아울러 설치가 되어 대동지지나 대동여지도,세종실록 지리지 경국대전등 많은 사료가 있으므로 비록 근대화에 밀려 사라지긴 하였어도 이 길은 지금도 남아 있고 앞으로도 세대를 이어 문화의 발전 과정을 알려주는 옛길로서 ,과거 국토순례가 관에 의한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 옛길을 따라 ,아니 찾아서 나서는 길은 수천년동안 세대를 이어온 그 힘의 원류를 느낄수 있고 문화의 전파로로써 제2의 국토순례로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소중한 길로서 인식해 올바른 문화이해에 작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
2.영남대로란 무엇이며 어디를 말하는가.
[그림3:충주에서 멀지 않은 단호사]
영남대로란 말은 조선초기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영남대로란 용어는 타당한가. 영남이란 명칭은본래 계립령 ,조령의 남쪽 지방, 즉 상주,문경,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나 오늘날에는 경상남북도를 통틀어 널리 통용된다. 그러므로 영남대로란 "한양에서 영남 방면으로 가는 큰 길"이란 말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겠다. 따라서 최영준 교수가 제시한 바대로 영남의 의미는 조령의 남쪽이란 뜻이다.이런 의미에서 오늘 날 사용하고 있는 "영남"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못한 것 처럼 보일 수 도 있으나 한양에서 영남으로 간다는 의미로 볼 때 후기에 나타난 각종 읍지도의 영남대로란 표기는 "영남으로 가는 대로"라는 의미로 받아 드릴 수 있겠다. 한양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양에서 추풍령 거쳐 내려가는 우로가 있고 조령을 거쳐 내려가는 중로 , 죽령을 거쳐 내려가는 좌로가 있다. 여기에서 영조 24년 영의정 김재로가 제시한 조선통신사의 사행길에 대한 제안을 보면 " 통신사는 삼로로 나눠 본래 출발하게 하는 것이 구규인데 중간에 회동하여 연회를 베풀 때 애로로 인해 변통하여 한양에서 동래부로 출발할 때는 좌로로 가고 올때는 중로를 경유하여 오는 것으로 통문관지에 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사의 인원이 많은 관계로 역참의 어려움을 고려해 한양으로 올라 올때는 정사는 중로인 조령을 경유하고 부사는 좌로인 죽령을 거치고 종사관은 우로인 추풍령을 거치게 하소서"
[그림4:문경새재-과것길] 여기에서 영남으로 가는 대로는 하나가 아니라 3개의 삼대로가 있으므로 영남행 삼로를 영남대로라 하는 것 보다 "영남삼로"라 부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이 중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짧아 많은 사람들 , 특히 영남의 선비들이 이용하게 되어 이를 두고 대로 혹은 과것길이 부르게 되었다. 소위 대로라 불리우는 중로는 과거를 치르는 선비들이 많이 이용해 일명 "과것길"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으니 죽령을 이용하면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이용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그같은 별명이 붙어 지금도 소조령을 올라 조령 삼관문의 첫 관문인 조령관앞에 이르게 되면 "과것길"이란 팻말을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행정은 60리로, 부산포로부터 중로를 이용해 상경하면 한양까지 14일, 좌로로는 15일 수로로는 21일 걸린다. 제포(웅천)로부터 우로를 택하면 13일 중로는 14일 수로로의 북상은 19일이 걸리고 염포(울산)으로 부터는 15일이 걸려 한양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날씨와 연회 일정에 따라 사신이나 왜인의 상경에는 시일이 꼭 표준화된 것은 아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2년전과 3년전 1580년 89년 일본국왕사의 자격으로 온 한양땅까지 온현소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풍신수길의 답서를 가지고 한양까지 왔는데 그는 영남좌로를 이용하여 경주,영천,풍기를 거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풍우속에서 "천하의 險 죽령"을 넘어 황강역(제천 한수면)에 도착해 다음날 충주에 들어가게 된다. 현소일행은 지쳐 현재의 중원군 가금면에 있는 목계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만 의전상 곤란하다는 조선정부의 완강한 거부에 직면한다. 당시 수로로 이용되던 남한강은 사람들의 교통로라기 보다는 물산의 집산지로서 유명하다.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는 그 옛날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리고 있다. 지금은 남한강의 댐으로 인해 수량이 적어 그 예전의 화려한 모습과 집산창고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자리잡고 있고 "목계장터"란 표석하나가 목계의 언저리에 오가는 사람들에 옛기억을 더듬어 주고 있다. 화개장터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로 섬진강을 따라 경상도의 서부와 전라도의 동부지역의 물산 교류가 이뤄지던 곳이라면 이 곳 목계장터는 경상도의 상인과 충주평야의 집산물이 이곳에 모여 한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로서 한양은 개성,강화등지의 서부쪽에서 한양까지의 집산물은 京江을 통해서(강화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을 말함), 충주이남의 집산물은 목계에 모여 한양으로 옮겨진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지만 일본 국왕사인 현소는 한때 그곳은 물산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노구에 지친몸을 남한강을 이용하여 추스리려 했으나 조선정부의 왕강한 거부로 좌로를 이용하여 여주,양근,평구를 거쳐 한양의 동평관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하게 된다.
왜인상경로를 한번 더 예를 들어보자. 임진란이 끝난지 20여년이 지났을 때 왜인으로서는 조선이 근대에 막을 내릴때까지 한양까지 상경한 유일한 사람이 있는 데 그의 이름은 겐뽀 즉 현방이라는 대마도 외교승이였다.(조선과 일본의 공식문서 관장) 현방은 앞서 풍신수길의 답서를 가지고 한양에 온 현소의 제자였는데 그의 "방장로 조선상경일기"에 의하면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였고 또 신중하고 대담한 사람인 것 같다.
기록은 부산 출발전 4월5일부터 대마에 돌아온 6월17일까지 72일에 걸쳐있다. 4월6일 부산의 왜관으로부터 동래를 거쳐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문경을 거쳐 조령을 넘은 현방일행은 중로에서 좌로인 충주로 향하게 된다. 충주에서는 관찰사의 연회가 개최되고 여기서 부터는 목계의 남한강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소위 중로,좌로,수로를 함께 이용하게 된다. 당시일본 사신들은 정사는 주로 대마도의 외교승이 맡았는데 이는 경,시,서를 막론한 당대의 학문의 최고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약간 주제에 빗나가지만 현소의 한양행이 임진란때 일본군의 한양침범로로 이용되어 추후 다시는 이 길을 일본의 사신에게 허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양행을 허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방이 왜 한양상경을 국서를 지참하지도 않고 한양으로 상경코자 하였는지 알아보면 당시 조선의 북방에 후금이 날로 실력을 키우고 있어 조선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탐을 위한 목적 및 조선에 어려움이 있으면 우방으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막부의 요청을 조선정부에 전하지만 조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같은 지원은 임진란때 조선 북방의 야인들로 부터도 받는데 역시 거절한 바있다. 현방은 스스로 국왕사라 칭하였음에도 조선의 예조에서는 이를 인정을 하지 않아 정전에서 맨 땅에 알현하여 그의 자존심이 심히 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이유중 하나인 대마에 미지급분 목면 600동의 수령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에 받게 된 것을 보면 그의 대담함은 현소를 능가하는 것 같다.
부산에 가면 초량왜관이 있다.그러나 현방이 머물렀던 초량왜관은 지금의 왜관이 아니다.지금이 수정동 근방의 장소에 협소한 왜관이 있었던 것이다.(이진희 선생) 50년이 지나 현종때는 현재 부산에서 초량왜관이라는 지명이 있는 용두산에서 이전 부산시청이 있던 지역까지 확장 이전된다. 물론 이 왜관의 이전은 조선정부에서 상당히 고민을 한 결정이었으며 대마번에서는 목숨을 건 모험을 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산, 동래 지역의 옛길을 더듬으면서 다시 한번 짚어보자,
다시 현방의 귀로를 살펴보자. 남한강의 수로까지 배로 한양에서 이동하여 충주로 가고 육로로 문경,함창,상주를 거쳐 다시 낙동강의 수계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향했다.즉 한강과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이 귀로는 현방에게는 패배감을 안겨준 길이었다. 접위관인 선위사가 거추사로 바뀌었고 목면 미수분도 조선에서 기록에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기타 접대도 생각같이 쉽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대담함은 결국 조선정부로부터 목면 600동이라는 엄청난 양의 목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왜인상경로는 조선이 근세 외세에 무력으로 굴복할 때까지 다시는 허락되지 않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3.조령고개로의 출발
1) 충주로 향하는 길 일산에서 서울 외곽순환도로가 김포대교로 연결되어 과거 88이나 강변북로를 타고 고속도로를 진입하던 것이 이젠 옛말이 되어 버렸다. 길은 항상 새로운 것이 과거의 길을 대체하기 마련이다. 그래샴의 법칙처럼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은 적어도 길에 관해서는 맞지 않는다. 이번 일정은 문경새재를 넘는 일이다. 문경새재를 넘되 가능한 옛길을 따라 그 길의 흔적과 역참, 원 ,주막등의 기록을 보고 찾아갈 계획이다. 물론 이 길은 영남대로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나 일단 대표적인 영남대로로 이야기를 풀려한다. 앞서 예시한 바대로 문경새재는 근세 신작로가 이화령으로 나기 전 무려 천년 이상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오갔던 곳이다.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의 3년에 "三年, 夏四月, 隕霜. 開< 立嶺>路."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니 충주에서 영남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역사는 천년을 훨씬 넘어 2천년의 역사에 이르런다,
김포대교를 지나 부평을 통과하는데 빗발이 점점 굵어져 경부고속도로 진입때는 거의 차들이 비상등을 켠채 조심스레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차는 영동고속도로의 이천을 지나 이천IC쪽으로 빠져 나가 장호원을 향한다.장호원에는 남한강의 지류가 흐르는데 이곳에도 예전에는 원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장호원이다. 이태원, 漢江渡와 양재 (말죽거리), 판교,용인,양지,죽산까지의 옛길의 문화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은 장호원에서 생극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3번 국도를 타고 주덕,대소원을 거쳐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생극, 진천방향의 국도확장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대소원은 주덕으로 충북선이 나므로서 한때 조선때 관리나 민간인의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지만 현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모해 버렸다. 국도변의 나무들은 가로수로 심겨진 지 오래여서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위안이 된다.
잠시 역과 참,원,마방등의 용어의 차이를 보자. 역은 조선에서 41개의 역도를 나누어 지역을 다스리는 현감과 대등한 외관 군사직인 종6품의 찰방을 파견한 곳이다. 대역과 중역,소역으로 나뉘는데 대역은 찰방,중역은 역승이 다스린다. 현과 차이가 있는 것은 읍성을 만들지 않고 홍살문 하나로 그 역시설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 차이다. 더구나 이곳은 국가의 시설물이며 소위 암행어사가 마패로 말을 교환하는 곳이 이곳이고 국가의 관원이 공적인 일로 말을 교환할 때도 역시 역을 이용한다. 역에는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30리마다 역과 참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참은 임진란 이후에 봉수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파발을 만들면서 참을 만들었는데 역의 보완시설로서 이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30리마다 역과 참을 설치하였다. "한참 가야 한다"는 말은 1참인 30리를 의미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院은 조선후기에는 주로 민간숙박시설로서 사용되었지만 조선초기까지는 고려에서 사용하던 사찰의 숙박시설을 흡수하여 국가에서 관리하였지만 후미진곳에 주로 있은 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게 되고 주도로에 인접한 원만 살아 남아 민간시설로 이용되었다.
점이나 각,주막 등도 원이나 역참의 보조 시설로서 민간인들이나 낮은 관직의 사람들이 이용하였는데 현재의 판교점이나 판문점과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마방은 이러한 원,점,각등의 부수적 시설인 것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 이야기의 흐름에 이해가 쉬울것이다.
이곳을 가다보면 신덕저수지를 만나는데 이곳은 과거 대동지지에 표기된 숭선마을이 수장된 곳이다. 숭선마을에는 숭선참이 있었는데 이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말을 갈아 타는 파발참이 있었다. 화개산으로 연결된 얕은 연봉들을 따라 길을 가다보면 용원에 이내 도착하게 된다.용원 신니면사무소 근처에는 오랜 나무들이 있는데 바로 이 근방이 과거 용안역이 있던 곳이라 한다. 이곳의 古老들께나 경찰에 물어 보아도 과거 용안역의 자취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불과 100년만에 과거 조선의 교통체계가 기억에 조차 사라져 버리고 있는것이다, 도도로키씨의 조사에 의하면 화개산 아래에 길이 있었고 현재의 국도는 신작로라는 것이다, 나 역시 조사를 통해 보니 길은 산자락을 따라서 나 있었고 산허리를 오가게 될 때는 일부를 잘라 鞍部를 만든 곳도 여러곳 보게 된바 있다. 이곳에서 부터는 충주평야가 펼쳐진다.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여주에서 충주로 들어오는 길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안,가흥을 거쳐 충주에 들어오는 좌로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지나온 길처럼 용원,주덕,충주로 오는 영남중로(일반적으로 영남대로 임) 길이다,
충주로 들어가기위해서는 달래강을 건너야 한다, 넓다란 충주평야는 과거부터 물산의 집산지로서 풍요로운 장소로서 충청도의 대표적인 목으로 이름나 있다.
일본의 외교승 현방은 다음과 같이 충주를 술회하였다. "충주의 숙소는 매우 넓었다,장로의 방밖에는 정자가 있고 ,그 앞에 연못에는 가운데 섬이 만들어져 있고 버드나무와 여러 가지 꽃이 아름답게 심어져 있다, 이곳은 관찰사가 있는곳이어서 만사가 번창했다. 18일에는 관찰사에 의한 연회가 열렸다"
또한 임진란전 일본의 신사가 오갈 때는 반드시 충주를 다녀갔다. 앞서 말한 바대로 충주에서는 관찰사가 개최하는 화려한 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행록에 충주가 빠지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그러나 숙종,영조때 조선통신사(이 글에서 조선통신사라는 것은 조선의 통신사란 의미에서 사용함. 정식명칭은 을미통신사,임술통신사,신묘통신사등이 타당하다, 그러나 출발한 해와 일본으로 건너간 해가 틀린 경우도 있다. 가는 도중 한해가 넘어 간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단순히 "조선의 통신사"란 의미로 사용하니 이해를 바란다,)의 일본 사행에서 충주,안동,경주의 향연은 停減하게 되었고,단지 동래부에서의 향연만 설연하게 되었다.이는 흉년으로 인해 경비절감 차원에서 시행하게 되었지만 사행이 거듭되어 전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전에 이 길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충주목에 들어갔을 것이다. 장터에 들러 여행길의 물건도 사고 지친몸을 이곳에서 며칠간 추스렸을것이다.
충주시에 진입해 3번 국도를 따라가면 성내동의 학생회관이 나오는데 그 뒤가 충주목이 있던 곳이다,충주목 아문 앞에는 오랜 수령의 은행나무가 보호되고 있다, 문무인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석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충주목에 들어가보니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것이 바로 동헌이다, 청령헌 ... 정면7칸,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서 관사로서의 품위는 괴목 기둥과 회,돌의 절묘한 조화가 어울려 조선지방관아의 풍모를 엿볼수 있는 건물이다. 귀한 괴목으로 기둥을 세워 아름다운 무늬가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것을 보면 역시 물산의 중심지, 교통의 요로로서 ,또한 수많은 외교사절들을 접대한 곳으로서의 옛 풍모의 일면이라도 볼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림5:충주목 청령헌]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6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풍채는 보물급 못지 않은 자태를 가지고 있다.아쉬운 점은 건물 좌측의 회를 덧칠해야 할 부분을 시멘트로 치장해 건물의 품격을 손상케 한 것이 못내 아쉽다. 더구나 덧칠을 한 부분이 벌어져 손에 작은 힘이라도 가하면 곧 부스러 진다, 고종6년 1869년 이곳 충주목은 꽃담으로 개축하여 예성이라 불리었는데 둘레가 1.2KM에 이르렀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드니 세월이 무심하기만 하다. 시,도 지정문화재의 보수, 수리에도 정해진 원칙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의 현주소를 알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일반인들은 조선의 건축을 이야기하자면 제일 먼저 경복궁의 근정전이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말하긴 하지만 실상 미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그렇지 않다. 권위적인 건축의 모습을 중히 여긴다면 경복궁의 근정전을 따라 갈 수 없지만 섬세한 면이나 단정한 모습을 중히 여긴다면 수원 화성의 화령전이 제일이 아닌가 한다. 수원시에 있는 화성행궁 옆의 신풍국민학교는 원래 화성객사가 있었던 곳이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령전이 있다, 현판 이름은 "운한각"...
순조2년에 부친의 영정을 모시고자 화령전을 건립하고 실내에는 정조의 큰 영정은 걸어두고 작은 영정은 궤짝에 두어 보관하였다. 계단을 올라 월대에 오르면 마치 길다랗게 나열된 열주와 어두운 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비례감이 주춧돌 하나의 섬세함과 어울려 공간적 공허함이 단조로운 미의 극치를 자아내게 한다. 비라도 올테면, 눈이라도 내릴때면 그곳의 세상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다. 이런 화령전에 두 번을 다른 친구와 간적이 있었는데 모두들 감탄을 자아 내었다. 그것은 정조시대의 문화의 "마지막 거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곳으로 빠졌지만 충주를 빠져나와 건국대 충주캠퍼스를 가는 길로 향하면 충렬사가 나오고 몇미터만 더 가면 단호사가 나오는데 이곳이 예전에 단월역이 있었던 곳이라고 도도로키씨는 말한다. 대동여지도상와 청구도를 살펴보니 현 단호사 근방이 맞는 듯 한데 충주시에서 복원한 단월역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앞으로 영남대로가 더 연구되어 검증되길 바랄 뿐이다.
단호사는 아주작은 절로서 보물로 지정된 철불좌상과 삼층석탑이 초라하게 있는데 지금은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나무가 담위로 울창하게 뻗어 있는 단호사에 내리자마자 세찬비가 줄기차게 내리기 시작하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단호사에 들어갔다. 절의 내력을 알기위해 주지스님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중이라 법당 처마 밑에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다. 조선초기에 심었다는 적송이 옆으로 드러누워 와송이 되었는데 그 사이로 고려 시대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지붕석의 경사가 가파르며 비례는 비교적 좋은 편이나 상륜부가 없다.적송과 어울려 친구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호사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강원도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 자식이 없었는데 이곳 단호사에 불공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있다는 말을 듣고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던 중 적적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꿈에 그 소나무 심은 자리가 법당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후 태기가 있었는데 그 소문으로 인해 지금도 이곳은 애기가 없는 사람들이 불공을 드린다고한다. 절의 입구에 석불이 모셔져 있고 그 아래 작은 애기부처가 놓여져 있는데 모두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2)임경업장군 묘를 찾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단호사에서 나와 조금 가다보니 임경업 장군 묘소 3.5KM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길은 곧 사람들의 역사다. 바로 이러한 길이 가치를 깨닫고자 대동여지도 하나 들고 길을 나서게 된 것 아닌가., 임경업장군 묘를 찾아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을 들어 갔는데 중간에 안내판이 없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길을 배회하는 사람조차 없는 터라 포기하고 마을을 빠져 나가 3번 국도에 합류하려 하려 내려가는데 임장군의 묘소 안내판이 나왔다. 겨우 차한대가 올라갈만한 하늘로 따라난 길을 올라 갔다. 비오는 오전이라 적막한 산중은 안개로 덮였다. 깜박이를 깜박이며 겨우 차한대 들어갈만한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간 후에야 차 몇대 주차할 공간을 발견하였다.이곳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이었다,우측에 임경업장군 묘역 정화 기념비가 임씨 대종회에서 한켠에 세워 두었고 안개가 자욱한 숲속 질퍽한 길속에 발은 점점 깊숙히 빠져 들었다.
20여미터 가니 길이 양갈래로 나오는데 나는 우측으로 올라갔다. 우측에는 묘 2기가 병렬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묘비를 보니 임 아무개 영중추부사로 적혀 있었지만 분명히 임경업장군은 아니었다. 다시 양갈래 길로 돌아가 아랫길로 가니 나지막한 계단이 위로 뻗어져 있었다. 이윽고 임장군의 묘역에 이르러 보니 묘비와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돌로 개축되어져 있었다,. 문인석은 자그마한 반면 무인석은 아주 크게 근대화된 조각으로 되어 있어 묘소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임장군에 대한 예우는 갖춘 것은 같다.
세상과 정녕 인연을 이을수 없는 달천 근방의 깊은 산중에 모셔진 임장군의 묘앞에서 잠시 예를 갖춰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생을 마친분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림6:임경업 장군 묘역] 충민공 임경업장군은 선조27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나 27세에 무관의 길을 걷게 되고 ,호란을 맞아 의주부윤으로 재직하면서 명과 내통하여 청을 치려다 발각되어 중으로 변장하여 연평도를 거쳐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명의 국력은 이미 기울어 다시 청에 잡히게 되었으나 청태종은 경업의 인물됨을 알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원수의 나라를 위해 머리를 깍을수 없다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심기원이 역모를 꾀했는데 임장군과 도모했다하여 조선에서는 청에 임장군의 압송을 요청하게된다. 조선에 잡혀온 임장군은 갖은 고초 끝에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된다.
인조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임장군이 역모를 심기원과 함께 도모하지 않은 사실을 조리있게 대신들에 설명도 한다. 그런데도 김자점을 비롯한 간신배들의 계속된 상황설명에 한편으로 의심도 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인조는 경업의 죄를 감하려 하였으나 , 승지 이시해는 "경업이 이미 죽었읍니다"라고 보고한다.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그리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만 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실록 인조 24년)
함석헌 선생은 그러신다. "충무는 죽어서 殉死요,제 손으로 한 자결이지만, 임장군은 역적의 이름으로 맞아 죽었다.나라가 용납하지 못한 것은 같다.....(중략).....저때에는 환란중에도 의병이 있고 ,자랑이 있을수 있으나 이번은 다만 부끄럼이 있을 뿐이다."
충무는 때를 만나 조국을 왜란에서 구했고 충민은 호란의 원통함을 흑룡강 물줄기에 씻으려 하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일신 죽음으로서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원통하고 애석해 하지는 말자. 숙종때 그의 손자 임중번이 그의 무죄함을 상소하자 숙종은 다시 그의 문초를 한 일기를 들춰본다. 숙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천하에 뜻을 펴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 정의를 유지시키려고 하였던 것인데 (중략) 그런데 명령을 벗어나 도망하여 자중함이 없어서 성심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온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인신이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어야 하는 절개로 논한다면 망명한 죄는 면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성상께서 임장군이 죽은 뒤에 애석하다,애석하다 하며 정녕, 죽었으냐고 하문하신 것을 보면..."
위의 이유로 숙종 32년 임장군의 신원이 복원된다. 앞서 숙종의 말에서 임장군의 망명을할 수 밖에 없었던 뜻과 충무공의 자결설이 좀은 이해되는 듯하다. 아마 인조와 숙종은 이러한 임장군의 뜻을 분명 읽었을 것이다.
3)드디어 소조령을 넘다. 소조령을 넘기전에 먼저 들러야 할곳이 대안보이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안보리 대안보마을은 조선시대 安富驛이 있던 곳이다. 처음에 이곳에 들렀을때는 대안보를 찾지 못하고 소조령을 넘었다. 두 번째 이곳에 왔을때도 찾지 못하고 헤멨는데, 소조령을 올라가기전 597번 도로로 옛 계립령인 하늘재 가는 길, 즉 우측으로 빠졌더니 약 500미터 정도 갔을까... 대안보 마을이 나왔다, 대안보 마을로 진입하자마자 다섯기의 공덕비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 있어서 예스러움이란 불과 이것과 옛길이 일부 남아 있다는 것 외는 없다. 길가는 노로께 이곳에 대해 몇가지 물어 봤다. 아직도 옛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내 나이 80인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마을에 95된 노인께서 있긴 하지만...원래 예길은 38번 도로를 따라 올라 가지 않고 이 마을 중간에 흙길이 일부 있지요...이곳을 통해 올라 갔는데 작년에 시멘트를 다시 깔아 거의 없어졌지요..근데 그 밑에 길은 그대로있을꺼야...그위에 그냥 시멘트를 올렸기 땜시..."
"길은 어느정도 넓었나요" "상당히 넓었지. 차 한 대가 지나가고 남을 정도 니까...그리고 그 밑에는 돌이 깔려 있었어요,,,큰돌들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시멘트를 올렸지... 몇해전에 교수들이 와서 이런 것을 물어 봤는디... 그런거 연구하는 사람인가봐..." "예 그렇읍니다...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상세히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돌들이 산위인 조령고개까지 깔려 있었나요" "그렇지요...조령고개 길에도 깔려 있었지요... 그래서 가마도 올라가고 말도 올라갔지요" "그럼 597번 도로로 빠지는 미륵리로 올라가는 지릅재 길은 얼마나 이용을 했나요" "그 길은 소로지..이곳은 대로길이고 ,,,이용을 하긴 했는데 그다지 이용을 안했어" "그럼 수안보는 언제 개발을 했었나요" "아 여기는 대안보고 지금 수안보 자리는 원래 이름이 소안보였어...이곳에 집이 나 어릴때만 해도 백호가 훨씬 넘었어 ...근데 소안보 자리는 집들이 뒤엄뒤엄 있어 소안보라 했지... 옛길도 이 마을을 지나서 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원래 수안보에는 온천이 있었는데 일제때 일본애들이 철파이프를 만들어 개발했는데 오래 되니까 ...녹물이 나와서 박사들이 물길을 새로 놓고 해서 오늘날 수안보가 된거지"』
영남일보사에서 취재한 "영남대로길을 따라서"에 의하면 영남대로 상의 큰길은 10M, 중간길은 5-6M,작은 길은 3M에 이른다는 데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약 5M정도의 중간길에 속하는 것 같다. 세월에 흐름에 더 좁아진 옛길을 촬영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손을 흔들며 조심해 댕기오라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마을 한쪽의 언덕에서 옛길이 내려와 마을을 통과해 지금의 길과는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곳으로 올라가면 조령고개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한다. 마을 길은 개울로인해 떨어진다. 떨어진 그 길은 마을내에서 다시 연결되어 소조령을 올라간다. [그림7:조령고개] 소조령으로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산행을 점검하는데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고 장이 서게 된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곳 대안보의 장이 예전에는 쾌 성행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은 38번 도로에서 벗어나 지릅재 올라가는 작은 마을에 불과한 대안보를 떠나 이제 소조령을 올라간다.
소조령길은 지금은 이화령과 연결되어 있다. 몇해전만 해도 이화령 고갯길을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이제 사라지고 이화령 터널이 뚫려 문경 가는 길이 "구부야 고갯길"이란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소조령을 올라 고사리로 빠져 들어가면 고사리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는 대동여지도에도 고사리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주막거리로 불리웠다 한다.이 고사리마을에는 예전에는 新惠阮이란 원이 있었고 예전에는 백여호에 이르는 집들이 있었는데 "봇짐진 보부상들이나 과거길로의 역할"이 줄어든 지금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주말에는 이곳을 거쳐 지나가는 등산객들로 붐빌 뿐이다.
1978년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조성되면서 지금의 고사리는 과거의 사람들은 거의 없고 타지사람들이 옛이름을 빌려 마방가든이나 하는 그런 마을로 변모되었다. 이곳에는 마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안부역에서 고사리까지는 약 10리 길인데 이 영남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많은 숙박시설인 원이나 역의 부속시설인 마방이 있었다는 장소와 만나게 된다. 마방은 지금은 있다 하더라도 현재는 과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두 개조되어 있다.
역참은 보통 30리 마다 있지만 마방은 원이나 주막이 있는 근처에 있기도 하다. 주로 말이 쉬어가고 먹이를 주는 그러한 장소로 이해한다면 이 길에 마방이 왜 많은 지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조령관으로 올라가는 옛길이 이어진다.
약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옛 오솔길을 보존합시다" 및 "과것길"이란 팻말이 나온다. 조령관문이 있는 곳에 조금 못 미쳐 문경새재 입간판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경상북도 문경땅이다. 이곳에서 표를 사고 조령관문을 통과하면 훤히 세상이 터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서 20년간 안내를 했다는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화령길은 문경과 수안보를 잇는 주도로이고 이 문경새재길은 관문공사를 한후 3-4년 정도 이용한 보조도로로 이용되었는데 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시찰한 후 당장 보존 조치토록 했다고 한다. 그 덕택에 잘 닦여진 이 길은 흙길로 이후부터 보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많이 가진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는 경주 고분 발굴에서 잘 나타난다. 오늘날 경주란 작품은 박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의 일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그림8:조령관] 이곳 조령관에 이르면 충북과 문경이 함께 있는 곳인데 문경새재라 하는 지 이해가 된다.이곳 조령의 상당부가 문경에 속하고 삼관문이 문경땅에 속해 문경새재라 하는 것이다. 이 새재길을 넘으면 비로소 문경(聞慶)...즉 경상도의 말을 듣게 된다하여 문경이라 한다..
예를 한가지 더 든다면 고사리 방향이 인본주의적 길이라면 문경쪽은 자연주의적 길로 조성했다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문경에서 올라오는길에는 전신주가 땅밑에 매설되어 있고 고사리 방향은 전신주가 눈에 띄는 점에서 그렇고 ,가게집들이 고사리에서는 길가에 있지만 문경으로 내려가다 보면 가게는 후미진 곳에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특징이랄수 있다.
조령제 1관문은 원래 숙종34년에 열었다고 한다. 후에 잔해만 남은 것을 1974~77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었는데 관문을 쌓은 돌들의 색이 붉은 색이 들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곳 돌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영주돌을 사용했다 한다. 이십여년이 흘러 돌에 세월의 이끼가 끼었음직한데도 아직도 붉은 색 돌들은 눈에 거슬린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한양쪽이 아니라 문경에서 문을 여닫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나중에 실록을 찾아 보니 ,이 관문을 축조할때는 청에 대한 대비책을 논하고 있었고 병사역시 문경쪽에서 파견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도 동화원이 만들어져 지나는 길손에 숙식을 제공했다 한다. 조령제일 관문을 통과해 마사토로 깔린 새재길을 조금 가다보면 "옛 과거길"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이 문경새재길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옛길이다. 이 길은 바닥에 돌이 깔려 있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지금은 돌이 땅에서 패여 이리 저리 뒹굴지만 예전에는 정연하게 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수백명의 통신사 행렬과 보부상,영남의 선비와 세곡미와 진상품들이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이곳 새재 길을 오르내린 역사적인 흔적인 것이다.
어느 나라에 이같은 자연적인 ...아니 인위적으로 자연적인 길을 만들었단 말인가. 있다손 치더라도 보존된 길이 얼마나 있는가. 비록 지금은 부서지고 황폐한 그 길이 예전에 우리 역사에서 수백년간 보수,수리한 그 길이 아직 우리 눈앞에 남아 이 길을 걷는다는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길을 보고 조선이 형편없다 말하지 말자. 왜냐면 지금도 홍수한번 나 무너진 도로에 수십년이 흐른다면 그 원래모습을 알수 있을까... 하물며 100여년 버려진 땅이다.잊혀진 땅인들 오죽하랴... 그 길을 지금 옛길로 생각하여 걷는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림9:조곡관]
마사토로 곱게 깔린 길 영남 제2관문 조곡관으로 가는 길은 숲이 우거지고 경사가 완만한 쉬운 길이다. 예전에 이러한 길을 찾고 닦았다는 것은 경험에서 발로되었을 것이다. 한참을 가다보면 조곡관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문경읍 상초리이다. 현재 조곡관은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1708년 조령관문을 쌓을 때 이전에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처음에는 조동문이라 했던 것을 조곡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현재의 것은 복원하여 지정한 것이다.
영남 2관문을 통과해 내려오면 많은 돌무지와 경북 문화재 자료로지정된 "산불됴심비"와 용추를 지나게 된다.오가는 사람들의 염원은 시대를 막론하고 돌하나에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龍湫는 임진란후 마지막으로 서울을 상경한 현방 일행이 문경새재길을 올라가면서 바로 이곳 용추를 구경하게 된다."용추를 구경했는데 이곳은 용이 살았다는 곳이다".사실 현방일행이 이곳을 통과할 때는 현재처럼 용추라는 글이 새겨져 있지는않았을 것이다.기유년에 새긴 구지정이란 사람은 숙종조때 사람으로서 현감의 벼슬을 했는데 조정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는 못한 것 같으나 힘찬 글속에 그가 펴지 못한 기개를 보는 것 같다. 용추의 옛길은 바로 아래 바위돌 위에 보면 인위적으로 패여진 곳이 있다.과거 옛길은 이 바윗길로 오갔던 모양이다.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곳이 나와 있다는 데 동화원에서 1리되는 곳에 있다 한다.
내려가다 보면 주막이 하나 복원되어 있다. 금새 사람이 좆아와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들고 가라고 할 것 같다.사실 이곳이 1관문을 통과한 초입이고 보면 녹차한잔이나 찬물 한잔이라도 마시고 가는 살아 있는 주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주영씨의 객주도 이런곳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조령원이 나온다. 이 조령원은 2관문과 3관문 사이의 동화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쉼터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KBS 기획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중 궁예가 세달사에서 나와 백성으로부터 장군으로 추대되어 이용한 산채의 셋트장으로 활용중이다. 사람들은 이곳 조령원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드라마 왕건의 셋트장에 관심이 있다.
이제 조금만 더가면 셋트장 궁예궁이 나오고 제 1관문을 만나게된다. 궁예궁의 겉보기는 장대해 보였는데 실제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실상은 형편없었다.드라마 촬영장이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만들어야 할 터인데 드라마의 장면을 확인하는 의미외는 전혀 볼것이 없었다. 문화로서의 가치를 빼고 건물로서의 가치 등 .전혀 의미를 부여할 만 하지 않았다.
이제 제 1관문을 만난다.,
[그림10:주흘관] 주흘관,,,사실 3관문중 제대로 본래의 모습을 가진것이라곤 1관문 밖에 없다 .힘찬 관문의 모습이 왕건셋트장을 본 사람들은 "역시 옛날 사람들이 기술이 좋아" 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다. 문경시에서 제작한 타임갭술이 관문안에 있고 관문 위로올라가면 우측 끝에 성황당이 있다.성황당에는 여신을 모시고있는데 18c에 건립한 유서깊은 성황당이다. 이 성황당에는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의 일화가 전해 지는데 젊은 시절 최명길이 새재길을 넘을 때 여신이 최명길과 함께 넘어면서 장차 나라에 환란이 닥칠 때 나라를 구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데...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해 많은 선비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최명길은 삼학사 못지 않은 충성심과 합리적인 의지의 사람인 것 같다. 청에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여인들을 두고 당시 조선의 남정네들은 새로이 장가들려 했지만 최명길은 극렬히 반대했는데,,, 임진란때 역시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그들이 쇄환되기전에 새로 장가든 사람의 처는 첩으로 분류했다는 예를 들면서 본처의 속환이 속히 이루지도록 항변을 한 것을 보면 최명길은 합리적인 사람인 것 같다. 삼학사가 구국정신으로 후세에 본을 받아 마땅하지만 당시 화친을 청한 사람들은 그만큼 정세를 보는 예리한 눈이 있지 않았을까...인조 역시 삼학사의 충절을 논하면서 예리한 주변 정세를 보는 눈이 부족함을 얘기한다.
문경초입의 길은 번잡하다. 이화령 터널을 통과해 다시 고사리로 오는데 는 22,000원을 요구한다. 넘어오면서 일본에 조령고개와 비견되는 일본 에도막부 최대의 관문인 돌 다다미길 "하코네 고개"를 떠올렸다. 그날 역시 비가 왔는데 한 젊은 청년이 고베에서 자전거를 타고 넘어 왔다고 한다.뜨거운 유황온천에 목욕을 한후 한잔의 와인을 하면서 일본의 젊은이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젊은이와 일행은 이 하코네 고갯길은 조선통신사가 일본 막부의 초대로 500여명의 사절을 데리고 수많은 번의 병력들로 호위되어 이 고갯길을 올라 에도에 입성했다는 얘기에 처음 듣는다고 하면서 놀라던 기억이 새삼 떠올려 진다.
전나무숲과 뜨거운 온천물, 동해도를 통과한 번주와 조선통신사가 올랐던 하코네 고개의 옛길 돌다다미, 이끼낀 하코네 자료관과 주막에서 아마자께 한잔에 긴여정의 시름을 푼 시간이 소중했던 만큼 이곳 문경새재길도 우리의 옛길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인구에 회자되고 보존되는 길로 남길 바라면서... 다음에는 남은 40여개의 조선역도와 죽령고개를 넘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신 대동여지도(옛길을 찾는 문화탐방)◆ 小窓 차문성 ▶영남대로 옛길을 찾아 나서다.(영남중로;문경새재 길)
1.영남대로의 가치 조선에는 6개의 간선도로가 있다. 이 도로에 관한 상세는 백두대간에서 없어서는 안될 산경표의 저자 신경준 선생의 "도로고"에 나타나 있는데 첫째가 의주로요, 둘째가 경흥로, 셋째가 평해로 넷째가 동래로 다섯째가 제주로,여섯째가 강화로라 하였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에는 동래로를 "경상충청대로"라 하였다. 바로 이 길들을 오가면서 과거와 현재에도 길이 이어짐을 새삼 느끼었다. 돌무지.정자목,당집,장승,토후와 지금도 살아 있는 지명들을 보면서 전율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앞으로 지면을 통해 두고두고 41개의 옛 길을 말하고 싶다. [그림1:동여도] 먼저 옛길을 찾아야 하고 그 길에 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해야 하는 이유는 이 길을 통해 사람들의 교류가 생겼고 문화가 전해지고 물산이 왕래하고 전시에는 군사들의 이동로 로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옛길을 찾아내고 보전하는 것은 몇몇의 전문가의 일이 아니라 옛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이 영남대로를 오간 선각자는 당연히 옛 선인들일 것이며 특히 사행록등의 기록물을 기록,정리한 사람일것이다, 그러나 日人들이 20C초에 신작로를 내고 옛길을 허물어 경지정리를 한 이후에도 이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영남대로의 저가 최영준 선생과 영남대로 종주기를 쓴 일본인 도도로키씨의 노력이 뒤 따르고 있다. 내가 이 길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7년 조선통신사 일본답사를 하기전 천리안 문화유산답사동호회의 소모임 "얼아름"에서 국내의 사행길을 답사하자고 문경조사를 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저런 일로 바삐 다녔으나 성과없이 소일하느라 이제사 그 일을 다시 찾아 보게 되었다. 글이 거듭되므로 내용이 보완되겠지만 과연 이 길들이 어떻게 남아 있고 그 교통로에는 어떤 문화가 발생했는지 옛길을 통해 다시금 그 역사적 가치를 알아 보자.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은 과거 삼국시대부터 교류가 있어 왔다고 한다.
[그림2:탄금대] 신라의 8대 왕인 아달라 이사금이 계립령을 열었다는 것(AD 156)을 보면 사람들의 인적교류가 있어온길을 하나의 인적,물적 교통로로 개발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길은 고려때도 세미수송로로 죽령과 계립령이 이용되었고 조선때는 역참제의 확립으로 소위 영남과 호남의 교통로가 이 길을 통해 이용되었으며, 수로를 이용한 연결 역시 물류이동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기나가(소서행장)가 일본군을 이끌고 이곳 조령을 통과하기 위해 정탐을 하던중 새가 조선군이 세워둔 허수아비에 앉은 것을 보고 이곳에 매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령을 통과하여 일사천리로 한양으로 향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과 일본이 평화회담을 위해 오간 회답겸 쇄환사 일행이 이곳을 지난후 조선통신사의 12회에 이르는 사행이 이뤄지는 동안 260년간 이용을 하였고 (사실 통신사 이전의 조선초기의 신사 역할을 상고해 보면 그 기간은 훨씬 오래되었다) 일본의 사신 역시 이 길을 이용해 동래부에서 한양으로 이동을 하였다,
또한 이길은 봉수대와 역,참,원이 아울러 설치가 되어 대동지지나 대동여지도,세종실록 지리지 경국대전등 많은 사료가 있으므로 비록 근대화에 밀려 사라지긴 하였어도 이 길은 지금도 남아 있고 앞으로도 세대를 이어 문화의 발전 과정을 알려주는 옛길로서 ,과거 국토순례가 관에 의한 주도로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 옛길을 따라 ,아니 찾아서 나서는 길은 수천년동안 세대를 이어온 그 힘의 원류를 느낄수 있고 문화의 전파로로써 제2의 국토순례로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소중한 길로서 인식해 올바른 문화이해에 작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
2.영남대로란 무엇이며 어디를 말하는가.
[그림3:충주에서 멀지 않은 단호사]
영남대로란 말은 조선초기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영남대로란 용어는 타당한가. 영남이란 명칭은본래 계립령 ,조령의 남쪽 지방, 즉 상주,문경,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나 오늘날에는 경상남북도를 통틀어 널리 통용된다. 그러므로 영남대로란 "한양에서 영남 방면으로 가는 큰 길"이란 말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겠다. 따라서 최영준 교수가 제시한 바대로 영남의 의미는 조령의 남쪽이란 뜻이다.이런 의미에서 오늘 날 사용하고 있는 "영남"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못한 것 처럼 보일 수 도 있으나 한양에서 영남으로 간다는 의미로 볼 때 후기에 나타난 각종 읍지도의 영남대로란 표기는 "영남으로 가는 대로"라는 의미로 받아 드릴 수 있겠다. 한양에서 영남으로 가는 길은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양에서 추풍령 거쳐 내려가는 우로가 있고 조령을 거쳐 내려가는 중로 , 죽령을 거쳐 내려가는 좌로가 있다. 여기에서 영조 24년 영의정 김재로가 제시한 조선통신사의 사행길에 대한 제안을 보면 " 통신사는 삼로로 나눠 본래 출발하게 하는 것이 구규인데 중간에 회동하여 연회를 베풀 때 애로로 인해 변통하여 한양에서 동래부로 출발할 때는 좌로로 가고 올때는 중로를 경유하여 오는 것으로 통문관지에 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사의 인원이 많은 관계로 역참의 어려움을 고려해 한양으로 올라 올때는 정사는 중로인 조령을 경유하고 부사는 좌로인 죽령을 거치고 종사관은 우로인 추풍령을 거치게 하소서"
[그림4:문경새재-과것길] 여기에서 영남으로 가는 대로는 하나가 아니라 3개의 삼대로가 있으므로 영남행 삼로를 영남대로라 하는 것 보다 "영남삼로"라 부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이 중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짧아 많은 사람들 , 특히 영남의 선비들이 이용하게 되어 이를 두고 대로 혹은 과것길이 부르게 되었다. 소위 대로라 불리우는 중로는 과거를 치르는 선비들이 많이 이용해 일명 "과것길"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으니 죽령을 이용하면 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이용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그같은 별명이 붙어 지금도 소조령을 올라 조령 삼관문의 첫 관문인 조령관앞에 이르게 되면 "과것길"이란 팻말을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행정은 60리로, 부산포로부터 중로를 이용해 상경하면 한양까지 14일, 좌로로는 15일 수로로는 21일 걸린다. 제포(웅천)로부터 우로를 택하면 13일 중로는 14일 수로로의 북상은 19일이 걸리고 염포(울산)으로 부터는 15일이 걸려 한양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날씨와 연회 일정에 따라 사신이나 왜인의 상경에는 시일이 꼭 표준화된 것은 아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2년전과 3년전 1580년 89년 일본국왕사의 자격으로 온 한양땅까지 온현소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풍신수길의 답서를 가지고 한양까지 왔는데 그는 영남좌로를 이용하여 경주,영천,풍기를 거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풍우속에서 "천하의 險 죽령"을 넘어 황강역(제천 한수면)에 도착해 다음날 충주에 들어가게 된다. 현소일행은 지쳐 현재의 중원군 가금면에 있는 목계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만 의전상 곤란하다는 조선정부의 완강한 거부에 직면한다. 당시 수로로 이용되던 남한강은 사람들의 교통로라기 보다는 물산의 집산지로서 유명하다.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는 그 옛날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리고 있다. 지금은 남한강의 댐으로 인해 수량이 적어 그 예전의 화려한 모습과 집산창고의 모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자리잡고 있고 "목계장터"란 표석하나가 목계의 언저리에 오가는 사람들에 옛기억을 더듬어 주고 있다. 화개장터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로 섬진강을 따라 경상도의 서부와 전라도의 동부지역의 물산 교류가 이뤄지던 곳이라면 이 곳 목계장터는 경상도의 상인과 충주평야의 집산물이 이곳에 모여 한양으로 이어지는 통로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로서 한양은 개성,강화등지의 서부쪽에서 한양까지의 집산물은 京江을 통해서(강화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을 말함), 충주이남의 집산물은 목계에 모여 한양으로 옮겨진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지만 일본 국왕사인 현소는 한때 그곳은 물산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노구에 지친몸을 남한강을 이용하여 추스리려 했으나 조선정부의 왕강한 거부로 좌로를 이용하여 여주,양근,평구를 거쳐 한양의 동평관으로 들어오는 길을 택하게 된다.
왜인상경로를 한번 더 예를 들어보자. 임진란이 끝난지 20여년이 지났을 때 왜인으로서는 조선이 근대에 막을 내릴때까지 한양까지 상경한 유일한 사람이 있는 데 그의 이름은 겐뽀 즉 현방이라는 대마도 외교승이였다.(조선과 일본의 공식문서 관장) 현방은 앞서 풍신수길의 답서를 가지고 한양에 온 현소의 제자였는데 그의 "방장로 조선상경일기"에 의하면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였고 또 신중하고 대담한 사람인 것 같다.
기록은 부산 출발전 4월5일부터 대마에 돌아온 6월17일까지 72일에 걸쳐있다. 4월6일 부산의 왜관으로부터 동래를 거쳐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문경을 거쳐 조령을 넘은 현방일행은 중로에서 좌로인 충주로 향하게 된다. 충주에서는 관찰사의 연회가 개최되고 여기서 부터는 목계의 남한강수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소위 중로,좌로,수로를 함께 이용하게 된다. 당시일본 사신들은 정사는 주로 대마도의 외교승이 맡았는데 이는 경,시,서를 막론한 당대의 학문의 최고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약간 주제에 빗나가지만 현소의 한양행이 임진란때 일본군의 한양침범로로 이용되어 추후 다시는 이 길을 일본의 사신에게 허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양행을 허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현방이 왜 한양상경을 국서를 지참하지도 않고 한양으로 상경코자 하였는지 알아보면 당시 조선의 북방에 후금이 날로 실력을 키우고 있어 조선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탐을 위한 목적 및 조선에 어려움이 있으면 우방으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막부의 요청을 조선정부에 전하지만 조정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같은 지원은 임진란때 조선 북방의 야인들로 부터도 받는데 역시 거절한 바있다. 현방은 스스로 국왕사라 칭하였음에도 조선의 예조에서는 이를 인정을 하지 않아 정전에서 맨 땅에 알현하여 그의 자존심이 심히 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이유중 하나인 대마에 미지급분 목면 600동의 수령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에 받게 된 것을 보면 그의 대담함은 현소를 능가하는 것 같다.
부산에 가면 초량왜관이 있다.그러나 현방이 머물렀던 초량왜관은 지금의 왜관이 아니다.지금이 수정동 근방의 장소에 협소한 왜관이 있었던 것이다.(이진희 선생) 50년이 지나 현종때는 현재 부산에서 초량왜관이라는 지명이 있는 용두산에서 이전 부산시청이 있던 지역까지 확장 이전된다. 물론 이 왜관의 이전은 조선정부에서 상당히 고민을 한 결정이었으며 대마번에서는 목숨을 건 모험을 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부산, 동래 지역의 옛길을 더듬으면서 다시 한번 짚어보자,
다시 현방의 귀로를 살펴보자. 남한강의 수로까지 배로 한양에서 이동하여 충주로 가고 육로로 문경,함창,상주를 거쳐 다시 낙동강의 수계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향했다.즉 한강과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이 귀로는 현방에게는 패배감을 안겨준 길이었다. 접위관인 선위사가 거추사로 바뀌었고 목면 미수분도 조선에서 기록에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기타 접대도 생각같이 쉽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대담함은 결국 조선정부로부터 목면 600동이라는 엄청난 양의 목면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왜인상경로는 조선이 근세 외세에 무력으로 굴복할 때까지 다시는 허락되지 않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3.조령고개로의 출발
1) 충주로 향하는 길 일산에서 서울 외곽순환도로가 김포대교로 연결되어 과거 88이나 강변북로를 타고 고속도로를 진입하던 것이 이젠 옛말이 되어 버렸다. 길은 항상 새로운 것이 과거의 길을 대체하기 마련이다. 그래샴의 법칙처럼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은 적어도 길에 관해서는 맞지 않는다. 이번 일정은 문경새재를 넘는 일이다. 문경새재를 넘되 가능한 옛길을 따라 그 길의 흔적과 역참, 원 ,주막등의 기록을 보고 찾아갈 계획이다. 물론 이 길은 영남대로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나 일단 대표적인 영남대로로 이야기를 풀려한다. 앞서 예시한 바대로 문경새재는 근세 신작로가 이화령으로 나기 전 무려 천년 이상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오갔던 곳이다.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의 3년에 "三年, 夏四月, 隕霜. 開< 立嶺>路."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니 충주에서 영남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역사는 천년을 훨씬 넘어 2천년의 역사에 이르런다,
김포대교를 지나 부평을 통과하는데 빗발이 점점 굵어져 경부고속도로 진입때는 거의 차들이 비상등을 켠채 조심스레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차는 영동고속도로의 이천을 지나 이천IC쪽으로 빠져 나가 장호원을 향한다.장호원에는 남한강의 지류가 흐르는데 이곳에도 예전에는 원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장호원이다. 이태원, 漢江渡와 양재 (말죽거리), 판교,용인,양지,죽산까지의 옛길의 문화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은 장호원에서 생극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3번 국도를 타고 주덕,대소원을 거쳐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생극, 진천방향의 국도확장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대소원은 주덕으로 충북선이 나므로서 한때 조선때 관리나 민간인의 숙박시설이 있었던 곳이지만 현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모해 버렸다. 국도변의 나무들은 가로수로 심겨진 지 오래여서 나그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위안이 된다.
잠시 역과 참,원,마방등의 용어의 차이를 보자. 역은 조선에서 41개의 역도를 나누어 지역을 다스리는 현감과 대등한 외관 군사직인 종6품의 찰방을 파견한 곳이다. 대역과 중역,소역으로 나뉘는데 대역은 찰방,중역은 역승이 다스린다. 현과 차이가 있는 것은 읍성을 만들지 않고 홍살문 하나로 그 역시설의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 차이다. 더구나 이곳은 국가의 시설물이며 소위 암행어사가 마패로 말을 교환하는 곳이 이곳이고 국가의 관원이 공적인 일로 말을 교환할 때도 역시 역을 이용한다. 역에는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30리마다 역과 참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참은 임진란 이후에 봉수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파발을 만들면서 참을 만들었는데 역의 보완시설로서 이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30리마다 역과 참을 설치하였다. "한참 가야 한다"는 말은 1참인 30리를 의미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院은 조선후기에는 주로 민간숙박시설로서 사용되었지만 조선초기까지는 고려에서 사용하던 사찰의 숙박시설을 흡수하여 국가에서 관리하였지만 후미진곳에 주로 있은 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게 되고 주도로에 인접한 원만 살아 남아 민간시설로 이용되었다.
점이나 각,주막 등도 원이나 역참의 보조 시설로서 민간인들이나 낮은 관직의 사람들이 이용하였는데 현재의 판교점이나 판문점과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마방은 이러한 원,점,각등의 부수적 시설인 것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이 이야기의 흐름에 이해가 쉬울것이다.
이곳을 가다보면 신덕저수지를 만나는데 이곳은 과거 대동지지에 표기된 숭선마을이 수장된 곳이다. 숭선마을에는 숭선참이 있었는데 이곳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말을 갈아 타는 파발참이 있었다. 화개산으로 연결된 얕은 연봉들을 따라 길을 가다보면 용원에 이내 도착하게 된다.용원 신니면사무소 근처에는 오랜 나무들이 있는데 바로 이 근방이 과거 용안역이 있던 곳이라 한다. 이곳의 古老들께나 경찰에 물어 보아도 과거 용안역의 자취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불과 100년만에 과거 조선의 교통체계가 기억에 조차 사라져 버리고 있는것이다, 도도로키씨의 조사에 의하면 화개산 아래에 길이 있었고 현재의 국도는 신작로라는 것이다, 나 역시 조사를 통해 보니 길은 산자락을 따라서 나 있었고 산허리를 오가게 될 때는 일부를 잘라 鞍部를 만든 곳도 여러곳 보게 된바 있다. 이곳에서 부터는 충주평야가 펼쳐진다.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여주에서 충주로 들어오는 길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안,가흥을 거쳐 충주에 들어오는 좌로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지나온 길처럼 용원,주덕,충주로 오는 영남중로(일반적으로 영남대로 임) 길이다,
충주로 들어가기위해서는 달래강을 건너야 한다, 넓다란 충주평야는 과거부터 물산의 집산지로서 풍요로운 장소로서 충청도의 대표적인 목으로 이름나 있다.
일본의 외교승 현방은 다음과 같이 충주를 술회하였다. "충주의 숙소는 매우 넓었다,장로의 방밖에는 정자가 있고 ,그 앞에 연못에는 가운데 섬이 만들어져 있고 버드나무와 여러 가지 꽃이 아름답게 심어져 있다, 이곳은 관찰사가 있는곳이어서 만사가 번창했다. 18일에는 관찰사에 의한 연회가 열렸다"
또한 임진란전 일본의 신사가 오갈 때는 반드시 충주를 다녀갔다. 앞서 말한 바대로 충주에서는 관찰사가 개최하는 화려한 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행록에 충주가 빠지지 않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그러나 숙종,영조때 조선통신사(이 글에서 조선통신사라는 것은 조선의 통신사란 의미에서 사용함. 정식명칭은 을미통신사,임술통신사,신묘통신사등이 타당하다, 그러나 출발한 해와 일본으로 건너간 해가 틀린 경우도 있다. 가는 도중 한해가 넘어 간것이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단순히 "조선의 통신사"란 의미로 사용하니 이해를 바란다,)의 일본 사행에서 충주,안동,경주의 향연은 停減하게 되었고,단지 동래부에서의 향연만 설연하게 되었다.이는 흉년으로 인해 경비절감 차원에서 시행하게 되었지만 사행이 거듭되어 전례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전에 이 길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충주목에 들어갔을 것이다. 장터에 들러 여행길의 물건도 사고 지친몸을 이곳에서 며칠간 추스렸을것이다.
충주시에 진입해 3번 국도를 따라가면 성내동의 학생회관이 나오는데 그 뒤가 충주목이 있던 곳이다,충주목 아문 앞에는 오랜 수령의 은행나무가 보호되고 있다, 문무인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석물들이 나열되어 있는 충주목에 들어가보니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것이 바로 동헌이다, 청령헌 ... 정면7칸,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서 관사로서의 품위는 괴목 기둥과 회,돌의 절묘한 조화가 어울려 조선지방관아의 풍모를 엿볼수 있는 건물이다. 귀한 괴목으로 기둥을 세워 아름다운 무늬가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것을 보면 역시 물산의 중심지, 교통의 요로로서 ,또한 수많은 외교사절들을 접대한 곳으로서의 옛 풍모의 일면이라도 볼수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림5:충주목 청령헌]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6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풍채는 보물급 못지 않은 자태를 가지고 있다.아쉬운 점은 건물 좌측의 회를 덧칠해야 할 부분을 시멘트로 치장해 건물의 품격을 손상케 한 것이 못내 아쉽다. 더구나 덧칠을 한 부분이 벌어져 손에 작은 힘이라도 가하면 곧 부스러 진다, 고종6년 1869년 이곳 충주목은 꽃담으로 개축하여 예성이라 불리었는데 둘레가 1.2KM에 이르렀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드니 세월이 무심하기만 하다. 시,도 지정문화재의 보수, 수리에도 정해진 원칙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의 현주소를 알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일반인들은 조선의 건축을 이야기하자면 제일 먼저 경복궁의 근정전이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말하긴 하지만 실상 미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그렇지 않다. 권위적인 건축의 모습을 중히 여긴다면 경복궁의 근정전을 따라 갈 수 없지만 섬세한 면이나 단정한 모습을 중히 여긴다면 수원 화성의 화령전이 제일이 아닌가 한다. 수원시에 있는 화성행궁 옆의 신풍국민학교는 원래 화성객사가 있었던 곳이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령전이 있다, 현판 이름은 "운한각"...
순조2년에 부친의 영정을 모시고자 화령전을 건립하고 실내에는 정조의 큰 영정은 걸어두고 작은 영정은 궤짝에 두어 보관하였다. 계단을 올라 월대에 오르면 마치 길다랗게 나열된 열주와 어두운 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비례감이 주춧돌 하나의 섬세함과 어울려 공간적 공허함이 단조로운 미의 극치를 자아내게 한다. 비라도 올테면, 눈이라도 내릴때면 그곳의 세상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된다. 이런 화령전에 두 번을 다른 친구와 간적이 있었는데 모두들 감탄을 자아 내었다. 그것은 정조시대의 문화의 "마지막 거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곳으로 빠졌지만 충주를 빠져나와 건국대 충주캠퍼스를 가는 길로 향하면 충렬사가 나오고 몇미터만 더 가면 단호사가 나오는데 이곳이 예전에 단월역이 있었던 곳이라고 도도로키씨는 말한다. 대동여지도상와 청구도를 살펴보니 현 단호사 근방이 맞는 듯 한데 충주시에서 복원한 단월역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앞으로 영남대로가 더 연구되어 검증되길 바랄 뿐이다.
단호사는 아주작은 절로서 보물로 지정된 철불좌상과 삼층석탑이 초라하게 있는데 지금은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나무가 담위로 울창하게 뻗어 있는 단호사에 내리자마자 세찬비가 줄기차게 내리기 시작하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단호사에 들어갔다. 절의 내력을 알기위해 주지스님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중이라 법당 처마 밑에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다. 조선초기에 심었다는 적송이 옆으로 드러누워 와송이 되었는데 그 사이로 고려 시대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지붕석의 경사가 가파르며 비례는 비교적 좋은 편이나 상륜부가 없다.적송과 어울려 친구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호사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강원도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 자식이 없었는데 이곳 단호사에 불공을 드리면 자식을 얻을 수있다는 말을 듣고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던 중 적적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꿈에 그 소나무 심은 자리가 법당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후 태기가 있었는데 그 소문으로 인해 지금도 이곳은 애기가 없는 사람들이 불공을 드린다고한다. 절의 입구에 석불이 모셔져 있고 그 아래 작은 애기부처가 놓여져 있는데 모두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2)임경업장군 묘를 찾다,
여전히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단호사에서 나와 조금 가다보니 임경업 장군 묘소 3.5KM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길은 곧 사람들의 역사다. 바로 이러한 길이 가치를 깨닫고자 대동여지도 하나 들고 길을 나서게 된 것 아닌가., 임경업장군 묘를 찾아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을 들어 갔는데 중간에 안내판이 없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길을 배회하는 사람조차 없는 터라 포기하고 마을을 빠져 나가 3번 국도에 합류하려 하려 내려가는데 임장군의 묘소 안내판이 나왔다. 겨우 차한대가 올라갈만한 하늘로 따라난 길을 올라 갔다. 비오는 오전이라 적막한 산중은 안개로 덮였다. 깜박이를 깜박이며 겨우 차한대 들어갈만한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간 후에야 차 몇대 주차할 공간을 발견하였다.이곳은 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이었다,우측에 임경업장군 묘역 정화 기념비가 임씨 대종회에서 한켠에 세워 두었고 안개가 자욱한 숲속 질퍽한 길속에 발은 점점 깊숙히 빠져 들었다.
20여미터 가니 길이 양갈래로 나오는데 나는 우측으로 올라갔다. 우측에는 묘 2기가 병렬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묘비를 보니 임 아무개 영중추부사로 적혀 있었지만 분명히 임경업장군은 아니었다. 다시 양갈래 길로 돌아가 아랫길로 가니 나지막한 계단이 위로 뻗어져 있었다. 이윽고 임장군의 묘역에 이르러 보니 묘비와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아직 때가 묻지 않은 돌로 개축되어져 있었다,. 문인석은 자그마한 반면 무인석은 아주 크게 근대화된 조각으로 되어 있어 묘소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임장군에 대한 예우는 갖춘 것은 같다.
세상과 정녕 인연을 이을수 없는 달천 근방의 깊은 산중에 모셔진 임장군의 묘앞에서 잠시 예를 갖춰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생을 마친분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림6:임경업 장군 묘역] 충민공 임경업장군은 선조27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나 27세에 무관의 길을 걷게 되고 ,호란을 맞아 의주부윤으로 재직하면서 명과 내통하여 청을 치려다 발각되어 중으로 변장하여 연평도를 거쳐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명의 국력은 이미 기울어 다시 청에 잡히게 되었으나 청태종은 경업의 인물됨을 알고 그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원수의 나라를 위해 머리를 깍을수 없다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심기원이 역모를 꾀했는데 임장군과 도모했다하여 조선에서는 청에 임장군의 압송을 요청하게된다. 조선에 잡혀온 임장군은 갖은 고초 끝에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된다.
인조는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임장군이 역모를 심기원과 함께 도모하지 않은 사실을 조리있게 대신들에 설명도 한다. 그런데도 김자점을 비롯한 간신배들의 계속된 상황설명에 한편으로 의심도 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인조는 경업의 죄를 감하려 하였으나 , 승지 이시해는 "경업이 이미 죽었읍니다"라고 보고한다.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그리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만 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실록 인조 24년)
함석헌 선생은 그러신다. "충무는 죽어서 殉死요,제 손으로 한 자결이지만, 임장군은 역적의 이름으로 맞아 죽었다.나라가 용납하지 못한 것은 같다.....(중략).....저때에는 환란중에도 의병이 있고 ,자랑이 있을수 있으나 이번은 다만 부끄럼이 있을 뿐이다."
충무는 때를 만나 조국을 왜란에서 구했고 충민은 호란의 원통함을 흑룡강 물줄기에 씻으려 하였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일신 죽음으로서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원통하고 애석해 하지는 말자. 숙종때 그의 손자 임중번이 그의 무죄함을 상소하자 숙종은 다시 그의 문초를 한 일기를 들춰본다. 숙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천하에 뜻을 펴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 정의를 유지시키려고 하였던 것인데 (중략) 그런데 명령을 벗어나 도망하여 자중함이 없어서 성심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온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였으니 인신이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어야 하는 절개로 논한다면 망명한 죄는 면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성상께서 임장군이 죽은 뒤에 애석하다,애석하다 하며 정녕, 죽었으냐고 하문하신 것을 보면..."
위의 이유로 숙종 32년 임장군의 신원이 복원된다. 앞서 숙종의 말에서 임장군의 망명을할 수 밖에 없었던 뜻과 충무공의 자결설이 좀은 이해되는 듯하다. 아마 인조와 숙종은 이러한 임장군의 뜻을 분명 읽었을 것이다.
3)드디어 소조령을 넘다. 소조령을 넘기전에 먼저 들러야 할곳이 대안보이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안보리 대안보마을은 조선시대 安富驛이 있던 곳이다. 처음에 이곳에 들렀을때는 대안보를 찾지 못하고 소조령을 넘었다. 두 번째 이곳에 왔을때도 찾지 못하고 헤멨는데, 소조령을 올라가기전 597번 도로로 옛 계립령인 하늘재 가는 길, 즉 우측으로 빠졌더니 약 500미터 정도 갔을까... 대안보 마을이 나왔다, 대안보 마을로 진입하자마자 다섯기의 공덕비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 있어서 예스러움이란 불과 이것과 옛길이 일부 남아 있다는 것 외는 없다. 길가는 노로께 이곳에 대해 몇가지 물어 봤다. 아직도 옛길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내 나이 80인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마을에 95된 노인께서 있긴 하지만...원래 예길은 38번 도로를 따라 올라 가지 않고 이 마을 중간에 흙길이 일부 있지요...이곳을 통해 올라 갔는데 작년에 시멘트를 다시 깔아 거의 없어졌지요..근데 그 밑에 길은 그대로있을꺼야...그위에 그냥 시멘트를 올렸기 땜시..."
"길은 어느정도 넓었나요" "상당히 넓었지. 차 한 대가 지나가고 남을 정도 니까...그리고 그 밑에는 돌이 깔려 있었어요,,,큰돌들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시멘트를 올렸지... 몇해전에 교수들이 와서 이런 것을 물어 봤는디... 그런거 연구하는 사람인가봐..." "예 그렇읍니다...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상세히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돌들이 산위인 조령고개까지 깔려 있었나요" "그렇지요...조령고개 길에도 깔려 있었지요... 그래서 가마도 올라가고 말도 올라갔지요" "그럼 597번 도로로 빠지는 미륵리로 올라가는 지릅재 길은 얼마나 이용을 했나요" "그 길은 소로지..이곳은 대로길이고 ,,,이용을 하긴 했는데 그다지 이용을 안했어" "그럼 수안보는 언제 개발을 했었나요" "아 여기는 대안보고 지금 수안보 자리는 원래 이름이 소안보였어...이곳에 집이 나 어릴때만 해도 백호가 훨씬 넘었어 ...근데 소안보 자리는 집들이 뒤엄뒤엄 있어 소안보라 했지... 옛길도 이 마을을 지나서 저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원래 수안보에는 온천이 있었는데 일제때 일본애들이 철파이프를 만들어 개발했는데 오래 되니까 ...녹물이 나와서 박사들이 물길을 새로 놓고 해서 오늘날 수안보가 된거지"』
영남일보사에서 취재한 "영남대로길을 따라서"에 의하면 영남대로 상의 큰길은 10M, 중간길은 5-6M,작은 길은 3M에 이른다는 데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약 5M정도의 중간길에 속하는 것 같다. 세월에 흐름에 더 좁아진 옛길을 촬영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손을 흔들며 조심해 댕기오라는 할아버지의 손길이 따사롭게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마을 한쪽의 언덕에서 옛길이 내려와 마을을 통과해 지금의 길과는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곳으로 올라가면 조령고개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한다. 마을 길은 개울로인해 떨어진다. 떨어진 그 길은 마을내에서 다시 연결되어 소조령을 올라간다. [그림7:조령고개] 소조령으로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산행을 점검하는데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고 장이 서게 된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곳 대안보의 장이 예전에는 쾌 성행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이 모이는 곳에 문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은 38번 도로에서 벗어나 지릅재 올라가는 작은 마을에 불과한 대안보를 떠나 이제 소조령을 올라간다.
소조령길은 지금은 이화령과 연결되어 있다. 몇해전만 해도 이화령 고갯길을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이제 사라지고 이화령 터널이 뚫려 문경 가는 길이 "구부야 고갯길"이란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소조령을 올라 고사리로 빠져 들어가면 고사리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는 대동여지도에도 고사리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주막거리로 불리웠다 한다.이 고사리마을에는 예전에는 新惠阮이란 원이 있었고 예전에는 백여호에 이르는 집들이 있었는데 "봇짐진 보부상들이나 과거길로의 역할"이 줄어든 지금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주말에는 이곳을 거쳐 지나가는 등산객들로 붐빌 뿐이다.
1978년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조성되면서 지금의 고사리는 과거의 사람들은 거의 없고 타지사람들이 옛이름을 빌려 마방가든이나 하는 그런 마을로 변모되었다. 이곳에는 마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안부역에서 고사리까지는 약 10리 길인데 이 영남대로를 따라 가다보면 많은 숙박시설인 원이나 역의 부속시설인 마방이 있었다는 장소와 만나게 된다. 마방은 지금은 있다 하더라도 현재는 과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두 개조되어 있다.
역참은 보통 30리 마다 있지만 마방은 원이나 주막이 있는 근처에 있기도 하다. 주로 말이 쉬어가고 먹이를 주는 그러한 장소로 이해한다면 이 길에 마방이 왜 많은 지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조령관으로 올라가는 옛길이 이어진다.
약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옛 오솔길을 보존합시다" 및 "과것길"이란 팻말이 나온다. 조령관문이 있는 곳에 조금 못 미쳐 문경새재 입간판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경상북도 문경땅이다. 이곳에서 표를 사고 조령관문을 통과하면 훤히 세상이 터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서 20년간 안내를 했다는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화령길은 문경과 수안보를 잇는 주도로이고 이 문경새재길은 관문공사를 한후 3-4년 정도 이용한 보조도로로 이용되었는데 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시찰한 후 당장 보존 조치토록 했다고 한다. 그 덕택에 잘 닦여진 이 길은 흙길로 이후부터 보전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많이 가진 박정희 대통령의 일화는 경주 고분 발굴에서 잘 나타난다. 오늘날 경주란 작품은 박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의 일화가 곳곳에 남아있다. [그림8:조령관] 이곳 조령관에 이르면 충북과 문경이 함께 있는 곳인데 문경새재라 하는 지 이해가 된다.이곳 조령의 상당부가 문경에 속하고 삼관문이 문경땅에 속해 문경새재라 하는 것이다. 이 새재길을 넘으면 비로소 문경(聞慶)...즉 경상도의 말을 듣게 된다하여 문경이라 한다..
예를 한가지 더 든다면 고사리 방향이 인본주의적 길이라면 문경쪽은 자연주의적 길로 조성했다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다. 문경에서 올라오는길에는 전신주가 땅밑에 매설되어 있고 고사리 방향은 전신주가 눈에 띄는 점에서 그렇고 ,가게집들이 고사리에서는 길가에 있지만 문경으로 내려가다 보면 가게는 후미진 곳에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특징이랄수 있다.
조령제 1관문은 원래 숙종34년에 열었다고 한다. 후에 잔해만 남은 것을 1974~77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었는데 관문을 쌓은 돌들의 색이 붉은 색이 들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곳 돌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영주돌을 사용했다 한다. 이십여년이 흘러 돌에 세월의 이끼가 끼었음직한데도 아직도 붉은 색 돌들은 눈에 거슬린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한양쪽이 아니라 문경에서 문을 여닫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나중에 실록을 찾아 보니 ,이 관문을 축조할때는 청에 대한 대비책을 논하고 있었고 병사역시 문경쪽에서 파견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 역시도 동화원이 만들어져 지나는 길손에 숙식을 제공했다 한다. 조령제일 관문을 통과해 마사토로 깔린 새재길을 조금 가다보면 "옛 과거길"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이 문경새재길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옛길이다. 이 길은 바닥에 돌이 깔려 있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지금은 돌이 땅에서 패여 이리 저리 뒹굴지만 예전에는 정연하게 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수백명의 통신사 행렬과 보부상,영남의 선비와 세곡미와 진상품들이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이곳 새재 길을 오르내린 역사적인 흔적인 것이다.
어느 나라에 이같은 자연적인 ...아니 인위적으로 자연적인 길을 만들었단 말인가. 있다손 치더라도 보존된 길이 얼마나 있는가. 비록 지금은 부서지고 황폐한 그 길이 예전에 우리 역사에서 수백년간 보수,수리한 그 길이 아직 우리 눈앞에 남아 이 길을 걷는다는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길을 보고 조선이 형편없다 말하지 말자. 왜냐면 지금도 홍수한번 나 무너진 도로에 수십년이 흐른다면 그 원래모습을 알수 있을까... 하물며 100여년 버려진 땅이다.잊혀진 땅인들 오죽하랴... 그 길을 지금 옛길로 생각하여 걷는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림9:조곡관]
마사토로 곱게 깔린 길 영남 제2관문 조곡관으로 가는 길은 숲이 우거지고 경사가 완만한 쉬운 길이다. 예전에 이러한 길을 찾고 닦았다는 것은 경험에서 발로되었을 것이다. 한참을 가다보면 조곡관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문경읍 상초리이다. 현재 조곡관은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1708년 조령관문을 쌓을 때 이전에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처음에는 조동문이라 했던 것을 조곡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현재의 것은 복원하여 지정한 것이다.
영남 2관문을 통과해 내려오면 많은 돌무지와 경북 문화재 자료로지정된 "산불됴심비"와 용추를 지나게 된다.오가는 사람들의 염원은 시대를 막론하고 돌하나에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龍湫는 임진란후 마지막으로 서울을 상경한 현방 일행이 문경새재길을 올라가면서 바로 이곳 용추를 구경하게 된다."용추를 구경했는데 이곳은 용이 살았다는 곳이다".사실 현방일행이 이곳을 통과할 때는 현재처럼 용추라는 글이 새겨져 있지는않았을 것이다.기유년에 새긴 구지정이란 사람은 숙종조때 사람으로서 현감의 벼슬을 했는데 조정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는 못한 것 같으나 힘찬 글속에 그가 펴지 못한 기개를 보는 것 같다. 용추의 옛길은 바로 아래 바위돌 위에 보면 인위적으로 패여진 곳이 있다.과거 옛길은 이 바윗길로 오갔던 모양이다.동국여지승람에도 이곳이 나와 있다는 데 동화원에서 1리되는 곳에 있다 한다.
내려가다 보면 주막이 하나 복원되어 있다. 금새 사람이 좆아와 막걸리 한사발이라도 들고 가라고 할 것 같다.사실 이곳이 1관문을 통과한 초입이고 보면 녹차한잔이나 찬물 한잔이라도 마시고 가는 살아 있는 주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주영씨의 객주도 이런곳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조령원이 나온다. 이 조령원은 2관문과 3관문 사이의 동화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쉼터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KBS 기획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중 궁예가 세달사에서 나와 백성으로부터 장군으로 추대되어 이용한 산채의 셋트장으로 활용중이다. 사람들은 이곳 조령원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드라마 왕건의 셋트장에 관심이 있다.
이제 조금만 더가면 셋트장 궁예궁이 나오고 제 1관문을 만나게된다. 궁예궁의 겉보기는 장대해 보였는데 실제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 실상은 형편없었다.드라마 촬영장이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만들어야 할 터인데 드라마의 장면을 확인하는 의미외는 전혀 볼것이 없었다. 문화로서의 가치를 빼고 건물로서의 가치 등 .전혀 의미를 부여할 만 하지 않았다.
이제 제 1관문을 만난다.,
[그림10:주흘관] 주흘관,,,사실 3관문중 제대로 본래의 모습을 가진것이라곤 1관문 밖에 없다 .힘찬 관문의 모습이 왕건셋트장을 본 사람들은 "역시 옛날 사람들이 기술이 좋아" 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다. 문경시에서 제작한 타임갭술이 관문안에 있고 관문 위로올라가면 우측 끝에 성황당이 있다.성황당에는 여신을 모시고있는데 18c에 건립한 유서깊은 성황당이다. 이 성황당에는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의 일화가 전해 지는데 젊은 시절 최명길이 새재길을 넘을 때 여신이 최명길과 함께 넘어면서 장차 나라에 환란이 닥칠 때 나라를 구하라는 말을 남겼다는 데...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해 많은 선비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실록을 살펴보면 최명길은 삼학사 못지 않은 충성심과 합리적인 의지의 사람인 것 같다. 청에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여인들을 두고 당시 조선의 남정네들은 새로이 장가들려 했지만 최명길은 극렬히 반대했는데,,, 임진란때 역시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그들이 쇄환되기전에 새로 장가든 사람의 처는 첩으로 분류했다는 예를 들면서 본처의 속환이 속히 이루지도록 항변을 한 것을 보면 최명길은 합리적인 사람인 것 같다. 삼학사가 구국정신으로 후세에 본을 받아 마땅하지만 당시 화친을 청한 사람들은 그만큼 정세를 보는 예리한 눈이 있지 않았을까...인조 역시 삼학사의 충절을 논하면서 예리한 주변 정세를 보는 눈이 부족함을 얘기한다.
문경초입의 길은 번잡하다. 이화령 터널을 통과해 다시 고사리로 오는데 는 22,000원을 요구한다. 넘어오면서 일본에 조령고개와 비견되는 일본 에도막부 최대의 관문인 돌 다다미길 "하코네 고개"를 떠올렸다. 그날 역시 비가 왔는데 한 젊은 청년이 고베에서 자전거를 타고 넘어 왔다고 한다.뜨거운 유황온천에 목욕을 한후 한잔의 와인을 하면서 일본의 젊은이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젊은이와 일행은 이 하코네 고갯길은 조선통신사가 일본 막부의 초대로 500여명의 사절을 데리고 수많은 번의 병력들로 호위되어 이 고갯길을 올라 에도에 입성했다는 얘기에 처음 듣는다고 하면서 놀라던 기억이 새삼 떠올려 진다.
전나무숲과 뜨거운 온천물, 동해도를 통과한 번주와 조선통신사가 올랐던 하코네 고개의 옛길 돌다다미, 이끼낀 하코네 자료관과 주막에서 아마자께 한잔에 긴여정의 시름을 푼 시간이 소중했던 만큼 이곳 문경새재길도 우리의 옛길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인구에 회자되고 보존되는 길로 남길 바라면서... 다음에는 남은 40여개의 조선역도와 죽령고개를 넘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