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돌》 하나라도 함부로 던지지 마라 / 이상호
입력 : 2021/01/25 [11:5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골프장에서 한 선수가 샷을 했는데 잔디 위에서 놀던 비둘기가 날아온 공에 맞아 죽는 영상을 보았다. 샷을 한 골퍼는 질색했다. 누구의 죄일까? 세상에는 누구에게도 죄를 묻기 힘든 일이 종종 발생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준다. 때로는 골프장 비둘기처럼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골프장에서 골퍼와 비둘기처럼 전혀 의도한 바도 없는데, 한 사람의 행위가 타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다. 어떤 이는 육교 밑을 지나다가 고가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떨어지는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여기엔 운전자의 부주의가 있겠지만 그 부주의가 고가 밑을 지나는 사람을 죽인 일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운전자는 부주의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세상에는 나의 행위가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장난으로 한 행위가 동료를 엄청나게 괴롭히는 일이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이 직장 동료나 부하 혹은 상사 등에게 치명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과 행위의 범죄성을 두고는 논란이 많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피해자가 아니라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보려면 행위자가 아닌 피해자의 관점에서 우선 살펴야 한다. 만약 사건을 행위자의 관점에서만 보면 연극에서 배우의 행위처럼 그 행위 자체에만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돌》 하나를 무심코 던질 때도 그 돌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돌이 처할 처지와 던져진 돌이 또 다른 대상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신미균의 시 《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돌 - 신미균(1955〜 )-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싶어서 손에 잡히는 돌 하나 던져 넣었다. 돌은 자기가 어디쯤 떨어지고 있는지 알리려는 듯 탁, 타닥 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가끔씩 내면서 떨어졌다 아차, 저 돌 깊은 우물 속에 한 번 빠지게 되면 다시는 햇빛을 못 볼 텐데 미안하다 -신미균 시집『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시선 53, 2020- |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린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혹은 재미 삼아 한 행위가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호기심으로 혹은 장난삼아 할 수 있는 일을 시적 언어로 쓴 것 같다. 확장하면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연은 일상의 호기심과 그 호기심에 대한 실험적 행위이다. 이런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알고 싶어서/손에 잡히는 돌 하나/던져 넣었다.”에서 잡히는 돌은 불특정의 돌이다. 우물을 본 화자를 강하게 자극한 것은, 우물의 깊이에 대한 궁금증 즉 호기심이다. 돌을 우물 안으로 던진 행위는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실험적 행위이다. 여기엔 다른 어떤 사유 즉 돌의 입장이나 우물의 입장에 대한 고려도 없다. 이 행위에 깃든 사유는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일 뿐 타자 지향성이나 객관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쨌든 던져진 돌은 우물 안으로 깊이 떨어지고 있었다. 제2연은 돌이 우물 안으로 떨어지는 상황에 대한 사실적 묘사다. 이것 역시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떨어지는 상황에 대한 묘사에서도 사유에 문제가 있음을 본다. “돌은 자기가 어디쯤 / 떨어지고 있는지/ 알리려는 듯”했다지만, 돌 자체는 그런 생각조차 할 길 없다. 만일 돌에 정령(精靈)이 있다면,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돌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자기중심적 사고만 존재하지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없다. 그런 타자 배제의 사고는 떨어지는 돌은 “탁, 타닥/벽에 부딪히는 소리를/가끔씩 내면서/떨어졌다”는 표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화자에게는 그 소리가 우물 벽에 부딪히는 돌의 소리일지 몰라도, 돌의 입장에서는 상처 나고 깨어지는 소리이다. 또 그 소리는 돌이 회복 불가능한 비극의 세계로 떨어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제3연에서 이제야 화자는 자기 행위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었다. 돌을 우물 안으로 던지는 행위를 해 놓고 나서 “아차”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지’ 하며 생각한다. “저 돌 깊은 우물 속에/한 번 빠지게 되면/다시는 햇빛을 못 볼 텐데” 그렇다. 우물 속에 떨어진 돌은 영영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한다. 돌은 약한 타자(他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자는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타자 중심적이고 객관적인 사유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유는 때늦은 사유가 되고 말았다.
뒤늦게 타자 중심적으로 생각해 보니 화자가 우물안에 던져진 돌에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다. 잘못된 행위에 대한 타자를 향한 반성과 사과치고는 너무나 가볍다. 화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 ‘미안하다’는 말에는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여운은 크다.
시에서 화자는 늦게라도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실제로 인간 세상에선 그 “미안하다”가 얼마나 어려운지 해야 함에도 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며 자기 정당화만 일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제 위의 시에서 《돌》을 성폭력(성희롱, 성추행) 피해자로 바꿔보자. 한 남성이 한 여자를 보고 얼마나 예쁜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은밀한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호기심을 발동하였다고 하자. 자기는 호기심과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한 행위지만, 상대는 깊은 우물 속인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된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부하 여직원을 친근한 눈빛과 어조로 대하다가 아주 친근한 행동으로 대했다고 하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마음과 호기심과 친근함이지 부하 여직원의 마음은 아니다. 더 나아가 궁금하여 돌을 우물 안으로 던져 넣듯이 추행이나 폭행을 가했다고 가정하자. 그 행위는 타자에 대한 사유는 완전히 배제된 자기중심적인 욕망만 채우는 행위이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호기심과 욕망만 발동한 행위는 늘 타자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렇게 호기심과 욕망에 함몰된 자기중심적인 자에 의해 던져진 피해자는 돌이 우물 깊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어디쯤 떨어지고 있는지 알리려는 듯 “탁, 타닥” 하면서 우물 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듯이, 그 상처 나는 몸을 알리려고 본능적으로 아우성을 칠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그 행위가 우물 안과 같은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기에 우물 안의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외부에 잘 들리지 않듯이, 피해자의 아우성은 세상에 직접적으로 알려지기가 어렵다. 그 아우성은 일종의 생존 본능에 의한 방어기제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이 우린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우선 살펴야 한다.
그런데 시에서는 화자가 “아차”하고 돌의 입장에서 저 우물 속에 빠지면 다시는 햇빛을 못 볼 텐데 하면서, 자신이 한 행위를 후회하고 돌이란 타자에게 “미안하다”고 하였지만,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가해자들은 절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차(내가 무슨 짓을 했지?)”를 하지 않으며, 피해자가 겪는 상처와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미안하다”는 성찰적 속죄는 전혀 없는 것 같다. 더 잔혹한 것은 그런 자기 행위를 철저하게 은폐하며 때로는 정당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우린 모든 사건을 우선 행위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는 《돌》이란 물상을 성폭력 관련 피해자에 대비시켜봤지만, 학교폭력 피해자, 사이버 폭력피해자, 언어폭력 피해자, 인터넷상에서 문제가 되는 악플 피해자, 나아가 정치적 보복 피해자 등으로 확대해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다양해진다. 상당한 영역에서 우리 사회는 호기심과 욕망이란 이름으로 치환된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음을 본다. 그것은 정치의 세계에서도 펜덤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자기가 한 그 행위에 대하여 뉘우치지도 않고 죄의식도 미약한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자기 정당화에 몰입한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올바른 사유능력의 상실이나 마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 자기중심적인 호기심과 욕망에 빠진 사람들은 사유능력이 비틀리거나 상실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 영역 안에서의 자기 중심성에는 충실하지만(우리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상실되었다. 그들은 타자 중심적인 사유를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다시 시를 읽으며 ‘악의 평범성’에 관해 설파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 〜1975)의 보고서 『예루살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정화열 해제, 한길사)을 떠올렸다. 한나 아렌트는 히틀러 치하에서 유태인 학살을 잔인하게 행한 일등 공신이었던 아이히만의 전 재판 과정을 참관하면서 관련자들의 증언과 대화를 바탕으로 느끼고 성찰한 사유를 바탕으로 이 보고서를 썼다. 그리고 뒷날 책으로 출간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후에 ‘악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기초를 마련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그 잔혹했던 아이히만은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가 행한 유태인 학살은 그에게 있어선 자신의 직무 충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성실성’ 자체가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유가 철저히 배제된 성실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성찰과 사유가 없다면 아이히만과 같은 사유하지 못하는 잔혹한 성실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성립시킨다.
성실성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매우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유능력이 없는 성실성은 아이히만처럼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보고서 『예루살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사유의 3대 무능성”을 발견한다.
첫째는 말하기의 무능성(無能性)(inability to speak)이다. 그는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공통감(共通感)을 가진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초지일관 과거의 선전 문구와 상투적인 언어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반복했다.
둘째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의 무능성(inability to think)이다. 그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이념과 자기 중심성에 빠져 타인의 입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타인과 소통하지도 못했다. 아렌트는 말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단절된 자기만의 세계에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와는 소통도 불가능하고 그에게 타자는 들어설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판단의 무능성((inability to judge)이다. 그는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그 행위가 미칠 영향에 대한 사유가 완전히 마비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만 판단하고 행동했다.(위의 책 20쪽, 106쪽) 아렌트의 보고서를 보면서 나는 사유능력이 배제된 인간은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괴물 로봇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물론 히틀러는 그런 충직한 로봇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 했다.
나는 또 하나의 생각에 빠졌다. 인간은 어떻게 사유의 무능력에 이르게 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사유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사유하는 능력을 습득하는데 실패하는가? 여기서 이런 문제를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나에게 그만한 능력도 부족하지만, 그것은 이념적 편향과 잘못된 지식과 신념에 의한 확증편견, 정치적 펜덤화와 고착화, 성장 과정에서의 인간성과 도덕성에 대한 소통의 결여 등에서 초래한다고 보여 진다. 어쨌든 여기서 그런 논의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논의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한 것처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또 펜덤화된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위선의 평범성’ ‘은폐의 평범성’ ‘침묵의 평범성’ ‘동조의 평범성’ 등이다. 그리고 그 ‘평범성’은 이기적이고 자위적인 ‘편의성’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상당 부분에서 정치인들은 자기 위선을 거침없이 자행한다. 심지어는 1년 전에 자기가 한 말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뒤집는다. 또 자기가 한 행동이 불리하면 철저하게 은폐하며, 타 집단에선 크게 문제시되던 행동도 자기 집단에선 별것 아닌 것처럼 미화한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자기 집단에 불리하면 정의와 진실도 팽개친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바른 소리를 하던 자가 특정 정치집단에 소속되니 그 집단의 언어에 철저한 동조자가 된다. 심지어는 유능한 선전선동자와 최전선의 투사가 되기도 한다. 엊그제의 인권운동가가 자기가 속한 집단을 위해 침묵하거나 그 집단의 대변인이 된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스스로 사유를 포기했거나, 왜곡했거나, 마비시킨 현상들이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일련의 ‘평범성’들이 이념으로 확증 편향된 말과 행동을 집단화하며, 상당수의 대중이 자기 성향의 인물과 정치집단 편들기에 몰입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에는 자기와 자기 집단만 존재하지 타자와 타 집단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집단을 중심으로 벌어진 그런 여러 ‘ 평범성’들이 일반 대중들의 삶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가끔 판단 불능, 도덕 불감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정치적 행위나 사건들의 중심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유 부재의 ‘평범성’들이 타자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성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나와 내 집단, 나와 내 이념만 소중하지 타자와 타 집단 특히 국민이란 대중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다. 둘째는 말과 사건이 행위자에 집중되어 있지 타자에 집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의 타자는 국민이다. 행위자인 그들은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을 관객으로 한 타성에 빠진 배우이다. 타성에 빠진 그 배우에게 사유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유하는 국민의 몫이기도 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린 우리 안에 자기 욕망과 호기심만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과 호기심도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 사회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아이히만의 3대 무능력’을 탈피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가 더 엄격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정치지도자들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행위자가 아니라 그 행위의 대상자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는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의 가해자들이 신미균의 시 《돌》에서처럼 늦었지만 “미안하다”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호기심과 욕망이란 자기 중심성으로 던져지는 수많은 《돌》이란 피해자들이 조금이라도 위안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은 언제쯤 도래할까? 지금부터 《돌》 하나라도 함부로 던지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