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의 비정한 숨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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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래트럴>, 마이클 만의 결벽과 완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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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래트럴>은 <히트> <인사이더> 등을 만든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짧은 순간을 다루고 있지만 그의 세계관이 한꺼번에 압축된 요약본이다. 완벽주의 거장 마이클 만이 그리는 황량한 도시의 오디세이를 따라간다
“<히트>의 로버트 드 니로를 기억합니까?” 지난 1999년 11월 4일, <인사이더> 개봉을 앞둔 마이클 만은 '살롱닷컴(salon.com)'과의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려 보라고 말했다. “회색! 그게 바로 내가 동경하는 거요.” 마이클 만의 과장된 제스처가 아니더라도 로버트 드 니로가 <히트>(1995)의 첫 등장 신에서 말쑥한 회색 슈트를 입고 있다는 것은 기억해낼 수 있다. 머리카락 역시 희끗희끗한 회색이었다. 마이클 만 감독은 <알리> 이후 3년 만의 신작 <콜래트럴>에서 냉혹한 킬러 역을 맡은 톰 크루즈에게도 역시 잿빛 머리와 회색 슈트를 요구했다. 거기엔 물론 이유가 있다. 그건 익명성의 색이었다. 마이클 만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누군가 경찰의 요구로 인상 착의를 설명해 본다고 하자. 중년의 중키에 흰색 셔츠에 회색 슈트를 입은 남자. 그건 누구나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무도 아닐 수 있다. 특수성을 부인하면서 익명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는 잿빛으로 물든 도시 속에서 경계를 온전히 긋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인간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콜래트럴>은 바로 그 비정한 잿빛이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의 평행선
<콜래트럴>은 어느 날 밤 LA에서 약 10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긴박하게 밟는다. 택시 기사 맥스(제이미 폭스)는 시간에 쫓기는 변호사 애니(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이제 막 내려준 참이다.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는 그의 택시에 회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빈센트(톰 크루즈)가 탄다. 빈센트는 지금부터 LA의 다섯 장소를 시간에 맞춰 정확히 가주기만 하면 6백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 제안의 실체가 드러나는 건 2004년 1월 25일 밤 9시 30분경, 그러니까 빈센트가 청부 살인 업자이며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담보(collateral)로 삼았다는 사실을 맥스가 알게 되면서부터다.
살인에 공모할 것인가, 살인을 막을 것인가. 평범한 소시민 맥스는 용감하게도 살인에 동참할 수 없다는 선택을 한다. 한편, 빈센트는 오늘 밤 안에 5명을 모두 흔적 없이 해치우고 오전 6시까지 공항에 가야만 한다. 이때부터 둘은 더 이상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팽팽한 평행선으로 대립한다. 여긴 바로 프로들의 세계다. 빈센트는 6년 동안 쌓아온 자신의 깔끔한 커리어와 정확한 일 처리에 흠집을 내려는 맥스에게 말한다. “맥스, 난 프로야, 프로라고!” 12년 동안 LA의 골목과 바닥을 누빈 베테랑 택시 기사 맥스 역시 자신의 꿈인 리무진 렌탈 사업을 위해 차곡차곡 월급을 저축해 왔다. 그는 LA를 손바닥처럼 훤히 알고 있다. 그가 빈센트의 살인 여행에 동참하게 된 이유도 그가 택시 운전에 있어 프로이기 때문이며 그가 거부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근면하고 청렴한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프로는 정확함이 생명이다. 이젠 정확성과의 싸움이다.
실제로도 완벽주의자로 소문나 있는 마이클 만 감독은 시계처럼 정확한 그들의 프로 근성에 생기는 균열의 순간을 개인 대 개인이라는 대립항의 공식으로 풀어놓는다. <콜래트럴>을 자세히 보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간이 맥스의 미터기, 휴대전화의 시계, 지하철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 등을 통해 계속 흘러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렇게 프로들의 세계가 대립하는 순간을 잡아내는 마이클 만 감독의 실력은 이미 <히트>에서 확인한 바 있다. “<콜래트럴>을 위한 리허설이었다”는 <히트>에서 LA 경찰 반장 빈센트(알 파치노)와 지능적인 도둑 닐(로버트 드 니로)이 서로 대립하는 지점이자 동시에 서로에게 매혹되는 부분 역시 프로페셔널리즘이다. 상대편의 정확한 계획을 간파하고 미리 매복해 있는 빈센트의 예측, 그리고 역으로 빈센트의 예측을 파악한 닐의 정확한 직감으로 구성된 영화는 크로스 퍼즐처럼 진행된다. 일 중독자인 빈센트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 “나란 인간은 내가 좇는 목표 그 자체”라고 못 박는다. 선을 넘어올 경우, 가차없는 프로 근성이 발동하게 되어 있다는 경고다.
마이클 만 감독은 <콜래트럴>에서 원인과 이유를 모두 숨기고 대립의 순간만을 카메라에 담는다. <인사이더>에서 기업과 언론의 더러운 자본주의 논리는 불빛이 희미한 <콜래트럴>의 밤거리에선 모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왜 빈센트가 5명을 죽여야 하는지, 맥스가 왜 빈센트를 막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지는 모두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드러날 뿐이다. 이건 처절한 원한 관계로 맺어진 납득할 수 있는 복수극이 아니다. 마이클 만이 주목하는 것은 어쩌다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 개인들이며, 그들의 비극이고, 그 비극을 농밀하게 그려내는 호흡과 속도다.
자네 좋은 놈인 거 알아
“커피나 한잔 하겠나?” <히트>에서 처음으로 닐과 대면하게 된 빈센트는 놀랍게도 그에게 커피나 한잔 하자고 제안한다. 보자마자 총부터 꺼낼 줄 알았던 이들이 내뱉는 이 유유자적한 대사는 바로 그들이 서로에게 직접적인 원한과 증오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심지어 빈센트는 닐에게 “만약 내가 자네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좋지 않을 거야”라며 이쯤에서 그만둘 것을 조심스럽게 요구한다. <콜래트럴>의 냉혹하고 염세주의적인 킬러 빈센트 역시 자신의 살인을 목격한 맥스를 죽이지 않는다. 그는 “왜 난 여태 죽이지 않은 거지?”라고 묻는 맥스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는다. <히트>의 커피숍 신처럼 평온해 보이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으로 뒤범벅된 명장면이 <콜래트럴>에도 나온다. 빈센트는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입원해 있는 어머니를 항상 방문한다는 맥스에게 병원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맥스의 어머니는 빈센트가 아들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다.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빈센트, 그리고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맥스의 얼굴 위로 차가운 안도감과 뜨거운 긴장이 드러난다. 그들은 친구로 만날 수도 있었으나 이날 밤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그런 가혹한 우연으로 만난 개인들이다. 대결 구도를 좋아하는 마이클 만의 영화에서 화려한 액션 신보다 대화가 중요한 건 그래서다. 그는 굉장한 수다쟁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쉴 새 없이 대화가 떠돌며 언제나 테이블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 명장면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인사이더>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주인공들이 전화로 얘기를 나누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콜래트럴>에서 맥스와 빈센트는 택시의 앞좌석과 뒷좌석에 앉아 자신들의 직업과 인생관, 우주의 법칙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이들은 상대가 누군지 안다. 연민, 혹은 이상한 연대감까지 느낀다. 그들은 서로가 좋은 놈인 것도 알고 있다. 빈센트는 맥스가 소매치기를 당하자 절도범들을 쏴 죽인 후 그에게 지갑을 되찾아주고, <히트>에서 빈센트는 자신이 죽인 닐의 손을 조용히 잡아준다. <인사이더>에서 가장 더러운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서조차, 개인은 결백하다. 그들에게 선과 악은 의미가 없다. 염세주의적인 악당에게도 고독하고 외로운 면모가 있으며, 정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려는 소시민 영웅은 죽음의 활시위를 당겨야만 한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건 단지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다. 맥스는 빈센트가 살인 청부 업자라는 것을 알고 중요 인물을 죽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빈센트 역시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맥스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히트>에서의 대결 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닐의 말처럼 동전은 앞 혹은 뒤다. 앞과 뒤가 동시에 나올 수는 없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인사이더>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개인에 대한 가장 처참한 비극을 말한다. 담배 회사의 유해 물질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고발을 둘러싼 수많은 배신과 음모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누군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상대방에게 위협이 된다. 그들은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회색 지대를 어느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훌쩍 넘어버린다. 그들은 비열한 거리 위에서 어쩔 수 없이 악당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영웅이 된다. 그냥 그렇게 선과 악 어느 곳에도 들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그들은 어느 순간 사건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을 응시하는 도시의 냉기
<인사이더>에서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 PD 로웰(알 파치노)은 담배 회사의 추악한 진실을 폭로하기로 한 와이갠드 박사(러셀 크로)와 그의 아내를 가리켜 “특별한 상황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콜래트럴> 역시 특별한 상황의 한 순간에 놓인 평범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며 정의의 입장에 서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을 내세우지만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차갑고 건조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아마도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일 것이며, 영화 전체가 살인과 죽음을 조용히 덮어버릴 것 같은 밤 신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작 <히트> 등에서 LA의 야경을 숭고하게 잡아낸 마이클 만 감독은 영화의 80%를 디지털 카메라인 바이퍼 카메라(viper camera)와 소니 HD 카메라로 촬영하며 어느 날 밤의 가혹한 순간을 생생한 질감으로 포착해낸다.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테크니션이자 스타일리스트인 마이클 만 감독은 인공적인 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현장의 불빛을 이용해 실루엣이나 음영만으로 거대한 도시에서 어디로든 꼼짝할 수 없는 폐쇄된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다. 어둠과 빛 가운데 서 있는 인물들은 그들이 비켜 나갈 수 없는 운명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 있는 것처럼 보이며 노란 빛이 도는 청회색 도시는 따뜻한 동시에 차가운 이중적 모습을 드러낸다.
스튜어트 비티의 시나리오 중 영화의 배경을 뉴욕에서 LA로 바꾼 마이클 만은 정제소 사이에 위치한 인적 드문 나이트클럽, 거대한 주차장을 끼고 있는 어두운 고층 빌딩처럼 다른 영화들 속에선 흔히 등장하지 않는 특별한 장소와 건축물을 통해 웅크린 야수와 같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늘 위에서 부감으로 잡은 LA의 풍경은 그 안에 속한 인간들의 죽음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비열한 숭고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1995년 <히트>를 발표했을 당시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존 래스홀로부터 '건축물을 다루는 마이클 만의 솜씨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래 제일이라 할 만하다'는 찬사를 받은 그는 <콜래트럴>에서 “LA의 풍경과 분위기가 인물들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는 LA를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히스패닉계와 한국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 근방을 코요테들이 어슬렁거리는 풍경, 그게 바로 LA의 특별한 점”이라며 초현실적인 기운마저 풍기는 이질적인 LA의 모습에 매혹됐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완벽주의자 마이클 만이 촘촘하게 설정한 장치에 비극성을 더해주는 건 영화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다는 설정이다. 마이클 만은 “영화 속의 하룻밤은 주인공들에겐 대단원의 결말이나 다름없으며 거기에 그들의 인생 전반이 담긴다”고 말한다. 아무리 긴 영화를 만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순간들로 영화를 구성할 줄 아는 마이클 만의 연출 능력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미리 계획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즉흥적으로 어떤 일도 가능한 밤은 찰나의 무시무시함을 건드린다. 염세주의자 빈센트는 근면한 삶을 통해 언젠가 자기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맥스의 꿈을 듣자마자 “10분 후의 일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비웃는다. 순간의 잔인함은 거대한 도시 속 개인의 삶을 신문에 조그맣게 나온 부고 기사만큼의 가치도 없게 만든다. <인사이더>에서 개인의 행복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와이갠드 박사는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난 쓰고 버려진 휴지 조각이 될 거다”고 자조한다. <콜래트럴>의 빈센트 역시 살인하지 말라는 맥스의 충고에 “LA의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누가 신경이나 쓸 것 같나?”라고 냉소하는데 그 냉소는 그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언제나 두드릴 수조차 없는 거대한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대결 구도로 환원한 마이클 만은 휴지 조각보다도 못한 개인의 죽음을 고즈넉하고 씁쓸하게 묘사한다. 마이클 만의 영화가 정의의 승리와 같은 엔딩의 외피를 입고 있어도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쓰라림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스템과 개인 간의 균열 때문이다. 마이클 만 감독은 단 한번도 정의가 승리한다고 얘기한 적이 없다. 그는 <알리>에서조차 영웅으로서의 알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스미스씨 워싱턴 가다>류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며 “언제나 이렇게 해야 한다는 법칙 같은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모든 건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온전히 악한 사람과 온전히 착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회색빛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언제나 대중 영화의 최전선에 서서 꼼꼼하고 유기적인 연출력으로 장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거장의 냄새를 풍기는 것도 바로 이런 이상한 균열 때문이다. 마이클 만의 위대함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진 틈새 속에 있으며,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중간자적 잿빛 세계관 위에 있다. 그는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잘 만드는 할리우드 감독이지만, 언제나 자신의 완벽한 걸작을 다시 한번 뛰어넘어 버린다. <히트>를 만든 4년 뒤 <인사이더>로 돌아왔고, 다시 5년 뒤 <인사이더>를 능가하는 <콜래트럴>을 내놓았다. 마이클 만은 언제나 영화 속에서 거짓과 진실은 혼동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LA의 지하철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라는 <콜래트럴>의 마지막 대사만큼은 우리 모두 죄의식을 공유하기엔 버거운 진실이다. 그 끔찍한 죽음의 비명 소리를 이보다 더 비정하게 묘사하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