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술 공예운동 (Art & Craft Movement)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사회
전분야가 변화되고 공업과 기계생산에 의해 제품들은 대량생산되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기계만능주의가 결국 생활속의 전통적인 미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옷감, 가구, 인쇄 등의 응용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수공업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회복시키기 고자하는 중세적 원리에 따른 시도가 미술
공예 운동을 출발시켰다. 이는 근대 디자인사에서 가장먼저 일어난 운동은 영국으로 윌리엄 모리스가 고딕 부흥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퓨진(A.W.Pugin)과 스승인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아 예술의 민주화를 주장한 수공예 부흥 운동이다. 근대 디자인 사에서 미술과 공예의
회복을 주장한 점에서 근대 미술 운동의 시초라 불리고 있다.
모리스는 1861년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Morris,
Marshallm, Faulkner Co)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질이 높은 벽지, 염색직물, 스테인드글라스, 양탄자, 실내장식용품 등을 스스로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제품을 수공업의 형식으로 디자인 하고 제작하였다. 런던의 레드 라이온 스퀘어에서 운영 되었고 신 고딕 및 중세양식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하고 제작하였으며 모리스가 “공식가구”라고 부르던 것은 장엄하고 정교하며 반면에 “일상가구”라고 묘사하였던 유형은 극도로 단순한
것이다.
부유층의 지나친 사치심을 조장하리라는 측면을 인정하였던 공시가구 모든 효과들이 풍요로운 상태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형태와 모양은 단순하고 평범하며 선적이거나 유기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양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식은 제작과정에서
주어진 것이다. 자연의 식물, 새, 동물의 형태들은 강력한 영감의 원천이며 대가로 간주되고 있는 윌리엄 모리스는 직물, 벽지 디자인에서 나타나고
있는 본질적으로 평평하고 2차원적인 양식화된 패턴 속에서 형태들을 사용하였다.
모리스의 이러한 혁신 운동은 1860년대부터 시작하여
건축가와 공예가들의 큰 호응을 받았으며, 1880년대에는 직인기술의 향상을 위한 몇 개의 조직도 결성되었는데, 1882년의 ‘센추리 길드’,
1884년의 ‘아트위키즈 길드’와 ‘미술공계 전람회협회’ 등이 그것이며 “미술공예” 라는 명칭은 “미술공예 전람회협회” 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최초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는데 수공예에 의해서 생산한 제품이 기계에 의해서 생산된 제품 보다 값이 매우
비싸며 수공에 의존하다 보니 소량만이 생산 가능하므로 대중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이들 직인적 공예운동은 기계능력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 시대를 역행한 듯하나, 예리한 문제점 제기와 세련된 미의식은 그 후의 공예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
아르누보(Art Nouveau)
아르누보는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으로 빅토르 오르타와 헨리 반 데 벨데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벨기에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유행시킨 전 조형분야에 걸쳐 곡선적이고 화려한 장식이 풍미하여, 건축의 외관이나 일상생활용품에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Oranic Form)에서 비롯된 장식을 이용한 하나의 양식을 의미한다.
미술공예운동에 있어서는 공예품의
미적수준을 높이기 위해 고딕을 표준으로 하는 조형 활동이 진행되었으나, 아르누보는 과거의 역사적 양식에서 탈피해 참으로 새로운 조형미의 창조에
도전한 것이다. 그것은 공예와 건축을 중심을 폭넓게 다양한 분야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은 19세기
전반의 기계문명에 대한 반성과 과거의 절충양식으로부터 탈피하여 공예품의 미적 품질을 높이는 전진적인 새로운 조형으로 향하도록 했다고 하는
의미에서 대단히 공헌도가 컸다고 할 수 있으나, 19세기 말경까지 혼미는 계속되고 있었다. 19세기 문명은 물질적인 진보에 따른 정신적인 측면이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예술은 근대화를 겨냥하면서 충분히 그 시대에 대한성격을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정확한 시대의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아르누보는 벨기에에서 일어나 그 영향은 전 유럽에 미쳐 각기 다른 특성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서 개화시켜 '900년 양식'이라고 불려지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유겐트 스틸(Jugend Stil)', 이태리에서는
'스틸 리버티(Stile Liberty)',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서는 '아르테 호벤(Arte Hoven)', 오스트리아에서는
'세세션(Secessin)', 영국과 미국에서는 '모던스타일(Modern Style)' 등으로 불려져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아르누보라는 명칭은 1895년 독일에서 시작된 잡지 '유겐트( Jugend)'가 발행되면서 '유겐트 스틸(Jugend
Stil)' 이란 용어로부터 유래하였으며, 같은 해 사무엘 빙(Samuel Bing, 1838~1905)에 의해 파리에서 개장된 상점의 이름
'라 메종드 아르누보 (La Maison De Art Mouveau)' 로부터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78년 사무엘 빙은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한 후 1896년 프로방스가에 미술품점을 열어 실내 장식을 반데 벨데에게 의뢰했다. 빙은 자신의 점포에 아르누보라는 이름을 붙여 곡선을
사용한 벨데의 장식과 더불어 이 말은 갑자기 평판을 받게 되어 순식간에 유럽전체에서 퍼지게 되었다.
식물의 모방에서 출발한
아르누보 양식은 당초 양식, 물결양식, 꽃의 양식, 국수 양식 등으로 불렸다. 식물의 곡선에서 오는 장식미를 그 특징으로 삼았으며 사치스런
재료의 사용과 섬세한 디테일, 장인 정신 그리고 아름다운 물결모양의 곡선무늬에 있었다. 식물과 같은 유기적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내는 아르주보는
역겨운 도시적 분위기가 제거된 머나먼 환상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곡선적인 화려한 양식을 풍미하여 건축의 외관이나 일상 생활용품에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에서 비롯된 곡선적인 장식을 애용한 것이 두드러진다. 동식물의 형태를 모티브한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였고, 종래에 그다지
채용되지 않았던 담쟁이덩굴의 감아 붙인 모습과 수선화, 단풍나무, 페릴컨, 백조, 학, 뱀 등의 장식 문양을 즐겨 이용하였다.아르누보의
대표작가로는 영국의 맥머드와 맥킨토시, 미국의 루이스 설리번, 스페인의 안토니오 가우디, 벨기에의 헨리 반 데 벨데와 빅토르 오르타, 프랑스의
기마르와 가이야르, 이탈리아의 다론코 등이 있다.
3. 유겐트스틸 (JugendStil)
뮌헨에서 발행하는 미술 잡지
유겐트에서 유래한 것으로 독일식 아르누보를 말한다. 아르누보에 비해 식물적 곡선을 패턴화하여 양식화, 추상화한 점과 중후함이 특징이다.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헨리 반 데 벨데가 선구자 적인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합스부르크가(家)가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고 당대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디자인 개념을 정립하는, 즉
아카데믹한 교육제도를 만들고 실천했던 일을 일컫는다. 이 디자인 세계에 눈을 뜬 사실 하나로 당시 비엔나에서는 새로운 미술사조들이 등장했었고
후세에 우리는 이 흐름을 '유겐트 스틸'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이 새로운 사조는 비엔나에서 특이한 회화 양식 즉 '빈 분리파'로 연계되어져
독창적인 비엔나 풍의 회화를 만들어낸다.
4. 세세션-분리파 (Secession)
신에술 양식인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1897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성행한 운동으로 과거의 모든 예술로부터의 분리를 목표로 하고,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창조하자는 운동이다.
전통 즉, 종래의 양식으로부터 분리를 주장하였다. 오토 와그너(Otto Wagner)와 조셉 호프만(Josef Hoffman)을 중심으로 주로
건축분야에서 일어났다.
1903년 조셉 호프만에 의해 빈 공방이 설립되어 기계에 의한 공예품, 가구 등의 제작판매가 실시되었다.
실천적 리얼리즘을 배격하고 시민예술을 추구하였으나 후에 오히려 귀족주의가 되었다.
표현주의의 영향을 곡선보다는 클래식한 직선미와
기하학적인 개성을 창조하였다. 분리파의 대표적 작가인 오토 와그너는 보수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미술을 주창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미술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5. 기능주의
기능주의는 19세기 후반 진보적인 건축가들에 의해
도입되어 근대 건축의 혁신적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예술 사조를 말한다. 기능주의는 디자인에 있어 아름다운보다는 기능의 편리함과 만족스러움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오토 와그너, 루이서 설리반등이 있으며 이들의 정신은 20세기 초반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마르셀 브로이어,
마르트 슈탐, 르 꼬르뷔제, 죠셉 알베르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작가들에 의해 이어지게 된다.
6. 독일 공작 연맹
(DWB:Deutsher Werk Bund)
19세기에 진행된 예술운동의 이론이나 실제는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러스킨이나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만 하더라도 단순히 역사주의 운동이라고 결론지을 수 없는 깊은 윤리감이나 내포되어 있었으며, 아르누보를 중심을 한 세기말의
운동도 단순히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젖은 '선향화화적'인 움직임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새로운 움직임은 모두 근대 디자인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독일에서는 미술학교와 미술 공예학교의 개혁이 성행되어, 예술과 공예와 공업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장 교육을 구체화 하려고 했으며 이는 기계화 시대에 있어서 교육기관과 산업을 결합시켜 나가려는 계획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상무성의 명에 의해 런던에 주재하고 있던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기계화의 가능성과
영국 전원주택의 소박하고 기능적인 우수함을 배워, 독일에 귀국 후 근대화에 주력하여 기계문명을 도입, '합리적 즉물론'을 강하게 내세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독일공작연맹이 1907년 10월 뮌헨에서 결성되고 쟈클리히케이트, 즉 즉물적인 조형운동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의 기본이념은
적극적으로 기계를 도입, 예술(예술가), 공업(제조업자), 수공예(크래프트맨)의 협력에 의해 독일 공업제품의 '양질화', '규격화'를 모색하여
이성적이고도 단순한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제품의 품질을 올릴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독일 공작 연맹은 기존의 일품 제작의 수공예
작업에서 벗어나 미술과 산업의 결합으로 공업제품을 양질화 규격화 하였으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미술을 주장하였다. 최초로 기계를 인정하여 미술과
공업, 수공예와 상업을 잘 결합하여 규격화된 합리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다. 이런 현대적 디자인 이념은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의 요람인 바우하우스를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7. 모더니즘(Modernism)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미래주의·다다이즘·형식주의(포멀리즘) 등의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리켜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운동을 통틀어 모던 아트(modern art)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으나, 이것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19세기 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리얼리즘)에 대한 반항운동이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전위예술(前衛藝術: 아방가르드) 운동의 한 형태였다.
8. 표현주의(Expressionism)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그뤼네발트ㆍ뒤러의 깊은 신앙체험과, 반 고흐ㆍ뭉크ㆍ마티스 의 강한 정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시작한
‘다리파’와 1911년 뮌헨에서 조직된 ‘청기사파’, 그리고 1919년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바우하우스’그룹들과, 1920년대에 전개 된
신즉물주의 등이 모두 표현주의에 포함된다. 표현주의란 말은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화가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주로
인상파나 자연주의파 화가들에 대한 강한 반발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표현주의는 정확한 관찰만을 앞세우는 과학만능을 혐오하고,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독일 철학자들 의 영향 하에서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표현주의는 화가들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강한 내적
표현주의(Intensive Expressionism)와, 자연과 외부세계를 표현한 외적 표현주의(Extensive Expressionism)로
구별될 수 있다.
9. 입체주의-큐비즘(Cubism)
입체파라고도 불리며, 1900~1914년에 걸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 혁신 운동으로 르네상스 이래의 사실주의적인 전통에서 해방시킨 회화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고 사물의 존재를 이차원적인 면의 분할로 재구성하였다.
큐비즘은 2차원적 화면에 3차원의 대상을 재현하는
문제를 제기한 세잔과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필두로 하는 초기 입체주의(세잔 입체주의)를 거쳐 다시점 양상들이 동시성 이미지로 융합되어 더욱
추상화하고, 재현과 추상의 균형 위에 순수추상의 토대를 마련한 분석적 큐비즘, 그리고 추상화된 화면에 현실의 사물을 도입하고 스텐실 기법의 문자
요소, 파피에 콜레, 악상블리쥬의 원리 색체의 재도입한 종합적 큐비즘(콜라주 큐비즘)의 3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다.
입체주의는
1차대전으로 인해 종식되었으나 그 후의 건축, 미술,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주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오르피즘,
섹숀도르(황금분할파), 순수주의 등이 입체주의에서 발전한 것들이다. 큐비즘의 색채는 면의 분할과 구성을 강조하면서 따뜻한 난색계통의 색체를
강렬하게 사용하였다.
10. 구성주의(Constructivism)
1913~1920년에 걸쳐 러시아 혁명기에 일어난
운동으로 정서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현대적이며 기술적인 원리에 입각한 예술을 주장하였다. 구성주의자들은 정치적인 혁명과
예술적인 혁명을 동일시하여 조형을 통한 사회주의 문화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구성주의의 색채는 기하학적인 요소와 함께 순수 스펙트럼상의 색을
사용하였다.
11. 데 스틸(De Stijl)
데 스틸은 네덜란드어로 양식이라는 뜻으로 네덜란드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1917년 결성한 조형예술운동(입체주의와 추상주의미술)그룹의 명칭이며, 잡지의 제목이기도 하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삼원색을 기본으로
하여 순수한 형태미를 추구한 데 스틸 운동은 순수성과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의 신 조형주의와, 조형물의 구체성을 중시하는 반 되스버그의
요소주의로 구분되어진다.
몬드리안은 1920년에 자신의 저서 ‘신조형주의’를 통해 신조형주의 라는 명칭을 소개하였다. 신조형주의의
기본 이념은 ‘새로운 조형성의 탐구’에 있으며 이 이념을 통해 몬드리안은 순수 조형의 세계를 추구 하였다. 몬드리안은 입체주의의 조형적 이념을
계승, 입체주의의 조형적 원리를 극대화하는 가운데 수직과 수평의 구조를 통해 회화를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환원 시 키고자 하였다. 색채는
3원색과 흑, 백, 회색 등 무채색에 국한 시켰다.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 은 모티브가 된 나무의 형태를 화면에서 사상시켜 나가는 가운데 전차
단순화, 추상화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몬드리안의 회화적 방법론은 1917년에 결성된 ‘데 스틸’ 그룹으로 이어졌다.
데스틸은
입체파에서 비롯된 조형 예술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으로 전개시킨 최초의 운동이었으며 조형 예술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그 원리는 회화, 건축,
디자인을 막론하고 모든 공간을 평면으로 간주하고 기하학적 형태와 삼원색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데 스틸'은 응용
미술에 의한 순수 미술의 흡수를 주장하였다. 당시 예술의 정신은 건축과 제품 및 그래픽 디자인을 통해 사회에 전달될 수가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데 스틸'은 건축, 산업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등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이 뛰어난 정신적-형식적 우수성을 지닌 그림들을
제작하였는데 비해, 반 되스버그는 조각, 건축, 타이포그래피에도 손을 대었다.
반 되스버그는 다다의 자유분방한 잠재력을 깨닫고
다다 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쿠르트 슈비터스를 네덜란드로 초청하였다. 이 두 사람은 타이포그래피의 디자인에 관한 과제들을 공동으로
연구하였으며, 반 되스버그는 다다의 타이포그래피와 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그는 바이마르에서 '국제 구성주의 및 다다 예술가
회의'를 소집하였다.
'데 스틸' 잡지를 디자인한 바가 있었던 엘 리시츠키도 구성주의 미술가의 한 사람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데 스틸'은 가시적 실재를 지배하고 있으나 사물의 외양에 의해 감추어져 있는 보편적인 법칙들을 추구하였다. 과학적 이론, 기계에 의한 생산,
그리고 현대 도시의 리듬들은 이러한 보편적 법칙들로부터 생성되는 것들이었다.
데 스틸 예술가들에게는 아름다움이란 작품의 절대적
순수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묘사, 외면적 가치들에 의존하는 것,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등에서 탈피하여 미술을 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의 작품 내용이 우주적 조화, 즉 전 우주를 꿰뚫는 질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념은 순수성,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조형물의 효과나 구체성을 중시하는 반 되스버그의 요소주의로
옮겨갔고,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를 넘어서 국제 구성주의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데 스틸'은 전후 그래픽 디자인과 회화, 건축에 있어서
이론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주도적 핵심이었다.
12. 순수주의(Purism)
1918년 프랑스의 오장팡과 르 코르뷔제가
입체주의를 계승하여 일어난 조형운동으로 필요 없는 장식과 과장을 배격하고, 간결하며, 정확한 조형미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기능성을 최대한
살리자는 것으로 기능주의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두 사람은 《큐비즘 이후》(1918)에서 우선 큐비즘의 업적을 비판하면서 건전하고
순수한 예술의 견고한 이론적 기반으로서 출발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 회화에서의 환상이나 과장 등 개성적 ·장식적 요소의 개입을 배제하고,
화면구성의 절대적 객관성을 요구하였다.
이 순수조형 이론은 《엘랑》지(誌)와 《에스프리 누보》(1920∼1925)를 통해 전개되어
새로운 정신으로서 회화에서 건축 ·공예 ·음악 ·연극,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에까지 미쳤다. 이 이론은 르 코르뷔제와 오장팡의 공저(共著)
《근대회화》(1924)에 총괄되어 순수주의는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neo-plasticisme) ·구성주의 등과 함께 추상예술의 주요한 한
유파를 이루었으나, 절대성과 완벽성을 지향하는 합리적인 엄격성 때문에 회화에서는 별로 새로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르 코르뷔제의 건축에서
결실을 보는 데 그쳤다.
13.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근대 건축과 디자인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월터
그로피우스가 독일의 바이마르에 창립한 종합 조형학교이자 근대디자인의 정점을 이룬 운동을 말한다.월터 그로피우스는 독일 공작연맹의 즉물적
조형이론을 이어받아 건축가로서 인정받게 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15년 국가주의 대두로 인하여 국외로 갔던 반 데 벨데에 의해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전쟁으로 실패하였다.
1918년 이후, 독일 도처에서 마침내 아카데미가변화가 일기
시작했으며, 정부의 후원과 함께 반 데 벨데가 맡고 있던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Weimar School of Arts and
Crafts)'와 기존의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Weimar Academy of Fine Arts)'를 통합하여 1919년 종합조형학교, 즉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를 창립했다.
바우하우스는 '바우휘테'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중세시대에 교회당을 건축 할
때에 목수, 석공, 조각가, 화공 등 다양한 부문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혹은 중세의 '장인집단'을 의미한다.바우하우스 교육의 기본 목표는
모든 디자인 분야가 하나의 총체예술을 달성할 수 있는 현대판 바우휘테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형적 상상력과 기술적 능력 을 결합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을 교육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바우하우스는 시대적 특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1기부터 4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1기는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Weimar Bauhaus) 시대(1919~1924)로
수공예가를 양성하려고 했던 공예학교의 성격이 강했다.제2기는 시립 데사우 바우하우스(Dessau Bauhaus) 시대(1925~1927)로
공업과 관련되는 모든 제품의 디자인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산업 디자이너를 양성하려는 디자인대학의 성격이 강했다.
제3기는
한스 마이어(Hanes Meyer)시대(1928~1929)로 학교의 성격을 좌경화시킴으로써 바우하우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며, 사회주의 노동대학
같다고 비판을 받아 결국 한스 마이어는 시로부터 퇴교명령을 받았다.제4기는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시대
(1930~1933)로 시립바우하우스로서 건축공과대학의 성격이었다.바우하우스는 1932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데사우를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1933년 나치스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망명 교사나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으며,
1955년에는 바우하우스 졸업생 막스 빌(Max Bill)이 다시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는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으로,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부임하고, 모호이너지가 시카고에 뉴바우하우스를 개설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즉 이들로 인해 미국 동부에서는
하버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중부에서는 일리노이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건축의 양대 산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위원회를
결성해 시카고의 건축가들을 일리노이공과대학(IIT :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초빙, 시카고 철골 고층
건물의 신기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완전히 폐쇄되기는 했지만, 이 곳에서 제작한 제품들은 많은 곳에서
모방되었다. 또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설계하는 방법 역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교수법과 교육이념 역시 세계
곳곳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 포함될 만큼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4.
아르데코(Art Deco)
아르 데코라티프(art d coratif:장식미술)의 약칭이며, '1925년 양식'이라고도 한다.
1925년 파리 장식 미술 박람회에서 나온 명칭으로 아르누보에 이어 1920~1930년대에 유행한 장식예술을 말한다. 재즈양식, 헐리웃 양식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유기적인 곡선을 위조로 한 아르누보와는 달리 직선, 동심원, 디하학적인 형태와 반복패턴을 선호하여 모더니즘과 장식을
결합하였으나, 일품성 이주의 수작업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아르 데코의 원천의 하나가 이국정서에 넘친 러시아발레단에 있었던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때는 화려한 색채의 기하학적 형태가 펼쳐졌다. 이러한 뜻에서 같은 1925년전(年展)에 르 코르뷔지에가
순정(純正)한 기하학에 의거하여 출품, 전시하였던 '에스프리 누보관新精神館'은 뛰어난 합리적 정신에서 아르 데코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나타냈다.
아르 데코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는 공예의 폴로, 브란트, 르그랑과 포스터의 카상드르 등이 있다. 패션계에서는 포와레와
샤넬이 아르 데코의 취미를 받아들였다. J.호프만이 주재하였던 빈공방(Wien 工房)의 작품은 그 고아한 취미성에 의하여 아르데코와 근접한다.
그리고 1930년 전후의 뉴욕의 건축장식에도 흥미 있는 아르데코 양식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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