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뉴스 273/1017] 『사람냄새 나는 클래식음악』과 9일만의 귀환
꼬박 아흐레 만에 고향집에 돌아왔다. 지난해 7월이후 처음이니 1년도 훨 넘었다.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고 할까. 흐흐.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께 “나, 안보고 싶었어요?” 물었더니 그냥 웃으신다. 용인집에서 ‘서울나들이’라는 일기를 두 편 썼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많이 만난 것같기도 하고, 한 명도 못만나고 온 것같다. 모처럼 고향도 아니고, 아내 부재의 집에서 종일 책이나 읽으려 했는데, 나의 일기를 본 오랜 친구가 그제 아침 일찍 전화를 했다. “올라왔으면 함 봐야지” 서운하다는 투다. 그렇다. 이 친구는 보고 내려가야지.
12시 서초구 양재역 12번출구에서 2년여만에 만나니 반갑다. 그동안 서너 차례 전화만 했는데, 말년에 행운의 직장을 종로구에서 서초구 보건소로 옮겼다고 한다. 나보다 두 살 위이니 55년생 양띠, 셋째형과 갑이다. 1976년 3월 원광대학교 캠퍼스에서 같은 학과 동기생으로 우리는 처음 만났다. 1년 짧은 기간 동기생으로 똥배짱이 잘 맞았다. 전남 순천에 사는 또 한 명의 친구와 오죽하면 ‘3총사’라고 불렸을까. 그 친구도 양띠. 형뻘이므로 마구 ‘00야’ 하기가 좀 거시기하여 ‘이형’ ‘장형’ 이렇게 지금껏 부르지만, 마음을 허許한 우정에 ‘나잇살’이 무에 그리 중헐까. 77년 내가 서울로 ‘도망’한 이후에도 사귐은 계속 됐으니, 어언 40년이 넘었다. 아아-, 어찌 흐르는 것만 세월뿐이라더냐, 우리의 삶도 이렇게 흘러 흘러, 노후를 앞두고 있는 것을.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대학 졸업, 병역, 결혼, 취직, 득남, 손편지도 제법 오갔다. 그때마다 나는 서두에 그에게 꼭 ‘아형雅兄’이라고 했다. 마음이 지극히 맑은, 눈곱만큼도 삿되지 않다는 뜻이다. 호학심好學心으로 똘똘 뭉쳤기에 당연히 교수가 될 줄 알았다. 외국어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고급 언어인 라틴어를 비롯하여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까지 수준급이었다. 실제로 그 짧은 1년, 그로부터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워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 Le Petit Prince』를 원문으로 읽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친구라지만 솔직히 외경畏敬스러웠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나,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10년도 못채우고 미련없이 사직을 한 후 ‘돼지 똘똘이(학원 수강생을 뜻하는 그의 조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20년도 더 일했다. 학원 강사는 더 체질에 맞지 않을 거라 확신했건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그랬는지 2000년 서울로까지 진출, 유명 학원에서 이름을 날렸으니 실력이 보통은 넘었으리라. 난다긴다 하는 서울 명문대 출신들이 나래비 선 학원가에서 지방대 출신으로 20년도 더 넘게 버티었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나같으면 꿈도 못꾸었을 일. 또 한번 존경했었다.
그런 그가, 어느해 겨울 종로 지역신문(종로신문)의 편집국장 명함을 들고, 자신이 직접 쓴 칼럼이 실린 신문을 들고 찾아와 세 번째 놀랐다. 아무리 지역신문이래도 편집국장이라니? 언제 기자가 되었다고? 언제 글(기사)을 써봤다고? 한마디로 “할만하다”는 것이었다. 오매? 오마이갓이 따로 없었다. 국회도 가고, 서울교육청도 가고, 직접 취재도, 전화취재도 하며 기사를 작성하는 1인 몇 역의 기자가 된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하지 못할 일을, 실실실 웃어가며 잘 해나가고 있는 친구가 달리 보였다. 발행인이 졸지에 죽으면서, 우리의 편집국장 친구가 또한번 기똥찬 직장을 찾은 게, 임기 5년의 종로구청 주차관리요원이었다. 구역을 하루에도 수십 번 순찰하며 불법 주정차 차량을 단속하여 딱지떼는 일. 골목골목 운전 귀신까지 되다니, 운전도 서툰 나로서는 네 번 놀랄 일. 사회의 어떤 일에도 잘 적응하지 못할 것같은 딸깍발이, 고리짝샌님, 열혈 학구파가 어찌 저리 적응을 잘 할꼬? 이형은, 서울에서 40년을 살면서도 생각이 퇴보적이어서 그런지, 무조건 정년퇴직 후 고향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 운운하며 노후 보낼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늘 부끄럽게 했다.
그런 이형을 엊그제 2년여만에 만났는데, 서초구청 보건소의 ‘시간제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금연교실을 운영하며 금연구역내 흡연자들을 단속하는 일도 하는데 3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아하-, 이렇게 생활력이 강했구나. 볼 때마다 늘 여전히 ‘맑은 얼굴, 착한 마음’에 놀란다. ‘한번 아형雅兄’은 영원히 아형이다. 왜냐하면 ‘알프스 자락 아래에서 살고 싶다(그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20대초의 꿈을 지금도 고스란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엔 사회생활의 풍파에 시달리며 프랑스어를 많이 까먹었다며 방송대학교 프랑스학과에 입학했다며 전과목 A학점 장학금을 받았다여 좋아하기도 했으나 ‘손자 돌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라 일시 휴학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나이(66세)에 그처럼 순진한 듯, 선한 심성을 갖고 사회생활 하기는 쉽지 않을 터. “스위스는 언젠가 꼭 갈거야”라며 싱긋이 웃는 그를 만나는 것은 나의 즐거움 중의 하나다. “고향집 고쳤다는데 한번도 가보지 못하고. 일간 시간 한번 낼게” 미안해 하는 친구의 말만 들어도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생우럭탕 한 그릇씩을 먹은 후 ‘사줄 책이 있다’며 강남역 근처 교보문고에 꼭 같이 가잔다. 2년 전인가도 광화문 교보문고로 악착같이 끌고가 사준 책이 『라틴어수업』이었다. 지금껏 다 읽지도 못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대학시절 몬시뇰 정의채님에게서 라틴어를 1년 동안 배우기도 했었는데. 대학때 1, 2학기 A학점을 받은 것은 라틴어과목이 유일했다. 흐흐.
신간 『클래식음악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지성호 지음, 소리내 2020년 5월 발간, 446쪽 18,000원)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친구복이 많을까. 나는 친구들에게 해준 것이 쥐뿔도 없는데, 지금도 이런저런 책을 부쳐주거나 이렇게 직접 책을 사주는 사람이 있다니? 고향집 사는데 보태라고 500만원을 흔연히 준 전직장 사장도, 유튜브 활동 잘 하라고, 명절 잘 쇠라고, 손자 장난감 사주라고, 아들 학비에 보태라고 금일봉을 주는 원로선배들도 무릇 기하였으니,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하긴 구했나 보다.
고등학교 3년 선배라는 저자를 ‘한국의 모차르트’‘불운한 천재작곡가’라고 서슴없이 소개한다. 클래식음악은 ‘1(하나)도’모르는 나로선 사실 거들떠 보지도 않을 책인데, 간곡하게 강추하는 책이므로 뭔가 특별하겠지 싶어 책을 떠들어봤다. 베토벤의 ‘아델라이데’을 내용으로 하는 첫 장 ‘프렐류드’를 읽으니 금세 감이 잡힌다. 진짜 사람 냄새가 퐁퐁 난다. 이건 내 체질의 책이다.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다. 오늘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 책을 독파할 작정이다. 탐독耽讀의 맛을 아시는가? 맛본 적이 있으신가? 내일 새벽엔 이 책의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쓸 수 있겠지. 기대해도 좋을 듯.
첫댓글 친구속에 갇혀있다간 책을 안 읽을수없게 생겼네.어제는 뉴욕좀비를 오늘은 『클래식음악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를 주문할까 말까 망설인다
아하 내일 감상문을 올린다니 읽어보고 사야겠다..가슴속 감정속엔 나도 책을꽤나 좋아하는데예전에 술끊고 2년만에 삼백여권 책도 읽어봤는데 머릿속에 별 기억은 없다.예전엔 영화만봐도 친구들에게 실감나게 침을 튀기며 얘기를 해주곤 했는데 좋았던 기억력은 점차사라지고 손에 휴대폰을 들고 휴대폰을 찾는 세대가 됐으니 나 걱정스러운 인간이됐다.
이번 기회에 어른들은 치매 예방한다고 화투친다는데 난 책이나 읽어봐야겠다.
글로 충고아닌 무언의 충고를 해수는 친구가있어서 난 좋다
친구야 부럽고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