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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배-동료-후배님 그리고 친구-지인 여러분께:
2020 년을 보내면서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소생이 출간한 영문 저술 (http://www.icks.org/hugo33kim/) 을 기초로 하여, 문명사 이야기를 한글로 써서 격주제로 연재해 왔습니다. 여기에 근세초기 유럽 (1400-1715) 의 정치와 종교 (연재 11) 을 첨부 하오니, 시간이 되시면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김휘국 삼가 드림
Hugo W. Kim (김휘국), Fairfax, VA
Phone: (703)-585-3748 (Mobile)
E-mail: hugo33kim@gmail.com
Web: http://www.icks.org/hugo33kim/
문명사 이야기
근세초기 유럽 (1400-1715) 의 정치와 종교 (연재 11)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서, 근세초기 유럽은 많은 역사적 변혁을 가져왔다. 문예부흥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엘리트 운동으로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고, 인간내면을 탐구하는 인본주의가 발전하였다. 유럽은 국가권력이 강화되고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교회가 타락하고 교황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가운데 종교개혁이 진행되었 다. 스페인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하였고, 포르투갈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서 칼카타에 도착하였다. 이로 인하여 유럽은 이들과 무역을 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주요 경쟁국이 되었다. 한편 유럽은 봉건제도가 몰락하여, 경제적 국가주의가 지배하는 중상 주의로 무역흑자를 추구하였다. 또한16세기부터 정치철학과 경제사상은 과학의 발전으로 자유화 되었고, 전통적 서구 문명의 질서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본 연재는 근세초기 유럽의 정치와 종교로서 (a) 문예부흥, (b) 종교개혁, (c) 지리상의 발견, (d) 종교 전쟁, (e) 국가의 건설 (절대왕정과 공화정)의 순으로 논의한다.
(a) 문예부흥의 시대: 회복과 재생
14세기 유럽은 흑사병, 정치적 무질서, 종교적 분파, 경제적 불황 으로 비참 하였다. 인간들은 신의 이름으로 쓰여진 성경을 위한 도구 였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 없이 천년 동안 살아왔다. 그들은 신과 함께 또는 신이 없이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여가가 필요하였다. 성장하는 자아의식은, 인간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해하고, 지적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 과 자기 실현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문예부흥은 중세에 잃어버린 자아발견 과 자기실현의 정신이며, 예술과 문학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 성을 표현하는 인문주의와 개인주의 정신에 있었다. 그들은 고대 문학, 예술, 이념의 재생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명을 회복 하고, 고대와 현재 그리고 철학 (이성)과 신학(신앙)이 화합하기를 원하였다. 문예부흥은 이탈리아의 부유한 도시국가에서 엘리트 운동으로 시작하여 1350-1550 기간에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문예부흥의 원동력은 자아의식의 발현에 있었으나, 플로렌스등 이탈리아 도시들이 모직산업으로 번창하고, 메디치가 금융산업에 성공하여, 크게 후원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이탈리아 반도: 플로렌스 (Florence): 양털산업이 발전하여 상인 계급이 토지귀족을 누르고1293년에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343년에 인구91,500명으로30,000명이 200여개 공장에서 일하였고. 투스카니, 피사, 리보르노를 정복하여, 상품은 제노아 상인이 피사를 경유 수출하였다. 1378년 노동자계급이 반란으로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하였고, 1382년에 상공업자가 세력을 잡아 과두정치체제를 확립하고, 도시위원회들을 구성 하여 통치하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가 금융업, 제조업, 무역업으로 성공하여, 민주주의 체제의 도시에 재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교회를 짓고, 전쟁위원회의 위원으로 정부에 전쟁비용을 대출하였고, 문학 철학 예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 (1469-92)는 공화국의 통치자로, 피사 대학과 플라톤 학원을 복원 확장하였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여 플로렌스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인문주의자들 (Humanists)은 종교로 부터 철학을 지향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탐구하였다. 부유한 이탈리아 도시 는, 귀족의 기사도나 성직자의 스콜라 문화와 달리, 인간의 존엄과 자기실현의 이상을 구현하는 지적 예술적 영역에서 개인주의와 세속주의가 성숙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와 그리스 철학을 조화시키려 하였고, 플라톤의 대화편이 신약성경과 대등 하였다. 새로운 인문주의 문화는 교육에서 문법, 수사학, 시문학, 역사, 도덕철학을 포함하였다. 플로렌스가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상층계급의 가정은 그들 자녀들이 공화국 지배계급에 합류하기 위하여, 상업적 도제보다 인문주의 교육을 선호하였다. 페트라르카의 서정시와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문예부흥을 선도 하는 작품이었고, 그들 사후에 살루타티, 니콜리, 브루니, 발라 등이 문예부흥에 기여하였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52-98)는 도미니칸 교단의 설교자로서 통치자인 로렌초를 공격하고, 교회와 교황의 타락을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찰스 8세가 1494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메디치를 축출하자, 그는 공화정을 수립하여 민주정치를 도입하고 종교개혁을 실현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교황의 설교금지에 불응하여, 교회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1498년에 화형을 당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498-52 사이에 외교 군사를 담당하였으나, 스페인 침공으로 인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 통치권을 회복한 후에 그를 축출하였다.
밀란 (Dutch of Milan): 비스콘티 가문이 공국을 건국하여 1395-1447 기간에 통치하였고, 용병대장의 아들 프란체스코 스포르자 는 20여년간 군에 봉사하고 지휘관이 되어, 공작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을 계승하여 1450-66기간에 밀란을 통치하였다. 차남인 루도비코는1481년 부터 조카를 섭정하고, 조카의 사후 1494년 공작이 되어, 농업 공업 상업을 발전시키고, 운하와 항만을 건설 하였다. 밀란은 부유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을 지원하였다. 루도비코의 승인하에 찰스8세가 밀란을 경유 나포리 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루이 12세가 밀란공국의 후손 으로 상속권을 요구하였으나, 루도비코와 적대 관계였던 베니스와 세금으로 핍박받는 밀란주민들의 지원으로, 루이12세는 1500년 밀란을 정복하여 루도비코를 축출하였다.
베니스 (Republic of Venice): 베니스는 프랑크와 비잔티움 사이 에서 중계무역으로 생존하였고, 아드리아 해의 해상접근을 방호 하는 대가로 비잔티움 으로부터 관세면제 특혜를 받았다. 베니스 는 제4십자군 원정에서 수송을 전담하여 세력을 확장하였고, 동지중해에 무역거점을 건설하였다. 제노아 공화국과는 해상 경쟁 국으로 120여년에 걸쳐 4회의 전쟁을하여 결국 승리하였고, 동지중해 무역독점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15세기에 키프로스와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고, 달마티아와 알바니아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453년 오토만 제국이 비잔티움을 정복한 후, 베니스는 그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고. 1499-1503 기간에 전쟁에 패하여 동지중해의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나폴리 (Kingdom of Naples): 페르디난드 1세가 1494년에 사망 하자, 프랑스의 찰스8세가 안게빈 혈통으로 나폴리 왕위계승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찰스8세가 나폴리왕 알폰소2세를 축출하자,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개입하여 프랑스군을 퇴각시키고, 그의 사촌 알폰소2세의 아들 페란티노를 복위시켰다. 그가 1496년에 사망하여, 그의 숙부인 프레데릭4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찰스의 사촌 루이12세가 1501년에 나폴리를 침공하여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왕국을 분할하였다. 그러나 1504년에 아라곤 (스페인)이 전쟁을 계속 하여 프랑스군을 축출한후 페르디난드 2세가 통치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스페인왕 찰스5세 (1516-56) 가 통치를 계승하였다.
유럽의 국가와 정치: 프랑스는 1453년 백년전쟁에 승리하여 영국 군을 축출하였고, 왕은 의회의 승인없이 계속적으로 세금을 부과 하고 상비군을 유지하여, 귀족의 통제에 도움이 되었다. 루이12세 (1498-1515)는 사촌인 찰스8세 미망인과 재혼하여 브리타니를 병합하였고, 위에 언급한 대로, 제2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하여 밀란과 나폴리를 정복하였으나, 후자를 페르디난도 2세 에게 양도 하고 철수하였다. 프란시스1세 (1515-47)는 이탈리아 예술가들 을 후원하여,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이, 프랑스에 문예부흥을 가져 왔다. 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포로가 되었고, 석방되어 재차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헨리2세 (1547-59)는 신교를 탄압 하고, 합스버그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전쟁을 계속하였다.
영국: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전비의 증가와 인명의 손실로 경제가 위축되고,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며, 부패와 혼돈으로 대격변에 직면하였다. 잭 케이드 반란 (1450) 은 부패, 행정실패, 권력남용 에서 오는 불만, 패전과 부채에서 오는 분노에 연유하였고, 이는 15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반란으로 케이드는 체포 되어,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장미전쟁 (1455-85)은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의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으로, 랭커스터의 헨리4 세로 부터 시작하여 30년 동안 왕이 6회나 바뀌어, 랭캐스터 가의 헨리7세 (1485-1509) 가 전쟁을 끝내고 튜더왕조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봉건제후와 기사계급이 몰락하고 절대왕정이 수립되었 으며, 헨리는 요크가의 에드워드4세 딸인 엘리자베스와 혼인하여 장미전쟁을 종식하고, 왕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는 요크가의 귀족영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영지를 확장하고, 성실재판소를 설립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상공업을 장려 하고, 합법적이며 공평한 거래로 번영을 추구하였다. 그는 평화를 위하여 1502 년 자신의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제임스4세와 혼인을 시켰으나, 영국의 신성동맹에 반해 제임스는 프랑스의 편에 가담하였다. 헨리8세 (1509-47) 는 6회의 결혼에서 교황과 갈등하여, 영국교회를 로마로 부터 분리하였고, 수도원과 수녀원 을 해체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왕권신수설에 의존하여 영국헌법 에 급진적 변화를 가져와 권력을 확대하였다. 그는 토마스 울시, 토마스 모어, 토마스 크롬웰 등 장관수장을 통하여 정무를 수행 하였다. 웨일스와 아일랜드를 통합하였고,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코틀랜드와 적대하여, 소득없는 전쟁을 하였다.
스페인: 15세기에 캐스틸과 아라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한 왕국으로, 서쪽에 포르투갈, 북쪽에 나바레, 남쪽에 그래나다 가 있었다. 1469년 캐스틸의 이사벨라 (1474-1504) 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 (1479-1516) 가 혼인하여 스페인 왕국이 되었고, 대등한 동반자로 각각 통치하였다. 캐스틸은 1479년 포르투갈의 캐너리섬을 병합하고, 1492년 그래나다를 정복하여 영토는 반도의 65.2% 인구는 830만이 되었다. 아라곤과 포르투갈의 영토는 반도의 17.2% 와 15.5% 였으며, 인구는 각각 15% 내외 였다. 스페인은 초기에 경찰력을 유지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폐지하였다. 1492년 이사벨라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토록 지원하여 하이티에 도착하였고, 후속 탐험대는 남미대륙을 정복 하였다. 스페인은 1478년에 종교재판을 도입하여 개종하지 않은 모슬렘과 유대인을 추방하면서, 인력과 자본의 유출로 경제가 약화 되었다. 페르디난드는 1515년 나바레를 침공 병합하였고. 그의 외손자 찰스 5세가 1516년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였다.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15세기 말 신성로마 제국은 독일어 를 사용하는 중앙 유럽의 모든 국가와, 네델란드, 로레인, 프랑슈-콤테, 사보이, 북부 이탈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를 포함하는 300여 독립 반독립 국가로서 인구1500-2000 만병이 되었다. 제국의 의회는 1356년 황금황소 (Golden Bull)를 제정 하여 7명의 선거인단—4 의 영주 (플라틴, 삭소니, 브란덴부르그, 보헤미아)와 3명의 성직영주 (메인츠, 트리에르, 콜론)—이 황제 를 선출하였다. 합스부르그 왕국은 1273년 루돌프 공작이 세우고, 1282년에 오스트리아 공국을 병합하였으며, 합스부르그 최초의 황제는 프레데릭 3세 (1452-93) 이며, 그의 아들 맥스밀리안 (1508-19)은 결혼 으로 버건디와 네델란드를 취득하였다. 맥스밀 리안의 아들 필립과 스페인공주 조안나와 정략결혼으로 출생한 찰스 5세 (1519-56)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스페인, 남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버건디, 남아메리카를 통치하여, 합스브 르그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 스페인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여 1525년 마드리드 평화조약을 체결 하였다. (2) 1526년 오토만 터키가 항가리를 패퇴시킬 때, 항가리와 보헤미아 의회는 찰스5세의 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3) 찰스는 독일에서 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 반대하였으나, 급속히 확장하는 신교의 종교적 정치적 세력을 막을수가 없었다.
북부 및 동부 유럽: (1) 스칸디나비아는 토지귀족이 세력을 장악 하여 농민은 반노예상태 였으며, 덴마르크는 왈데마 4세 (1340-75) 가 왕권을 확립하여 북해지역에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그의 딸 마가렛은 남편 사후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을 통합하여 1412 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러나 귀족, 한자 상공인, 농민반란, 성직자 간섭 등으로 반란이 일어나 3국으로 다시 분할되었다. (2) 폴란드 여왕과 리투아니아 왕자가 혼인하여 1386년 단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500년경 인접국가와 분쟁으로 폴란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이 의회를 장악하여 봉건제도를 강화하며, 왕을 선출하는 권한을 확보하였다. 보헤미아는 1212년에 왕국 으로 독립하였고, 1335년에 실레지아를 흡수하였으나, 15세기에 폴란드가 통치하였고, 1526년 합스부르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항가리는 몽고 침략으로 왕권이 약화 되었고, 16세기에 오토만의 위협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통제를 강화하였다. (3) 러시아는 몽고 의 침략 (1223-1480) 으로 남부지역은 고통을 받았다. 이반3세 (1462-1505) 는 리투아니아-폴란드를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 하였고, 반란을 벌하는 수단으로 노브고로드의 재력과 세력이 있는 가문을 모스코바로 이주시켰으며, 여타 공국들도 정복, 매입, 결혼 등으로 흡수하였다. 이반은 부패를 유발하는 교회의 토지는 몰수하였으나, 그의 아들은 교회의 편이 되었다. 러시아의 왕들은 드니에프와 볼가를 통제하여, 모스크바에서 볼틱해와 카스피아해 를 연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오토만 터키: 비잔틴 제국이 서부 라틴국가와 모슬렘 중동국가 간에 완충 역할을 할때에 오토만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몽고의 침략과 셀죽의 붕괴, 비잔틴 제국의 약화, 발칸 국가들의 분해, 라틴 영향에 저항하는 그리스, 기독교 세계의 균형을 유지 하는 세력부재는 오토만의 영토확장에 도움이 되었다. 오토만은 정복지에서 봉건주의 원칙을 존중하였으나, 행정을 중앙통제 하면서, 아시아와 발칸에서 영토를 확장 하였다. 무라드1세 (1362-89) 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봉신국가를 수립하였다. 메메드2세 (1451-81) 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고, 오토만 함대가 흑해를 항해하면서, 해안국가는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게하였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에서, 오토만제국의 전선을 확정하였고, 오토만 함대가 공해상에서 베니스에 도전함으로서, 유럽정치의 일부로 역할을 하게되었다.
유럽과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세력균형을 유지 하기 위하여 외국군대를 이용하였다. 밀란은 인접국가들이 국력을 강화하는 동안 고립을 느껴 프랑스군이 개입하도록 유도하였다. (1) 제1차 전쟁: 찰스8세가 나폴리 상속권을 주장하여 침공에 성공하였으나 주민의 저항과 페르디난드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 (2) 제2 차 전쟁: 루이 12세가 밀란과 나폴리의 상속 권을 주장하여, 베니스와 연합으로 침공하여, 밀란을 분할하였다. 프랑스군은 나폴리를 정복하고 스페인과 분할하여 통치하였으나, 리욘조약으로 프랑스는 밀란을 계속 지배하고, 나폴리를 스페인에 양도하였다. (3) 캠브라이 동맹: 베니스가 부강해해지자, 교황주도 로 인접국가들이 캠브라이 동맹을 결성하였고, 프랑스가 베네토를 점령하였다, 교황은 베니스의 붕괴가 이타리아애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의 연합을 해지하고, 베니스는 프랑스에 잃은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세력확장을 멈추 었다. (4) 제3차 전쟁: 찰스5세의 왕위계승으로 프랑스는 신성 로마제국과 스페인에 포위되었고, 영국의 헨리8세도 교황과 함께 스페인에 연대하였다. 프랜시스1세는 프랑스군을 놈바르디로 진격시켰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마드리드 조약으로 석방 되면서 요구했던 상속권을 포기하였다. (5) 코그낙 동맹: 교황은 찰스5세의 세력이 확대되자, 프랑스 영국 베니스 플로렌스 밀란 과 함께 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에 진입하자, 교황은 위협을느껴 군대를 철수하였고, 베니스도 동맹을 탈퇴하자, 프랑스군도 철수하였다. 찰스5세는 플로렌스와 로마를 접수하여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6) 여타의 전쟁은 프랑스 와 스페인 간의 이탈리아 분쟁에 외세가 개입한 전쟁 이었다.
도표 3-1. 유럽과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전쟁 | 기간 |
제1차 이탈리아 전쟁 | 1494-1498 |
제2차 이탈리아 전쟁 | 1499-1504 |
캠브라이 동맹과 전잰 | 1508-1516 |
제3차 이탈리아 전쟁 | 1521-1526 |
코그낙 동맹과 전쟁 | 1526-1530 |
이탈리아 전쟁 (4) | 1536-1538 |
이탈리아 전쟁 (5) | 1542-1546 |
이탈리아 전쟁 (6) | 1551-1559 |
이탈리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전쟁으로, 교황이 종교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맹을 결성하거나 해체하면서 국제관계를 조종하여, 터키나 영국까지 참전하였다. 전쟁이 75년간이나 지속되어 인명과 재산의 심대한 손실로 경제가 파괴되고, 대중은 과중한 세금으로 간신히 연명 하였다. 선박손실과 해군약화로 해안방어가 취약하여, 모슬렘 해적이 선박과 해안도시를 습격하고 인질을잡아 노예로 팔았다. 이탈리아 전쟁은 반도를 향후 2세기 동안 스페인이 지배하는 결과 를 가져왔다. 또한 이탈리아에 불운이 다가왔다. (1) 포르투갈의 인도항로 발견은 이탈리아의 지중해 상권에 타격을 가져왔다. (2)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황의 세입을 감소하였고 지중해 상권의 약화는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경제를 약화시겼다. (3) 미대륙의 발견은 장기적으로 대서양 국가의 번영과 지중해 국가의 쇠퇴를 가져왔다. (4) 캐톨릭교회의 반개혁운동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무질서와 도덕적 붕괴에 해로움을 더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 가톨릭교회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제기 하였다. (1) 부의 과다 집중: 16세기 초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가톨릭교회는 국가전체의 1/3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 이유는 1) 신도가 사망시에 유산의 일부를 교회에 헌납하였다; 2) 교회가 참화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소유권을 보관하여 사망시에 자동 귀속되었다; 3) 십자군 참전시 교회에 자산을 저가매도 하였다; 4) 수도원의 새로운 개척지는 교회의 자산에 편입되었다; 5) 교회가 자산을 소유하면 매도하지 못하였다; 6) 교회의 자산은 통상 면세 되었다 등 이다. (2) 성직매매: 많은 주교들은 지역의 성직자이며 통치자로서 왕과 교황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 하고 군대를 유지하며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세속적 이었다. 어떤 교황은 성직을 팔아서 교회의 비용을 충당하였다. 주교나 추기경의 임명과 교황 선출에도 금전거래가 많았다. 로마 에서는 모든것이 매매이고 돈없이 되는 일이 없었다. (3) 성직자의 금욕: 성직자의 개인적 도덕성이 타락하여 규율을 상실하였다. 수천의 수도사들이 종교적 봉사에 태만하고, 성 밖에서 배회하며, 여인숙에서 음주하고 정사하였다.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도 사랑 하지도 않았으며, 녹슬은 정신으로 육욕에 심취되어 다가올 인생 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독일에서 수천의 신부들이 내연의 처를 가지고 있어, 시기스문드 황제는 성직자 결혼이 공공 도덕성을 개선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면죄부 판매: 죄에 대한 고해성사를 면제하는 대신, 반복적인 기도, 자선품을 기증, 성지 순례, 십자군 참전, 금전 기증, 노동 봉사 등 선행으로 회개하여 죄를 사하였다. 이와같이 면죄부는 죄에 대한 벌의 일부를 사하는 것이었으나 십자군 전쟁이나 대성당의 건축을 위해 남용되었다. 현실적으로 면죄부는 뉘우치거나-고백하거나-용서되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구매자는 단순히 신의 구원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신학자들은 기부로 면죄를 받는다는 것과 연옥의 개념에 대해 부정적 이었다. (5) 성직자의 법적특권: 성직자들이 민사법으로 부터 면제되어 교회법정에서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도덕으로 부터 종교의 분리, 선행보다 정통적 믿음, 과도한 의식, 수도사들의 무위도식, 기적으로 인기영합, 교황의 파문과 성직정지의 남용, 교황의 과도한 출판검열, 종교재판의 잔학성 등이 비판을 받았다. (6) 신부들이 교육부족으로 [무식]하여 성경을 읽지도 설교할 줄도 몰랐으며, 고위 성직자가 교구나 주교구에 거주하지 않아 [결석] 하였고, 하나 이상의 직위를 가져 [성직겸임]을 하였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연고자 등용]으로 교회직위에 기용 되었다.
르네상스 교황직권: (1) 조정주의 (Conciliarism)는 교황 권위에 도전하여 보편적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들의 합의가 가톨릭교회의 최고권위를 갖는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콘스탄스 위원회 (1414-18) 는 위클리프-후스의 문제를 검토하고 교회개혁을 위하여 추기경29 명, 학자 100 명, 수도원 장 1334명, 주교-대주교 183명으로 구성하여, 교황의 독재를 조정하고 견제하였다. (2) 르네상스 교황체제는 마틴5세부터 레오10세 까지 다음 세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1) 교회분파와 조정주의 이후에 교회에 대한 교황의 우월성을 회복하려는 노력; 2) 이탈리아 정치에서 교황이 제후 및 용병대장과 경쟁을 하면서 교회의 세속화; 3) 문화적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교황의 후원을 들수있다. (3) 교황의 행적: 프랑스의 찰스8세가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알렉산더6세를 위협하고 나폴리 침공을 지원해 줄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하고,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군 철수를 강요 하였다. 줄리우스2세는 제2 이탈리아 전쟁에서 캄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교황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프랑스군을 축출하였다. 레오10세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편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교황국을 방어하였다.
(b) 종교개혁 (The Reformation)
가톨릭 교회는 과오, 남용, 차이를 일으키는 교황의 권위에 대하여 종교적 정치적 도전을 초래하였다.
정치와 종교 (1300-1517): 영국: 존 위클리프 (1325?-84) 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그는 성경을 영어 로 번역하여1382년에 완성 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존재하며, 이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모든 기독교도가 신부이며, 성직수여가 필요없다; 군주가 성직자 위에 있으며, 연옥의 개념, 성직자의 금욕, 성지 순례, 면죄부의 판매를 부인 하였다; 수도사는 사회의 해충이며, 종교의 적이고, 범죄의 후원자 이므로 수도원을 해체해야 한다; 신이 지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은 사용할 권리가 있을 뿐이고, 교회나 성직자가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신의 섭리를 위반하는 것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은 아담의 죄로 부터 인간이 물려받은 것으로, 개인의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와 그 사도들은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성직자들도 따라야 하며, 국가 (세속적 통치자) 는 모든 성직의 재산을 통제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는 그를 이단으로 소환하였으나, 1384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농민반란 (1381): 영국은 백년전쟁과 스코틀란드와 국경분쟁 으로 재정이 궁핍해져 세금을 인상하였고, 흑사병으로 임금이 상승하고 임대료 가 하락하여 의회는 임금을 통제하였다. 농민들은 농노제도 폐지, 토지 재분배, 임금과 임차료 환원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켜 런던으로 진격하였고, 지방에서도 장원과 교회를 공격하였다. 라차드 왕은 주동자 타일러를 만나 모든 요구를 수용하였으나,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총 7,000명이 처형되었다. 잭 케이드 반란, 장미전쟁, 헨리7세, 헨리 8세에 관하여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프랑스: 찰스8세 (1483-98) 는 나폴리를 침공하였으나, 아라곤 의 개입으로 퇴각하였다. 루이 12세 (1498-1515) 는 밀란과 나폴리를 정복하였고, 스페인의 개입으로 나폴리에서 철수하였다. 프란시스1세 (1515-47) 는 1525년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스페인의 포로가 되었고, 석방 보상금을 지불하고 상속권을 포기 하였다. 그후 스페인은 밀란을 2세기 동안 통치하였다.
보헤미아: 존 후스 (1369-1415)는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하고 가르쳤다. 그는 위클리프에 영향을 받아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해서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다. 그는 스위스 종교회의에 증언하려고 콘스탄스에 도착하자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체코의 의회는 지도자 500명이 서명한 서류를 보내 항의하였고, 후스주의자들은 끝까지 싸울것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의회를 구성하고 군대를 편성하여, 17년간 왕이없이 정부를 운영하였다. 1436년 의회는 시기스문드 황제와 화해를 하였다.
독일의 신비주의는 성공적으로 네델란드에 이식되어, 교회의 부패 와 세속화를 비판하고, 인간내면의 경건함과 신과의 교류를 강조 하였다. 제라드 그루테 (1340-84)는 네델란드 출생으로 파리대학 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1379 년 신부서품을 받고 유트레트 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설교에서 평신도의 죄와 함께 성직자들 의 이단, 성직매매, 탐욕, 불순결을 질타 하였다. 그는 제자와 함께 1387 년 평범한 삶의 형제회를 창립 하였고, 수도원을 설립하여 근 100여 가정과 신도 교류를 하면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토마스 켐피스는 그리스도 모방의 저술로 신비주의를 추구하였다.
기독교 인문주의: 에라스무스 (1466-1536) 는 네델란드 인문 주의자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492년 신부서품을 받았다. 그는 영국과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파리에 돌아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헨리8세의 초청으로 1509-14기간에 영국에 체재하며, 토마스 모어와 교우하면서 우신예찬을 발표하여 성직자 의 거짓됨을 비판하였다. [The Paradise of Folly argues that “as for the popes, who act in Christ’s place, if they tried to imitate his way of life....So much wealth, honor, power, so many victories, offices, dispen- sations, taxes, indulgences, so many horses, mules, retainers, so many pleasures! These would be replaced by vigils, fasts, tears, prayers, sermons, studies, sighs, and thousands of such wretched labors…. Certainly an inhuman and monstrous crime!”] 캠브릿지 학생들이 대부분 이책을 가졌다고 밀톤이1632년 기술하였다. 에라스무스 는 1516 년 신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출간하고, 2차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광신적인 신앙을 반대하고 종교개혁을 찬성하였 으나, 환자를 죽이는 것보다 치료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여 루터와 논쟁을 일으켜, 신교와 구교로 부터 모두 비난을 받았다.
독일의 종교개혁 전야: (1) 경제: 독일농부 소수가 자영농이었고,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영주에게 농산물, 노동, 현금으로 임대료를 지불하였다. 공용지가 폐쇄되고, 자영업자는 부채 이자로 시달리 고, 십일조는 강제로 곡물을 납부하였다. 농민의 불만이 고조되어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났다. 1476년 한스 봄은 “지상에 천국이 도래하였다. 황제 교황 공작 영주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다. 모두가 지상의 열매를 똑같이 나누어 가져라. 토지-산림-물-목장 모두 공유하며 무료이다” 라고 선언 하였다. 수천의 농부들이 그를 추종하여 모였으나, 주교는 그를 체포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1491년 알사스 농부들은 수도원을 습격하여, 봉토 요금과 십일조 폐지, 부채의 탕감, 모든 유대인의 죽음을 요구하였다. 1517년 9만의 농부들이 모여서 봉건제도 폐지를 요구하였으나 맥시밀리안은 아무조치가 없었고,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1525-26년 농민반란으로 발전하였다.
(2) 금융: 광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삭소니 선제후 같은 광산지역 영주는 광구세를 징수하여 부유하게 되어, 황제와 교황에 저항 하는 힘을 가지고 루터를 보호하였다. 또한 유대 대부업자들은 기독교 은행가들과 경쟁하여 대치 되었다. 제이콥 푸거 (1459-1525)는 이탈리아에서 섬유제품 거래로 부를 축적하여, 합스부르 그가와 로마교황청과 은행거래를 하였다. 푸거는 1501년부터 독일, 오스트 리아, 항가리, 보헤미아, 스페인에서 금은동을 채광 하여 그 부로 유럽의 은행가가 되었다. 아우그스부르그는 독일의 금융 중심가 였고, 뉴렘부르그는 예술과 기능의 중심지였다. 푸거 는 맥시밀리안을 지원하여 찰스5세가 황제가 되게하였다.
(3) 정치: 하급봉신의 기사단이나 고용된 중무장 기병은 쇠락하고, 상업자본의 증가로 물가와 비용이 상승하였고, 새로운 상인층이 토지귀족을 압도하고, 도시국가는 독립하여, 왕국은 권력을 중앙 에 집중하였다. 기사단이 보복을 시도하자, 귀족들이 스와비안 동맹 (1488) 으로 견제하였다. 맥시밀리안은 전쟁과 결혼으로 버건디와 스페인을 취득하여 합스부르그가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비엔나대학을 재건 하였다.
(4) 독일 인문주의: 독일은 이탈리아 같은 고전적 과거가 없어,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되어 교육되는 특권층이 없었고, 정치철학은 기독교 신부의 범위내에 있었으며. 독일 르네상스는 초기 기독교 사상의 재생으로서 종교개혁 속으로 빠저들어갔다. 그러나 독일의 인문주의 사상은 이탈리아로 부터 인도되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 자들이 독일을 방문하여 싹을 심었고, 독일의 학생, 순례자, 성직 자, 상인, 외교관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르네상스의 꽃가루를 담아 돌아왔다. 그러나 회의적 부도덕주의가, 루터이전 10년동안, 독일 인문주의자들 가운데 성장하여 축적되었다. 따라서 회의주의 가 신비주의와 조금씩 섞이어 교회에 전파되었다.
(5) 교회:무신론자들이 검열을 피하여 산재하였고, 에라스무스는 정신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하였다. 인문주의자들 가운데 회의 주의자들이 섞여 있었고, 인간과 신 사이에 중재자로 교회나 신부 가 필요없다고 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종교의식과 성례에 반대하며 내면의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독일 교회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운데, 하층 성직자들은 가난하였고, 고위성직자들 은 풍요하고 사치스러웠다. 국가주의와 반교권주의의 부상과 함께, 다수 독일인은 거액의 자금이 교황에게 보내지는 것을 거부하였다.
종교개혁의 요인은 다양하다. 교황의 지배권 약화와 분열, 수도원 규율과 성직자 금욕의 붕괴, 고위 성직자의 과분한 사치, 교황청의 부패, 교황의 세속적 행위, 알렉산더 6세의 비도덕성, 주리우스 2 세의 전쟁, 레오10세의 지나친 유흥, 면죄부의 판매, 십자군 전쟁과 터키와의 전쟁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 비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인지, 아라비아의 과학과 철학의 유입, 스코터스의 비합리주의 와 오크함의 회의주의로 스콜라철학의 붕괴, 개혁을 위한 보편적 위원회의 실패, 우상숭배의 풍습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인쇄기의 발명, 문학과 교육의 확대, 성경의 번역과 독서, 사제들의 빈곤 단순함과 교회의 부유한 의식간의 대조된 인식, 독일과 영국 에서 부의 증가와 경제적 독립, 로마 교황에게 유입되는 독일자금에 대한 불만, 법과 정부의 세속화, 국가주의의 격화와 왕정의 강화, 자국 언어와 문학에서 오는 국가주의적 영향, 위클리프와 후스의 자극적인 유산, 의식과 성례가 적은 내면적 체험을 향한 신비주의적 욕구 등이 누적되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지적, 사회적 요인이 격류속에 결합하여 중세관습의 계층을 깨트리며, 모든 표준과 유대를 완화하고, 유럽을 국가와 분파로 흔들어서, 전통적인 믿음의 지원 이나 편안함을 쓸어 버리고, 유럽인의 정신세계에서 가톨릭 지배의 종말과 함께, 과감한 개혁으로 새로운 믿음을 추구하였다.
종교개혁 (1517-64): 유럽의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 울리히 즈윙글리, 존 칼빈, 초기 개혁자들에 의해 창시되어 신교가 가톨릭 교회로 부터 분리되었다.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 마르틴 루터 (1483-1546) 는 독일의 농부가정에 태어나 엘푸르트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여 1507 년에 신부가 되었고, 1512년 비텐부르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신학교수가 되어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1512-16 기간 에 성경의 연구를 통하여 신의 정의는 “구원은 인간의 선행 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획득되는 신의 축복의 산물이다” 는것을 재발견하였다. 1517 년에 교황 레오 10세는 대성당을 개축하기 위하여 특별 면죄부를 발행하였다. 유럽 주요 국가의 통치자들은 자금이 반복적으로 로마로 유입되어 자국의 경제가 방해된다고 항의하였다. 루터는 동년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작성 하고 교회정문에 계시하여, 면죄부의 과장된 주장을 반박하고 그 남용을 교정하려 하였다. 그는 처음에 죄를 사하는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지 않했으나, 교황이 면죄부로 죄를 사할수 없으며, 죄는 신에 의해서만 사면 된다고 그의 반박문에서 선언하였다.
“면죄부는 교회가 고해성사의 보속을 면제받는 것을 뜻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배교, 우상숭배, 살인, 간통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할수 없고, 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나 박해를 받은 신자 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생기자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 하고 교회에서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안으로 받아들여 지는 고해성사를 실시하였다. 12세기 이후 중세교회에서는 고해 성사가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의 일정한 벌에 대한 만족를 주기 위해 개인고해로 바뀌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의 형벌 즉 보속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연옥에서 벌을 받아서 죄를 정화한 후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보속이 면제되는 것이 흔히 '면죄' 이다. 면죄는 일정한 조건을 완수하면 주어지며, 면죄를 얻은 사람은 보속이 면제된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의 천주교회에서도 존재하며, 주로 기도나 성지순례 등이 면죄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11 세기 말부터 헌금으로 인해 주워지는 면죄가 본격적으로 출현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극에 달했다.”
1518년 추기경 카제탄은 루터를 만나 반박문을 철회할것을 요구 하였으나 루터는 거절하였다. 추기경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겠다 고 프레데릭 제후에게 요청하였으나 그는 거부하였다.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루터는 초기 기독교에서 로마주교의 최고권 을 거부 하였고, 희랍정교에서는 아직도 이를 거부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 이었다. 1520년 요약문에서 그는 교황을 반기독교적 이라고 비난 하였다.
루터는 1520년3책을 출간하였다.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루터는 성직자와 신도간에 세가지 장벽이 있다고 공격 하였다. 1) 성직자와 신도는 진정한 차이가 없는데, 로마의 교회법이 이를 만들었다. 2) 각 교인이 신부 이고, 각자가 자신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 3) 성경이 교리나 실제에서 최종의 권위이며, 교황이 독점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없다. 만일 교황이 보편적 위원회를 막기위하여 파문이나 성직정지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를 경멸해야 한다. 독일교회가 메인츠 추기경의 지도하에 국립교회를 설립하고 로마에 매년 보내는 헌남금을 철폐 해야한다;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신부는 결혼이 허용되어야 한다; 연령이 30세가 되기 전에 종교적 인생을 결정 해서는 안된다고 루터는 주장 하였다. (On the Babylonia Captivity) 루터는 교황에 의하여 1천년간 포로가 된 성찬의식을 공격하고, 주의만찬, 세례, 속죄, 안수, 결혼, 성찬식, 성유에 관한 성찬의식과 교회의 개혁개념을 발전시켰다. (On the Freedom of Christian) 선행 없이 믿음만으로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며, 개개 악으로 부터 인간 을 구한다. 참다운 믿음은 우리를 나태하거나 사악하게 살게하지 않으며, 법과 선행이 인간의 정의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선행은 신을 영광 되게 하지않는다. 왜냐하면 선행은 선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나,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선행을 하기전에 참된 믿음을 통하여 선하게 된다.
1521년 레오10세가 루터를 파문하였고, 찰스5세가 그를 보름스의 제국의회에 소환하였다. 찰스 황제가 루터에게 그의 저술이 내포하는 모든 이단을 철회 하겠는가 질문하자, 루터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취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발하여, 어느 누구도 루터나 그의 추종자를 숨겨주지 말것이며, 그의 책을 박멸하라고 명하였다. 루터는 제후의 보호 하에 피신하는 동안 신약을 독일어로 완역하였고, 1522년에 비텐부르그로 돌아와 루터란주의를 계속하여 설파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문제에 직면하였다. 1) 비텐부르그 일부는 전설, 영상, 미사를 철폐하는 급진적 개혁을 원하였으나, 루터는 종교업무 에서 성경이 충분한 권위로서, 가톨릭 7개 의식에서 2개 만을 취하였다. 2) 루터의 운동이 가톨릭교회의 단합을 위협한다 는 것이 분명해지자, 에라스무스 같은 가톨릭 인문주의자들은 개혁가들과 단교하였다. 3) 농민의 불만이 종교개혁 운동과 얽혀 져, 루터의 추종자들은 통치자에 저항하여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농민 전쟁 (1524-26): 교황 클레멘트7세는 추기경에게 루터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의회는 루터주의를 무력으로 진압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응답하고, 검토가 진행되는 동안 혁명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교회와 국가가 밀접히 맞물려 있어 성직자는 사회질서와 민사행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그들의 권위와 힘이 붕괴되면 혁명에 대한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루터가 독일어 로쓴 새로운 신약성경의 보급은 성직자가 인간의 본성이나 세속적 방법과 타협하는 것을 보여주었고, 사도들의 공산주의와 가난과 억압에 대한 그리스도의 동정을 기술한 신약은 그들에게 맑스의 공산당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농부나 무산대중이 성경속에서 사유재산이 철폐되고 가난한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이상사회의 꿈을 위한 신의 권능을 감지하였다. 팜프렛이 독설적 연사는 교황과 세속적 권위에 대해 농부들의 불평을 대변하였다. 1525년 농민지도자들은 12개 조항을 만들어 제1조에서 미래에 권위와 권력을 가진 그들의 농민공동체가 목회자를 선출 임명 면직할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12조항의 한부를 루터에게 전달 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루터는 “약탈 살인하는 농민집단에 반대하여” 라는 팜프렛을 배포하였고, 반역자들의 공산주의적 욕망을 거부하였다. 사실상 루터의 개혁은 독일 제후들의 지원에 의존 하였고, 제후들은 루터의 종교적 지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폭도들은 도시들은 함락하고 수도원을 포위하였다. 프레데릭이 1526 년 사망한 후 그 아우 존이 계승하여, 약 100,000명을 사살 하여 폭동을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체포 처형하였다.
루터의 학문적 성취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영어 성경 의 킹제임스 판과 같은 수준으로, 그의 생애 동안에 10만부가 출간 되었다. 그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기독교와 신앙없는 철학을 조화 하려는 노력을 비난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지식은 직관과 개요에서 오며, 직관은 신에게 있고 개요는 인간에게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진리를 발견할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진정한 기독교인은 양심적으로 증오가 아닌 사랑의 윤리에 엮여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루터는 개혁을 위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해결 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하였다. 신은 법과 질서를 실천하기 위하여 세속적 권위로 정부를 창조 하였으며, 정부 없이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세상을 혼돈으로 이끌어, 그 존재에 종말을 고하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질서의 보존은 신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며, 제후들이 세속적 법에 의존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봉사이다. 종교적 신념을 제외하고는, 매사에 완전한 복종이 지상이며 인권 을 신장하는 절대적인 법이라고 루터는 설파하였다. 루터주의 국가는 권위적이며, 교단은 항상 정치 공동체와 동일하였고, 지역 통치자는 지역 교회의 최고 주교였다. 그는1525년에 결혼하였고, 그의 종교 운동은 정치권력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쯔윙글리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울리히 쯔윙글리 (1484-1531) 는 비엔나와 바셀에서 문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기독교 인문주의 영향으로 1506년에 스위스 시골교회의 신부가 되었다. 1518년에 츄리히의 “민중의 신부” 로서 일련의 신약성경 강의를 시작하여, 1520년 시당국으로부터 성경을 강의할 허학을 받아 금식과 금욕에 반하여 폭동을 유발하는 설교를 하였다. 성경의 최고성을 추구하면서, 1522년 한 수녀원에서 유명한 설교를하여 (The Clarity and Certainty of the Word of God) 일부 반대도 있었지만, 주교로 부터 신선함을 인정받아 그는 설교를 계속하였다. 1523년 츄리히 시청에서 콘스탄스 교구목사와 토의를 위하여 67개 조항 을 인쇄하였다. 교구내의 대부분 신부들이 그내용을 적용하였고, 그결과 성직자의 금욕은 비웃음을 받아 의전적 개혁이 초안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요점은 개혁된 목회자를 훈련하기 위하여, 주교가 있는 대성당학교의 재편성 이었다. 1524-25사이에 취해진 조치 는 영상의 제거, 오르간의 금지, 종교주택의 해체, 미사를 친교로 대체, 세례 사무실의 개혁, 예언이나 성경탐독의 소개, 목회자 직무의 재편성, 자국 성경의 준비 등을 포함하였다. 그는 공공하게 혼인하였고, 그의 개혁운동은 츄리히로 부터 인접교구로 신속히 확산되었으나, 일부 숲속 교구는 개혁에 저항하였다.
쯔윙글리의 종교개혁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교회는 신의 말씀 으로 탄생하고, 교회의 수장은 그리스도 뿐이다. 2) 교회의 법은 성경과 일치해야 구속력을 가진다. 3) 그리스도 만이 인간의 정의 이다. 4)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육신이 존재함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5) 미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 대한 심한 모욕이다. 6) 명상이나 죽음의 중재에 대하여, 연옥이나 영상과 사진에 대하여, 성경적 근거가 없다. 7) 결혼은 모두에게 합법적이다. 츄리히는 우호적인 교구와 기독교 민사동맹을 협의 하여, 바셀은 스위스 연방으로 들어왔다. 1525년 쯔윙글리의 노력은 스위스 내부에서 그리고 루터교도들과 불일치로 방해가 되었다. 츄리히 내에서 극단주의자들은 그의 프로그램에 불만을 가지고, 십일조 철폐, 국가연결의 단절, 참 신앙의 순수교회의 창립, 유아 세례의 종식등을 원하였다. 이러한 것을 재침례교도와 논의 하였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또한 미사와 관련하여 생각과 실천이 루터와 날카롭게 불일치하였다.
1529년 츄리히의 한 선교사가 슈비츠 시에 설교를 시도하여 화형 을 당하였다. 쯔윙글리는 츄리히 위원회를 설득하여 전쟁을 선포 하였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가톨릭 교구들은 츄리히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해체하고, 양편이 종교 적 차이로 공격을 하지않을 것에 서명하였다. 쯔윙글리는 개혁교구가 고립 되어 위험이 다가오기 때문에, 정치적 신학적 이유로 루터와 합의 를 환영하였다. 가톨릭 교구는 동맹에 대항하여 조직을 강화 하였고, 제국 개입의 위협도 존재하였다. 1529년 동맹은 카펠에 있는 숲속교구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531년 츄리히 의회와 그동맹은 영토에서 자유로운 설교를 하도록 가톨릭 교구를 축출하여, 가톨릭 8,000명과 개신교 1500 명이 전쟁으로 발전하여 츄리히군 500명과 함께 쯔윙글리도 47세로 전사하고, 가톨릭이 승리하였다. 쯔윙글리 위원회는 츄리히에서 하인리히 불링거를 선출하여 개혁을 계승하였다. 1536년 스위스 개혁교회 의 공통믿음인 제1헬베틱 고백에 합류하였고, 1549년 칼빈과 제휴하여 츄리히와 제네바 개신교도가 개혁교회로 하나가 되었다.
재침례교도 (Anabaptists): 루터나 쯔윙글리는 경제 사회적 정의 를 위한 개혁을 추구하였으나, 재침례교도는 단순한 개혁이 아닌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혁명가들 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이나 스위스 또는 여타지역의 종교적 변화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 하는 급진적 운동이나 혁명을 위한 기회가 되었다. 콘라드 그레벨 (1498-1526) 은 재침례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쯔윙글리의 개혁 속도에 불만을 가지고, 유아침례를 받으면 성인이 되어 재침례를 받아야하고, 침례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회원이 되는 표시라고 주장하였다. 그레벨은 1525년 결혼한 전 신부 펠릭스 만쯔에게 재세례를 주어 개혁의 최초 성인침례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한 민주주의로 목회자를 선출하고, 신학적 고찰을 거부하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고, 정치적 직위 취득을 거부하고, 인간의 생명을 빼았는 군대복무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톨스토이 보다 3세기 전 무정부주의자 였으며, 그들 일부는 경제 공동체를 주장하였다. 그레벨은 1525년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526년 탈출 하였으나 흑사병으로 사망하였고, 만쯔도 체포되어 강물에 던져졌다. 재침례교는 1530 년 스위스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나, 오스트리아, 독일, 네델란드 로 라인강을 따라 계속 전파되었다.
1529년 모라비아에서, 제이콥 후터는 한 재침례 단체에 가입하여 1533년 모라비아 공동체의 수장이 되었다. 처형과 탄압으로 유입 되는 재침례교도들은 경제적 평등주를 적용하였고, 응집력과 규율 있는 공동체가 되어 세력이 커지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는 1536년 그를 체포하여 화형에 처하였다. 한편 1532년 웨스트 팔리아의 문스터 에서 재침례교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1534 년 그들은 세력을 얻어 도시를 통제 하여 무신자를 몰아내고, 성경 외에 모든 책을 불사르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선언하였다. 그후 레이덴의 존 북켈스가 도시의 지도력을 계승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불렀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1535년 가톨릭과 루터란 연합군이 도시를 점령하고 급진적 재침례교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대부분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한편 메노 사이몬스 (1496-1561) 는 1515년 에 가톨릭 신부가 되어 1536년에 사임하고, 다음해의 재침례교의 안수를 받았다. 그는 네델란드와 북부 독일에서 평화로운 방법 으로 재침례교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신학은 속세와의 분리와 참회에 의한 세례를 중시하였다. 그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을 금지하고, 정부 직위의 취득을 거절 하고, 신도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 혼인 하는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거대한 교단을 건설하여 영향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존 칼빈 (1509-1564) 은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문학 석사가 되었고, 보르게스와 올린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면허를 취득한 후, 계속하여 인문학을 공부하였다. 1527년 루터 교회가 독일 절반의 정교가 될 때에, 칼빈은 자신이 신의 개혁계획 을 수행하기 위하여 선택 받았다고 믿었다. 그의 신교로 개종하고, 망명을 위해 1534년 스위스 바셀의 한 친구와 합류 하여. 기독교 강요를 1536년 라틴어로 출간하고, 1541년 불어로 번역하였다. 1536년 그는 제네바 개혁의 지도자인 윌리엄 파렐의 (안수 없는) 목회자가 되었다. 1538년 새로 선출된 위원회는 두 사람을 면직 하여 칼빈은 스트라스보르그로 가서 3년동안 프랑스 피난민에게 설교를하면서, 학원에서 신약성경을 강의하였다. 그는 1540년 결혼을하고 1541년 초청을 받아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칼빈의 개혁제안에 따라, 제네바 위원회는 1541년 교회의식을 통과시켰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 국가의 법은 성경이며, 성직자는 그 법의 설명자라고 하였다. 그는 목회를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분하고, 교회의 업무를 관장하는 교회회의를 목사 5명과 매년 위원회가 선출하는 장로 12명으로, 교회 법정은 장로와 목사로 구성하였다. 시정부는 법정에 사람을 소환하고, 교회회의는 민사 가 아닌 신앙적 문제만 재판하였다. 교회회의는 사회적 도덕을 엄격히 유지하였고, 학교와 학원을 세워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는 사유재산이 사회질서의 기본임을 인식하고, 경제 종교 도덕에서 개인에 앞서 공동체가 우선하였다. 1566년 스위스 신교도 고백은 쯔윙글리자와 칼빈주의자를 통합으로 개혁교회가 되었다.
칼빈의 정치이론은 일반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방호하는데 있었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감사 하면서, 그는 민주정치와 귀족정치를 혼합하는 정치제도를 선호하였다. 정치권력의 남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몇개의 정치 기구로 분할하여 견제와 균형의 체제를 유지 할 것을 제안하였다. 만일 통치자들이 신에게 반대하면, 그들은 신이 준 권리를 잃고 멸망하게 될것이다. 국가와 교회는 분리 되어야 하지만, 국민복지를 위하여 협력해야한다. 칼빈은 성경이 모든 정신적 문제에서 최종의 권위라고 하였으며, 그의 기독교 강요는 6개의 장으로, 처음 4장은 십계명, 사도 신경, 주의 기도, 세례와 주의 만찬을 포함한다. 나머지2장은 5개의 잘못된 의식을 공격하고, 기독교도의 자유를 방어한다.
종교개혁의 충격과 변화: 독일: 황제 찰스5세가 1521-29기간에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전쟁에 몰입하는 동안, 독일의 반합스부르그 제후들은 세력을 결집하는 기회를 가졌다. 1530년 아우스브르그 의회에서 황제와 개신교도간에 타협의 분위기가 있었으나 화해는 없었다. 황제는 교황이 보편적 위원회를 소집하여, 독일제후들이 항가리와 북아의 이슬람에 대항하여 군사력을 지원하도록, 설득할 것을 희망하였다. 한편 헨리8세가 캐더린과 이혼하여, 스페인은 영국 및 로마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독일의 신교제후들은 황제와 전쟁 (1536-38) 을 위해 프랑스와 연합하였다. 황제는 후계자로 동생 페르디난드를 지명하였으나 그의 아들 필립으로 변경하려고 하여 오스트리아에서 크게 분노하였다. 이러한 복합적 요소들로 이탈리아 전쟁에 진입하여 1544년 크레피 평화조약을 가져왔다. 1555년 프랑스와 신교제후들은 합스브르그가와 아우그스부르그 조약을 체결하였고, 루터교는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였다.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실용적인 제재 (1438) 는 왕을 교회의 수장 으로 영입하였다. 왕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그들을 민사 법정에서 재판하며,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교황의 권위는 제한적 이었다. 종교개혁은 프랑스 왕정의 권위-영향-세입에 심대한 손실을 주는 위협이었다. 프란시스1세는 성직자에게 십일조를 부과하고, 추기경-주교-수도원장-소수도원장을 선거 없이 임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포로가 될즈음, 문학, 사랑, 신비주의를 동반한 루터주의가 프랑스에 전입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석방된 프랜시스는, 합스브르그가와 적대관계에서 독일 신교도와 동맹을 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신교도 처형을 삼가하였다. 그러나 1525년 루터란 교리나 문학은 프랑스 내에서 금지되었다. 프랑스 헨리2세 (1547-59) 는 합스부르그가와 마지막 이탈리아 전쟁을 하였고, 종교개혁을 억압하여, 휴그노 숫자를 크게 증가시켰다. 이탈리아 전쟁을 종식시켜, 그는 영토 상속을 포기하고, 칼라이스와 3교구를 취득하였고, 간접적으로 합스부르그 가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분리시켰다.
영국: (1) 토마스 울시 (1473-1530) 는 옥스포드 등에서 수학 하고1498 년 신부가 되어 헨리7세때 궁정교회의 사제가 되었고, 주교-대주교-추기경을 거쳐 1515년 헨리8세의 주의장관이 되었다. 그는 직위를 이용하여 왕 다음가는 부를 축적하였고, 왕의 조언자로 영국이 유럽 정치의 조정자로서 프랑스와 합스부르그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는 교황이 헨리8세의 이혼 승인을 거부하여, 1529년 퇴임하였다. (2) 토마스 모어 (1478-1535) 는 법율가, 철학자, 인문주의자로 1529-32년 헨리8세의 주의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종교개혁, 영국이 로마와 결별하는 것,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는것, 헨리가 캐더린과 이혼하는것 등에 반대하였고, 성직자가 왕에게 교회의 최고통치자로 선서하는 것을 거부하여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그는 리차드3세의 역사를 라틴어로 저술하였고, 공무로 저지대와 벨기에를 방문하고 돌아와 1516년 유토피아를 출간하였다. 유토피아는 가상적인 섬의 사회, 종교, 정치적 관습을 기술하고 있으며, 이 섬은 플라톤의 공산주의 가 지배하는 공화국으로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고 있다. (3) 토마스 크롬웰 (1532-40) 은 헨리8세의 장관 수장으로 왕이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도록 도왔다. 교황이 헨리의 이혼승인 을 거부하자, 의회가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을 승인하여, 왕 자신이 자기의 이혼을 승인하였다. 헨리는 이혼과 재혼을 거듭 하였고, 크롬웰은 반역으로 처형되었다.
(4) 헨리8세 (1535-47) 는 그의 재혼을 거부한 교황과 단절하고, 의회는 최고의 법 (1534) 을 제정하여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되게하였다. 헨리는 1536년 수도원과 수녀원을 해산하여, 크롬웰은 578 수도원과 130수녀원 을 폐쇄하고, 6,521명의 수도사와 1,560명의 수녀를 해산하여, 12,000 명의 비성직 직원이 실직하였다. 몰수된 토지와 건물은 저가로 귀족, 젠트리, 상인들에게 매도하여 국고에 환수되었다. 이로인해 인구와 실업의 증가로 불황을 초래 하였고, 교육, 의료, 자선 등이 감소하였다. (5) 에드워드6세 (1547-53) 는 9세에 왕위를 계승하여 섭정으로 통치를 하는동안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스코틀란드와의 전쟁은 소득없이 철수하였다. 영국은 신교가 수립되어 성직자의 독신이나 미사는 철폐되었다. 에드워드가 병사한후 (제인 그레이 9일 이후) 매리 튜더 (1553-58) 가 37세로 여왕이 되어 영국의 개혁을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려 놓았다. 수도원을 폐쇄로 토지를 취득한 귀족 들은, 여왕이 카톨릭을 국교로하여, 그녀의 적이 되었다. 매리는 스페인의 찰스5세의 아들인 필립과 결혼을 하고, 가톨릭 교리를 회복하며, 이단의 법을 재생시켜 300명을 화형에 처하였다. 그의 사후에 이복 자매인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계승하였고, 로마 가톨릭은 다시 전복되어 다시 신교가 부활되었다.
러시아, 이슬람, 유대인, 반개혁: 러시아의 통일: 1300년경 러시 아는 존재하지 않았고, 북부에 노브고로드 등 도시국가가 있었고, 서부와 남부 주들은 리투아니아 에 종속되어 있었다. 1238, 1293 년에 몽고군이 모스코바를 불태웠으나, 산림지역은 안전하였다. 모스코바는 제후들이 몽고와 합작하여 다스렸고, 최초 통치자 다니엘의 누이는 우즈벡 칸과 혼인하였다. 이반1세 (1325-40)는 대공작으로 몽고와 합작하여 조공과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반3세 (1462-1505) 때는 많은 영토가 모스코바 지배하에 있지 않았고, 우크레인과 요카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일부였다. 그는 몽고와 타타르 지배를 종식하고, 영토를 세배로 확장하여, 로마 제국의 개념으로 러시아 국가 기초를 세웠다. 그의 손자 이반4세 (1547-84) 는 러시아를 중세의 국가로 부터 중앙집권으로 독재적 통치를하여, 러시아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1558년 러시아는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그 동맹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저항하고, 스웨덴이 폴란드를 지원하여, 타타르가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다. 스웨덴이 리보니아를 회복하고, 폴란드가 전쟁을 계속하자, 1582 년 교황의 중재로 휴전하고, 러시아는 퇴각하였다. 크리미아와 터키군이 1571년 모스코바를 공격하고 실패하여 퇴각하였다.
이슬람의 확장: (1) 맘룩 술탄 (1250-1517)은 아이유비드 왕조의 몰락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영토로 왕국이 수립되고, 오토만에 정복되어 제국의 한 주가 되었다. 맘룩은 점차 오토만 지배계급에 침투하여 주류가되어 군대의 파벌을 만들기 보다, 자손들을 통해 가문을 이루어, 오토만 통치자의 분해정책에서 생존을 도모하였다. 오토만의 세력이 약화되자, 맘룩은 통제력을 회복하였다. (2) 사파 비드 왕조 (1501-36) 는 커드족의 뿌리를 가지고 이란에 수립된 최초의 토후 왕조로서 인접국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타 민족과 결혼으로 많이 혼합되었다. 사파비드는 동서간의 경제적 거점으로 견제와 균형에 기초한 효율적인 정부와 국가를 수립하고, 건축을 개선하고, 예술을 지원하였다. (3) 술레이만 대제 (1520-66) 는 중앙 유럽과 지중해 지역으로 오토만 제국의 영토를 넓혀, 최소 2,500만을 통치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거점인 벨그라드, 로우드, 대부분의 항가리를 정복하고, 1529년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중동 과 북아프리카 알제리아 까지 병합하고, 오토만 함대가 지중해 에서 홍해 페르시아만 까지 지배하였다. 그는 내치에서 사회 교육 세금 형법과 관련하여 주요 법율과 제도를 개선하였다.
유대인의 축출 (1300-1564): 중세초기 유럽사회는 약 150만의 유대인이 차별없이함께 살았다. 가톨릭 교회가 조직을 강화하고,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교단이 세워지고, 도시에 중산층이 형성 되어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설교를 시작하자, 1300년 부터 유대인은 인종차별과 처형으로 많은 고통을 받아, 독일이나 폴란드 등 여타 국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에서 이자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금전대출업은 유대인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대출로 거액의 자금을 축적하면 제후나 정치권력자가 강제로 탈취하였다. 십자군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고 추방되었다. 빌 듀란은 추방에 관하여 종교적 적대감, 경제적 경쟁자, 민족주의, 흑사병의 독살음모 등을 들고있다. 스페인은 1492년칙령에 의해 15만명의 유대인을 축출하였고, 이들은 사르디니아, 시실리, 나폴리 등지로 다수 이주하였고, 일부는 세례를 받고 타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이탈리아로 유입은 감소하였다.
반 종교개혁 운동: 16세기 중엽 루터주의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에서, 칼빈주의가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동부유럽에서, 그리고 앙그리칸 주의가 영국에서 로마와 분리되어 뿌리를 내렸다. 한편 캐톨릭주의는 개혁을 향한 내적 외적 요구의 도전하여, 일련의 수도원주의, 예수회, 교황제도, 위원회 등으로 재활기를 찾았다. (1)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수도원에 규율울 엄격히 하여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였다. 1522년 캐머도울스를 다시 세워 은둔사나 수도사를 품으며 속세를 떠난 금욕생활을 강조하였다. (2) 예수회는 스페인 귀족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1491-1556) 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그는 신의 계시로 “정신적 연습”을 저술 하였다. 1528년 파리대학에 수학후 신부임명을 받고, 교황의 승인으로 예수회를 창립하여 각국에 규율있는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가톨릭 신앙을 선전하였다. (3) 교황의 지속적 노력. (4) 트렌트 위원회 (1545-63) 는 신교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교황 폴3세가 1542년 추기경,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신학자들로 구성하여 3기간에 논의하였다. 1) 성경은 교회전통 안에서 이해 되어야한다. 2) 프랑스의 헨리2세는 위원회를 거부 하였고, 위원회가 교황권위에 우선한다는 것을 교황은 거부하였다. 3) 인간의 구원을 위해 믿음과 선행이 필요하고, 면죄부-연옥-일곱 의식-빵과 포도주 의식-성직자 금욕 등 모든 것이 불변 이라고 강조하면서 교황은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 하였다.
(c) 지리상의 발견과 확장
지리상 발견의 조건: 심리적 태도와 동기: (1) 원거리 항해를 통해 새로운 대지를 발견하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물질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에 있었다. 오토만 터키가 동방에 이르는 육로를 차단하여 아랍 중개상이 아시아와 양념 무역을 독점하여,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았다. 동방의 양념과 고가상품의 근원에 직접 접근 하기 위하여, 유럽인들은 해상으로 아시아에 이르는 가능성을 탐지하는데 열심 이었다. (2) 통치자나 탐험가들은 새로운 대지의 토착민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는 종교적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왕국은 수세기 동안 인접하여 공존하며 살았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십자군의 종교적 열병이 유럽 특히 스페인에 재생하였다. (3) 사회적 인정이 지리상 발견의 다른 동기가 된다. 지리상의 발견은 제독이나 장군 등의 직함을 주고, 최초 발견자들은 콜럼버스와 같이 통치자가 된다. 또한 새로운 발견은 영웅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고 자신의 이름이 유럽사회에 널리 회자되었다. (4) 미지의 새로운 대지에 관하여 신기하고 모험적이며 알고싶어하는 욕망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지리상 발견을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상품거래와 은행업: 유럽은 사치품으로 중국과 페르시아 비단, 인도의 면화피복, 중국산 약제-대황, 인도의 고가 보석, 약품-염료-향료-연고-화장품-고가상품, 후추-시나몬-육두구-정향-생강 등의 양념류를 수입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역은 1543 년 까지 베니스가 지배하였고, 흑해에서는 터키와 타타르가 참가 하였다. 유럽의 동방무역은 적자로서 금은괴를 지불하였다.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삼각무역을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선적이 감소하여 지중해 목재수송 비용이 올랐다. 포르투갈이 인도항로를 발견하였으나, 그들은 발견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자본, 상업적 경험, 금융조직이 부족하였다. 카탈로니아는 신용제도나 사업 방법이 비교적 선진하였으나 자본이 제한되었다. 이탈리아는 상인 조합, 기능공조합, 기업방법, 회사규칙이 발전하였다. 남부 독일 도시에 퍼거나 웰서 같은 가족무역소가 발전하였고, 포르투갈과 캐스틸에서 신용거래와 외국투자가 허용되었다. 인도의 양념류와 아메리카의 은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유입되어 정부의 신용 대리 인 이탈리아와 독일의 은행으로 자금이 회수되었다.
선박: [Oared Ships]은 지중해의 전통적 전함으로 120 x 15 ft 크기이며 1290-1540기간에 운용되었다. 양편에 25-30 벤취로 양 벤취에 각각 3명이 노를 젓는다. 3개의 돛대에 삼각 돛을 달았으며, 약 250톤을 선적할수 있었다. [Caravel]은 1451년 포르투갈 헨리왕자의 지원으로 어선을 개조하여 탐험선이 되었다. 15-20 x 6 m 크기에 50-160톤으로 1-3개의 돛대에 삼각 돛을 달고 얕은 해안항해 를 하였다. [Carrack]은 15세기에 제노아 상선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대양 항해에 사용하면서 모형을 변형하였다. 포르투갈은1,000톤을 상회하여 인도 중국 일본 에 까지 운항하였다. [Galleon]은 16세기 베니스가 거조하여 해적 소탕에 사용한 것을 포르투갈이 대부분 화물선으로 사용하였다. 1534년에 1,000톤 적재의 갤리온을 건조하여 366문의 대포를 탑재하였고, 3-4 기둥에 삼각 돛을달고 풍력으로만 운항하였다. [Fluyt]는 16세기에 네델란드가 최소 건조비용, 최대 선적, 최소 인력 으로 대양을 운항하는 화물선으로 건조하였다. 약 80 피트 길이에 좁은 폭으로 2-3 높은 돛대에200-300톤을 선적하고, 화포로 무장한다. 운송비용이 저렴하여 최고의 경쟁력을 가졌다.
선원과 항해: 콜럼버스는40명은 산타 마리아 호에, 나머지 50 명은 카라벨2척에 분산 승선시켰다. 그들은 원래 선원중의 일부거나, 탐험이나 장거리 항해경험이 있는 사람가운데서 선발 하였다. 15세기에 선수는 보호시설이 없어 선원은 갑판 위에서 잠자고, 일기가 불순하면 배밑 짐칸에서 잤다. 배의 장교는 선장과 항해사 뿐이였다. 고가의 품목을 싣고 장거리 항해를 하는 큰 배의 경우,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고, 상인과 함께 특수 근무요원을 고용하였다. 선원임금은 동일 하였고, 일부 능력자는 배를 받았다. 요리사는 중요하고 음료수는 항상 부족하였다. 장거리 항해는 사기 저하와 영양 결핍이 문제였다. 콜럼버스 항해는 다행히도 선원의 건강이 좋았지만,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무척 나빴다. 마젤란은 부상이나 익사보다 괴혈병으로 손실이 많았고, 3년간 항해에서 270명중 18명이 살아 돌아왔다. 항해중 질병은 모기가 전염하는 황열병과 마라리아와 비위생적 여건에서 오는 질병이 많았다. 항해 세트는 돛의 위치, 돛, 돛을 팽팽하게하는 밧줄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배는 조종이 문제였다. 해결방법은 방향타의 손잡이를 항로에 맞추는 것인데, 현재는 조종핸들을 돌리지만, 18 세기 까지는 배의 조종핸들이 발명되지 아니하였다.
수로안내와 항해: 중세 후기에 항해사의 자격은 경험, 해안선에 관한 자세한 지식, 예리한 관찰력을 중시하였고, 방향과 수심을 측정하기 위하여 나침판과 리드를 사용하였다. 지중해 지역의 해양지도는 13세기 부터 사용되었으나, 원양 항해를 위한 항해서 (Rutters) 가 16세기에 출간되어, 항해의 방향, 항로, 그리고 항구 진입로와 전 해안을 따라 수심과 해저를 표시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원들은 해상 항로를 찾는데, 지중해 전통은 나침판 사용이며, 대서양 전통은 어림짐작 법칙에 제한된 기술 이었다. 포르트갈 존2세는 수학 전문가 위원회가 태양관측으로 위도를 찾는 방법을 연구케하여, 1484년 “항해자의 안내서”를 출간 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15 세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까지 항해 하여 돌아오게하는 실용적 지식이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항해학교 (Schools of Navigation) 를 설립하고 훈련을 시켜, 동인도와 서인도 무역을 위하여 항해사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간 많은 경험을 통하여 항해기술이 발전하였으나, 문제는 천체 관측을 나침판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그리고 배의 위치나 새로운 발견 지점을 위도와 경도로 어떻게 표시할 것이가 였다.
도표와 지도: 지도는 기본적으로 항해를 위하여 제작하였고, 항해 도표는 항해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정보로서, 위도와 경도, 지형 의 모양, 항해 조력물 (등대, 비율표지, 자력정보, 암초와 앝은 물, 수심, 경고) 을 포함한다. 15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의 서해안과 대서양의 도서들에 관한 지식을 확대하였고, 상선이 발견한 도서의 상업적 이익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도표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도표제작 산업은 제노아가 시작하여 리스본에 성행하였다.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세계 도표는 1508 년 왕실명령으로 제작된 스페인의 파드론 리얼 이다. 포르투갈의 지도제작자들은 이탈리아 숙련자들의 전통을 계속 하였다. 1500 년경 스페인 탐험가이며 지도 제작자인 라 코사는 수개의 지도를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많은 지도를 제작 하였다. 1578년 이론과 실제의 보편적 결합으로 머케이토 지도가 완성 되었다. 머케이토는 플랜더스 태생으로 네델란드 지도학교에서 잘 알려 졌으며, 그의 도법은 원통도법의 하나로, “원통을 적도에 접하게 하여 그 측면 에서 지표의 상태를 투영하는 방법” 이다. 이지도는 작도가 용이 하며, 극 지역을 제외한 지구의 대부분을 장방형으로 전개 할수 있어, 세계지도로 널리 이용되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포르투갈의 알폰소 4세 (1325-57) 는 해운상업 으로 탐험을 장려하였다. 카나리나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포르투갈이 그 소유를 주장하여, 1344년 캐스틸이 이의를 제기 하였다. 헨리 항해사 (1394-1460) 는 아프리카 서해안, 대서양의 도서, 새로운 항로의 발견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탐험과 해상무역 을 발전시켰다. 그는 부왕에게1415년 세우타 (지브랄타르 대안) 를 정복하여 아프리카 항해를 통제하도록 조언하여 수행하였다. 그는 사하라 무역로를 알게되었고, 아프리카에 매혹되어 포르투갈 무역을 확대하였다. 그의 탐험대는 항해를 지원하여 이윤의 20% 를 징수하였다. 그는 1418년 마데리아, 1427년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였다. 헨리의 탐험대는 아프리카 서안의 무역로를 계속 탐색하였다. 1478년 엘미나 해안에서 캐스틸의 35척과 포르투갈 의 함대가 기니아 무역 주도권을 위하여 싸웠고, 포르투갈이 승리 하여 1479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헨리는 1555-56 기간에, 계속하여 케이프 버드 여러 섬들을 발견하였다.
대서양과 아메리카: 스페인의 탐험: 캐스틸은 1402년 카나리아 제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탐험하였으나, 국내정치가 이슬람 퇴치 (Reconquista) 로 전환하였다. 캐스틸과 아라곤이 결합으로 스페인의 통일을 이루고, 아라곤은 지중해에서 스페인 동부, 프랑스의 남서부, 지중해의 주요도서—시실리, 말타, 나폴리, 사르디니아—그리고 그리스 도서까지 통제하였다. 1492 년 스페인은 조공을 바쳐온 그래나다를 정복하고, 아프리카 서안 탐험에 열중인 포르투갈의 독점을 우회하여, 컬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착하도록 허가하였다. 같은해 4월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1451-1506) 는 대양에 있는 섬과 대륙을 발견으로, 그곳의 제독과 총독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는 90명의 선원을 3척의 배에 분승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고, 10월에 산 살바도르에 도착하였다. 바하마, 쿠바, 하이티, 도미니카 등의 해안을 탐험 하고 1493년4월 바셀로나로 복귀하였다. 컬럼버스는 그곳이 중국의 일부라고 착각하였으며, 탐험은 포르투갈에 비해 성공적인 것이었고, 탐험소식은 인쇄되어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의 2차 항해는 같은해 9월, 17척의 배로 1,200명의 선원과 보급을 싣고 새로운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출항하였다. 그러나 1496년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올때 까지 별 성취가 없었고, 그후 1498년과 1502년의 두 항해도 성과없이 끝났다.
토데실라스 조약: 컬럼버스가 서인도제도로 부터 복귀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양국의 지배를 분할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교황 알렉산더4세는 각국에 교서를 보내 경도 100 리그 서쪽과 케이프 베르데 군도 남쪽의 모든 육지는 캐스틸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존2세는 스페인과 협상하여, 케이프 베르데 군도 서쪽 370리그 경도선의 동부는 포르투갈이 지배하도록 조정하고, 1494년 토데실라스 조약에 양국이 서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동부 남아메리카 (브라질) 를 지배하고, 스페인 (캐스틸) 은 이선의 서쪽을 취하여, 대부분 아메리카와 태평양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북 아메리카에서 효력이 없게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되어 이 조약 은 무시되었다. 네델란드가 말라카를 함락하고, 화란 동인도회사 가 인도네시아에 있는 포르투갈의 자산을 인수하여, 서뉴기니아, 서부 오스트레일리아가 홀란드 영이 되었다. 동부 오스트레일리아 는 1770년 제임스 쿡이 탐험하여 영국이 영토권을 주장할 때 까지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북아메리카: 이탈리아의 항해사이며 탐험가인 존 캐보트 (1450-1500) 는 1497 년 영국 황실의 일부 지원으로 18명의 선원과 함께 소형 배 한척으로 북아메리카 캐보트 해협의 케이프 노스, 세인트 폴, 케이프 레이 해안을 탐험하였다. 그는 그곳을 아시아의 동북해안으로 착각하고, 8월 브리스톨로 돌아왔다. 캐보트는 1498년200명의 선원을 5척의 배에 분승하여 출항하였으나 심한 태풍으로 손상을 입고 아이랜드에 닻을 내렸다. 1499년 라브라도는 포르트갈 왕실의 허락을 받아 데 바셀로스와 함께 그린란드에 도착하였고, 영국의 이름으로 탐험하려고 브리스톨로 돌아왔다. 1499-1502 년에 개스파 형제와 코르테 리얼은 그린 랜드 해안을 탐험하였고, 라브라도는 뉴파운드란드를 탐험하여 이 두 해안의 이름이 명명 되었다.
남아메리카: 아메리고 베스푸치 (1454-1512)는 플로렌스 출생의 상인, 탐험가, 항해사로서, 알론소 데 아제다의 지휘하에 스페인 에서 출항하는 4척 탐험선의 항해사로 원정에 참가 하였다. 그의 함선은 1499-1500 항해에서 귀아나에 도착한후 아마존강 입구 를 발견하고, 케이프 오거스틴까지 남하하여 다시 오리노코강까지 북상하고, 하이티에 도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탐험지역이 아시아 라고 착각하였다. 베스푸치는 포르투갈의 후원으로 제2 탐험에 들어 갔다. 탐험대는 1501년 봄 리스본을 출항하여 케이프 버드 군도에 정박하고, 브라질의 케이프 오거스틴 해안에 도착 하였다. 그는 계속 남하하여 리오 데 자네이로 만과 리오 데 라 플라타 만 까지 항해하고 1502년초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탐험 지역 이 아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인도양과 아시아: 다 가마의 인도항로: 포르투갈 왕 만누엘 1 세의 지원하에, 바스코 다 가마 (1460-1524) 는 1497년 6월 170명의 무장병력으로 4척의 탐험선에 분승하여 리스본을 출항 인도양을 항해 하여 다음해 5월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 하였다. 출항 후 2년 만에 가마와 55명의 선원들이 생존하여 포르투갈로 귀환하였다. 포르투갈 제2 탐험대는 1500년에 페드로 카브랄의 지휘하에 약 1500명을 13 함선에 분승하여 출항하였다. 임무는 인도의 캘커타 왕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그 시내에 포르투갈 공장을 세우는 것 이었다. 카브랄은 아랍 상인조합과 분쟁으로 들어가, 폭동으로 공장이 전복되고 70명의 포르투갈 인원이 살해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과 탈리컷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엿다. 그들 제3탐험대는 1502년 2월 함선15척에 800병력이 중무장하여 다 가마의 지휘로 리스본을 출항 하여 칼리컷에 도착하였다. 다 가마는 협상 이전에 칼리컷으로 부터 모슬렘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여, 포르투갈 함대는 2일동안 시내로 함포사격을 하면서, 미곡 수송선을 잡아 신체적 가해를 하여 왕에게 보내어, 말라바 해안의 무역이 이루어 졌으나, 요구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였다. 다 가마는 코친, 카나노어, 인근 왕국으로부터 영념류를 수집하여, 해안 순찰을 위한 소 함선 분견대을 남기고, 1503년초 인도를 출항하여 동년 9월에 포르투갈에 도착하였다.
알폰소 데 알부커키 (1453-1515) 는 포르투갈 존2세의 친구로서 북아프리카에서 모슬렘과 오토만 터키에 대항하여 10년간 전투를해온 군사적 천재 이다. 존왕의 원정 목적은 기독교의 전파, 양념류 무역로 확보, 포르투갈의 아시아 제국 건설에 있었다. 제1차 탐험 에서, 존왕은1503년 알버커키와 사촌 프란시스코 에게 각각 함선 3척을 주어 인도탐험 을 위해 출항시켰다. 그는 포르투갈이 코치항을 건설하도록 허락 을 받아 무역관계를 수립 하고, 1504년 귀국하였다. 제2차 탐험에서, 마누엘 왕은 알부 커키를 신임하여 1506년 함선 5척으로 출항하게 하였다. 그는 소코트라를 공략하고 요새화 하여 아덴만을 통제히고, 1507년 호르므즈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만을 통제 하였다.
포르투갈의 인도총독 (1509-15): 1509년 알부커키는 인도의 총독으로 모슬렘 세계를 지배하고 양념류 무역을 통제 하였다. (1) 고아 의 정복 (1510): 알부커키는 함선 23척과 병력 1200명으로 포르투갈 함대를 편성하여 고아를 공략하여 모슬렘 6,000명을 사살하고 요새화 하였으며, 힌두인구의 지원을 다시 획득하였다. 따라서 고아에서 포르투갈의 양념 거래가 보장되었다. 상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주화를 발행하여 영토적 정복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2) 말라카 정복 (1511): 알부커키는 900 명의 포르투갈 병력과 200명의 힌두용병을 18 척 함대로 편성 하여 말라카를 정복하였다. 말라카는 카이로나 메카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 이다. 포르투갈의 상선은 1513년에 처음으로 중국 갠톤에 도착하였고, 1556년에 마카오에 창고를 짓고 정착을 하였다. (3) 몰루카 (1513): 양념산지인 몰루카 섬들에 포르투갈 상선이 도착하였다. 한 지도 제작자는 현지에서 몰루카 최초탐험 에 참가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터네이트 왕과 계약을 하여, 정향나무 수집을 위하여 안전한 보관창고를 지었다. (4) 알부커키 는 양념류를 산지로 부터 수집하여 선적하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 하며, 배들이 안전하게 운항하여 리스본에 도착 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 무역 독점을 보장하도록 체제를 발전시켰다.
태평양과 아시아 (1513-29): 태평양의 발견: 1513년 스페인의 바스코 데 발보아는 오늘날 콜롬비아의 아칸디 남쪽에서 반대편 해변에 금이 많이 있다고 우연히 들었다. 그는 추장들로 부터 들은 정보로, 190명의 스페인 인력, 소수 원주민 안내자, 사냥개 무리와 함께 파나마의 이투무스를 건넜다. 몇척의 범선과 10 개의 원주민 카누로 해안을 항해하고 육지에 접근하였다. 탐험대는 1,000명이 증원되어 추쿠마쿠 강을 따라 전투를하며 밀림을 지나 산을 오르고하여 다른 바다를 불수있었다. 동년 9월25일 발보아는 선두에서 수평선 상에 있는 큰 바다를 처음 발견하였다. 110 km 를 더 전진하여 그는 새로운 바다를 보고 “마 델 수르” 라고 명명 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루존 섬을 발견하였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1480-1521):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해군장교 로서 마누엘 1세에게 인도에 도착하는 세계일주 계획을 지원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스페인의 찰스는, 인도네시아 양념섬 몰루카에 이르는 서부 항로를 발견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승인 지원하였다. 마젤란 탐험대는 5척의 선박에 270명의 선원으로 보급을 싣고 1519년 9월 스페인을 출항하여,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 리오 데 자네이로에 도착하였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세인트 줄리안에 정박하자 세선장이 반란을 일으켜 한사람은 살해되었고, 마젤란은 두 선장을 참수하였다. 겨울동안 산티아고 호는 폭풍으로 손실되고 1520년 10월 항해를 계속하여 마젤란 해협을 탐험하는 동안, 산 안토니오 호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냈다. 나머지 함대는 11월 말 태평양에 진입하여 1521년 3월에 (3개월 20일 항해) 구암 섬에 도착하였다. 긴 항해로 인해 식품과 물이 소진되었고, 약 30명이 대부분 괴혈병으로 사망하였다. 마젤란 함대는 곧 필리핀에 도착하여, 한달 반동안 체재하면서 최초로 미사를 드렸다. 마젤란과 탐험대원은 4월 27일 막탄 섬에서 원주민을 힘으로 누르려고하자, 싸움이 벌어져 제압하였으나 마젤란은 살해 되었다. 그의 사후 공동 지휘관 2명이 지휘하여 함대는 필립핀을 출항하여 1521년 11월 몰루카 양념섬에 도착 하였다. 선박2척중에 항해 가능한 빅토리아 호에 수집한 양념을 싣고 출항하여 1522년 9월에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탐험대 270명이 출발하여 2년의 항해에서 18명이 생존해 돌아왔고, 그후 17명이 추가로 생존하여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항해 기술과 강한 인내심에 대해 명성을 얻었고, 최초의 세계일주 는 지리적 발견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항해로 간주되었다. 마젤란 은 항해하면서 태평양을 명명하였고, 마젤란 해협은 18세기에 그의 정신과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명명되었다.
동서 탐험의 충돌: 포르투갈은 1525-28년 사이에 몰루카 군도 에 수개의 원정대를 보내어 여러섬을 탐험 하였다. 어떤 탐험대 들은 파푸아 뉴기니아 북서쪽 까지 도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마젤란의 탐험 이후, 스페인의 찰스는 데 로아이사의 지휘로 제2 탐험대를 보내 몰루카군도에 도착 요새를 구축하자, 터네이트에서 기존의 포르트갈 원정대와 대치하었다. 1년간 전투로 스페인이 패퇴하였으나, 분쟁은 10년간 지속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국은 3명의 천체학자, 3명의 지도 제작자, 3명의 항해사, 3명의 수학자로 각각 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의하였고, 1529년 존3세와 찰스5세는 자라고자 조약을 체결 하고, 몰루카 군도는 포르투갈에, 필리핀은 스페인에 귀속시켰다.
스페인 정복자들 (1519-32): 발견의 시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인, 탐험가,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대양주, 아프리카, 아시아로 항해하여 영토를 정복하고 통상을 개방하였다. 그들은 16, 17, 18 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많은 식민지를 가졌다. 1492년 컬럼 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이래, 스페인 서부와 남부 귀족들은 캐리비안 군도에서 점차 아메리카 제국을 건설하였다. (1)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511년 쿠바를 정복하여 바라코아에 스페인 정착촌을 형성하고1514년 총독이 되었고 다음해 하바나를 건설하였다. 페르디난드2세는 에코미엔다 정착체제를 선포하고 봉건제도의 노동자 개념을 적용하였다. (2) 허만 코르테스는 1519년 600명의 병력으로 멕시코 베라크르즈에 상륙하여 아즈텍제국을 정복하고 총독이 되었고, 1541년 스페인으로 복귀 하였다. (3) 페드로 다 빌라는 1519년 아리엔을, 1524년 파나마 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정하고, 페루 정복과 남미 서부해안 탐험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4) 프란시스코 피자로는 파나마 남부를 탐험 하여 1526년에 페루를 발견하고, 본국의 승인을 받아 1529 년 이를 정복하였고, 1542년 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이 되었다. (5) 스페인은 페루에서 은광을 발견하였고, 페루와 멕시코는 1561-1630기간 매년 평균 200 톤의 금은을 스페인으로 선적 하였다. 스페인은 새로운 농산물—설탕, 염료, 바닐라, 수피, 감자, 커피, 옥수수, 담배—을 아메리카로 부터 수입하였다.
포르투갈 무역: 다 가마는 1498년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은 양념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인도의 고아 에 무역기지를 건설하여, 유럽상품을 고아로 부터 마카오로 운송 하여 비단, 비단제품, 관동자기를 선적하고,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팔면서 은을 매입하여, 되돌아 오면서 마카오에서 매도하였다. 포르트갈 상인은 양념류, 보석, 비단, 양탄자, 아이보리, 가죽, 향수 를 아시아에서 수입하여 큰 이윤을 남기고 유럽에서 팔았다.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 무역을 독점하고, 포르투갈은 극동과의 무역에 지배적 이었다. 동서 무역의 독점은 동인도에서 화란에, 서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d) 종교 전쟁과 30년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찰스5세는 이탈리아에서 합스부르그-발로이스 전쟁, 오토만 제국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분투, 독일 제후들 간의 분쟁으로 인한 종교개혁의 3 가지 분쟁에 동시 직면하였다. 그의 동생 페르디난드는 황제를 계승하였고, 그의 아들 필립2세 는 스페인을 계승하여 네델랜드와 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1559 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전쟁을 종식한 후, 스페인은 이탈리아를 150년간 통치하였다. 필립2세는 국력의 절정을 이루어 스페인 황금시대를 열었으나, 네델란드의 독립과 포르투갈의 병합 등으로 인해 수회의 국가부도에 직면하였다. 프랑스는 헨리2세 사후에 그의 3 아들이 비효율적으로 통치하여, 카톨릭과 신교간 종교전쟁 으로 많은 휴그노가 희생 되었다. 헨리4세는 1589년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모든 종교의 공존을 허용하였다. 영국은 헨리8세 사후 에드워드6세가 6년간, 매리1세가 5년간 재임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44년간 통치 하면서, 1588년 스페인 함대를 침몰시켰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약화시키려고 휴그노와 칼빈교도를 도왔다. 유럽은 버본-합스부르그 갈등으로 30년 전쟁을 하였고,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국제관계에서 질서를 정립하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1558-1603): 종교-신교: 16세기에 신교는 미래를 위해 싸우는 새로운 이념에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 신앙으로, 최초 의회는 1559년 동일성의 법령 (Act of Uniformity) 을 공표하여, 모든 영국인은 일요일 성공회에 출석 하고, 모든 다른 종교의식을 철폐하였다. 최고의 법령 (Act of Supremacy) 은 영국여왕이 매사에 최상의 통치자로 종교적 통치권을 가졌으며, 고위 성직자나 공직자에게 선서를 요구하고, 교황의 권위에 대한 어떤한 방어도 종신형에 처하였다. 영국의 청교도(Puritans) 는 매리1세때 망명하여 귀환한 세력 으로, 1569년 캠브리지 신학교수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장로 교조직과 성공회조직이 다르다고 성공회를 비판하였다. 그는 해고 된 후 스위스에 가서 장로교 신학에 심취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1572년 장로교 최초 교회를 세워 청교도가 번창하였다. 이때에 청교도는 런던의 신교와 의회의 주류가 되었다. 청교도 운동에 위협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출판과 교회활동을 억제하고,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청교도 세력의 주장을 억제하였다.
영국과 아일랜드: 엘리자베스는 가톨릭 아이랜드가 신교 영국에 위협이라고 생각하여, 섬 전역에 신교를 완전히시행하도록 명 하였다. 1565년 여왕은 헨리 시드니를 왕실 대리인으로 임명하여 레인스터의 게일 세력과 울스터의 스코트 세력을 파괴 하려하였다. 시드니가 문스터에 영국 정착촌을 형성하여 식민지화 하려하자, 데스몬드 공작 피처랄드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1579 년 소수의 이탈리아 및 아이랜드 상륙군과 합세하였다. 영국은 그레이 경 지휘하에 함대를 파견하여, 600명의 아일랜드-스페인군의 방어 요새를 공략하여 함락 하였고, 문스터 반란을 평정하는데 4년이 걸렸다. 문스터의 토지를 몰수하여 1585년부터 영국 정착자들 에게 분배하고, 여왕은 터로우 오네일을 타이론의 공작에 새로 임명하였다. 그는 로마, 스페인, 아일랜드 적대세력과 접촉하여, 1595년 반란에 합세하고 영국 수비대에 적대하였다. 영국은 스페인의 위협을 우려하여 제한된 병력을 파견하여 결국 타이론이 승리하였고, 영국 정착자들은 주거지로 부터 철수하였다. 여왕 은1600년 마운트조이의 남작 찰스 불로운트를 아일랜드에 보내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반란군은1603년 항복하였다.
호킨스와 드레이크: 존 호킨스 (1532-95) 는 영국의 항해사로서 민간무장선으로 대서양 노예무역에 가담하였다. 그는 1562년 3 함선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 300명을 잡아서 서인도 섬에 가서 설탕, 양념, 약초등과 교환하여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제2 투기 로 투자자를 모았고, 여왕의 배 한척을 지원 받았다. 그는 4함선 으로 아프리카로 항해하여 400명의 노예를 잡아 서인도 섬에 팔고 영국에 돌아와 여왕에게 투자이익 60%를 바쳤다. 1567년 그는 여왕에게 배 한척을 빌려 다른 4척과 함께 출항하여 같은 방법으로 거래하고 거액의 물건을 싣고 귀환중, 멕시코 해안에서 스페인 함대에 붙잡혀 모두 손실되고, 1569년 어렵게 귀환하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1540-96) 는 본 항해 생존자로 복수를 결심 하고, 파나마 해안에서 스페인의 은 수송선을 나포하여 영국으로 돌아 왔다. 여왕은1577년 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탐험을 시작하려고 드레이크를 보냈다. 그는5함선에 164명이 분승 하고 1577년 플리머스를 출항하여 마젤란 해협 에서 폭풍으로 흩어졌고, 드레이크 배는 샌프란시스코 까지 북상 하여 필리핀, 몰루카, 자바, 인도양을 거쳐1580년에 귀환하였다. 그는 60만 파운드의 전리품 중 27.5만을 여왕에게 바쳤다.
영국-스페인 전쟁 (1585-1603): 1568년 스페인 함선 수 척이 15만 파운드를 싣고 네델랜드로 항해 중, 영국의 민간무장선이 습격하여 영국으로 끌고왔다. 이로인해 네델랜드의 알바 공작이 영국인을 체포하고 화물을 압류하자,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국적자 를 체포하였다. 영국은 계속 스페인 함대를 습격하였고, 필립의 여왕 암살 음모에 관련자들을 투옥하였다. 1584년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대사를 축출하고, 네델란드 독립을 지원하였다. 1585년 드레이크는 30척의 함대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산토도밍고를 습격하고 뇌물로 30,000 파운드를 받고, 플로리다의 오거스틴을 약탈 방화하고 1986년 돌아왔다. 영국이 스코트여왕 매리를 처형 한 보복으로, 스페인이 영국침공을 계획하는 동안, 드레이크는 카디즈 항에 정박중인 스페인 전함 37척을 불태우고, 스페인의 침공계획을 지연시켰다. 스페인은 시도니아공작 지휘하에 함선 130척, 항해요원 8,050 명, 전투병력 19,000 명으로 무적함대를 편성하고 1588년 5월 출항하였다. 영국의 드레이크는 하워드 휘하에 전함82척의 부제독으로 플리머스에서 스페인 함대를 기다렸다. 무적함대가 북상하여 칼라이스에 정박하자, 영국 해군 은 함포사격으로 스페인 함대를 해상으로 유인하여, 다수의 함대 를 괴멸하였다. 스페인 제독은 철수를 명하였고, 잔여선은 바람에 밀려 북상하여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퇴각하였다. 이들은 해안에서 아무런 지원없이 10,000명의 병력이 54 척에 분승하여 부상 또는 환자로 패퇴하여 스페인에 도착하였다.
스코틀랜드: 매리 스튜어트 (1542-67) 는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 의 딸로, 출생시 부친이 전사하여 여왕이 되었다. 1558년 프랑스 의 프란시스2세와 결혼하였으나 1560년 그가 사망하여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매리는 1565년 사촌인 단리와 재혼 하여1566년 제임스1세를 출산하고, 단리는 곧 살해되었다. 그녀는 사촌 엘리자베스에게 보호를 받으려고1568년 영국으로 왔다. 그러나 매리가 이전에 영국의 왕위계승을 요구하였고, 그녀의 캐톨릭 종교를 우려하여 주거를 여러 성곽에 제한하였고, 여왕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적발되어 1587년 처형되었다. 모친인 매리를 계승하여1567년부터 스코틀랜드왕이된 제임스4세는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1세 (1603-25) 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문학과 연극의 황금시대를 열었고, 성경을 완역 하여 제임스 왕 판 (King James Version) 을 출간하였다.
스페인 필립 2세 는 스페인왕을 계승하였고 4회의 결혼을 하였다. 합스부르그는 숙부 페르디난드1세가 계승 하였다. 필립은 부왕이 남겨준 거액의 부채와 자신의 원정으로 전비가 증가하여 부채가 누적되었고, 자신의 재임중 6회 이상 국가파산에 직면하였다. 정치와 군사: 필립은 스페인, 네덜랜드, 이탈리아, 아메리카 신 세계를 캐톨릭 종교와 종교재판을 통하여 통치하였다. 1559년 영국 및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터키가 지중해에서 스페인을 위협하여, 필립은 함선 28척과 병력10,000 명을 희생하여 1560년 트리폴리를 정복 하였다. 그래나다의 무어인들은 기독교의 억압으로 폭동을 일으켜, 1568년에 오스트리아의 돈주안이25,000의 병력으로 출동하여 제압하였고, 필립은 캐스틸에 산재한 무어인 50,000 명을 축출 하였다. 사이프러스에 터키의 위협이 증가하여, 스페인은 1571년 베니스-로마와 신성동맹으로, 레판토해전에서 터키전함 230척 을 침몰시켰으나, 터키는 1년내에 대등한 해군을 재건하였다. 또한 필립은 포르투갈을 병합 하여1580-1640기간 통치하였다. 그는 페루와 멕시코로부터 채굴한 금은괴의 안전한 수송을 위하여 아메리카 해상 수송로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저지대 국가: 필립2세가 저지대 국가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여, 1566년 칼빈주의자들의 반 스페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는 알바 휘하에 10,000명의 병력을 네델랜드에 보내, 가톨릭종교를 보호 하고. 무역을 증진 하며,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1572년 신교도 군대는 북부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윌리엄을 지도자로 선출하여 제2폭동을 일으켰다. 알바는 오스트리아의 돈주안으로 대치되었다. 1575년의 스페인 국가부도는 사회 무질서를 촉진 시켰고 군대는 앤트워프를 포위하여 살인 약탈 하였다. 1577년 북부 주의 지도자들은 돈주앙과 협상하여, 영구칙령을 공표하고 군대는 철수하였다. 1579년 남부 주는 가톨릭동맹을 결성하여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1585년 스페인 군대는 부뤼셀과 앤트워프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주요도시에서도 스페인의 지배를 회복하였다. 영국의 해적행위에 대한 스페인의 보복으로 1588년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 함대는 패퇴하였다. 1595 년 플랜더스 군대와 여타 스페인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헨리 4세는 스페인 과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과 네덜랜드는 프랑스와 동맹하였으며, 1596년 스페인의 파산으로 인하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스페인은 이탈리아 전쟁에 승리하여 이탈리아 반도와 프랑슈콩테를 지배하였다. 스페인 해군은 포르투갈 계승 전쟁의 폰타 델가다 해전에서 1582년 영불 연합함대에 승리하여 아조레스 군도를 취득하였다. 필립은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신교국 에 대항하여 가톨릭 동맹을 재정지원 하였다. 1593년 헨리4세는 캐톨릭으로 개종하였고, 1995년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여, 다음 해 봄에 칼라이스를 함락하였다. 1597년 스페인이 아미엔스를 탈취하자, 프랑스는 이를 탈환하여 협상을 시작하고, 1598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헨리는 낭트칙령을 선포하였다.
프랑스의 종교전쟁 (1562-1629): 갈리카니즘은 프랑스 교회를 통치하는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정의한다. 갈리카니즘과 앙그리카 니즘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왕실의 권력성장과 같은 선상에 있었다. 17세기에 “프랑스에는 전제 군주국가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 교회가 정돈되면서 정치적으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정치적 국수주의가 발생하고, 지방교회의 일은 지방 주교와 지방 교회에 맡기라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프랜시스와 그의 아들 헨리2세는 그들의 클라이언트, 일가친척, 정치적 동지들을 교구 직위에 다수 임명하였다. 이를테면 프랜시스는 129명의 주교 중 102명을 포함하였고, 헨리의 임명 가운데 1/4 은 부재자로 정신적이라기 보다 정치적 임명이었다. 생 제르맹 칙령 (1562): 1560-70 년에 프랑스는1,200개신교회에 신도 1.8백만으로 인구의 10% 였다. 그들의 칼빈주의는 교리부패와 성직남용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비참함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하층계급의 반란 이였다. 중산층은 칼빈주의가 매력적이었으며, 1560년 휴그노의 85% 가 상공인과 교육받은 전문가 였으며, 농부나 노동자는 5% 이하였다. 발로이스 왕들은 신교도를 처형하고 신교주의를 금지하였다. 1562년 찰스 9세의 섭정 캐더린은 생제르맹 칙령을 선포하여, 내전을 피하고 휴그노 정착을 제한적으로 인정하여, 그들은 공개적으로 평화롭게 만날수가 있었다.
초기 종교전쟁 (1562-70): 파리의 의회는 상기 칙령의 등록을 거부하였으나, 1562년 3월 법으로 등록이 되었다. 가이스 공작의 병력이 바시에서 예배하는 비무장 신교도를 만나 발포로 시작하여 대량학살이 발생하여, 프랑스 신교는 올린스에서 전국회의를 열고, 콘데 왕자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요청하였다. 콘데는 가이스와 그 지원자에 대항하여 신교도들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였다. 올린스 시를 신교도 작전기지로 점령하고, 콘데와 다른 귀족들은 왕국의 수로, 교량, 육로를 점령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캐더린은 다른 선택이 없이 휴그노반란을 진압하는 전쟁을 지원하였다. 3/4 의 가톨릭 지도자 들은 전사하였으나, 남부 신교 공동체는 피해가 없었다. 캐더린은 1563년 캠브로이스 칙령으로 내전을 종식하였으나, 유사한 작전 은 지속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캐더린 데 메디시 가 음모하고 귀족들과 시민들이 수행한 비극이다. 1572년 캐더린 딸 마가렛이 휴그노인 나바레의 헨리와 혼인하는 날, 다수 휴그노 귀족들이 파리의 결혼식에 참가하였다. 8월 24일 새벽, 콜리니 제독 암살로 시작하여 파리 지역에서 휴그노 5,000-30,000명을 학살하였고, 지방에서도 학살이 10월초 까지 지속되었다. 이 학살 이 프랑스 종교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동맹의 위기와 헨리3세: 찰스 9세가 병사하고 동생인 헨리3세 (1574-89) 가 계승하였다. 휴그노는 세력을 강화하였고, 가톨릭은 1576년 신성동맹을 결성 하였다. 프랑스 의회는 왕이 휴그노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도록 압박하였고, 1585년 가톨릭 동맹과 헨리3세간에 레모우어스 동맹을 체결하여 구 종교전쟁을 새롭게 하였다. 헨리3세 상속은 신교도로서 사촌인 나바레의 헨리와 가톨릭 동맹의 가이스 공작인 헨리가 유력하였다. 1588년 12월 헨리3세는 가이스 공작을 왕실로 초대하여 경호병력이 그를 살해케 하고, 동맹지도자들을 투옥하였다. 1589년 8월 한 도미니칸 수도사가 헨리3세를 암살 하여, 나바레의 헨리 왕이 헨리4세로서 프랑스왕이 되었다.
헨리4세 와 낭트칙령: 헨리4세 (1589-1610)는 신교의 신앙으로 양육되어 1572년에 나바레 왕을 계승하였고, 루이 9세의 직계로 보우본가의 수장이며 최초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는 4년 후에 실용적 정치인으로 가톨릭교로 개종하였고, 1598년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신교도에게 종교적자유를 허용하여 프랑스 종교전쟁을 종식하였다. 그는 가톨릭 한 광신자에 의하여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루이8세가 계승하였다. 왕위계승 과정에서 스페인은 가톨릭 동맹으로 그를 방해하였다. 그는 오토만 제국과 동맹의 정책을 견지하여, 1604년 헨리4세와 오토만의 아메트1세는 평화 조약과 협정에 서명하여, 프랑스는 오토만 제국내에서 여러가지 경제적 이득을 가져왔다. 1604-09 기간에 아시아와 무역에서 영국의 모형을 따라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수립하도록 시도하였다. 그는 1610년 독일과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30년 전쟁 (1618-48) 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전쟁은 독일 에서 일어났지만,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유럽 패권을 위해 싸운 전쟁이다. 독일에 가톨릭 세력이 상승하자, 신교 제후들은 1608년 신교연합을 결성하고, 가톨릭 통치자들은 1609 년 가톨릭동맹을 결성하였다. 아우스부르그 평화조약에도 불구하고, 루터란과 가톨릭이 제후국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종교는 불화가 되었다. 이 조약은 칼빈신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때문에, 팔레티네이트 선제후 프레데릭 4세는 1608년 화란-영국-프랑스가 지원하는 신교연합의 지도자가 되었고, 바바리아의 맥시밀리안 공작은 1609년 스페인과 신성 로마제국에 의해 지원되는 가톨릭동맹을 결성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가톨릭과 개신교의2캠프로 나누어졌다.
보헤미아 단계 (1618-25): 1617년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드 2세를 왕으로 받았으나, 칼빈주의 귀족들은 팔레티네이트 신교 통치자인 프레데릭 5세로 대치하였다. 한편 페르디난드 2세는 바바리아 맥시밀리안의 지원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 다. 페르디난드는 1620년 프라하 교외의 한 전투 에서 프레데릭을 이겼고, 스페인은 1622년 팔레티네이트를 정복하였다. 프레데릭 은 보헤미아와 팔레티네이트 두 왕관을 잃고 홀란드로 망명하였다. 스페인은 팔래티네이트의 서부를 취하고, 바바리아는 나머지를 취하였다. 페르디닌드2세는 보헤미아를 합스부르그 에 병합하고, 신교도 토지를 몰수하고 가톨릭국가를 세워, 약 30,000명이 삭소니와 항가리로 이주하게 되었다.
덴마크 단계: (1625-29): 크리스찬4세 (1588-1648) 는 덴마크 왕으로 루터신교를 신봉 하였다. 그는 신교지원 과 영토확장의 야심으로, 20,000 용병과 15,000 자국 및 영국의 병력으로 독일 북부로 진격하였다. 페르디 난드 2세는 보헤미아의 왈렌스타인이 30,000-100,000 병력으로 북진하여 함부르그, 루벡, 브레멘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고, 덴마크군은 완전히 패퇴하여 전쟁개입을 종료하였고, 발틱에서 덴마크의 우위도 상실하였다. 프레데릭2세는 전승으로 위상이 고양되어 1629년 배상칙령을 공포하여, 칼빈주의 예배를 금지 하고, 지난75년간 신교 제후에 의해 빼았긴 모든 재산을 가톨릭 교회로 환원시켰다. 동년 루벡조약에서, 덴마크는 독일의 신교 를 지원하지 않는 조건으로 영토를 회복하였다.
스웨덴 단계 (1630-35): 스웨덴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1611-32) 는 국가를 부흥시켜 발틱해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부르봉 프랑스는 세력이 강화된 합스부르그 독일에 불안하여, 스웨덴을 재정지원하여, 군사적 천재인 구스타부스는 북부 독일에 훈련되고 무장된 군대를 출현시켰다. 그는 발틱해가 스웨덴 바다 가 되기를 원하여, 북부 독일에서 합스부르그를 보고싶지 않았다. 또한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독일의 신교를 돕고 싶었다. 구스타부스 군대는 북부독일에서 제국군대를 쓸어버리고 독일의 심장부로 진격하였다. 페르디난드2세는 왈렌스타인에게 제국의 지휘권을 주어 라이프치 부근에서 구스타부스와 전투하였으나 (1632), 대패 하였다. 왈렌스타인이 부하에게 암살되고, 제국군대 는 1634년말 스웨덴군을 남부 독일로 부터 격퇴하여, 가톨릭 교회를 유지하였다. 제국황제는 이 기회에 평화를 유지하기위하여 1629 배상칙령을 철회하였다.
프랑스-스웨덴 단계 (1635-48): 전쟁에서 정치권력이 역동적이 되면서 종교적 이슈는 의미를 상실 하였다. 프랑스 루이8세는 리첼리우 추기경의 지도력으로 전쟁에 진입하였다. 가톨릭 프랑스가 가톨릭 합스부르그 (독일과 스페인) 에 대항하여 개신교 스웨덴을 지원하고; 스웨덴은 북부 독일에서, 프랑스는 네덜랜드와 라인강을 따라 독일 서부에서 전쟁을 하였다. 1643년 로크로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스페인에 결정적 승리를 하였고, 남부독일로 기동하여 제국의 바바리아군에 대승하였다. 모두가 전쟁에 지쳐서, 5년간의 협상 끝에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 (1848) 에 서명하였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전쟁을 계속하여 1659 년 피레니 평화에 서명하였다. 따라서 스페인은 제2등급 국가로 전락하였고, 프랑스는 유럽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웨스트팔리아 조약: (1) 종교의자유: 모든 독일 제후국들이 세개의 개신교 (가톨릭교, 루터교, 칼빈교) 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최소한 개별적 예배, 양심의 자유, 이민의 자유를 포함하였다. (2) 영토의변동: 프랑스는 서부독일, 알사스 일부와 3개 도시을 얻어 불독 국경지역을 통제하고, 미래 군사작전에 유리한 기지를 제공 하였다. 스웨덴은 서포메라니아, 브레넨, 베르덴을 취득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영토를 상실하지 않았으나, 300이 넘는 제후국들은 사실상 독립국으로 인정되어, 제국의 지배력은 크게 감소하였다. (3)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 되었다. 교황은 조약의 모든 결정 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종교가 기본적으로 개인의 신념과 선택 이 됨으로서, 정칙적 동기가 외교정책을 좌우하였다. (4) 경제 사회적 영향: 전쟁으로 독일 경제가 파멸되고 인구가 1600-50 기간에 2,100만에서 1300만으로 감소하였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 어떤 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다른 지역은 무사하여 경제가 성장하였으나, 전쟁은 대부분 파괴적 이었다. (5) 세력 균형: 본 조약에서 국가는 유럽질서의 건설블록이 되어 국가 주권의 개념이 수립되었다. 웨스트팔리아는 국가간 합의된 규칙과 제한에 기초하여, 국제질서를 제도화하는 최초의 시도가 되었다. 세력 균형 (Balance of Power) 과 국가이익 (National Interests) 의 개념이 국제관계에서 희미하게 나타나가 시작하였다.
군사과학은 1560-1650년 사이에 혁명적인 발전을 하였다. 근세 초기 유럽의 전쟁은 5 분야로 발전—화력의 새로운 사용, 요새화의 새로운 형태, 군대 규모의 증가, 직업주의의 발전, 새로운 전술—로 발전하였다. 소총은 1550년대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군에 소개되었다. 그후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화란에서 정확성과 연발사격 기술을 발전시켰다. 화란의 모리스는 1616 년 최초의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전쟁기술을 교육하고, 화란 의 실제에 기초하여 전쟁교범을 발행하였다. 스웨덴의 아돌푸스는 징병제도에 의해 상비군을 발전시켰고, 그의 보병여단은 동수의 소총수와 창병으로 편성하였다. 그는 공격전술의 발전과 함께 소총수의 재장진 속도를 증진하였고, 기병 운용의 유연성과 함께 야전포병의 화력을 증가하였다. 화포는 3개의 구경으로 분류하여 탄약은 즉각 장진하도록 준비하였다. 포병화력의 증가는 진지설계 를 변형하였고, 군대규모를 증가시켰다. 1630년대 유럽 주요국가 는 상비군 150,000명을 유지하였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 기간이 장기화 되어 비용증가로 인해 세금부담이 증가하였다. 무기와 장비의 개선, 전략 전술의 발전과 함께, 융통성과 기동성을 가진 잘 훈련되고 규율된 군대를 준비하는 것이 전승의 비결이다.
위기와 내전: 경제 사회적 위기: 15-16세기에 유럽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을 통하여 많은 변화를 체험 하였다. 인구의 증가로 의식주 수요가 증대하면서 농업, 공업,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신대륙의 발견과 동서 무역의 증가는 경제발전과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기후의 변화로 비정상적인 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로, 흉년, 기근, 질병이 만연하였고, 정치혼란과 종교전쟁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가져 왔고, 인구감소와 경제불황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아메리카로 부터 유입되는 고가의 금속은, 1500-1600 년 사이에 유럽에서 들어온 동일 양의 은은 평균 구매력이 1/5 로 감소하여, 물가인상 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고 생활수준이 크게 저하되었 다. 반면 토지귀족은 임대료를 인상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계층간에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켰다. 증폭된 불만과 분노는 일상에서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늘어나, 결과적 으로 유럽 각국에서 반란과 내전으로 확산 되었다.
반란과 내전: 30년 전쟁이후 일련의 반란과 내전이 유럽국가의 내부 질서를 파괴하였다. 귀족은 군왕의 중앙집권에 저항하였고, 평민은 고율의 세금과 토지귀족이 주는 고난으로 분개하였다. 농부나 하층계급 반란은 1590-1650 년 사이에 유럽 여러나라 에서 일어났다. [휴그노 반란, 1620-28]헨리4세의 암살 이후 루이8세 섭정 캐더린의 신교 탄압에 저항하여, 휴그노들이 자신 들을 방어하고, 독립적 정치군사 조직을 편성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할 목적으로, 주로 남서부 프랑스에서 반란을 이르켰다. 반란은 1620-22, 1625, 1627-28 등 3기간에 일어났으며, 모두 진압되어 휴그노는 정치세력을 잃었고,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1685년 취소함으로서 종교의 자유를 상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프랑스 왕정의 절대권력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마녀재판과 문화적 변화: “마녀는 본래 사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출산이나 질병치료 같은 의료 기능을 담당하거나 점을 치고 묘약을 만드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한 집단이었다.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487년 도미니코교단 두 수도승은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를 질타 하기위해 예수와 대립된 존재로 마녀를 만들어냈다.”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네덜랜드, 뉴 잉글랜드 에서 나타났으며, 이 기간에 7500명의 마녀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이 가난한 무산 하층계급의 50세가 넘는 독신이나 미망인 이었다. 자선의 수혜자는 사회의 짐이 되었고, 재산을 가진 사람은 빈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 두려워, 마녀를 처형 하여 위험이 되는 사회의 오염을 청소하려 하였으며, 이는 정치적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처형은 1700년 부터 감소하여 점차 사라졌다.
(e) 국가의 건설: 절대왕정과 공화정
프랑스 루이 14세 (1643-1715): 선친 루이 13세 (1610-43) 는 1617 년 실권을 잡아, 국정을 문란케한 섭정인 모친 매리를 추방 하고 추종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는 추기경을 수석장관 으로하여 프랑스 아카데미를 세우고 귀족들의 반란을 종식시키며, 도전적 영주들의 성곽을 조직적으로 과괴하고, 결투-무기지참- 사병유지 등 개별적 폭력사용을 금지하였다. 리첼리우 추기경은 수석장관 으로 무기의 왕실독점 원칙을 수립하였으며, 휴그노와 스페인의 위협을 경계하였다. 루이 14세는 모친 안나가 섭정하고 추기경 마자린이 수석장관으로 1661년 그의 사망시까지 보좌하였고, 그 이후 부터는 루이가 직접통치 하였다.
루이14세의 정치: (1) 프롱드 의회 (1648-49): 1648년 의회는 “모든 개인세금 을 1/4 감소하고, 새로운 세금은 의회 동의없이 부과할수 없으며, 지방 장관을 감독하는 왕실의 파견관을 철수하고, 재판없이 24 시간 이상 구속할수 없다” 고 왕에게 요구하였다. 마자린은 의회자도 자들을 구속하였다가 곧 석방하고 개혁을 약속하였다. 영주들이 반란에 가담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켜, 왕은 교외로 피신하였다. 정부군이 반란을 중지시키고, 무기를 내려 놓으면 사면을 허용 하여, 의회는 반군 철수와 왕에 복종할 것을 알렸다. 왕은 1649년 파리로 돌아와 정상을 회복하였다. (2) 프롱드 귀족 (1650-53): 마자린은 불만을 가진 콘테, 콘티, 롱게빌을 구금하였다. 롱게빌 부인은 노르만디로 가서 반란군을 모으고, 스페인령 네델랜드로 가서 트레네에게 반역에 합류토록 약속을 받았다. 반란군은 모두 패퇴하였고, 마자린은 1651년말 프랑스로 돌아왔다. 전쟁이 다시 시작되어, 적대적인 민심으로 마자린은 프랑스를 떠났다. 왕자들 과 싸우는 파리의 중산층은 왕이 파리에 입성 하는것을 허용하여 왕은 1652년 10월에 파리로 돌아왔고, 다음해 2월 마자린도 저항없이 돌아왔다. (3)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59):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 이후, 화란과 신성로마제국은 전쟁을 떠났고, 프랑스와 스페인만이 남았다. 1650-52사이에 프랑스 내란으로 스페인은 상실항 영토의 약간을 회복하였으나 교착상태가 되었다. 프랑스는 1657년 영국과 동맹하여, 영불 연합군은1658년 스페인을 공략하고, 던커크를 함락하여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스페인은 소진하여 1659년 피레네조약을 체결하였다. 합스브루 세력약화로 유럽에서 프랑스가 지배세력이 되었다.
전쟁과 군사전략: 루이14세는 왕국을 천연적 국경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공세적 전략을 취하였다. (1) 계승 전쟁 (1667-68): 루이의 왕비는 스페인 필립4세의 딸로서 스페 인령 네덜랜드 상속권을 주장하여, 프랑스군은1667년 프랜더스 로 침공하여 목표를 탈취하고, 신성로마황제 레오폴드 1세와 협상하여 1668년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플랜더스 에서 약간의 영토를 취하고 네덜랜드와 프랑슈콩테 거의 전부를 스페인에 돌려주었다. (2) 프랑스-화란 전쟁 (1672-78): 프랑스 와 한 세기 동안 우호적 관계인 화란이1668년 영국 및 스웨덴과 3국동맹을 결성하였다. 루이는 해군력 성장으로 위협을 느끼는 영국을 화란과 분리시키려고, 영국과 비밀 도버조약을 체결하고, 영국해군의 지원으로 1670 년 화란을 침공하여 3/7 영토를 점령 하였다. 화란은 암스텔담 부근의 제방을 열어 침수시키고, 유리한 작전으로1673년말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1674년 영국은 화란과 평화조약을 체결 하였고, 프랑스는1678년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종식하였다. (3) 9년 전쟁 (1688-97) 은 프랑스와 유럽 동맹 (오스트리아, 신성제국, 화란, 스페인, 영국, 사보이) 사이의 분쟁으로 유럽과 그 해역, 북아메리카, 인도 등지에서 싸운 최초의 세계규모 전쟁이다. 루이14세는 1688년 라인간을 건너 신성로마 제국을 압박하였다. 레오폴드1 세와 독일의 제후들은 저항하였고, 화란의 윌리엄3세와 영국도 프랑스에 저항하였다. 주된 전투 지역은 네덜랜드, 라인랜드, 사보이, 카탈로니아 였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에 유리하였으나, 1696년 경제위기에 직면한 이후 모두가 소진하여, 1997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프랑스는 알사스를 전부 가진 대신, 라인강 동쪽에 취득한 땅은 포기하였다. (4) 스페인 계승전쟁 (1701-14): 1700년경 스페인은 네덜랜드, 이탈리아, 필리핀, 아메리카를 포함하는 세계적 연방이었다. 찰스 2세가 후손없이 루이14세 손자인 필립에게 양위한다고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유럽을 포위하여 세력균형을 파괴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영국, 홀랜드, 오스트리아, 독일제후 국들이 스페인과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을 형성하고, 전쟁은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오래 지속되었다. 1713년 유트레트, 1714년 라스타트와 바덴 조약으로, 프랑스는 스페인과 영원한 분리를 조건으로 필립의 계승이 승인되었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네덜랜드 영토를 오스트리아와 사보이에 양도하였다. 영국은 지브랄탈과 메노르카를 계속 유지하였다.
경제와 콜베르의 개혁: 장바티스트 콜베르 (1616-83) 는 루이 14 세의 재무장관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 재정 구조조정: 마자린의 사후 그가 숨겨놓은 재산의 위치를 왕에게 폭로 하고, 1653-61기간의 재정감독관인 리콜라스 포우켓의 부패를 고발 하여 재산몰수와 종신형을 받게하였다. 왕은 정의 집행실을 설치 하여 세금징수관, 군납업자, 재정조달 은행가 등에 대하여, 조사 하고, 그들의 불법 부당한 행위를 심판하여 대청소를 하였다. (2) 프랑스 해군력의 건설: 1661-77 기간에 프랑스 해군은 6-8척의 낡은 갤리선과 20-30척의 항해선에서 199척의 전함을 건설하고 그 절반의 배에는 24-120의 포를 장착하였다. (3) 5대농장과 자유무역 지대: 프랑스 북부와 중부의 5대농장 지역에 자유무역 지대를 만들었다. 콜베르 개혁 이전에, 파리에서 영국해협 까지 혹은 스위스에서 파리 까지 16개 지역에서 통과세를 지불하였고, 올린스에서 낭테 까지 28지점에서 지불하였다. 1664년 콜베르는 이 복잡한 체제를 수출과 수입의 단일체제로 하여 비용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하였다. (4) 외국 상품에 대한 관세: 1664년 콜베르는 수입상품에 대해 방어적 관세를 부과하였다. 1667년에 대부분의 수입상품에 관세를 배로 인상하였다. 1700년 지도급 상인들로 구성된 상업위원회는 중상주의 체제는 해외시장에서 프랑스 상품 의 구매를 저하시키고 있다고 모두가 동의하였다.
가톨릭개혁과 휴그노: (1) 갈리카니즘: 프랑스의 종교전쟁 참조. (2) 장세니즘 (Jansenism): 코넬리스 잔센 (1585-1638) 은 화란 의 칼빈주의자나 프랑스 휴그노에 대항하여 가톨릭교를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은 축복과 예정설에서 성 오거스틴을 따르고, 가톨릭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종교적 도덕율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고 주장 하였다. 1616년 잔센은 로우베인에서 화란학생의 수장으로 자유 의지의 예수회 신학을 공격하고, 홀란드 영국 독일에 있는 신비적 청교도 교리를 설파하였다. (3) 예수회 (Jesuits) 는 “그들의 지적 인 독립성과 수도회의 지침은 바티칸으로부터 종종 위협으로 간주 되기도 했으며, 정치적 분쟁에 뒤얽히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회는 교회 안에서 위험하고 권력지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교황청이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4) 휴그노: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폐기하여 칼빈교도를 탄압하였다. 그들의 3/4 은 죽거나 개종하였고, 18세기 초까지 500,000명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세계 각지로 분산되었다.
영국의 대반란과 명예혁명: 대 반란: 16세기 영국은 인구증가로 경제가 번창하고, 부유한 가정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들은 종교 개혁으로 몰수된 토지를 저가로 다량 매입하여 점차 부유하게되어, 귀족이 사치로 토지를 매도하는 동안, 귀족과 농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젠트리가 형성되고, 새로 부유하게된 다수 젠트리 가정은 자녀를 우수한 대학에 보내어 전문인력으로 중산계급 (은행가, 상인, 제조업자,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을 형성하고, 사회의 계층 이동을 촉진하였다. 다수의 젠트리는 자아의식이 강한 정치세력 으로 성공회에서 칼빈교를 추종하는 청교도 (Puritans) 가 되었다. 1625년 500명의 하원의원 가운데 3/4 의석이 가톨릭과 절대왕정 을 거부하는 청교도 였다. 찰스의 제3차 의회는 권리청원 (1628) 을 찰스1세 (1625-49) 에게 보내, 4원칙—의회의 승인 없는 세금 불가, 이유없는 구금불가, 주민에게 병력주둔 금지, 평화시에 계엄령 불가—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왕은 1629년 3월 의회의 휴회를 명하였고, 의장은 왕의 행위를 비난 하는 3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왕은 프랑스-스페인의 평화를 유지하며, 향후 11년간 의회의 소집없이 기존 세입으로 통치하였 으나, 상비군과 지방행정이 없이는 정부 운영이 어려웠다.
귀족의 약화와 함께 젠트리 계층의 상승은 의회에서 정치적 자신 감을 갖게하였고, 청교도정신의 확산은 교회와 국가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1640년 스코틀랜드가 영국 북방을 침공할 때에, 찰스는 긴 의회를 소집하였고, 단결된 의회는 왕을 무력화 하기 위해 여러 법률을 통과시켰다. 1642년 찰스는5명의 급진파 지도자를 체포하려고 300명의 병력을 의회로 보냈으나 실패 하였다. 의회는 내전 (1642-46) 에 대비하여 병력을 재조직하고, 공안위원회를 창설하여, 올리버 크롬웰 (1599-1658) 이 새로운 육군을 편성하였다. 내전에서 의회군대가 승리하고, 스코틀랜드 에 항복한 찰스는 1646년 영국의회로 송환되었다. 그는 도주하여 반역을 도모하다가 체포되었고, 의회는1649년 1월 그를 처형 하고, 이어서 5월에 영국 공화국을 수립 하였다.
올리버 크롬웰 (1649-58) 은 영국 동부 헌팅턴의 청교도이며 젠트리 집안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고 1628년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청교도 혁명에서 의회파에 속하여 1942년 기병대를 지휘하여 전투하였고, 새로운 모형의 군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으로 내란에 참가하여 의회파를 승리로 이끌었다. 내란의 종결후 독립파로 장로파를 추방하고 주도권을 잡아, 1648년에 다시 일어난 찰스1세를 처형하고, 1649 잉글랜드 연방 (공화국) 을 수립하여 “왕당파의 반혁명의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중산시민 의 지지를 받으며” 군사독재를 하였다. 그는 교황주의의 잔재인 주교제도를 폐지하고, 다른 개신교에 대하여는 관대하였다. 그는 1658년 병사하였고, 1660년 찰스2세로 왕정이 복원 되었다. (1) 아일랜드 전역 (1949-50): 1641년 반란은 아일랜드 가톨릭 연합이 주도하였으며, 1649년 영국의 왕당파와 동맹하여 내전에 대항하였다. 1652년 크롬웰의 의회군은 이를 평정하여, 대량의 토지를 몰수하고, 가톨릭교를 불법화하여, 성직자를 추방하였다. (2) 스코트랜드 전역: 스코틀랜드는 왕당파를 지원하여 1648 영국 을 침공하였고, 찰스1세의 처형 후 찰스2세를 지원하려 하였다. 1650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고지대와 도서 들을 2년간 지배하였다. (3) 영국-화란 전쟁 (1652-74): 화란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에서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화란의 선박 이 저렴한 가격으로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무역을 독점하여 영국 은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항해법을 제정으로, 양국간에 1652-74기간에 3회의 해전으로 화란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명예혁명 (1688): 크롬웰 사후, 찰스2세 (1660-85) 가 즉위하고, 1673년 의회는 시험법을 통과시켜 성공회 교도만이 군 장교와 민간정부의 간부가 되게하였다. 숙부 제임스2세 (1685-88) 가 왕위를 계승하여 면죄부 선언 (1687) 으로 가톨릭 교도나 국교 반대자를 제한하는 모든 법을 중지시켰다. 영국에 가톨릭교가 부활되는 것을 우려하여, 일단의 영국귀족은 제임스2세 조카이며 사위인 오렌지공 윌리엄과 그의 딸 매리가 함께 왕위를 계승하는 명예혁명에 성공하고 권리장전 (1689)에 서명하였다. 권리장전은 의회의 동의 없는 모든 법을 완전히 중지하고, 의회의 승인없이 평화시에 상비군을 유지하며, 의회의 업무에 왕의 간섭을 배제 하고, 선거는 자유롭게 선출된 의원들은 언론의자유를 갖는다고 명시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가톨릭왕정의 부활을 영원히 차단하고 전제 군주제와 결별하여, 입헌군주 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의회의 권력은 꾸준히 고양되고, 왕실의 권력은 계속 약화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봉기로 출발한 혁명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지만, 명에혁명 후에 영국헌법은 오히려 보강되었다.
여타 국가: 서부, 동부, 북부 유럽 (1648-1715): 네덜랜드: 찰스 5세는 네덜랜드를 17 주로 통일하여 오늘날 벨기에, 룩셈부르그, 프랑스와 독일의 인접지역을 포함하였다. 필립2세의 압제와 반 종교개혁의 탄압이 칼빈주의 네덜랜드에서 반란을 유발하여 8년 전쟁 (1568-76) 이 일어났다. 1579년 북부7개주는 유투레트 신교연합을 결성하고, 1581년 “7개 연합 네덜랜드 공화국” 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스페인은 가톨릭 남부 네덜랜드를 장악하였다. 전쟁과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네덜랜드는 웨스트팔리아 조약 에서 연합 공화국 (United Republic) 이 되었다. 스페인: 필립3세 (1598-1621) 는 반영국 친프랑스 정책을 견지하였고, 1609년 무어인 모슬렘 300,000명을 북 아프리카로 추방하여 경제적 재앙 을 초래하였다. 비효율적 정부, 낡은군대, 억압받는 농업과 후진한 산업, 사치스런 귀족, 과다한 성직자와 수도사로 문제가 많았고, 빈부격차가 심하고, 중산층이 소멸되었다. 필립4세 (1621-65) 는 개혁에 희망을 가졌으나, 귀족들의 전횡으로 큰 진전이 없었고, 30년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폭동이 발생하였다. 찰스2세 (1665-1700) 는 프랑스가 일으키는 전쟁에 휩쓸렸고, 그의 사후 스페인 계승전쟁으로 필립5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프러시아: 프레데릭 윌리엄 (1640-88) 은 브란덴브루그 선제후 이며 프러시아 공작으로, 웨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부국강병으로 프러시아를 성장시켰다. 그는 1678년까지 45,000의 상비군을 유지하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무역을 증진하였다. 프레데릭 3세 (1688-1713) 는 170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1세를 설득하여 프러시아를 왕국으로 승격시키면, 자신이 8,000명의 병력을 스페인 계승전쟁을 지원하겠다고 하여, 그는 프러시아의 최초의 왕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레오폴드1세 (1658-1715) 는 합스부르그가의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 상비군을 창설하며, 오스트리아 행정을 통합하였다. 프랑스와의 군사작전에서 몇번의 승리를 하였으나, 결국에는 프랑스 외교가 결정적 시기에 동맹을 분리시켰다. 레오폴드는 제국을 그의 일차적 책임으로 고려하지 않고, 합스부르그 왕조의 힘과 권위을 우선으로 하였다. 스페인 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승리하여 스페인령 이탈리아를 인수 하였다. 한편 1683년 터키가 150,000병력으로 비엔나를 침공 하여 외곽 요새를 탈취하였으나, 유럽 연합군의 반격으로 도시는 구조되고, 터키 병력은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퇴각하였다.
스웨덴: 구스타부스1바사 (1523-60) 는 스웨덴을 덴마크로 부터 해방하고, 한자동맹으로 부터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였다. 존3세 (1568-92) 는 덴마크와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종교적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가톨릭 아들이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어 시기스 문드 3세 (1587-1632) 로 폴란드와 스웨덴을 통치하였다. 존의 사후 찰스 공작이 이끄는 스웨덴 의회는 루터교 신자만이 왕이 될수있다고 선언하였다. 시기스문드가 폴란드에 돌아올 때에, 구스타부스1바사의 막내인 찰스9세 (1604-11) 가 왕이 되었고,, 구스타부스 아돌프스 (1611-32) 가 그를 계승하였다. 아돌프스는 귀족계급이 군대의 장교와 행정부의 간부로 복무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강한 군대를 건설하여 30년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국력이 찰스 12세 (1697-18) 부터 기울기 시작하였다.
덴마크: 프레데릭2세 (1559-88) 는 영토를 노르웨이까지 확장 하여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재산 을 몰수하였고, 신교 성직자는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하였으나, 교육을 통제하고 문학을 검열하였다. 크리스티안4세 (1588-1648) 는 정부를 개혁하고, 덴마크 해군을 건설하며, 제조업과 상업을 진흥하고, 우편서비스 체제를 수립하며, 대학과 도시를 설립하였다.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는 개신교 편에 참전하였다. 프레데릭4세 (1699-1730) 는 폴란드 및 러시아와 함께 반 스웨덴 동맹에 합세 하였으나, 국력약세로 곧 탈퇴하였다.
폴란드: 폴란드 의회는 리투아니아와 병합하여 1569년 단일국가 가 되었고, 왕은 1572년 의회에서 선출되어, 폴란드 왕정공화국 은 귀족들과 권력을 나누었다. 1652년 의회는 자유비토 법안을 통과시켜, 한 사람의 반대로 전체 의결을 부결시킬수 있게하였다. 이로 인하여, 폴란드는 토지귀족이 지배하는 반독립 연합으로, 외국세력의 전투장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코작이, 크리미아의 타타르 지원으로, 폴란드에 반란을 하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전쟁으로 1667년 동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양도하였고, 터키 와 전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를 터키에 양도하였다. 잔 수비스키 (1674-96) 는 1676년 터키군을 서우크라이나 에서 축출하였다.
오토만 터키: 술레이만 대제 (1520-66)는 1520년 다뉴브 까지 진출하였고, 1526년 항가리를 정복하였으나, 1529년 비엔나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터키의 세력이 서 지중해 까지 확대 되어, 스페인 해군은 레판토 해전에서 터키 함대를 침몰 시켰으나, 그들은 1년내에 함대를 재건하였다. 1669년 오토만은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점령하고, 크레테를 정복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터키는 항가리와 비엔나에 진출하였으나 패퇴 하였다. 1697년 오스트리아 군대가 세르비아 북부에서 터키군을 결정적 으로 패퇴시켰다. 터키는 지속적으로 흑해와 인접한 지역, 특히 러시아와 발간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국제관계의 상황 발전을 주시하며 유리하게 이용해 왔다.
러시아와 피터대제: 러시아는 이반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1598년경 혼돈의 기간에 귀족들이 발흥하여 이를 “고난의 시대” 라 불렀다. 1611년 폴란드가 스몰렌스크를 탈취하고, 모스코를 방화하고 크레믈린을 점령하였고, 스웨덴은 노브고로드를 장악 하여, 국가는 핵심을 잃고 분해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국민군대는 각성하여 트로츠키 수도원은 노브고로드 시민들을 일으켰다. 시민 군대가 구성되고 움직여, 모스코 가까이 코삭분견대가 숙영하며 침략자들을 격퇴하였다. 1613년 시민지도자, 코삭 군대, 제후들 이 성직자와 모든 계층의 대표자를 소환하였다. 젬스키 소보 (의회) 는 이전 황제의 사촌인 마이클 노마노브 (1643-45) 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하였다. 황제 권력은 원래 상속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전제적 이지만, 보이야 위원회에 의해 좌우되는 상층 지배계급과 비밀계약에 의해 제한되었다. 보이야 위원회는 젬스키 소보에 의해 견제되었다. 러시아 사회는 봉건제도에 의해 이득을 보는 토지귀족이 지배하였다. 도시의 납세자들은 거주이전이 제한되었 고, 사회 계층간의 이동은 제한되었다.
1654년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지배하여, 러시아-폴란드 간에 전쟁이 발발하고, 스웨덴은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1667년 평화 협정으로 러시아는 스몰렌스크와 키에브를 얻고, 우크라이나는 드니에퍼 동쪽을 취하였다. 1672년 폴란드는 터키와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서부를 터키에 양도하였으나, 1676년 그들을 축출 하였다. 러시아의 개혁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1) 폴란드와 평화 또는 동맹유지. (2) 발틱의 동해에서 스웨덴과 투쟁을 하고, 러시아의 남부에서는 터키와 크리미아에서 투쟁. (3) 정규군으로 군대의 재편성. (4) 복잡한 직접세금 제도를 인두세와 토지세로 양분 단순화. (5) 수출과 산업의 발전. (6) 상업과 산업의 생산성과 복지를 증진할 목적으로 도시의 자치정부를 도입. (7) 외국의 모형으로, 일반적 종교적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기술학교 는 수요에 적응하고. 외국인으로서 기술자, 관리, 장교, 의사, 공예인, 상인, 공장주 들은 “독일 정착촌” 을 형성한다.
피터대제 (1682-1725)는 돈강과 드니에퍼강을 발틱 네바강 처럼 무역과 전쟁을 위한 결정적 출구로 보았다. 1679년 아조브를 터키로 부터 탈취하고, 오스트리아-베니스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피터는 55명의 귀족과 200명의 인력으로 대사관단을 구성하여 1697 년부터18개월 동안 유럽 각국을 방문하여 선진한 서구문명 을 보고, 폴란드의 오거스터스2세, 브란덴부르그의 프레데릭3세, 영국의 윌리엄3세, 오스트리아의 네오폴드1세,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피터는 여행에서 돌아와, 정규 육군과 해군을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개편하며 지방정부를 8-15 지역으로 조정 하였다. 그는 지주계급이 군의 장교와 행정부의 간부로 봉사하게 하였고, 실적에 따라서 귀족으로 진출케 하였다. 산업화를 위하여, 광산업을 장려하고, 농부를 산업인력으로 전환하며, 상인의 지위 를 높이고, 정부의 독점을 철폐 하였다. 피터는 총주교를 폐지하고, 신성한 종교회의를 만들었다. 그는 서방의 습관과 문화를 도입 하여 러시아 문명의 선진화를 시도하였다. 피터는 1703년 러시아 신문을 최초로 창간 하였고, 1724년에 성피터스부르그에 육군 사관학교를 창설하고, 붉은 광장에 극장을 허가하였다.
피터는 징병제를 도입하여 상비군 210,000을 양성하고, 러시아 해군을 창설하여 28,000의 해군과 함께 전함을 다수 건조하였다. 1699년 러시아는 스웨덴에 대항하여 덴마크-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터키와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폴란드가 리가를 취하려다 스웨덴에 패퇴하여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피터는40,000 병력 으로 지원하였으나 찰스12세의 8,000에 패퇴하였다. 1709 년 폴토바에서 찰스9세는 러시아에 패퇴하여 터키로 도주하였다. 1711년 터키가 200,000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피터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협상으로, 모든 장비를 남기고, 함대와 아조브를 터키에 포기하고, 찰스의 안전한 스웨덴 복귀를 보장 하고, 폴란드 업무에 간여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러시아로 안전 하게 퇴각 하였다. 그후 러시아는 보복으로 스웨덴을 침공 하여 해안선과 여러도시를 유린하였으며, 1721년 니스타드 조약 으로 스웨덴을 축출하여 발틱해를 러시아의 호수로 만들었다.
(문명사 이야기 – 연재 1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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