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정읍중앙교회 김선종 목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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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멜랑콜리아: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욥 10:1a)
욥기는 산문으로 이루어진 1-2장의 프롤로그와 42장 7-17절의 에필로그 사이에 욥과 세 친구의 대화, 엘리후의 연설, 욥과 하나님의 대화, 욥의 독백이 운문 형태로 삽입(욥 3:1-42:6)되어 있는 짜임새를 이룬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탄식(3장)과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의 다짐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탄식(29-31장)이 욥과 세 친구가 행하는 대화의 앞뒤를 감싸고 있다. 그중에서도 욥의 멜랑콜리아를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욥기 10장 1절 전반절에 나오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새번역)이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욥의 탄식에 해당하는 3장과 29-31장,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42장을 주목하고자 한다.
욥의 생일 저주(욥 3장)
예레미야 20장의 탄식과 같이 욥기 3장에서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욥, 예레미야, 바울과 같은 성서의 위대한 신앙인이 고난이나 갈등 때문에 죽음을 갈망하는 모습은 놀랍다. 욥의 삶에서는 멜랑콜리아에 대한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의 흐름이 읽힌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으면 나르시시즘적으로 퇴행하고 사랑의 대상을 증오하게 되며,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기를 학대하고 원망하며 저주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입장을 따르는 정신분석학자 크리스테바(Kristeva) 역시 멜랑콜리아는 인간이 갖게 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곧 죽음으로 회귀하려는 본능인 ‘죽음충동’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1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생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욥은 현재의 잘못된 존재론적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세상이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욥은 어두움이 있으라고 말하여 창조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욥기 3장 4절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어둠이 있으라’인데, 창세기 1장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정반대로 도전한 것이다. 나중에 욥기 38-41장에서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되레 창조에 관한 질문을 수사의문문의 형태로 쏟아부으신다. 사람이 우주 만물의 중심이 아닌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탄식한 욥을 꾸짖고 타이르신 것이다. 욥의 자기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깨뜨리신다.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욥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협하는 베헤못과 동일시된다.
욥의 회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새로운 자식이 태어나고 재산을 두 배로 얻는 것이 아니다. 회복을 뒤엣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신명기 신학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은 욥기가 문제삼는 신명기 신학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질과 건강의 회복이 곧 욥기가 말하는 회복이라면, “신은 표면적으로는 욥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친구들의 손을 들어준 것”2에 해당한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비합리적이며 비극적인 구조를 갖고 있고, 인과응보라는 세상의 기계적인 질서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운명을 해석한다. 그런데 완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난 의인 욥(1:1, 8, 2:3)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교리가 잘못되었거나,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행위와 화복의 관계, 죄와 벌의 인과율이 옳은 것이라면 욥은 의인일 수 없다. 인간의 단순한 논리에서 이것들은 양립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은 버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욥은 순종에 따른 복, 불순종에 따른 벌이라는 단순 논리를 거부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욥의 고난은 모순율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커로서 욥은 하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이러한 세계관을 극복해야 하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러한 단순 논리에 맞서 『욥에의 응답』에서 칼 융(Carl Jung)은 기독교의 신은 반대의 극을 포함하는 ‘모순적 일치’ 또는 ‘모순적 복합’의 존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3
나르키소스(narcissos), 노스탤지어(nostalgia), 멜랑콜리아(욥 29-31장)
욥기 29-31장은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각각의 장이 탄탄한 문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단락에는 과거의 행복했던 욥(29장), 현재의 불행한 욥(30장), 마지막으로 최후 변론과 미래로의 다짐(31장)이 나타난다. 29장에서 반복되는 “그 때에는”(29:3, 4, 5, 7)과 30장에서 반복되는 “그러나 이제는”(30:1, 9, 16)이라는 표현은 행복했던 과거의 욥과 고난당하는 현재의 욥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제는”은 30장 1, 9, 16절에 세 번 등장해서 30장의 짜임새를 만들고 있다. 29-31장의 세 장은 이렇게 각자 나름의 주제를 가지고 논리적인 흐름을 이루는 단락을 형성하는데, 그중에서 29장과 30장은 이러한 흐름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번 같은 주제를 대비시킨다. 29-30장의 공통된 짜임새를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4
욥의 현재 삶이 괴로운 것(30장)은 과거에 누구보다 행복을 누리고 존경을 받았기 때문(29장)이다. 29장 4절에 따르면 욥의 행복의 근원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러나 30장 11, 23절은 하나님이 욥의 고난의 근원에 계시다고 말하는데, 30장 전체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으로부터 숨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적대자들과 공모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욥의 내면에는 현대 심리학으로 읽을 수 있는 흐름이 나타난다. 욥기 29장이 과거에 대한 욥의 노스탤지어를 보여주고, 30장이 과거와 현재가 극심하게 대비되는 멜랑콜리아 현상을 보여준다면, 31장에서는 이러한 괴리를 극복하고 자아를 지키려고 하는 욥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29장에서 욥은 자신만만했던 과거의 모습을 자랑하는 나르키소스로 나타나고, 30장에서는 화려했던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현재 처절한 고난을 겪는 멜랑콜리커로 등장한다. 이때 우울증은 나르키소스의 감추어진 얼굴에 해당한다. 자아 안에 자신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극심하게 공존할 때 멜랑콜리아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데, 크리스테바는 이를 근거로 욥을 우울증 환자라고 여긴다.5 멜랑콜리아 이론에 따르면 멜랑콜리아는 노스탤지어, 곧 지난 시절 속 그리움의 대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생겨난다. 스타로뱅스키(Starobinski)는 현재의 자아와 과거 또는 미래의 자아의 대비, 존재와 의식 사이의 괴리를 멜랑콜리의 근본 원인으로 진단하고, 멜랑콜리아를 심리학적이고 문학적인 차원에서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고양시킨다.6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욥이 겪는 고난은 단지 개인이 겪는 고난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와 자신의 올바른 삶 사이의 괴리를 폭로하는 고난이다. 또한 욥은 자신의 고난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관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를 창조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31:13-15)
욥기 29장과 30장이 각각의 장에서 나름 정교한 문학적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면, 욥이 최후 변론을 하는 31장은 내용상으로 그가 ‘마음으로 저지르지 않은 죄’(1-12절), ‘이웃에게 저지르지 않은 죄’(13-23절), ‘하나님을 거슬러 저지르지 않은 죄’(24-34절)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1-12절에서는 욥이 저지르지 않은 죄를 14가지, 곧 완전수 7의 두 배를 의도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욥의 의가 완전했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욥은 자신이 마음으로 저지르지 않은 죄의 목록을 나열하는데, 여기에는 음욕 금지 등 십계명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욥은 자신이 이웃과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욥은 자신의 삶을 압박하는 인과응보 사상, 교조주의의 전통 사상이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항변하며 그 장벽을 뛰어넘으려 한다. 결국 욥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소환한다.(욥 31:35)
멜랑콜리아의 극복(욥 42장): 알브레히트 뒤러의 〈욥과 그의 아내〉
그렇다면 욥은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했고, 자신의 고난 경험을 어떻게 공동체의 신학 차원으로 승화시켰는가? 욥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모든 슬픔과 우울과 괴로움을 던져버렸는가? 욥기 42장의 결말은 과연 해피엔딩인가? 욥은 회복되었는가?
위경 『욥의 유언서』(Testament of Job)는 욥기 이후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거기에서 욥은 병에서 치유되지 않은 상태이다. 욥기의 에필로그(42:7-17)에서 욥은 자녀를 다시 얻고 두 배의 재산을 얻지만, 병이 나았다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암시될 뿐이다. 자식을 잃은 욥이 다시 자녀를 얻은 것을 가지고 자식에 대한 상처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욥의 회복을 말한다면, 다시 신명기 신학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다. 욥기의 에필로그에서는 욥의 아내가 등장하지 않지만, 『욥의 유언서』에서는 아내가 욥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여기서는 이사야와 바울처럼 욥도 질병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지만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를 준다.7
야바흐(Jabach) 제단화 왼쪽 패널인 알브레히트 뒤러(A. Dürer, 1471-1528)의 〈욥과 그의 아내〉는 지난 호에서 분석한 작품과 같은 특징을 지니는데,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 〈멜랑콜리아 I〉을 다시 한번 싣는다. 팔꿈치로 얼굴을 괴고 있는 모습이 멜랑콜리커의 전형을 잘 나타낸다. 〈욥과 그의 아내〉에서는 욥의 뒤편에 집이 불타고 있는데, 시간의 전후 관계가 한 폭의 그림 안에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무표정한 욥의 아내가 심한 피부병으로 몸에 열이 오른 남편의 몸을 식혀주기 위해 물을 끼얹고 있는 것을 보면, 뒤러는 욥의 아내를 악처로 보지 않는다. 욥의 아내는 뒤러가 살던 당시 뉘른베르크의 의복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욥의 멜랑콜리아를 자기화하여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작센 지역에는 전염병이 창궐해 있었다. 뒤러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욥의 아내를 그린 것이다. 위경에서도 욥의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아내로 등장한다.
욥기는 욥이 심한 피부병으로 괴로워하며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몸을 긁는다고 전하지만(2:7) 뒤러는 욥을 고통받는 사람보다는 깊은 생각에 잠긴 몽상가로 표현한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을 고통을 겪는 사람과 동일시함으로써 고통이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이처럼 독자들은 성서에 나타나는 인물의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키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물론 지혜문학으로서 욥기에는 예언의 전승도 흐른다. 욥의 세 친구가 죄에 대한 심판, 회개에 따르는 용서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욥의 문제는 단순히 예언의 차원에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영성의 차원 곧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해결된다.8 멜랑콜리아는 멜랑콜리아와 대면하여 침잠(沈潛)함으로 극복된다. 보통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자기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그것을 신이 자기에게 준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제3의 길을 연다.
종교와 예술에서 신학자와 예술가는 단지 사물을 객관의 차원에서 대상화하여 판단하지 않고 자기화하여 받아들인다. 뒤러는 욥을 통해 자신의 내면, 멜랑콜리아를 드러낸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자신과 독자를 치유하는 것이다. 성서 주석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와 주석가는 성서 본문을 읽고 그 내용을 객관적, 과학적, 역사적으로 밝히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성서의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며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고, 그를 통해 치료되고 청중까지도 치료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욥 10:1a)
슬픔과 우울, 이 둘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다. 흔히 사람들은 슬픔과 우울감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부정적인 성질이라고 생각하여 피하고 억압하고 감추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멜랑콜리아 이론을 통해 욥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욥기의 신학을 더욱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욥은 구약의 대표적인 멜랑콜리커이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살았다. 화려했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로 인해 욥이 현재 겪는 불행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욥은, 회개하여 전통 신앙을 받아들이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세 친구, 교조주의자에 맞서 싸운다.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저항하며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한다. 자신이 의롭기에 하나님이 잘못한 것으로 여긴다. 욥에게 교리는 자신의 고난과 불행을 설명하지 못하기에 폐기처분해야 하는 틀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더 이상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은 하나님마저도 정해진 질서 안에 가둘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외롭고 고독한 멜랑콜리커로서 욥은 전통 신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사상과 세계상을 제시해야만 했다. 자신의 현실과 도덕이 세상의 질서와 충돌할 때, 자신이 겪는 슬픔과 불행과 고난 역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실임을 알게 된 것이다. 슬픔은 회피하여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겪어냄으로 이겨낼 수 있다. 고난과 고난에 대한 교조주의적 이해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해 귀로만 듣던 욥은 자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적인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이것이 욥에게 주어진 참된 보상이다.(42:5)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슬픔과 애수, 우울한 감정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울증(depression)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겪는 병리 현상이고, 우울한 정서를 포괄하는 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인간 실존의 본질과 뗄 수 없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멜랑콜리아를 다르게 이해해왔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문학에 따르면, 멜랑콜리아 기질을 가지고 있는 멜랑콜리커는 신에게 미움과 벌을 받아 미쳐버리고 신과 사람에게 버림받아 방황하며 자기를 학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들은 정해진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비극적 영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도덕적 질서와 자신을 둘러싼 존재론적 질서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 8, 2:3)인 욥이 재산을 잃고 가정이 파괴되고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의 회개 요구에 굴복하지 않은 믿음의 영웅이다. 욥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여 소외감을 느끼지만, 세 친구가 요구하는 세상의 질서에 편입하지 아니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제3의 길을 찾아나선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우니!”(10:1a) 그의 외마디 탄식은 살기 괴로워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주(註)
1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옮김, “슬픔과 우울증,” 『무의식에 관하여』(프로이트 전집 13)(열린책들, 1998), 261; 오형엽, “멜랑콜리의 문학비평적 가능성: 정신분석 비평의 관점에서,” 「비평문학」 38 (2010): 381; 줄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옮김,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동문선, 2004), 43-46.
2 이경재, 『욥과 케 보이: 현대사상에서 욥을 읽다』(대한기독교서회, 2009), 198.
3 칼 구스타프 융, 한국융연구원 C. G. 융 저작 번역위원회 옮김, 『인간의 상과 신의 상』(솔, 2008), 295.
4 안근조, 『하나님의 지혜 초청과 욥의 깨달음』(킹덤북스, 2012), 187.
5 크리스테바, 앞의 책, 15-16, 233.
6 J. Starobinski, L’endcre de la mélancolie (Paris: Seuil, 2012).
7 Sun-Jong Kim, “La maladie de Job(Jb 2,7b),” Cahiers bibliques 48, Foi et vie 108 (2009): 80-94; 김선종, 『욥기』(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2), 367-369.
8 구스따보 구띠에레스, 김수복·성찬성 옮김, 『욥에 관하여: 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분도출판사, 1996).
김선종|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욥기』, 『덤불 속 두 돌판』, 『레위기 성결법전의 신학과 윤리』, 역서로 『아가 주석』이 있다.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였고, 정읍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한일장신대학교 객원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