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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의 아내와 자녀들(호1:2-5)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을 다 회복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번영하던 시기였습니다.
강대국에 기죽지 않고, 우리 끼리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다는 사람적인 생각이 가장 팽배하던 시기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없이도, 적당히 하나님 믿어도, 바알과 하나님을 같이 섬겨도, 소위 벌 받지 모든 것이 잘되는 시기였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가정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결혼해야 할 대상은 순결하고 신앙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처녀가 아닌 영육간에 문제가 많은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절대적인 주권에 철저히 복종함으로써 그러한 결혼을 선뜻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형식상으로만 결혼하고 부부의 의를 맺은 것이 아니라 2남 1녀의 자녀를 둘 정도로 정상적인 형태의 부부 생활을 이루어 갔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에게서 자녀를 낳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께서 좇아내시다' 라는 뜻의 이스르엘, 둘째인 딸은 '사랑을 받지 못한 자' 라는 뜻인 로루하마, 셋째인 아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인 로암미였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서 낳은 자녀들의 이름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음행은 구약의 배경에서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간주 됩니다(호1:2).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인의 삶에 동화된 것을 가리켜 영적 음행으로 간주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음행한 여인에 비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할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부적절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 음행의 범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악으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실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런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장가드는 결혼식의 비유를 통해 확증해 주십니다(호 2:19-20).
이사야는 회복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가리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남편 되심을 선언합니다(사 54:5).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관계를 남편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으로 발전돼 실체화됩니다(엡 5:22-33). 이토록 음행은 구약적 배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불순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선지서입니다. 또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이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보답하기는 커녕, 오히려 배신을 하고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몇 번이고 예언자들을 보내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도록 타이르고 애원도 했건만,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나는 이스라엘이 젖먹이 때부터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품에 안아 키워 주었건만, 그는 내가 키워 준 것도, 죽을 고비에서 살려 낸 것도 알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음란한 여자를 맞으라(2)
“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 하십니다.
음란한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으라는 명령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결혼입니다. 요즘 장수시대 이기에 결혼하기 전 부모와 산 시간보다 결혼하고 남편 아내와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더 긴 요즘 시대에는 더더욱 결혼만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요한 결혼을 창녀같은 여자와 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에 ‘아멘!’ 이 나왔을까?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떨어진 이 하나님의 명령 자체는 모순 덩어리이고 충격 그 자체입니다. ‘아니,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보고 창녀와 결혼하라니,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 맞습니까?’ 하고 반문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전도적 차원에서 음란한 아내를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라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은 인생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면서 일생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는 네 민족을 위해 네 자신의 생을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호세아는 자기 민족을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고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호세아는 선지자이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엄하게 살아가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였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도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기 싫어합니다. 자신은 비록 타락했을망정, 아내만큼은 순결한 여인을 취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삼으라고 명령합니다.
음란한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 것은 실제 창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 창녀와의 결혼을 금지했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창녀와 결혼하라고 했을리는 없습니다.(레21:14) 그럼, 음란한 여자는 말 그대로 영적, 육적으로 ‘음란과 음행’을 일삼는 여자입니다.
당시의 배경으로 보면 더욱 그것이 확실합니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육적으로는 바알 신을 섬기는 제사가 실제로 상당히 성적으로 문란합니다.
이런 문란함이 자연스럽다 보니까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나중에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성에 대한 관념이 자유분방한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여기서 품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한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고멜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 음란한 여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하여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뼈 아픈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이러한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참 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멜과 비극적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체험토록 했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이와같은 비극적 사랑의 결혼은 선지자에게 짊어지운 하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아픈 사랑'의 메시지를 몸소 증거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아픈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음란한 여자 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신(邪神)우상을 따라가는 부패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은 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택한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저버린 것이요, 즉 결혼 계약을 저버린 부정한 아내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 죄를 사랑하게 되면 음행으로 이혼당한 자와 같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으로 때리십니다. 잘못을 깨닫고 바른 자녀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쓰라리고 뼈아픈 고통을 주어서 사랑의 교육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요셉은 옥중에서,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나사로는 무덤에서 각각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윤리를 배웠나이다(시119:71)"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하였습니다.
호세아를 일컬어 “사랑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타락한 아내 고멜을 위해서 끊임없이 울고, 울고 또 우는 남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여인 고멜은 집안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그런 여인입니다. 집안에 있다가 견디지 못하여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으면 그 남편인 호세아가 집으로 데려오고 또 집을 나가면 돈을 주고 사오고 정말 한시라도 관심을 놓치면 영 엉뚱한 곳에 가서 지내는 그런 안타까운 여인이 고멜입니다. 이런 아내를 돌보고 사랑을 베풀고 관심을 가진 정말 착한 마음씨를 가진 좋은 남편이기에 그를 "사랑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호세아서를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타락한 아내 고멜을 위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정성을 쏟아 붇는 남편 호세아는 믿음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2-4)
“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우상숭배, 즉 바알을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선지자의 일인데, 호세아는 그런 일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음란한 여자를 택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호세아는 이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세 남매를 낳았습니다. 첫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둘째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로, 셋째인 아들 이름을 로암미로 지었습니다. 각각의 이름은 역사적으로나 뜻으로 볼 때 불행한 운명과 연결됩니다.
장남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부르도록 하나님께서 하심은 ‘이스르엘’이란 단어의 의미는 농부가 씨를 흩어 뿌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스르엘은 지명인데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곳으로 사마리아 동북방 20마일 지점에 있는 아합왕의 별장이 있는 조그만 동네 이름입니다. 이스르엘이란 지명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합의 집을 에후틀 통하여 심판하실 때 이곳에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족 42명을 씨를 말리려고 피로 물 들인 장소입니다.
이스르엘이란 곳은 아합과 에후의 죄(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면서 ㉠적개심을 품고 ㉡살기가 등등하여 이세벨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는 야욕으로 왕족 42명을 무참히 죽인 것과 ㉣자신이 왕이 된 후, 우상을 숭배하는 잘못을 행한 죄)를 연상시키는 지명이요, 범죄한 아합과 에후의 가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지역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씨를 흩어 뿌리듯 열방에 흩어버리시겠다는 심판의 선고로 이스르엘은 ‘하나님을 떠난 자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인데, 로(아니다),루하마(동정을 받다. 은혜와 긍휼을 입다)의 합성어로 ‘동정을 받지 못하다. 은총을 입지 못하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로, 로(아니다),암미(백성)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란 뜻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이상과 같은 자녀의 이름 뜻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표호적(表號的)인 이름이었습니다.
처음은 유다 왕국에는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이미 긍휼을 받지 못하는 자로 되고, 드디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하나님과 절연(絶緣)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구원에 참예할 것을 예언합니다. 위의 말씀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을 것을 가리켰으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그의 약속하신 것을(창 22:17) 기억하십니다.
공의와 인자를 겸전하신 이는 인자뿐이시며, 그 두 가지를 함께 실현시키실 권능자도 여호와 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시고자 하신 말씀을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녕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들을 버렸다면 이런 말을 여러 번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관계를 끊겠다고 말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하는 식으로 하지 말아라'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그로 인해서 다가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호세아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호세아는 그의 예언자적 삶과 그의 결혼생활을 통해 깨어진 관계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호세아는 그의 삶을 통해 북이스라엘에게 임박한 파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보면 여러 사람의 이름을 볼 수 있는데 그 이름에는 모두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양적인 습관과 비슷한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무슨 특별한 의미를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저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을 딴다든가 할아버지 혹은 외가의 이름을 따서 아이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자체에 무슨 의미가 특별히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적인 습관은 그 이름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좋은 이름을 짓느라고 무던히 애씁니다.
사실 누구든지 자녀들의 이름을 좋게 지으려고 합니다. 요즘은 아주 예술적인 감각, 한번 들으면 잘 기억할 수 있고, 사랑스런 느낌을 주는 이름을 짓느라 부모들이 애를 씁니다.
어쨌든 고멜한테서 낳은 아이들의 이름을 보면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과는 동떨어진 이름입니다.
3.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으며 악인이 비록 득세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완전한 패배를 맞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고 부한 자를 가난하게 하기도 하십니다. 주변의 부조리한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와 공의로운 섭리를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욥기12장14절에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하여 말합니다. "헐으신다"고 함은 건설과 정 반대로 패망케 함과 파괴시킴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의 심판 행위이다. 이것은 옛날 바벧탑을 쌓던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심과 같은 것이며(창11:1-9), 또한 여리고성 무너뜨리신 것과 같습니다(수 6:20; 왕상 16:34).
본문 5절에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신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힘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약속하는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꺾겠다고 하십니다.
호세아가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때는 북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막강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그것은 종교적인 타락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믿고 있는 군사력을 꺾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로보암 2세 이후 북이스라엘의 국력은 쇠약해졌고, 다음 왕인 스가랴 이후로 예후 왕조는 단절되게 됩니다.
여기서 ‘그 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의지가 호세아의 첫째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이스르엘은 멸망을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피흘리게 했던 곳이며, 그곳에서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아합왕이 예후에게 멸망당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의 피를 예후에게, 즉 예후의 증손자인 여로보암 2세와 이스라엘 족속에게 갚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합이 예후에 의해 멸망 당했던 것처럼 예후의 증손자 여로보암이 멸망 당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을 통해서 출생한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지으시고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실 것임을 예언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 뜻의 엄중성과 단호함을 표현코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망할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결국 이 말씀대로 망하였다는 역사에서 보면 그러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악을 물리치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부패와 부정을 제거하고 공의와 의로움을 나타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호세아의 아들의 출생과 삶을 통해서 증거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녀의 삶은 단순히 재앙과 멸망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다스리심과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호세아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많은 하나님의 계획을 받습니다. 그 속에 세상에 대한 다스림과 심판하심과 올바르게 함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약속하시는 복과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면서 성도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뿌리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이기게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단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파괴 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미련하게 되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 올 때 그들은 모든 복을 잃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우상들을 재로 만드시고, 올무로 만드시고, 그 우상으로 인하여 우리를 향한 심판의 증거로 삼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우상들은 나의 삶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삶과 꿈은 산산 조각이 납니다.
이사야14장5절에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
강포한 성이 몰락하게 된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멸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파멸은 우연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역사를 자신의 거룩하신 뜻안에서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가 흘러가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집니다. 국가의 흥망 성쇠와 개인의 생사 화복까지 주장하시고 계시며 모든 인생의 언행 심사를 따라 선을 상주시고 악을 벌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1.음란한 여자를 맞으라
2.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3.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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