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저게 벌교에 갔는데 믓점 사갈라고 마트를 물엇더니 부용산 자락에 이마트가 있다네.. 얼씨구나.... 갓더니 없는기라... 왓따메.... 긍께..그 E마튼 없고, 이마트더라궁...종업원한테 물었지.. 어캐된거냐고... 읏따 그 아자씨 믈 고딴걸 다 뭇소이..울 싸장님 성씨가 李씨라 이마트요..므가 잘못 됫당가???? 하이고...대구리 푹 숙이고 수습하느라...^^;;;;;ㅋㅋ
그라마..부용산 오릿길에...잔디만 푸르러 푸우르러...이 노랜..아요?
(잉,,당근히 노래를 불럿제 금 안부르냐구...급한데...)
잉, 그랫더니...그 종업원 아가씬지 아주멘지..... 읏따 아자씨 말씸은 저짝이그만 이짝 노랠 다 아는 거 보이 솔찬히 머싯씨요이...하두만..ㅋㅋㅋ 곰고미..생각해봉께나 나가 생각해도 나가 솔찬~~~하두망..잉, 멋이 ㅋㅋㅋㅋ
부용산이란 지명은 좀 흔하지요 춘천, 벌교 옆 장흥 것은 좀 높구요 정작 이노랫말에 나오는 데는 벌교 읍내에 있는 야트막한 뒷산인데요 해발 한 100미터여 되남....
<부용산>은 박기동씨가 1947년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함께 재직하던 안성현(월북<엄마야 누나야> 작곡가)이 1948년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남재희씨가 어떤 인터뷰에서 “남도에서 <부용산> 모르면 간첩”이라며 열창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곡이지요.
뭐 여러 버전이 있지만,,그나마 안치환을 일단 올립니다. 기실 이건 정통 성악곡입죠.
노라가 알았음 눔물 좀 짤앗슬껴... ㅋ
작곡가 안성현과 와 작시가 박기동
< 부용산 악보 >
노래 <부용산>은 해방과 전쟁 뒤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의 최대 히트곡이 됐지만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하면서 지하에 묻히고 말았지요.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하자 이 노래도 공식무대에서 사라졌구요, 게다가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가슴과 가슴속에서만 불려지게 되었지요.
“노래가 자신들의 신세와 비슷해서 그들이 즐겨 불렀던 것 같아요. 작곡가 안성현은 목포항도여중 교사 시절 저와 단짝이었는데, 예술을 좋아하는 <엄마야 누나야> 같은 낭만주의자였어요.”
작시자는 “안성현의 아름다운 곡조 때문에 <부용산> 시가 살았다”며 한 인터뷰 때 작곡가에게
그 공을 돌렸어요.
이런 <부용산>의 사연이 지식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노래는 빛을 보기 시작했는디 1997년 가수 이동원과 안치환에 의해 처음 무대에서 불려졌고 전남 목포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초청음악회에서 불려졌지요.
송광선씨의 초청음악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박기동 시인이 가사 1절이 나온 지 52년 만에 2절을 보내와 처음으로 공개된 자리이기도 했답니다.
가사 2절에는 1절의 애상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데. 기실 이노래엔 숨겨진 사연을 가지고 있답니다.
벌교읍 전경. 멀리 벌교만이 보이구 물나간 뻘밭에서 파내는기 벌교 꼬막이다.
저 멀리 경전선..철교랑 중간에 소화다리가 보인다
< 부용산 전경. 제가 1년에 두번은 여글 가지요. 저 묏등넘어에,,,친구가 살지라..>
동란 전 벌교땅에 살던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여동생은 시집간지 1년만에 폐결핵인지 백혈병인지에 걸려 죽습니다.
당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불효라 해서 부모님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사였던 오빠는 동생의 마지막길을 지키기 위해 부모님 대신에 장례식에 참가했고 여동생의 무덤이 바로 부용산이었습니다. 여동생을 묻고 부용산을 내려오면서 작사했던 시가 바로 부용산입니다.
그 이후 6.25가 터지고 이념갈등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념보다 우선한 것이 사람이 이었을텐데..., 6.25 당시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던 빨치산이 당시에 인구속에 회자되었던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 노래를 불온하다고 해서 금지시키고, 이 노래의 작사자를 수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작사자는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고향을 야반도주해야 했습니다. 몰래 배를 타고 망망대해속으로 떠났고 그가 도착한 곳은 이름없는 하나의 섬.. 그곳에서 지나가던 배에 구조되어 정처없는 오스트레일라아로의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혼자 50년을 지나고..., 2001년 이 노래가 다시 전라도지방에서 불리워졌을 때 한 지방의 방송국에서 이 작사자를 찿았고 그 인연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그러나 50년만에 귀향해 찿았던 부용산에는 동생의 무덤은 사라졌고, 부모의 흔적 또한 찿을길 없었습니다.
모두다 전쟁속의 참화로 없어지고 지워져 버렸던 것 입니다. 고향이 그리워하다 살기위해 50년만에 찿았지만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그는 쓸쓸히 오스트레일리아로 다시 돌아 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부용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에요. 지인이 2절을 붙여 달라기에 썼는데, 다 쓰고 나니 가슴이 먹먹했어요.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이 대목을 쓰고 나서는 많이 울었어요.”
팔순의 노 시인은 먼 타국 땅에서 52년 만에 <부용산> 가사 2절을 써놓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시조님 아니믄 어캐 이따우 글이 써졋간~~ㅋㅋ
시조님이가 새삼 머시땅~~~
가서 시조님 좀 모셔오그라.마리야...
그보담 마리 기억력도 솔찬하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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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그도 있그망..사남시에만 댓번은 우려먹읏을걸로...ㅋㅋ
명절 잘보내요
마리님 노라님
네네..정빈님두요..
마리님 부산모임날짜가
잡혔나요?
벌써예매얘기가 나오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