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에 관한 시모음 9)
동짓날 아침 /묘혜공
운무 가득한 기청사 도량
서릿발은 어디서 왔는지
발걸음마다 밝히고
하얀 새알을 넣고
끓인 동짓날 팥죽
정갈한 그릇에 담아
정지를 비롯하여
측간 지방이나
기둥에 흩뿌린다
삼재도 물러가고
태평세월만 와서
심신미약한 우리의 살림도 살피시고
부처님과 조상 음덕으로
세상 잠 편히 잘 수 있도록 빌고 또 빈다
나무묘법연화장 세계여
불 보살의 세계여
동짓날 /신화남
중부지방엔 대설주의보가 내렸고
코로나19
아무런 걸림도 없이
온 나라가 스산한 눈바람을 맞이하듯
좀체 수그러지지 않았다
동짓날 아침
눈발속에서 팥죽을 먹었다
그대 가고 없는 자리
오늘따라 너무나 아쉽게 여겨져
쓸쓸한 내면만 드러내어 놓고
무질서한 꿈만 꾸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그걸 느끼지 못하고
혼자서 당신 생각으로
앞산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왔는지
찬바람만 내 곁에 눕는다
동짓날 /김수복
식탁머리 너머 산수유 열매 뜨겁다
직박구리새들이 날아와 쪼아 물고
하얀 숲으로 돌아간다
이마에 열이 내려갔나
이마를 짚어주는 햇살의
손길이 더욱 따사롭다
동지 /신덕룡
폭설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동지 /박형준
어느 추운 겨울밤, 머언 옛날이었습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할머니가 박스로 城을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계단으로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무를 밭에서 막 뽑아낸 듯 사정없이 바람이 허벅지를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어 할머니의 성에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 안엔 한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성 담벼락,
할머니의 등뒤에 쪼그려앉아 밀려드는 졸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느새 나를 향해 돌아앉아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성냥을 그을 때마다
계단으로 밀려드는 눈발이
새벽의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품안에 돋아나는 불꽃이
저의 곱은 손과 차디찬 허벅지에
흰 속살인 듯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박스로 만든 성 안에는
매운 재만 폭삭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동지 단상 /오수열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며칠 남지 않은 달력을 본다
이 시간까지 달려온 나날
아무 하는 일 없이
바삐 흘러갔거나 지나갔다
동짓날 아침 팥죽 쑤는 솥
팥들은 일제히 살아
누웠다 다시 일어난다
내 나이 만큼 새알을 만든다
잠시 부엌을 바라보자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
“새알 작게 비비면 젊어진다 안카나!”
이 소리 귓등으로 듣고
김 오르는 솥에 새알을 일제히 붓는다
한 줄기 겨울바람이 막 가슴 속에 안겼다
동지 무렵 /위선환
며칠째 눈 내리고 길은 멀고 푹 눈 덮여 있다
새가 걸어서 하늘로 갔다 여러 번 헛딛고 넘어지다가 마침내 눕고 만 듯 빳빳하게 곱은 발가락과 퍼렇게 얼은 아랫몸이 눈 쌓인 하늘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눈 더미를 쓸어 모아 꾹꾹 눌러서 묻고
꾹꾹 손자국 찍힌 하늘의 한쪽이 새 몸뚱이 크기로 묻혀 있는 것 본다
새는 먼저 나를 헤쳐 놓고 갔다 할퀸 발톱자국과 쪼인 부리자국과 파이고 찢긴 살점들이 내 등가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눈은 나를 덮었고 아직도 내리고 길은 멀고
이어서 걸어갈 다음 새가 눈 덮인 내 뒷등에 올라 종종대며 눈싸라기들을 쪼고 있다 새의 가녀린 발목이 자주 내 등가죽 안으로 빠진다
동지(冬至) /박준
그때.
(작은 냄비에 두 개의 라면을 끓여야 했던 일을 열락(悅樂)이나 가는귀라 불러도 좋았을 때, 동짓날 아침 미안한 마음에 ‘난 귀신도 아닌데 팥죽이 싫더라’ 하거나 ‘라면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피 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라는 말이나 해야 했을 때, 혹은 당신이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나봐’ 하고 말해올 때,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아 있어서 출출하고 춥고 더럽다가 금세 더부룩해질 때, 밥상을 밀어두고 그대로 누워 당신에게 이것저것 물을 것도 많았을 때, 그러다 배가 아프고 손이 저리고 얼굴이 창백해질 때, 어린 당신이 서랍에서 바늘을 꺼낼 때, 등을 누르고 팔을 쓰다듬고 귓불을 꼬집을 때, 맥을 잘못 짚어 올 때, ‘맥박이 흐린데? 심하게 체한 것 같아’ 바늘 끝으로 머리를 긁는 당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을 때, 열개의 손가락을 다 땄을 때, 그 피가 아까워 아름다울 가(佳)자나 꽃부리 영(英)자를 거꾸로 적어볼 때, 당신을 종로로 내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그대로 누웠을 때, 손으로 손을 주무를 때, 눈을 꼭 감을 때, 눈을 꼭 감아서 나는 꿈도 보일 때, 새 봄이 온 그곳 들판에도 당신의 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을 때)
동지(冬至) /태안 임석순
밤과 낮이
항상 쉼 없이
오늘을 슬금슬금 달려가고
낮과 밤이
오늘도 하루를
하루 동안 걸어간다
달이 숨어서
태양을 등지면 저 멀리
오늘은 쏜살같이 달려가고
태양이 빛나면
낮달은 수줍어 그림자 되어
저 멀리에 비켜서서 걸어간다
달의 몰락은
새로운 태양의
힘찬 부활로 다시 시작이다.
동지 팥죽 /임성용
메주네 누님은 얼굴이 부순방 꾸들장에 뜬 메주 볼따구에 지라죽 깨진 뒤웅박에 훌렁 낯바닥 몰랑지가 죽은 듯기 벌씸벌씸 콧등사니 우아래 썩음털털 뻐드렁니가 삐쭘 누가 웃는 낯으로 실금 쳐다보기도 어려웠던 것인데
싸전머리 국밥집 돼지 대그빡 꼴랑지에다 쎗바닥 염통 간에다 창자구 긁어모다 막소주 되로 퍼주고 시한엔 동지 팥죽 맛이 참이 일품이어서 팥죽 새알에 훈김 입김이 모락모락 끊이질 않았던 것인데
포목장수도 소장수 개장수도 그릇전 옹기전 어물전 쩔룩배기도 너도 나도 메주네 서방이라고 서방 아닌 사람이 없다고 소문이 팥죽 끓듯 자자했던 것인데
장 보러 나온 메주네 동생 얼간이 꺼멍이놈 사람들이 그저 오나가나 어이, 쩌어기 느그 매형 간다 어이, 쩌기도 느그 매형 온다 이놈 저놈 죄다 매형이라고 얼릉 넙쭉 인사를 해라는 것인데
묵다 둔 쑥떡 같은 꺼멍이놈 불뚝 지게 작대기를 들고 으뜬 씨벌놈이 내 진짜 매형인디 그려? 앵기는 대로 다 때려 죽인다 메주네 누님 국밥집 찬장이고 상이고 주발이고 뭐고 눈에 불이 씨게 박살을 내버렸던 것인데
그때사 펄펄 가마솥 동지 팥죽을 뒤집어쓴 매형들이 아이고 뜨거라, 아이고 뜨거라, 부자지가 빠지게 내빼고 그 덕분에 엎어진 국밥솥에서 돼지 뼙다구를 물고 시장통 흰둥이도 누렁이도 좋아라고 발발 뛰어다녔던 것인데
세시풍속 6 /전병윤
-동지 팥죽-
동지는 눈보라와 함께 몰아쳐 온다
눈이 쌓여 오도가도 못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서 못된 짓 하는 역귀(疫鬼)가 되었다.
그는 피를 보면 바들바들 떤다, 그래서 피 대신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면서 악귀를 쫓는다. 집과 나라안에 재앙이 없도록 해 달라시던 할머니는 “사색당파싸움, 임진왜란, 동학란도 역귀의 작란이다”고 하셨다.
그래 삼팔선의 철조망, 이스라엘이나 이라크의 전쟁도 역귀의 작란이 틀림없겠다
이제 그만, 역귀 없는 세상을 위해서 한솥 푸지직푸지직 끓어오르는 평화의 팥죽을 쑤어야겠다.
동짓날 /이화영
동짓날 팥죽을 먹는데
전깃줄 가득
검은 사이렌의 노래가 들렸다
분쇄기에 우울을 넣었다
버튼을 눌렀다
죽여도 줄을 줄 모르는
형상도 없이
피어나는 것들
나는 팥죽을 먹으며
가만 저항해보는 것이다
冬至 아침 /김우전
어머니가 끓여 보낸 먼 길 굴러온 팥죽 새알 몇 알이나 먹었나 헤아리며 나선 아침
얼은 도랑 볕바른 풀더미에서 길고양이 아기 네 마리 젖을 빨고 있네요
설움도 모르고 모로 누운 어미 젖꽃판 앞발로 꾹꾹 누르며 빨고 있습니다
털이 고실고실한 어미 등에는 먼지와 검불이 붙었습니다만 꼬물거리는 애기들 등은 윤슬같네요
내가 걷는 길보다 낮은 저곳까지 내려와 고양이네 등을 둥글게 안고 다독이는 하늘과 거짓말 한번
한 적 없는 것 같은 어미의 눈을 조곤조곤 읽어보고 싶습니다
달리던 바람은 멈칫, 살금살금 걸어 지나는 듯도 합니다
한 뼘도 안 되는 어미 품은 새끼들의 겨울 다 덮고도 남겠습니다
한결 더 매서워지는 때가 오면 그걸 좀 빌려나 볼까 생각도 하는데
쉰 고개 넘은 지 한참 지나도 식지 않는 그것에 나는 이미 싸여 있네요
동지팥죽 /남혜경
하루 해 짧아 발걸음 재촉한 낮달이
어둑어둑 붉은 석양 속에 퐁당퐁당 빠진다
동짓밤 /박규리
절집 생활 칠년이면 이골이 날 만도 한데
불쌍한 영가가 들어올 때면 아직도 내가 더 운다
오늘도 영정 모셔놓고 하루종일 훌쩍였다
삶과 죽음이 밥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곳
이별과 사무침이 도란도란 젓가락질하는 곳
한 척의 배가 된 절이 산속을 찰랑찰랑 흐르는 곳
아무래도 이런 밤이면
이제는 아득한 나 때문에 다시 목 메인다
뜨거운 팥죽을 먹으며 /이근화
말 위의 사람도 떨어뜨린다는 팥죽 한 사발을 앞에 두고
숟가락이 무겁다 속을 훑어 내린다
입술이 점점 붉어지고
한 숟갈 한 숟갈 당신에게 더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죽음
팥죽 한 그릇을 해치우는 데 철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지나가는 길이었고
모르는 사람이었고
낡은 식당이었는데
남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뜨거워졌다 가라앉았다
허기도 발걸음도 뒷모습도 나는 잘 모르고
반쯤 떠 있는 새알심을 건져 올릴 때
죽은 사람이 죽은 냄새가 죽은 목소리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왜 뜨겁고 달콤한가
낡은 의자가 툭 꺼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일까
뻘건 죽 한 그릇에 돌아가지 못하고
기어이 땅에 떨어지고 만 사람들
귀신이 아니라 귀신 같은 얼굴로 뜨거운 팥죽을 먹었다
반쯤 열어 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동짓날 /장유정
동짓날 긴 긴 밤
팥죽 먹고
동치미도 한 모금
아삭아삭 무 맛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문풍지 소리 들락날락
펄럭거린다
팥죽 할멈 /이문구
팥죽 할멈은
옥수수를 좋아해
오막살이 텃밭에
옥수수를 심었지.
줄줄이 총총 박힌
찰옥수수 심었지.
앞니뿐인 입
앙다물고
누가 불러도
대꾸조차 않았지.
이를 악물고 심어야
줄줄이 총총 박힌다고
다 심을 때까지
한눈 한번 안 팔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