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딱 망하고 쉬쉬 … ‘차이나 드림’은 없다 ‘기회의 땅’ 중국서 성공하기 갈수록 어려워 …
중국 거주 일부 한인들의 절박한 실상이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당시 사건은 ‘차이나 드림’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소 씨는 실패한 중국 거주 한인의 전형이었다. 이미 아내와 이혼한 상태로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중국에서 비참한 생활을 감내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개인사업을 해본 이라면 그가 어떻게 사업에서 몰락했는지, 그리고 온갖 모욕을 참아내고 끌어온 최후의 종자돈 600만원을 잃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베이징에 사는 사업가 A 씨는 “너무도 뻔한 스토리”라며 한숨지었다. A 씨는 이어 “내 주변 사람들도 자살만 안 했지 실상은 소 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나라도 중국에서 죽을지언정 절대로 한국으로는 못 돌아가지…, 그가 원한 것은 한국행 배편이 결코 아니었어.” “애당초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실패한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인 양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멋모르고 중국에 와서 쫄딱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이역 땅에서 ‘나 망했소’라고 떠들어댈 정신 나간 사람은 없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게다가 이들이 내린 결론만큼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천편일률적이었다. “애당초 중국에 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그래도 정 오고 싶다면 제대로 준비해서 오고 선배들의 충고일랑 무시하지 마시라….” 중국과 수교한 지 벌써 13년째. 한국인들이 ‘기회의 땅’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지난해 중국을 방문한 인원만 약 288만명.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골드러시(gold rush)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우리의 ‘중국 짝사랑’은 이미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삼성·LG 같은 대기업에서부터 지방의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통닭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김모 씨까지도 한번쯤 중국 열병을 앓았을 정도다. 지금까지 집계된 대(對)중국 투자액만 260억 달러(약 30조원, 현지 재투자분 포함). 무려 3만여 한국인 사업체가 중국에 진출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각종 언론에서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꽤 성공적이었다는 기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 이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베이징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채모(39) 씨는 기자에게 충격적인 통계치를 제시했다. “베이징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60%가 집세 걱정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중 수백명가량이 우리로 따지면 극빈층으로 밥을 얻어먹고 사는 수준이죠. 그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계속 중국으로 몰려 들어와 당혹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몰락한 한국 사람들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선 그들이 재중 한국인 사회에서 도태된 상태여서 움직임을 확인하기 힘든 데다, 나름대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왕징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왕징(望京)은 베이징 중심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서울로 치면 송파구 정도에 해당하는 신흥 아파트 단지로 4만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베이징 최대의 코리아 타운이다. 왕징 할아버지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날마다 왕징의 한 공원에서 한인들과 조선족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60세를 넘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 통하는 조선족들을 한국인 가정에 소개하는 인력 소개업이 전부였다. “왜 망했는지 알아. 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기회의 땅이겠어. 당신 눈에는 여기서 희망이 보여? 13억 인구를 만나 무얼 어떻게 하겠다고, … 다 허상이야. 중국에서 사업에 실패해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을 ‘신조선족’이라잖아. 내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어.” 그는 중국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해외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하다 90년대 중국과 인연을 맺고, 한때는 화려한 중국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기운 사업은 그를 이산가족으로 만들었고, 결국 중국에 홀로 남게 했다. 그는 여권도 잃고 이름도 잃고, ‘왕징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베이징 한쪽에서 숙식을 걱정하며 여생을 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3만개 한국인 사업체 진출 260억 달러 투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어. 중국으로 오지 말라는 거야. 중국은 거대한 늪 같은 곳이야. 한번 발을 잘못 내딛으면 나같이 돼….” 비교적 젊은 사업가인 문모(36) 씨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차이나 드림’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01년 인쇄업체의 주재원으로 중국 생활을 시작한 문 씨는 다음해 국내 복귀 발령이 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중국에서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5000만원으로 시작한 봉제공장은 그런대로 운영됐지만, 경쟁 업체들이 난립하면서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했다. 연이어 시작한 가발공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자금을 날린 것은 물론 순식간에 빚쟁이로 몰렸지요. 어떻게 망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이었어요. 한 달간 집 앞을 지키고 선 사채업자들 때문에 자살까지 결심했지만, 죽어도 한국으로는 못 가겠더군요.” 알량한(?)‘자존심’과 ‘빈털터리’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오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중국 사채업자들은 제 뒷조사를 해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포기하더군요. 적어도 여기는 신용불량자 딱지는 없으니까 다시 시작해볼 용기라도 생기는 거죠.”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던 문 씨에게 찾아온 유혹은 여권을 사겠다는 것과 위장결혼 제의였다. 지금은 값이 많이 떨어졌지만, 한때 한국 여권은 중국에서 3만~4만 위안(400만~500만원)이란 거금에 거래됐고, 조선족과의 위장결혼 또한 여자 쪽 가족이 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생기기 때문에 4만 위안이 넘는 대가가 제시됐다. 물론 문 씨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현재는 조그만 식품유통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가 됐으며, 곧 한족(漢族) 여인과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다. “중국에서 1단계 성공이라면 한국에 손 안 벌리고 먹고사는 수준을 유지하는 거예요. 지금 이 정도라도 정말 감사한 거죠.” 중국에 장기 거주한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쯤 투자금을 모두 날리고 간신히 재기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일부 주재원 출신들은 사업에 실패할 경우 전문적인 브로커로 나서기도 한다. 교회나 사교모임 등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인맥을 넓혀 중국에 발을 내딛는 신참 한국인들을 상대로 중국 세일즈에 나서는 것이다. 아예 한국으로 돌아가 투자자를 모집해오는 일도 허다하다. 중국에서는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신들도 언제 저런 처지가 될지 몰라 모른 체할 뿐이다. 이런 탓에 “조선족보다 오히려 한국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실패한 사람 늘어나면서 불법적 사업 행태도
“내 주위에는 54번이나 명함을 바꾼 사람이 있어요. 휴대전화 번호야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한국인들은 극단적으로 말해 누구나 브로커이자,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베이징 한국인단체의 B 사무국장) 중국에서 소규모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로는 대개 비슷하다. 중국 진출 기업 주재원으로 일하다가 한국으로 발령이 나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중국에 눌러앉아 개인 사업에 나서는 식이다. 보통 자신의 중국 내 인맥을 이용해 납품처를 확보하고 제조 공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회사에서 모든 생활비가 지원되는 ‘주재원’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달리 중국에서 개인 사업자들이 겪어야 하는 사업상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복잡한 세법, 관료들에게 바쳐야 하는 갖가지 ‘준조세’, 중국인 도매업체들과의 불협화음 등이 기다리고 있다. “대기업조차 중국에서 성공한 예가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중국 내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해왔고, 공장 설립에서 노무관리까지 모든 일이 한국처럼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죠. 하물며 중대나 소대급, 특히 혈혈단신으로 성공한 사례는 환치기나 밀수 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베이징 한 한의원 원장) 실패한 사람이 늘어나고, 한국에서 밀려든 불법 체류자들이 증가하면서 온갖 불법적인 사업 행태도 난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위조문서, 밀수, 환치기, 마약 등이 조선족의 일로 치부됐지만, 지금은 한국인들이 끼여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03년경까지 베이징에는 가난한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쪽방촌이 있었다. 베이징 3환(세 번째 순환도로) 한국 영사관 인근 따퉁빌딩 근처의 후미진 주택가인 가오리춘(高麗村)이 바로 그곳이다. 조선족 사업가들이 세운 이 동네는 동북 3성에서 내려온 가난한 조선족들이 밀집해 살았고, 사창가로 활용되기도 했다. 빛이 들어오는 방은 한 달에 500위안(약 7만원), 반지하는 300위안, 그 이하는 150위안 수준이다. 공동 화장실에 난방시설은 물론 없다. 이곳에 중국 진출 뒤 망한 한국인들이 조선족과 섞여 살았으나 살인 등 강력사건이 빈발하자 중국 당국이 철거를 시작했고, 거주자들은 왕징 인근의 아파트 지하로 대부분 이주했다. 지하 쪽방은 예상대로 더럽고 불결했다. 왕징 인근의 한 지하 단칸방에 살고 있는 한 한국인은 자신이 운영하던 술집을 몇 년 전 조선족 조폭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소연했다. “장사가 되는 한국인 술집에 조선족 깡패들이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고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간 돈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가게를 내주지 않으면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니까요.” 중국에서 술집이나 식당을 하려면 이런 고충이 뒤따른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한국인들이 처음 투자했던 베이징 내 주요 찜질방이나 룸살롱, 가라오케 등은 거의 대부분 주인이 조선족으로 바뀌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상자 기사 참조). 이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은 큰돈을 벌기는커녕 생계를 걱정하고 있을 정도다. 한두 번 제조업에서 실패한 이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는 탓에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한국인을 상대로 한 식음료업으로 투자처를 옮기게 마련이다. 문제는 주류나 요식업이 중국에서도 가장 힘든 사업이다라는 점이다. 특히 2003년 중국의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발발 이후 규제가 대폭 강화됐고, 그만큼 준조세도 폭증했다. 규제가 강한 만큼 편법이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영세상인들의 사정을 악화시켰고, 한국식 ‘권리금’까지 보편화되는 등 한국인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주류나 요식업 너도나도 한국인들끼리 경쟁 격화
“완전히 제살 깎아먹기식입니다. 서로 못 죽여서 안달입니다. 하나같이 고깃집 하고 술집 하고…. 한국인끼리 서로 장사하려다가 함께 몰락해가는 거죠.” 규제가 까다로운 만큼 이를 꽈ㄴ시(關係·인맥)로 풀어보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를 노리고 중국인과 안면을 틔워주겠다는 전문 브로커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인 관리들에게 술과 밥을 사는 등 야단법석을 떨어도 정작 어려움이 닥치면 도와줄 중국인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숨 섞인 푸념들을 내뱉는다. “추운 겨울 난방시설 없는 방에서 동사했다는 사람부터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했다는 기업인까지, 확인되지 않는 얘기도 많이 나돌아 뒤숭숭하지요.”(왕징 한인교회 C목사) 중국 주요 도시의 한인촌에는 한인교회에서 식사를 제공받고, 볕이 들지 않는 쪽방에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고민하는 한국인들이 늘고 있다. 중국 당국 역시 한국인 부랑자들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해법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이들 한국인 불법 체류자를 대대적으로 추방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국행을 거부하는 이들로 인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체류자 문제가 중국에서도 한국인들에 의해 불거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때 사업을 함께했던 중국인으로부터 방값을 지원받는 처지로 전락한 최모(42) 씨는 “중국에 한류(韓流)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지만, 있다 해도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다”고 절규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굶지 않고, 한 건만 성공하면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엿보인다”고 말하는 등 이중성을 내비친다. 이들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며 오늘도 힘겨운 하루살이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일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중국 베이징, 칭다오=글·사진/ 정호재 기자
[‘중국 로또’수렁]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말 그대로 대국(大國)이다. 그런데 최근 여기에 56번째 민족이 추가됐다고 한다. 바로 신조선족, 때로는 한국족으로 불리는 30만 재중 한국인이 그 주인공이다. 신조선족이란 표현은 더 이상 실패한 한국인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제는 중국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한국인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탈바꿈했다. 이민을 불허하는 중국 정책상 이들의 국적은 엄연히 한국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한국으로의 복귀를 꿈꾸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국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특수한 환경 때문. 일각에서는 “중국이란 환상에 눈이 멀어 더 이상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일 뿐이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 신조선족들은 “중국의 흡인력이 두렵게 느껴질 뿐이다”고 고백한다. 예전에도 산둥반도에 ‘소백제’ ‘신라방’ ‘고려촌’ 등이 세워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흔적도 없이 중국에 동화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향내에 취해 여기서 살게 되는 거죠. 중국인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순수하고 깊은 속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갈 수 없는 흡인력 두려울 뿐” 공업도시 톈진(天津)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맹순자(42) 사장이 중국에 장기 체류하는 이유다. 맹 사장은 1994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가죽공장에 파견 나오면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된 이래 어느새 11년째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자신과 함께 일하는 조선족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가족 같은 회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제 중국에 대해 모국 같은 느낌을 갖게 됐다고 토로한다. 신조선족이 절망감을 느끼는 때는 ‘중국 대륙에서 성공할 만한 저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털어놓는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다 쓰고 귀국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고민할 때, 결국은 중국 잔류를 택하게 되는 이유조차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중국의 마력(魔力) 때문이라고 말할 뿐이다. “대기업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못다 이룬 꿈을 혼자라도 성공시켜보겠다는 의욕 같은 게 생겨 주저앉았다.” 베이징에서 조그만 IT(정보기술)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는 류기선(40) 사장은 이를 일종의 ‘오기와 꿈’이라고 설명한다. 한국이란 나라가 주지 못했던 ‘의욕과 희망’을 느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중국 땅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조선족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들의 의견을 종합한 최소한의 조건은 △실패를 경험한 이들로 중국에 대해 ‘겸손’한 사람 △30대 후반 이상의 중국어 소통 가능자 △가족과 함께 살 것 △자녀가 중국을 선택해도 서운해하지 않을 것 등이다. 신조선족의 최대 고민은 역시 아이 교육 문제다. 자신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자녀만큼은 중국과 한국 문화 양쪽에 완벽한 국제인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소망이다. 때문에 중국 공교육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 강남식 사교육도 포기하지 않는다.
칭다오에서 5년째 거주하는 정선화(가명·43) 씨는 아이 셋을 모두 중국 공립학교에 보냈지만, 한국식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대학은 아이들이 원하는 쪽으로 보낼 생각인데 아무래도 초등학교 때 온 아이들은 베이징을 택하고, 그 이후에 온 아이들은 서울을 선호하더군요.” 정씨의 중국어 실력이 수준급이긴 하지만, 사업하는 데 충분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신조선족은 미국 이민 1세대가 영어에 무지했던 것과 달리 상당한 중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 신조선족이 탄생한 배경이 쉽게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중국과의 특수 관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서툰 중국어 탓으로 40대 이상의 신조선족이 중국에서 힘겨운 길을 걸어왔다면 20, 30대 신세대 젊은이들은 준비된 정보와 숙련된 중국어로 차근차근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충무검도관을 운영하는 유민수(28) 관장은 중국 런민(人民)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다. 군대 제대 후 한국에서 공인된 그의 검도 실력은 6단. 지금 중국 내 모든 일본인 검도사범들을 누르고 ‘중국에서는 최고수’라는 명예를 획득했다. 그는 아시아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 땅에 당도했지만, 이제는 중국 국가대표 감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추가한 셈이 되었다. 그는 이전의 선배들과 달리 돈 한 푼 없이 중국에 건너왔지만 나름의 실력을 바탕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젊은 신조선족인 것이다. 베이징 내 유명 한인매체인 ‘포커스’의 김동석(29) 부장 역시 3년 전 학업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와 아예 중국 전문가가 되고자 베이징에 눌러앉은 경우다. 그는 신조선족의 부상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평가를 내린다. 준비된 정보와 숙련된 중국어가 정착 이유 “사실 중국은 근대적 한국인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땅이다. 서구로 향한 한국인은 접시부터 닦았고, 동남아시아로 간 한국인은 왕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한국인은 귀족으로 건너왔다가 점차 보통 사람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신조선족은 “과거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결국 그들의 존재까지도 흡수해버렸던 대국이 바로 중국이었음을 우리 모두 한번쯤 되새기자”고 입을 모은다.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모든 게 가짜거나 또는 불법입니다.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은 ‘나는 중국을 전혀 모르는 초짜’라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편안해집니다. 대신 한국에서의 삶은 무의미해져요. 결국 여기 신조선족의 삶터가 영원히 중국이란 의미입니다.” 과연 한국인들의 도전은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느 정도 성공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정호재 기자
[‘중국 로또’수렁] 중국 어느 곳이나 한국인 급속 증가…
2004년 겨울 교사들의 한 중국 체험연수회에서 교사들과 LG 노용악 부회장의 간담회가 열렸다. 그때 노 부회장의 말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은 “기업인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중국에 다 다녀갔는데 가장 먼저 와야 할 선생님들이 왜 이제야 왔느냐”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중국을 바르게 가르쳐야 할 교사들이 이제야 오기 시작했다는 데 대한 책망이면서 기쁨의 표현으로 들렸다. 베이징(北京)의 한국인 거리인 왕징(望京), 톈진(天津)의 완더좡따지에(万德庄大街), 선양(瀋揚)의 시타(西塔), 상하이(上海)의 구베이(古北) 등은 수만명의 한국인이 사는 곳으로 코리아 타운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곳의 최근 수년간 유입자 증가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거 증가세를 이끌던 이는 중국에서 활로를 찾던 중소·자영업자들이었지만, 최근에는 중·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에까지 이르는 조기 유학생과 그 가족이다. 엑소더스(Exodos)같이 중국에 파고드는 중국 속 한국인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미국에서처럼 코리아 타운을 형성하고, 한국인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 선조들처럼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문화의 용광로인 중국에 동화돼 살아갈까.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재중 한국인 사회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전제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먼저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베이징을 거쳐 청더(承德)를 향하던 사신단의 시대와 달리 요즘은 비행기에서 잠시 몸을 뒤척이면 베이징에 닿는 초고속 시대라는 점이다. 베이징 왕징, 톈진 완더좡따지에 등 수만명 북적 인천에서 베이징까지 실제 비행 시간은 1시간 반 남짓이다. 인천에서 상하이까지 역시 1시간 반 남짓. 반면 베이징과 상하이 사이는 1시간40분 정도로 한국에서 가는 것보다 더 멀다. 또 최근에는 대도시뿐만 아니라 중국 곳곳으로 항공 노선이 연결되면서 노선 수는 일본을 추월한 지 오래다. 게다가 베이징인들이 상하이인을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고 생각하는 탓에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존중하는 편이다. 상하이인들 역시 베이징인들을 돈도 못 벌면서 정치 논쟁이나 하는 무능한 사람들로 인식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 간의 거리나 위치 설정은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성(?)이다. 이미 2002년부터 “중국 속 한국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기 시작했다. 중국 진출 초기, 중국인들과 조선족한테서 받은 피해는 이제 “방심하면 한국인에게 당한다”는 격언으로 바뀐 지 오래다. 여기에 주재원, 자영업자, 유학생 등 여러 계층구조에서 기인하는 교민단체의 결집 실패와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인들의 방탕한 생활 등도 끊임없지 지적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3년여가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 한국인 수는 급증했지만, 여전히 한인단체는 교민사회에서 중심 축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 예가 난항에 빠진, 베이징·상하이에서의 한국국제학교 설립 문제다. 정원 680명인 국제학교는 이미 정원이 차 입학이 하늘의 별따기일 만큼 어렵지만, 현지 모금액 380만 달러(정부지원 480만 달러)가 모아지지 않아 학교 측은 건설 중단 위기에 빠져 있다. 바로 이런 일에 한인단체가 제 기능을 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의 신뢰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재중 한인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단체가 있어야 하고, 그 몫을 한국인회나 한국상회·한국상공인회 등이 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 단체에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인단체가 좀더 적극적으로 존재 가치를 인식시켜야 한다.
이러한 일을 위해 노력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톈진한국인회다. 각종 문화강좌 등을 열어 교민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바자 등을 통해 교민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한국인회가 활발해지면 이를 바탕으로 시정부 등 중국 기관들과 재중 한국인 관련 논의를 할 수 있고, 한국인의 권익 보호를 위한 장치도 만들어갈 수 있다. 지금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중소기업가나 자영업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동전화나 자동차 업종 등은 그래도 괜찮지만, 전자나 섬유 업종 등은 중국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인건비·세금 등 부대비용의 증가로 삼중고를 겪고 있다. 한-중 관계는 과거와 달리 급변하고 있다. 우리의 창의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기업 제품뿐만 아니라 중국기업에서 만든 물건까지 세계시장에 팔아야 할 상황이다. 우리가 가진 경쟁력이란 적극적인 사고와 유연한 대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진취적 기상의 세일즈 정신, 한류로 대변되는 문화 콘텐츠의 생산과 마케팅 능력, 그리고 뛰어난 정보통신 적응력을 바탕으로 한 정보통신 기술 개발 및 활용 능력일 것이다. 중국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이들은 “만약 이렇게 발전하는 세계 공장이 중국이 아니라 인도나 브라질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중국이 우리나라 옆에 있다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중 한국인 사회는 분명히 그런 전초기지 구실을 하는 곳이다. 전초기지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앞으로 중국의 한인사회는 양적인 증가에도 사상누각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001년에 한국상회의 모 사무국장은 “한국 진출 기업 가운데 10%는 이윤을 남기고, 40%는 반반 정도고, 50%는 그만두어야 할지 또는 옮겨야 할지를 놓고 고민한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비율은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사업 환경은 계속 나빠졌지만, 이제는 중국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무작정 들어오기보다 나름대로 준비한 끝에 오기 때문에 성공 확률이 높아지진 않았지만 실패율도 오르지 않고 있다. 한인사회 성숙과 유지의 관건은 교육 그렇다면 재중 한국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양적인 증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베이징의 경우 단기유학생까지 합치면 유학생 수만 10만명을 헤아릴 정도다. 거기에 조기유학생들까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유학생의 증가는 소비자원의 증가이지, 생산자원의 증가는 아니다. 또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지내기 때문에 교민들의 구심점도 약하다. 미국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던 곳이 교회나 각종 소모임들이었다. 중국에서의 문제는 각각의 소모임들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전체로 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소모임의 증가는 재중 한국인 사회 통합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경우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 중국에 오는 이들은 중국이라는 초원에 양을 놓아 길러서 세계에 팔려는 유목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몽골족들에게 아오빠오(敖包)라는 지침대가 있었듯, 우리도 한국인이라는 지침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중국 내 한인사회의 성숙과 유지의 관건은 교육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국식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이해를 잃고 신조선족으로 살아갈 것이다.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3세대 이후부터는 조선인학교가 급속히 줄면서 언어를 잊기 시작했다. 한국이 가까워지면서 한국어의 중요성이 새삼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먼 훗날 조선족이 지금 겪는 고민을 재중 한국인 후세들이 할 것이 자명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국제학교를 서둘러 세우는 것이다. 또 재중 한국인들을 골치 아픈 대상으로만 보고 소극적으로 대하던 대사관이나 영사관의 활동 등이 좀더 교민 친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한국인회나 한국상회 등 교민 우호단체들의 활동을 지원·강화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셈이다. 조창완/ 중국전문연구가ㆍ알자여행사 대표 |
첫댓글 뭐 조금 더 긴장하고 열심히 하자는 의미 입니다. 저 또한 긴장 되고요.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해야되겠죠. 주간동아 연재 글이었군요. 잘읽었습니다. 감사
많은참고 쎼쎼!
와 ~ 상당히 길군요. 긴장많이하고 가네요.. ^^ 중국이 기회의 땅이고 앞으로 중심이 될 것이란 생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단, 무협영화에서 보듯이 약자(엑스트라)는 칼도 맞지 않아도 나가떨이지지만 진정한 강호에서 살아남는 자. 무림고수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다들 많은 내공를 키우자구요.. 그리고 행복하시고..ㅎㅎ
이 글을 누군가도 읽어보고 느껴야 할텐데... 만만치 않는 중국을 뼈저리게 느끼고도 손놓지 못하는 인간이 한명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내 나라도 아닌 남의 나라에서 돈벌겠다면 당연히 긴장하고 더욱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야죠... 한국보다 싸다고 골프, 가라오케, 안마에 빠져 사는 사람들 보면 안타깝더라구요...그에 대한 비용은 싸다고 해도 이것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어느 곳에서도 같은 가치가 있지 않나 싶어요... 한국에서는 한달에 한번 정도 하던 것을 여기에서 한달에 5번 정도 한다고 하면 그만큼 일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더 소비될 것이고, 당연히 망하게 되겠지요...그리곤 한 마디 하겠죠...중국이 정말 쉽지 않더라... 뒤돌아보자구요~ 저도 반성하면서 리플 답니다.
이미 베이징쪽은 한국인이 너무 많아요 ............ 그리고 ... 상하이 복단대 학생들 좀 정신차리세요 .. 한국 망신 시키지 말고여 .... 다른학교쪽은 궨찮은데. .복단대에 소문이 너무 않좋아요 ...
그리고 .. 주재원들중에서 언어 못하시는분들 많던데 .. .그리고 ... 사업하시는분들 중에서도 말은 못하시는데 .. 어떻게 성공해여 ... 먼저 말부터 배우세요 ..
삽질하시느라고 팔좀 아프셨겠네요. ㅋㅋ 상당히 긴글 아주 감명깊게 잘읽었어 요 공감동감~~ 각자 처해진 상황들이 아름답게 해결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뿅~~
삽질은 퍼온다는 좋은 의미이길 빌겠습니다 ^^ 뿅
당근이죠.. 삽질은 퍼온다는 뜻의깜찍한 좋은 의미입니다.ㅇㅇㅇ 뿅~~
대학나오고 똑똑한 조선족 아이들 보면 중국말 못하고 중국사정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많죠...정말 공감가는 글이고, 긴장이 바짝되는 글이네요. 모두 모두 아자 아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고 덤비는 한국인들.... 정말 한심하지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다시 일어서면 됩니다......건투를 빕니다......아! 대한민국.........
중국어도 배우지 않고 중국에서 로칼학교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어떻게 학교를 운영하자는 건지??? 나중에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하시려고 하시는지?? 식당을 운영하시는 사장도 주방에 대한 노하우가 없음 언젠간 망합니다.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하물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운영자 입장이라면 일단 중국에 온 이상,,,언어부터 배우시고,,하심이..무슨 얘기를 할려고 하는지 다들 아실겁니다~
최선들은 다하는데 모두들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거 같은데..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한국사람들이 하나둘씩 안보이시고 다른분들이 새로 오시고 이거야 반복되는 한국의 근성인지 ㅎㅎ 저두 어디가서 이런말 못하는데.. 내 이야기 같아서 .. 열심 살아야지 또 반복되는 하루 하루
현지화만이 살길입니다. 한국을 잊고, 한국음식 않먹고, 중국말하려고 노력하고, 중국 방식으로 살려고 힘쓰고, 중국인들과 하나되고,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는 길만이 중국 내수에서 성공하는 길입니다.
좋은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