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거(Tiger - Panzerkampfwagen VI Ausfuhrung E)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을 대표하는 지상 병기로서, 무수한 전설과 신화를 남긴 걸작 重戰車이다.
무수한 적 전차들을 격파한 88㎜ 주포는
1,000m 거리에서 어떠한 적 전차도 파괴할 수 있었으며, 100㎜에 달한 정면 장갑의 방어력은 그 어떠한 적 전차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다.
밀리터리 키드들의 영원한 이상향인 티거에 대해 알아보자!
- 개발 略史 -
티거의 개발은
1937년 4호전차가 배치 되던 시기, 차기 주력전차가 될 30 ~ 33ton 급의 전차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Henschel사가 받으면서
시작된다.
Henschel사는 DW1(Durchbruchswagen,돌파 전차)이라는 명칭으로 ProtoType 1대를
만들어냈으나, 새롭게 제기된 프로젝트(VK6501)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하여 개발을 중단한다.
DW1
1930년대 말 독일 육군은 Henschel에 Panzerkampfwagen VII(VK6501)의
개발을 의뢰하였는데 전체 무게 65ton, 128mm 포, 2∼3개의 기관총을 장비하고 있으며, 차체 정면장갑 두께는 100mm, 차체 측면
80mm, 승무원은 5∼6명으로 되어 있다.
이 전차는 무게 때문에 철도수송을 할 때 포탑을 분리하여 운반해야만
했다.
1941년 말 1대의 prototype이 완성되어 각종 실험이 진행된 후 이 프로젝트 역시 취소된다.
DW2
한편 1940년 헨쉘사는 DW1의 설계를 발전시킨 DW2를 개발하고 있었다. DW2는 승무원
5명의 32톤급 전차로서 75mm 24구경 전차포와 MG34 기관총 2정을 장비했다.
그러나 1941년 DW2 역시 취소되고,
Henschel에게는 새로운 전차 개발 계획이 하달된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명칭은 VK3001라고
명명되었으며, Henschel 이외에도 다임러-벤츠,포르쉐,MAN사 등이 제안에 참가한다.
VK3001(H)
헨쉘사의 VK3001(H)는 티거의 골격을 이룬 차량으로 DW의 기술을 이어나가고
있다.
차체 상부는 독일전차의 전통대로 수직장갑판을 용접해 구성됐으며 상하부는 볼트로 고정되었다. 서스펜션은 7개의 토션바,
3개의 리턴롤러로 구성됐다.
이 전차에는 75mm 48구경 고속전차포가 탑재될 예정이었지만, 소련의 T-34가 등장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주포의 탑재가 요구됐다.
한편 VK3001(H)의 섀시를 이용해 128mm K 61구경 대전차포를 탑재한 차량
2량이 동부전선에 시험적으로 투입돼 좋은 평가를 얻기도 했다.
VK3001의 진행과 함께 히틀러는 어떤 상황하에서도 절대 우세를 가질 수
있는 헤비급 전차(VK3601)를 구상하고 있었다.
요구 사양은 아래와 같았다.
1. 어떤 적 전차도 1,500미터 밖에서 격파할수 있을 것 2. 같은 거리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전차무기에도
방어될 것 3, 최고시속이 40km에 이를 것
이 전차에 탑재되기로 한 주포는 개래트 725라는 명칭으로 개발중이었는데 텅스텐 탄심의
포탄을 발사하는 75mm 강선포였다.
헨쉘사가 제안한 VK3601(H)는 전면 100mm, 측면/후면 60-80mm에
달하는 뚜터운 장갑으로 보호됨으로써 당시의 많은 연합국측 대전차병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수 있었다.
VK3601(H)의 섀시는
VK3001(H)의 것으로부터 발전했지만 전륜이 8개로 늘어나고 대형 로드휠이 장착됐으며 리턴롤러는 폐지됐다.
VK3601(H)
그러나 병기국은 VK3601(H)의 주포가 될 예정이던 개래트 725에 사용될 텅스턴
탄심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개발을 중지시켰다.
이에 따라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Krupp사에서 개발중이던 강력한 '88mm KwK 36 전차포'였다.
88mm Flak 18
원래 88mm포는 '88mm Flak 18'이라는 대공포로
유명하다.
서부 전선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이 대공포는 종종 대전차포로 사용되었는데, 37mm대전차포가 격파하지 못하는 목표물을 쉽게
관통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주포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더욱 대형의 차체가 필요했다.
따라서 독일 육군은
'88mm KwK 36' 전차포를 사용한 새로운 전차(VK4501)의 개발을 Henschel사와 Dr. Porsche에게
명령한다.
VK4501의 요구 사양은 최대 중량 60ton 미만, 600hp 엔진 탑재를 하여 최대 속도 40km/h, 야지
주행속도 25km/h의 기동력, 그리고 당시 Krupp에서 개발중인 88mm포를 탑재 할 것 등이었다.
탑재될 포탑은 라인메탈사가
개발중이었다. 라인메탈사는 88mm포 장비형 포탑 이외에도 75mm KwK L/70포를 탑재할 수 있는 또다른 포탑을 목업까지 만들어놓고
제안했지만 기각되고 말았다.
이 Project에 대하여 Henschel의 수석 엔지니어인 Ervin Anders는
기존의 VK3601(H)를 설계 변경한 VK4501(H)를 제안한다.
기존의 VK3601(H)에서 변화된 것은 상부차체가
캐터필러 위까지 돌출하게 된 것 뿐인데, 이는 대형의 KwK 36포를 수납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큰 포탑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상부차체의 측면장갑도 80mm까지 강화됐다.
한편 Dr. Porsche는 당시 적용되고 있던
독일전차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전차를 구상하였다.
이것이 VK4501(P)인데 차체 중앙에 공랭식 디젤엔진을
두어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모터를 구동시켜 drive wheel을 회전시키는 electro-mechanical transmission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방식보다 중량이 더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공랭식 디젤엔진의 개발은
결국 실패하였다.
헨쉘,포르쉐 양사의 기술진은 산적한 기술적 문제 뿐만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도 감수해야했다.
1941년 5월 26일 병기국은 히틀러의 생일인 1942년 4월 20일까지 첫 프로토타입을 준비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헨쉘사의 기술자와 근로자들은 밤낮을 가리지않고 작업을 진행, 1942년 4월 17일 '라스텐부르그 총통 대본영'行 화물차가 출발하기 불과
40분전에 프로토타입을 완성할 수 있었다.
VK4501(H) ProtoType
완성된 차량을 화차까지 시험주행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첫
프로토타입은 트레일러에 실려 열차에 적재되었다.
VK4501(P) ProtoType
포르쉐의 프로토타입인 2대의 VK4501(P)는
니벨룽겐워크(Nibelungenwerke)공장에서 여유롭게 완성되었다.
1942년 4월 19일 헨쉘과 포르쉐 양사의
시험차량이 라스텐부르그로부터 11km 떨어진 역에 도착했다.
시험차량들은 열차에서 크레인으로 하역되었는데, 프로쉐의 차량이
내리자마자 진흙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헨쉘사의 수석설계자 쿠르트 아르놀트는 포르쉐박사에게 VK4501(H)를 이용해 끌어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포르쉐는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사실 이때까지 헨쉘의 프로토타입은 시동 한번 걸어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
결과 라스텐부르크까지의 길은 너무도 멀수밖에 없었다.
양 차량은 몇백미터 가지도 못해 주저앉곤 했고
그때마다 기술진들이 달라붙었다.
이렇게 예닐곱번의 수리를 거친 끝에 히틀러의 눈앞에서 시험에 응할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인 4월 20일 아침, 아르놀트는 히틀러가 오후 2시경에나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하고 말썽많은 VK4501(H)의 최종 감속기(로드휠을 직접 구동하는 부분) 를 분해해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특유의 변덕을 부려 예정보다 세시간이나 빠른 오전 11시에 나타남으로해서 헨쉘사의 기술진들은 기어를 다시 조립하느라 야단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양차량은 우선 최대 속도를 테스트하기 위해 수백미터를 전속주행하게 됐다.
포르쉐의 VK4501(P)는 1,000미터 이상을 시속 50km로 성공적으로 주행했다. VK4501(H)도 약 850미터를 시속
45km로 주파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헨쉘의 프로토타입 엔진이 과열되어 아르놀트는 차량에 불이 붙을까 노심초사했다.
결국 간신히 참관단을 지나 차량을 임시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주행시험 결과 포르쉐의 차량이 더 빨랐기 때문에 참관단의 분위기는 VK4501(P)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아르놀트는 한번더 기지를 발휘해 군수상 알베르트 쉬페어에게 접근한 후 양 차량의 기동성을 시험해보자고
제안했다.
전날부터 보아본 바로 그는 포르쉐 차량의 선회성능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VK4501(H)의 선회성능은 대형전차치고는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기동성시험의 결과는 대세를 역전시키고 말았다.
이 외에도
포르쉐의 차량은 2대의 엔진으로 2대의 발전기를 구동시켜 최종감속기어를 돌리는, 매우 복잡한 방식이었던 점이 감점요소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VK4501(H)이며 Tiger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Ferdinand
비교 평가 이전에 Dr.Porsche는 당연히 자신이 개발한 전차 VK4501(P)가
채택되리라 여겼기 때문에 90대의 차체를 미리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 차체는 개조를 통해 88mm 71구경을 장비한
구축 전차 Ferdinand(Elephant)로 사용된다.
Tiger - Panzerkampfwagen VI Ausfuhrung H
티거의 최초 정식 명칭은
6호전차 H형(Panzerkampfwagen VI Ausfuhrung H, 열대용 필터 장착)였으나,
곧 6호전차 E형(Panzerkampfwagen VI Ausfuhrung E)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아군,적군을 불문하고 모두
티거로 불렀다.
훗날 티거 2가 등장하면서 티거I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공식명칭은 아니다.
- Tiger의 생산, 교육 및 내.외부 구조 -
헨쉘사는 중공업과 철도장비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던 기업으로 특히 기관차와 대형 크레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헨쉘은 티거와 같은 중전차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거의 갖추고 있었고, 아르놀트가 이끄는 우수한 기술진을
보유했으며 자체의 주행시험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모든 핵심장비 - 차체, 포탑등 - 를 자체적으로 생산할수 있었고 포탑링의 가공과
같은 정밀작업도 외부의 도움없이 할수 있었다.
티거의 최종조립이 이루어지는 건물은 티거 전차의 차체도 왜소해 보일 정도로
거대했으며, 하루에 6-7대의 티거를 출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티거의 승무원은 기존 전차 부대원 전차 훈련 학교의 우수한 학생들 가운데에서
선발됐다.
이들은 차량을 익히기 위해 헨쉘공장을 방문, 각 구성품의 생산과 최종조립과정을 견학했다.
Tigerfibel
승무원교육을 위해 티거피벨(Tigerfibel) 이라는 소책자가
만들어졌는데,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티거를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어서 인기가 높았다.
티거는 총 1,354량이 생산되었고, 1944년 4월 한달간 105량이 출고됨으로써
피크를 기록했다. 생산기간은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였다. 적은 수량만 생산된 원인은 독일의 물자부족과 1944년 1월
티거2가 등장한 점 등이 원인이었다.
티거는 거대한 몸집에 비해서는 기동성이 좋았지만, 아무래도 판터 등의 中전차에 비하면 둔한
점이 있었다.
또한 복잡한 구조로 인하여 생산단가가 높았으며, 정비유지도 용이하지 않았다.
중량 또한 당초 계획의
45톤에서 11톤이상 초과하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과 미국의 생산방식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측이 원래 계획에 거의 근접한 수만큼의 티거를 생산했지만, 3년동안 생산된 수량은 1,354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미국이 대전말기 급히 개발한 T26E3(M26)는, 불과 6개월만에 1,350량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이 있었던 것이다.
티거의 구조는 포탑 후방에 2개의 대형 수납 공구상자가 달린 것을 제외하면
ProtoType인 VK4501(H)과 거의 유사하다.
차체는 수직장갑판을 용접해 만들어졌으며 끝부분을 서로 물림으로써 견고함을
더했다.
차체전면장갑판은 100mm였으며, 만텔 역시 같은 두께였다.
측면장갑판은 60mm지만 차체상부와 리어패널은
80mmm였다.
포탑은 82mm장갑판을 말굽 모양으로 구부린 형태로서 상면 장갑판은
25mm였다.
Tiger - 단면도1
내부는 운전석,무선수석,포탑전투실과 엔진실등 크게 네부분으로 나뉜다.
운전석과 무전수석 사이에는 육중한 트랜스미션과 최종감속기어가 가로막고 있다.
운전석은 차체 앞쪽에 있는데, 조향은
유압식 핸들로 이뤄졌고 파손될 경우를 대비해 2개의 기계식 레버가 준비돼 있었다.
이 레버들은 각각 한쪽씩의 기동륜과 연결돼
있으며 주차 브레이크로도 사용되었다.
Tiger의 운전석 - 좌측부터 handbrake, left steering stick, steering wheel,
right steering stick, gear 조정 레버 스티어링 휠 우상단에 있는 작은 휠은 조정석 바깥에 있는 관측창의 높이
조정용임.
무전수는 차체 우측에 앉아서 통신뿐만 아니라, 기관총수 역할도 했다. 차체기관총은
7.92mm MG34로, 표준형 큐겔블렌데 마운트에 장착돼 있었다. 무전기는 무선수석 좌측, 트랜스미션 상부에
설치됐다.
포탑링은 직경 1.85미터로 매우 큰 편이며 세개의 지주 아래 원형의 바닥판이 설치돼
있었다.
주포인 'KwK 36'이 워낙 길었으므로 포미는 포탑의 거의 뒷부분에 걸칠 정도였고, 이에 따라 포탑은 사실상
좌우로 분할된 상태였다.
포수는 주포의 좌측에 앉아 TZF9b 쌍안경식 조준기를 사용했다. 포의 회전은 유압을 이용했으나 미세한
조정은 수동식 핸들을 사용했다.
주포의 부양 또한 수동식 핸들에 의존했으므로 결국 포수의 경험과 솜씨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셈이었다. 포수 앞에는 차체에 대한 주포각도를 알려주는 원형 계기판이 있어서 급박한 전투의 와중에서 목표를 신속히 조준하고 새로운 목표를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계기판에는 시계처럼 1-12의 숫자가 표시돼 전차장의 방향 지시에 신속히 반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전수는 주포 오른쪽에 자리잡고, 포탄의 적재임무를 담당했다.
포탄은 포탑바스켓 아래, 차체전투실 바닥, 전투실
좌우측 등에 보관되어 있었다.
Tiger - 단면도2 전차장은 주포의 왼편, 포수의 뒷쪽에 위치했다.
전차장용 큐폴라는
초, 중기형까지 원통형 드럼 모양으로 5개의 방탄 관측창이 설치돼 있었고, 포수석에 설치된 것과 같은 포탑 각도를 표시하는 원형 계기판이
장착됐다.
또한 거리측정기와 포병용 쌍안경을 장착할 수 있는 마운트가 부착되었다.
주포는 KwK 36 88mm 56구경으로서, 워낙 무거웠으므로 포탑 오른쪽 벽에 균형을
잡아주는 스프링을 장착해 조작을 쉽게 했다.
포수용 선회 핸들에 붙어있는 전기스위치를 누르면 포탄이 발사됐다. 포탄은 총 92발의
고폭탄(HE)과 철갑탄(AP)이 적재됐으며 동축 및 차체기관총을 위해 4,800발이 실려있었다.
이외에도 근접전투를 위해 9mm
MP40기관단총 1정이 차내에 보관됐다. 이 기관단총은 포탑바스켓 좌우측에 있는 피스톨포트를 통해 발사됐다. 그러나 중기형부터 오른쪽의
피스톨포트는 승무원 출입용 비상해치로 대체됐다.
포탑의 양쪽 앞에는 90mm NbK39 연막탄 발사기가 각각 3기씩 장착돼
있었다.
한편 대전차공격을 시도하는 보병으로부터의 방호대책으로 차체 상부에 S마인 발사기가
장착됐다. S마인은 지름 4인치, 길이 5인치가량의 원통형으로 내부에는 360개의 볼베어링이 들어있는 인마 살상용 무기이다.
발사되면 공중으로 3-5피트가량 튀어올라 폭발하며 사방에 베어링을 흩뿌린다.
장착위치는 차체상면 양쪽의
앞,중간,뒤등 최대 6개소이다. 그러나 중기형 이후부터는 회전식 발사기 1기를 포탑상면에 부착해 360도 발사가 가능하도록
변경되었다
티거의 중량은 애초 30톤급에서 57톤으로 거의 2배가량 늘어났기 때문에 현가장치는
다수의 토션바에 대형 로드휠을 겹친 매우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캐터필러는 725mm에 달하는 광폭이었으므로, 이것을 실을 경우
화차보다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520mm짜리 수송용 캐터필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이때는 또 바깥쪽의 로드휠 8개(한쪽
4개씩)를 떼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장비 담당자들은 수송 루트에 철교나 터널이 없을 경우 이런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화차에 싣곤 했다.
티거 1 초기형은 마이바하 HL 210 P45 650마력 엔진을 장착했다.
이 엔진은 배기량 21,000cc의 V형 12기통 가솔린엔진으로 차체 뒷부분 중앙에 장착되었다.
HL 210 P45
1943년말부터는 보다 강력한 배기량
23,000cc의 마이바하 HL 230 P45 700마력엔진으로 교체된다.
HL 230 P45
티거의 엔진은 중량에 비해서 출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얻고 있었지만, 다른 전차를 견인하는 등의 무리한 부하를 가하지 않으면 비교적 신뢰성이 좋은 편이었다.
당시
독일군은 마땅한 중전차 견인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고장난 티거를 티거로 견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경우 견인하던 차량이 고장나면 두대를 모두 잃게되는 셈이므로 독일군은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했다.
최종 감속기어(final reduction gear)는 헨쉘사가 영국 메리트
브라운사의 제품을 토대로 개발한 것이다.
티거의 트랜스미션은 전진 8단 후진 4단의 다양한 기어비를 제공하고 있었으므로 동시대의
다른 전차에 비해 훨씬 우수한 조작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최종 감속기어나 트랜스미션에 고장이 발생할 경우엔
별도의 트랜스미션 커버가 없기 때문에 포탑을 들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뛰어난 유압시스템 덕분에 포탑을 들어올리는 작업은 비교적 용이했다고
한다.
티거 1 초기생산분 495량은 수심 4미터까지 도하할 수 있는 슈노켈장치가
부착됐다. 하지만 실전사용 결과 별로 쓸 일이 없었던지 이후에는 수심 1.3미터를 도하할 수 있는 간단한 도하장비로 교체되었다.
또한 건조 기후에서 사용할 차량에는 특제의 파이펠(Feifel) 에어 클리너가 부착되었다.
이 장치는 다량의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부착된 거승로 엔진과 강철제 덕트(duct)와 고무호스로 연결됐다.
무전기용 안테나는 엔진데크 오른쪽 후방의
마스트에 하나가 설치됐다.
- 실전 및 개량 -
독일군에서 최초로 티거를 수령한 부대는 502 중전차대대(sPz.Abt.502)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방면에 4대를 투입했다.
최초로 레닌그라드 방면에 투입된 티거
그러나 이들은 전투에 투입된 첫날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경험이
풍부한 소련군 대전차포병에게 전차가 기동하기 어려운 습지와 삼림지대에서 헤매는 티거는 손쉬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망신스러운
데뷔전에서 격파된 4대 가운데에서 3대가 회수되었고, 운전 실수로 캐터필러가 망가진 1대는 소련군에 노획되었다.
독일군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4대 모두 장갑이 관통된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소련군은 노획한 티거를 테스트해본 후
모스크바의 고리키 공원에 전시한다.
소련군에 노획된 Tiger - 쥬코프 원수가 시찰하고 있다.
하지만 티거의 진가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502 중전차대대는 곧
완전한 편성의 1개중대를 티거로 장비하고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1943년초 소련군의 동계공세 넉달간 독일군이 파괴한 전차중
1/4은 이 중대가 격파한 것이었다. 이 중대의 가용차량이 7량을 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전과인 것이다.
1942년말부터 속속 티거 부대가 창설돼 북아프리카및 아프리카, 이탈리아등에
배치되고 승무원 훈련을 위한 훈련센터가 독일과 프랑스에 설치됐다.
독일군은 티거 대대를 최소한 군단급 이상의 직할부대로 운영했는데
각 군에 10개, SS에 3개의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했으며 훈련대대 1개가 별도로 운영됐다.
한편 독일국방군 최고의 사단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예외적으로 사단직할 티거 대대를 배치받고 있었다.
티거 대대는 핵심작전지역에서 적진을 돌파하거나
주요거점을 방어하는데 투입됐으며 때로는 전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전투단 (Kampfgruppen) 에 편입되기도 했다.
한편 티거의 설계자인 쿠르트 아르놀트는 일선 중전차대대의 장병을 접촉하며 개선점을 찾고
있었다. 당시 독일군은 군수업체와 일선부대간의 직접접촉을 허용치 않고 있었으므로 이런 접촉은 미밀리에 이루어졌다.
전선의 장병들이
가장 먼저 호소한 것은 섀시와 동력부에 대한 것이었다.
Tiger 초기형 - 1943년 5월까지 생산
동부전선의 경우 복잡하게 겹쳐진
로드휠(roadwheels)사이에 눈과 얼음이 달라붙는게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별다른 대책 없이 티거 2까지 이어지게 된다.
출력부족 문제는 원래의 650마력 엔진을 700마력엔진으로 교환함으로써 약간 완화됐다. 이로써 티거의 성능이 향상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엔진출력에 여유는 없었으므로 다른 티거를 견인할 여력은 없었다.
결국 적당한 중전차 견인 차량이 필요했지만 수도
부족할 뿐더러 대개는 판터 부대를 뒷바라지하는데도 힘이 부친 상태였다.
Tiger 중기형 - 1943년 5월부터 1944년 2월까지 생산
1943년부터 독일군은 너무 많은 병기의 종류에 따른 수리부속 보급의 난맥상을 해결하기
위해 각 장비들간의 부품 공용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43년말부터 티거 1은 티거 2용으로 설계된 신형 큐폴라를 장착하게
됐다.
이 큐폴라의 장착과 함께 포수용 조준기도 단안식 TZF9c로 변경됐으므로 후기형 차량은 만텔 좌측의 구멍이 하나만
뚫려있다.
차체 이곳저곳에 있던 S마인발사기와 포탑양옆의 NbK39 연막탄발사기가 폐지되고 대신 포탑에 회전식 발사기 1기가
장착됐다.
이 발사기에서는 인마살상용 폭탄이나 연막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장착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벤틸레이터는 차체
정중앙으로 옮겨졌다.
차체 양쪽에 있던 보쉬 헤드라이트는 하나로 줄고 장착위치도 조종석과 무선수석 사이 중앙으로
옮겨졌다.
Tiger 후기형 - 1944년 2월 이후(강철 로드휠(Steel-rimmed roadwheels)
장착)
1944년초에는 티거 2와 판터 2용으로 개발된 강철 로드휠이 장착되기 시작했다. 이때 양측 1,3,5,7번째 전륜의 맨
바깥쪽 바퀴가 폐지되므로써 현가장치에 얼음이 달라붙는 문제가 다소 완화되었다.
공장에서 파이펠 에어클리너를 장착하는 일도
1943년을 마지막으로 중지되었다.
티거 후기생산형은 생산당시부터 대부분 자기흡착식 지뢰에 대비해 전체 수직면에 찌메리트코팅을 한
상태였으며 엔진데크의 흡/배기그릴위에는 나뭇잎등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강철 메쉬를 깔았다.
한편 지휘전차의 부족 때문에 티거 1 가운데 84량이 지휘전차로 개조됐다. 이 전차는
포탄탑재량을 66발로 줄이고 기관총탄도 4,050발로 줄인 대신 통신장비를 강화했다.
티거 1 지휘전차의 정식 명칭은
Panzerbefehlswagen mit 8.8cm KwK L/56, 혹은 Panzerbefehlswagen Tiger ausf. E이다.
Tiger 지휘 전차(Panzerbefehlswagen Tiger ausf.
E)
- Tiger의 외관 -
티거는 행정단위상 독립 대대로 운용되면서 전투시에는 다른 부대에
임시로 배속되어 작전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티거 대대의 마킹은 일반 독일군의 형태보다 더 튀는 경우가 많다.
1942년 중반에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티거들은 전체가 다크 그레이(RAL 7027)로 도장됐고, 1942 ~ 43년 겨울 눈이
내릴 수 있는 지역에는 백색의 수성도료가 지급됐다.
1942년말 북아프리카에 파견된 501중전차대대소속의 차량들은 데저트
브라운(RAL 8020)으로 도색되었다.
북아프리카 전투가 튀니지로 옮겨졌을 때, 501중전차대대는 데저트 브라운(RAL
8020) 바탕에 올리브 그린(RAL 7008)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504중전차대대 역시 동일하다.
1942년 ~ 1943년의
기간중 티거에 사용된 위장패턴은 매우 다양하지만 올리브 그린(RAL 7008) 과 레드 브라운(RAL 8017)이 주로 쓰였다.
1944년 8월 제공권 상실에 따라서 새로운 방식의 도장 체계가 도입됐다.
새로운 올리브 그린 (RAL 6003)
과 레드 브라운 (RAL 8012) 이 그것으로 레드 브라운은 RAL 8017에 비해 붉은 색이 좀더 강하며 올리브 그린은 RAL 7008보다
어둡다.
이 색들은 원래 다크 옐로우 기본색에 덧칠하는 위장색이었지만 도료의 부족때문에 1944년 11월부터는 기본색으로
칠해지기도 했다.
대전말기에는 또 대전초기 기본색이었던 다크 그레이가 기본색이나 위장색으로 많은 차량에 도색되었다.
1942년 8월 - 502 중전차 대대
1943년 2월 소련 하르코프 - 제 4 무장 친위대 전차 사단 1연대 - 동계 도색
1943년 2월 - 502 중전차 대대
1943년 3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 504 중전차 대대
1943년 4월 소련 하르코프 - 제 4 무장 친위대 전차 사단 1연대
1943년 6월 - 505 重전차 대대
1943년 7월 - 그로스 도이칠란트 전차 사단
1943년 7월 -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제 1연대 - 치타델 작전시
1943년 9월 - 502 重전차 대대
1944년 6월 이탈리아 - 504 重전차 대대
1944년 7월 프랑스 노르망디 - SS 제 2사단 101 重전차 대대
1944년 7월 프랑스 노르망디 - SS 제 3사단 101 重전차 대대
1944년 9월 -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 제 9 전차 연대
1945년 4월 - Fehrmann Tiger 집단 - Fehrmann은 독일의 유명한 등반가.
국방군 총사령부에서 새로운 도색규정을 만들더라도 일선부대는 기존에 보급된 도료가 다
떨어질때까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구식차량에 새로 규정된 색이 칠해지기도 하고 신형차량이 옛날 도료로 도색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 독일 군수 업체들은 차체 기본 도장으로 삼산화이철 (Red Oxide) 을 다량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직 정식
도색이 이뤄지지 못한 차량은 이 색깔이 그대로 보이곤 한다.
티거 1에 사용된 마크는 독일군의 어떤 다른 차종보다도 다양함을 보인다.
이는 티거 1이 작전에 따라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옮겨다니며 활약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경우 티거 대대는
독특한 글자체나 그림을 사용하거나 아예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차량번호를 표시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차량은 독일군의 정통적인
세자리기호로 표시하지만 일부 부대는 중대번호, 소대번호, 혹은 차량번호만을 기입하기도 했다.
마킹에 사용된 글자체나 색도 매우
다양하다. 대대별로는 비교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부 대대는 모양이나 표기체제를 자주 변경했다. 이는 배속받는 부대가 달라지거나 대대의
지휘관이 바뀔때 특히 잦다.
- 티거 부대 편성 및 유지 관리 -
티거 대대는 이론상 대대본부중대(3량)와 4개의 중대(각 14량)로 구성됐다.
중대는 또 중대본부(2량)와 각 4대로 구성된 3개소대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편제대로라면 총수 59량을 유지해야했지만 실제
완편체제를 갖추고 있던 대대는 거의 없었다.
더우기 대전말기에는 대대의 정수가 45량으로 감축된다. 신편성에서는
대대본부중대(3량)가 소대(티거 보유수는 3량으로 동일)로 감축되고 중대수가 3개로 감소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수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으므로 티거 대대는 전쟁기간 내내 전차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티거는 복잡한 구조로 인해 상당한 사전정비가 필요했는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초기의
숙련된 승무원과 정비원들이 희생됨에 따라 정비유지 또한 큰 문제로 떠올랐다.
이로인해 신참 전차병들의 훈련기간이 점점 단축됐고
이는 또 전차병 자질의 저하라는 또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대전말기의 방어적 전투는 티거의 운용에 상당한 편의를 제공했지만 연합군의 신형전차가
등장하고 압도적인 항공열세가 지속되자 티거 부대의 어려움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1945년에 이르면 연료,탄약,부품등 모든 것이
부족해져 4월경에는 유럽전선에서 티거가 '멸종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때문에 1945년 봄 소련의 스탈린전차에 이어 미군이 뒤늦게
'티거 킬러'로 별명을 붙인 M26 퍼싱을 투입했었고 단 1회 티거와 전투를 치뤘지만 결과는 티거의
승리였다.
- 제 원 -
- 제작사 : 헨쉘, 베르크만 - 섀시번호 :
250001-251357 - 생산기간 : 1942년 7월 - 1944년 8월 - 생산대수 : 1,354량 - 승무원 :
5 - 중량 : 57톤 - 전장 : 8.45m - 전폭 : 3.7m - 전고 : 2.93m엔진 : 마이바흐
HL210P45(초), HL230P45 700마력(후) - 변속기 : 전진 8단 후진 4단 - 최고속도 : 38km/h -
주행거리 : 140km - 무전기 : FuG5 - 무장 : 88mm KwK36 L/56 7.92mm MG34 7.92mm MG34
부앙각 -9 / +10 - 조준기 TZF9b(전,중기) KgZF2 TZF9c(후기) - 탄약數 92
4,800
와아!!..2차세계대전 독일 전차중에 유명한 티거입니다..ㅎㄷㄷ..영화와 책드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요..*^-^* |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