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초 편지] 28. 녹두 – 겉모습은 콩과식물 중 가장 보잘것없으나
워낙에 가물고 더워서인지 잠깐 스쳐 지나간 태풍이 마치 한 저녁의 산들바람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많은 지역이 해갈되었다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비 맛을 본 뒤 나가 본 꽃밭은 생기가 넘쳐흘렀다. 오늘의 그림은 녹두란다. 콩 종류가 모두 이처럼 생겼지. 특히 녹두는 팥과는 구별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녹두는 이 이상 자라질 않더군. 잘못 키워서일까? 팥은 덩굴성으로 엄청나게 뻗어 가며 자라던데……. 예전에 원예부에 있을 때 팥을 길렀는데, 어찌나 잘 자라던지 이파리 하나 크기가 마치 호박잎만 하더라구. 그런데 그때의 팥은 줄기 가운데 구멍을 파고 들어앉아 사는 벌레 때문에 별 재미를 못 보았다. 녹두는 첫 잎사귀가 몇 개 나오고는 바로 꽃피고 열매 맺더니 끝이데. 이렇게 생애가 짧고 키가 작아서 전봉준을 녹두장군이라 불렀나 보다. 많이 심었으면 갈아서 녹두전이라도 부쳐 먹을 텐데 겨우 몇 포기에서 씨나 좀 받아 냈을 뿐이다.
모든 콩과식물의 꽃이 다 비슷하지만, 이 녹두란 놈의 꽃은 들여다볼수록 희한하다. 반쯤 피어 있을 땐 알기 쉬운데, 활짝 피어버리면 꽃잎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발랑 뒤집힌 채로 얽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로 상자에 빠진 기분이 들게 한다. 꽃 색깔도 우중충한 노란색에 잎사귀도 많지 않은 녹두. 게다가 키까지 작으니 콩과식물 중에는 가장 민중적이라 하겠다.
이놈이 열매가 다 익어서 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 오늘 다 익어서 바짝 마른 열매 하나를 따려고 손을 갖다 대었다가 딱!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양끝을 기점으로 갑자기 가운데가 탁 터지면서 콩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콩깍지는 마치 꽈배기처럼 비틀어져서 떨어지더라구.
고놈 참 박력 있게 터지데. 아마 백 년 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농민들과 합세하여 참다 참다못해 관아를 들이칠 때 그랬을 것이다. 탐관오리와 부농들에 의해 천하게 지지리도 못난 농투성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다가 그 원한이 익을 대로 익어 어느 날 탁! 하고 터진 게 아니겠니? 녹두가 겉모습은 콩과 중에 가장 보잘것없지만, 사람들이 가장 맛있게 즐겨 먹는 것처럼 우리 농민들도 국민의 먹거리를 만들어 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가장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왕조시대엔 농민들의 저주가 사회변동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농민의 원한을 내버려 둔다고 하여 별 탈 없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기는커녕, 옛날에는 한 지역사회의 변동을 걱정했지만 오늘날에는 지구 차원의 생태적 변동을 걱정해야만 한다. 한번 우리네 밥상을 보아라. 시금치, 감자, 배추, 호박, 밀, 쌀……. 어데 우리 토종이 남아 있나? 수량 많고, 때깔 좋고, 덩치 크고, 맛이 그저 그런 외국산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오로지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것만을 재배하다 보니 이제 우리 시골의 농가에는 오래전부터 재배해 오던 토종의 종자마저 씨가 마른 것이다. 결국 세계가 점점 단일 시장으로 되고 식량 재배 역시 지역적으로 특화되면서, 수많은 사람의 먹거리도 단일품목, 단일품종으로 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지배적인 품종에 치명적인 병이나 재해가 생긴다면 엄청남 식량 파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에는 이미 대체 품종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나라마다 ‘종자 보존 연구소’란 것이 있지만, 현재 재배하고 있지 않은 종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들은 그야말로 연구용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연구소 활동이 활발하다 한들 개별 농가의 재배를 통해 유지되는 종의 다양성에는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개별 농가를 통한 종자의 보존과 종자 연구소의 연구가 생산적으로 결합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이놈의 자본주의 시장 메카니즘이 그걸 보장해 주지 않으니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UR이 타결되어 농산물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기 전에 우리는 하루빨리 우리의 토종 종자를 보존, 발굴, 연구, 보급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UR에 편승하여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자들은 이따위 녹두 콩 씨 하나가 무슨 재앙이라 싶겠지만,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할 것이다.
오늘은 녹두꽃을 주제 삼아 한마디 지껄였더니 목이 컬컬한 게 녹두 부침에 막걸리 한잔했으면 원이 없겠다. 이따가 꿈에서나 먹어야지.
황대권. 야생초 편지. 도솔
황대권은 19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사회과학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1년 6월 8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국가기관에 의한 조작극이었다고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널리 밝혀졌다. 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어지는 《야생초 편지》는 풀 향기 가득한 식물 일기이고 생명 일기이며, 감옥에서도 자유로운 한 구도자의 사색 일기이고 수련 일기이다. 야생초에 대한 그의 관찰과 연구는 전문가 수준이며, 이 관찰은 식물적인 견해를 넘어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 인간관계에 대한 묵상으로까지 확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