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뽀오츠] 선수 죽이기 이제 그만...
2002.11.9 토요일
딴지일보 스뽀오츠부
김종부- 날 좀 내버려 둬
김종부는 고려대 1년생이었던 83년 당시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의 4강 주역으로 활약하며 이회택-차범근-최순호를 잇는 대형 스트라이커로 급부상했다. 이어 32년 만에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일조하며 프로팀의 스카우트 0순위로 지목 받았다. 능수능란한 드리블과 대포알 슈팅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
국내 프로팀들은 죄다 눈독을 들이며 추파를 던졌지만 결국 대우-현대의 2파전으로 압축됐다. 그리고 김종부는 대학스승이었던 이차만 씨가 코치로 있는 대우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다.
그러나 김종부의 대우행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현대로부터 상당한 시설 투자를 제공받은 학교와 학교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는 현대가 급브레이크를 걸었던 것이다. 결국 김종부는 12시간에 걸친 학교와 현대의 끈질긴 설득과 압력에 지쳐 현대와 계약금 1억5천만원에 가계약을 체결했다. 그 액수는 당시 공식 발표된 스카우트 금액으로는 전 종목에서 최고였다.
근데 김종부는 현대와의 입단계약 이후 12일 만에 대우행을 선언했다. 현대가 계약서에 삽입한 단서조항을 깨뜨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때 단서조항을 살펴보면...
1. 가족과 타인의 강력한 제지가 있을 경우 무효
2. 현대는 이 계약으로 인해 법적 제기를 하지 않는다
3. 계약금과 계약서는 밀봉했다가 선결문제(대우측과의 해결)가 타결된 다음 발표한다.
계약 사실이 사전 발표됐고, 주위의 강력한 저지가 있으므로 가계약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대 체육위원회는 괘씸죄에 걸린 김종부를 고대 축구부에서 제명시켰고, 대한축구협회에 선수등록취소통보서를 발송했다. 문제는 86년 월드컵 본선을 불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그런 조치가 취해 졌다는 거다. 김종부가 학교측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적인 보복조치라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러나 대표팀의 전력 손실을 우려해 김종부의 선수등록취소통보는 멕시코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소급유보됐고, 김종부는 무적선수로나마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월드컵 못나갔으면 어쩔 뻔 했나. 불가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 교체멤버로 출전한 김종부는 후반 24분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서 조광래의 센터링을 받아 그림같은 오른발 슛을 성공시켜 1-1 무승부를 만들어 냈다.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승점을 올린 값진 골이었다.
김종부는 86년 12월 9일 대우와 정식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김종부는 현대-대우와 2중계약을 맺어 고려대에서 제명, 졸업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87년 8월 후기졸업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리고 축구협회는 선수 살리기 차원에서 '7월 추가등록 기간에 대학후기졸업자는 등록할 수 없다'는 현행 선수등록규정을 개정, 김종부를 대우 소속으로 공식 인정했다.
현대는 이에 크게 반발하며 팀 해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고, 대우가 김종부를 포철로 이적시켜 2년 여에 걸친 줄다리기는 일단락됐다. 현대가 이성을 되찾고 대우가 한 발 양보한 거까지는 좋다. 근데 김종부는 잃어버린 2년을 누구한테서 보상받나.
자의반 타의반 포철에 입단한 김종부는 용의 해인 88년 승천의 꿈을 이루려 했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15게임에 출전해 무득점 어시스트 5개(공동 1위). 억대 몸값을 못한다는 주위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골에 목말라 있던 김종부는 89년 4월 29일 일화와의 경기에서 프로출전 17게임만에 짜릿한 골맛을 봤지만 그 후로는 부상으로 신음하는 때가 더 많았다.
김종부는 89년 11월 30일 대우 수비수 손형선과 맞트레이드되어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잠시 일화를 거쳤다가 94년 대우로 이적, 재기를 노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종부는 95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프로로 활약한 8시즌 동안 81경기(교체 52경기)에 출전, 6골, 8어시스트 기록.
동의대 축구팀 감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종부는 결국 돈싸움의 희생양이 됐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스카우트 파문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항상 약자인 선수라는 사실.
강혁- 얘들아, 야구 적당히 잘해라!
강혁은 신일고 재학 시절 고교야구 최고의 강타자로 명성을 떨쳤다.
얼마나 잘 했냐면... 2학년 때인 91년에는 팀을 봉황기,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끌었고, 대통령기와 청룡기에서는 6할이 넘는 고감도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격상을 휩쓸었다. 강혁은 그해 20경기에서 73타수
33안타 타율 0.452를 마크, 이영민 타격상을 움켜쥐었다.
불붙은 방망이는 식을 줄을 몰랐다. 92년에는 대붕기에서 타격왕을 거머쥐며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고, 91년 6월 3일부터 92년 9월 15일까지 31경기 연속안타 기록(아마야구 한국타이)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신일고가 고교야구 절대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다 강혁 덕분이었다.
과연 강혁은 누구의 품에 안길 것인가. 당시 강혁의 진로는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강혁은 92년 3월 장학금 3천만원 플러스
동료선수 2명과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한양대와 가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해 9월 OB(현 두산)와 계약금 6천만원에
입단 도장을 찍은 후 다시 한양대로 U턴했다. 그리고 이중계약을 했다는 이유로
앞길이 구만리 같은 강혁은 93년 4월 19일 프로야구에서 영구제명 되는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게 되었다.
사실 사태를 그 지경까지 몰고 간 주범은 대학의 끼워넣기식 스카우트와 프로의 금전공세식 스카우트였다. 무슨 말이냐면... 강혁은 당시 자신에게 딸려 대학진학을 하게 되는 동료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강혁이 OB와 입단계약을 맺자 그 학부모들로부터 이미 아들래미의 대학진학에 따른 응분의 보상을 받은 학교가 발끈 하고 나섰던 것이다.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은 강혁의 마음도 작용했을 거구.
하지만 뛰어난 야구재질이 어디 가나. 프로진출이 좌절된 강혁은 아마무대에서 펄펄 날았다. 강혁은 대학 4년간 줄곧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꼴지의 수모를 당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팀내 최고 타율인 0.429를 기록하며 나 홀로 분전했다. 그리고 98년에는 방콕아시안게임에 '드림팀 Ⅰ'의 멤버로 출전, 금메달을 일궈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강혁(0.500)은 이병규(0.560)에 이어 팀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등 맹타를 휘둘렀다.
'강혁을 구제하라, 구제하라' 여기저기서 강혁의 족쇄를 풀어주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강혁은 그동안 한국야구를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KBO 박용오 총재의 직권으로 영구제명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99년 1월 29일 두산과 역대 야수 최고액인 계약금 5억원에 입단식을 갖고, 6년 3개월만에 다시 꿈에도 그리던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강혁에게는 후반기부터 출전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붙었다. 각 구단들은 징계해제에는 동의하지만 '강혁이 출전하는 경기는 보이콧하겠다'면서 강혁의 두산 구단 복귀에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했다. 한 마디로 두산의 기득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고, 결국 요상한(?) 절충안이 나오게 됐던 것이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프로 유니폼을 입은 강혁. 근데 프로에 와서도 바람 잘 일이 없었다. 99년에는 고작 15게임에 출장해 20타수 3안타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고, 2000년에는 신인왕 후보로 올라와 있는 상태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켜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2001시즌을 앞두고는 새로 창단된 SK의 전력 강화를 위해 시즌 1,2위팀이 보호선수를 제외한 한 명을 현금트레이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SK로 이적했다. 근데 이 과정에서 두산과 SK는 '8억 이상 달라', '5억 이상은 안 된다'면서 선수를 볼모로 석달 간이나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결국 합의 금액은 6억7500만원.
SK에서는 부상의 악몽에 시달렸다. 강혁은 2001년 시범경기에서 타구 처리 중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어깨 회전근을 다쳤고, 참다 참다 8월 초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8월 8일 두산전에 대타로 출장, 지난해 6월 9일 삼성전 이후 무려 1년 2개월 여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프로 4시즌 통산 213경기에 출전, 611타수 152안타 13홈런 타율
0.249. 강혁은 프로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근데 중요한 순간마다 강혁의 발목을 잡아 끈 건 다름 아닌 구단들의 이기주의였다. 그리고 강혁이 죄가 있다면 간혹 예쁜 게 죄가 되는 것처럼 야구를 너무 잘 했다는 거. 그게 죄라면 죄다.
이경수- 몸이 근질근질해. 난 뛰고 싶단 말이야!
잘 생긴 외모, 뛰어난 실력, 깨끗한 매너. 식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스타선수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경수는 스타가 갖춰야 할 3박자를 모두 갖췄다. 무엇보다도 실력이 탁월하다. 신장 2m, 게다가 어깨는 떡 벌어지고 팔은 유별나게 길어서 타점도 엄청 높다. 아마 은퇴 후 요리사로 변신한 제희경(207cm)보다 타점이 위에 있었을 걸. 수비실력도 리베로 저리 가라다. 블로킹 능력은 어떻구. 난다 긴다 하는 센터들이 지레 꼬리를 내릴 정도니까. 서브는 기본. 특히 '배구의 꽃'인 스파이크 능력이 출중하니 더 말하면 입만 아프다.
이경수는 이미 고교 때부터 초고교급 스타로 불리며 대학팀의 집중적인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주위에서 좋은 체격조건과 묵직한 강타를 겸비한 그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한양대 유니폼을 입게 된 이경수는 성인무대에서도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성인 데뷔무대였던 98년 슈퍼리그에서 신인왕을 차지하며 화려한 스타탄생을 알렸고, 2000년 슈퍼리그에서는 쟁쟁한 실업 형님들을 제치고 당당히 공격종합 1위, 오픈공격 1위에 오르며 대학팀 중 유일하게 한양대를 4강에 올려놓았다.
이경수는 2000년 전국대학배구연맹전 2차대회 경기대와의 준결승전에서 성인 남자배구 한 경기 개인최다득점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혼자서 무려 53점(47킬, 6블로킹)을 올리는 고무팔을 휘둘렀던 것이다. 대학무대는 너무 좁았다.
이경수의 가치가 날로 급등한 것은 그가 '국제용'이라는 데 있었다. 98년 6월, 20살 때부터 태극마크를 단 이경수는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군계일학의 활약을 펼쳤다. '동양에도 저런 거포가 있는가' 이경수의 플레이에 뻑 간 서구팀 감독들은 좀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99년 월드컵에서 당시 세계 15위권에서 허우적거리던 우리는 일약 7위로 뛰어 올랐다. 이경수는 세계 8강 진입에 한 몫 단단히 거들었다. 곧이은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지역예선전에서도 쉼없이 대포알 스파이크를 뿜어댔다. 특히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일본전에서는 직선으로 내리꽂는 고공강타로 상대 진영을 마음껏 유린하며 막내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남자배구가 5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제2의 강만수,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는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며 침체된 배구판에 구세주처럼 등장했던, 강만수도 못한 세계무대 평정도 가능해 보였던 이경수는 지금 코트에 설 수조차 없다.
물론 원인 제공자는 본인이다. 이경수는 지난해 신인드래프트를 거부하고 2002년 1월 16일 자유계약으로 LG화재에 입단했던 것이다. 협회는 '협회 규정을 무시한 선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나왔고, 이경수는 지난 7월 협회를 상대로 낸 선수등록 가처분신청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선수 자격을 회복했다. 결국 이경수는 우여곡절 끝에 아시안게임에 출전, 팀에 우승을 안기며 병역면제라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이경수는 이미 펄펄 날던 예전의 이경수가 아니었다. 1년 여 동안 실전경험을 치르지 못해 경기감각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이경수는 일반부 선수로 등록됐지만 특정 구단 선수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LG화재 소속으로 대회에 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협회와 LG화재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 했다. 협회는 '이경수는 드래프트를 통해서만 실업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눈을 부라린 반면 LG화재는 이경수를 LG화재 선수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경우 팀 해체까지도 불사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 문제는 누구한테 있냐구? 협회와 LG화재 다 반반씩 책임이 있다. 협회는 그동안 갈팡질팡하기 일쑤였다. 99년에 삼성화재가 드래프트로 선수를 선발하자는 다른 구단과의 약속을 깨고 장병철, 석진욱, 최태웅, 명중재 등 유망주를 싹쓸이 스카우트했을 때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2001년 말 '곽동혁 사건' 때도 원칙없이 흔들렸다. '곽동혁 사건'이 뭐냐구? 초고교급 리베로 곽동혁(인창고)은 그동안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경기대로 진학시키려는 학교 결정에 반발, 한양대에 교장 추천 없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근데 지금까지 학교장 날인이 없을 때는 선수등록을 받지 않았던 협회가 뜬금없이 곽동혁의 선수자격을 인정해주며 한양대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그렇게 오락가락하던 협회가 이제 와서 규정을 따지고, 원칙을 지킨다고 하니 코웃음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LG화재도 우유부단한 협회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그나저나 LG화재는 고질병이 또 도졌다. 팀 해체가 무슨 심심풀이 땅콩인 줄 아는지 이번에도 해체론을 들고 나왔다. 근데 걸핏하면 팀 해체 운운해서인지 이제는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다. 약발이 따 떨어진 것이다. 차라리 해체하라는 의견이 많다. 솔직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올해 졸업생 중 괜찮은 선수 많다. 이경수와 올해 졸업생들 신생팀에 몰아주면 팀 하나 만드는 거 어렵지 않다. 쯧쯧, 누가 LG화재 좀 말려줬으면...
다행히도 강동석 대한배구협회장은 "11월 초에 LG화재 구단주를 만나 이경수 문제는 배구 발전이라는 대명제를 위해 양보하고 합의한다는데 의견일치를 이뤘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재안이 받아들여질 지는 아직 미지수. 아차 하면 또 틀어질지 모르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 과연 일개 대학선수가 자의만으로 협회규정을 어기는 배짱을 튕길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파문이 일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말이다.
이경수는 드래프트를 거부한 이후 '어린 선수가 돈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난을 숱하게 받았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은 분명 엉뚱한 곳으로 날아와 꽂힌 것이다. 집중포화를 맞아야 될 사람은 바로... 에이, 맘 약한 본 우원 말못하겠다.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거다.
무엇보다도 이경수는 벌써 규정을 어긴 것에 대한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 선수에게 뛸 수 없다는 것만큼 더 큰 형벌이 어디 있는가. 누가
뭐래도 선수가 있을 곳은 경기장이다.
골프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본 우원이 타이거 우즈 경기를 챙겨보는
이유는? 훗날 자식세대들에게 전성기 시절 타이거 우즈 플레이하는
거 봤다고 자랑하고 싶어서다. '니가 알리 권투하는 걸 봤어?' 이 한마디로 타이슨 보고 자란 본 우원의 기를 팍팍 죽였던 윗세대들에 대한
복수를 그런 식으로라도 하고 싶어서. 흐흐.
'만약 스카우트 분쟁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본 우원, 자라나는 새싹들 붙잡고 '그때 김종부가 얼마나 잘했냐면...' 침 팍팍 튀기며 말하고 있었을 거다. 너무 아쉽고 열받는다.
김종부와 강혁은 최전성기 때 외풍에 휘말려 스러졌다. 이경수도 절정의 기량을 선보여야 할 지금 코트 밖으로 내밀렸다. 그리고는 '비운의 스타'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띡하니 붙었다. 팬들도 선수들의 빛나는 플레이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본 우원 간단하게 세 가지만 외치고 물러나겠다.
선수에게 뛸 수 있는 기회를 줘라!
스타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돌리도!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한 '비운의 스타' 양산을 중단하라!
딴지 스포츠부
도우넛(bluesky@ddan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