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미국 텍사스 오스틴장로교신학교 정동현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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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과 주님의 수세주일: 밝히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들어가며
한국 개신교에서 주현절은 성탄절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강조되는 절기이지만, 그 역사는 고대 기독교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매우 깊다. ‘주현’(主顯)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며, 영어로 주현절을 가리키는 말인 ‘에피파니’(Epiphany) 역시 ‘나타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현절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경축하는 절기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주현절과 연관되며, 따라서 주현절은 성탄절과 그 의미가 어느 정도 겹친다. 그러나 주현절은 성탄절과 달리 수태고지나 예수 탄생의 순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첫 표적(“이 처음 것을…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요 2:11, 이하 새한글성경), 예수의 공생애 시작까지도 주현절 전통과 관련된다. 주현절 후 첫 주일은 주님의 수세주일인데, 이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한 사복음서의 본문을 바탕으로 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 하늘로부터 드러났고(막 1:11 등), 그것을 기점으로 예수의 사역이 세상에 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주현절과 주님의 수세주일은 하나의 흐름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지상 생애를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아기 예수의 탄생, 박사들의 경배, 예수의 수세와 공생애 시작, 그리고 예수의 첫 표적과 직접 관계된 이야기를 바울서신 안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는 주현절 및 주님의 수세주일의 신학적인 메시지를 더 폭넓게 전달하도록 돕는 본문들이 있다. 특히 주현절이 동방교회 전통에서 ‘신현’(Theophany),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는 의미로 경축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1 주현절 말씀 선포를 위한 본문으로 하나님의 의/구원/은혜의 나타남과 관련된 바울서신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디모데후서 1장 9-10절, 로마서 1장 16-17절, 3장 21-26절, 6장 1-5절을 살펴보려 한다.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신 분일세.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신 뜻과 은혜를 따른 것이지.
그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원 전에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네.
그런데 그 은혜가 이제야 환하게 드러났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통해서라네.
그분이 죽음을 없애 버리시고
생명과 썩지 않음을 밝히 드러내셨네.
복음을 통해 그렇게 하셨지.(딤후 1:9-10)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 및 디도서와 더불어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다수의 비평적 학자들은 목회서신을 바울 자신의 저작이 아니라 바울의 유산을 이어받은 누군가가 바울의 이름으로 쓴 위명서로 간주한다. 저작 논란이 없는 바울의 진정서신(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과 비교할 때 사상적·문체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2 필자 역시 기본적으로 목회서신을 바울의 전통을 이어받고 발전시킨 바울 이후 세대의 저작으로 여기지만, 이 글에서는 디모데후서 1장을 주현절과 관련된 바울의 본문으로 선정하였다.
먼저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와 비교해볼 때, 바울 진정서신과 보다 가깝게 여겨질 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3 더 나아가 정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세 개의 목회서신 모두 바울서신의 한 부분으로 보는 데 문제가 없다. 정경적 관점에서 목회서신을 광의의 바울신학에 포함시키고 목회서신과 바울 친서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유연하게 붙드는 것은, 오늘날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과 실천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데 기여한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위한 고난에 자신과 더불어 의연히 참여하도록 디모데에게 권면한다. 바울의 이 실천적 권면은 신학적 기반 위에 단단히 서 있다. 위에 인용한 본문 9절 시작 부분의 헬라어 분사는 8절의 마지막 단어인 “하나님”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새한글성경이나 다른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그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기에(이는 헬라어와 한국어의 문장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두 구절의 연결 부분에 대한 필자의 사역을, 다소 불완전하지만 아래와 같이 제시해보겠다.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8절)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분…(9절)
이같이 바울은 자신들을 이미 구원하셨고 거룩하게 부르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도록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설명하는 9절과 10절의 한가운데에 주현절을 가리키는 영어 명칭 ‘에피파니’(Epiphany)와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는 헬라어 명사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및 동족어근 동사인 ‘파네로오’(φανερόω)가 등장한다. 에피파네이아라는 표현(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다른 중요한 단어인 “구원자”라는 호칭)은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의 여러 신들과 통치자들에게 흔히 적용되었기 때문에, 바울의 이방인 독자들에게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원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다른 신들이나 통치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을 통해 지금 이 순간 “환하게 드러났다(파네로오)”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을 주현절에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시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며 사역하신 것이,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은혜가 세상에 밝히 나타난 사건임을 되새긴다.(딛 3:4 참고)
디모데후서 1장을 통해 우리는 주현절, 곧 ‘나타남의 절기’의 메시지를 폭넓게 선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영원 전부터 예비하셨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셨다. 셋째,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계속해서 세상에 나타나는 통로가 된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복음을 위한 고난도 감당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포인트는 이어서 살펴볼 다른 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울려퍼진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거든요.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아 사람에게도, 또 그리스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일이지요.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의인은 믿음에 기초해서 살 것이다.”(롬 1:16-17)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셨으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드러났다고 고백하는 디모데후서 1장은, 바울의 진정서신인 로마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남/계시됨’의 주제를 확장시킨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아포칼륍토(ἀποκαλύπτω, ‘계시하다’), 곧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난다는 의미의 동사를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메시지를 역동적으로 전한다.(로마서 3장에서는 디모데후서 1장과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동사 ‘파네로오’가 나온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에게 수여되는 특정한 속성(즉 칭의의 결과)을 가리키기보다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개입을 역동적으로 묘사한다. 물론 우리가 믿음을 통해 칭의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반세기 전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이 잘 표현한 것처럼, 그 의의 선물은 선물을 주시는 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즉 선물을 수여한 후, 선물의 수여자가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이 아니다.)4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는 이 두 가지 실재(선물과 선물을 주시는 분) 중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어그러진 모습과 관계를 올바르게 하시며 우리에게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계시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복음이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3절)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이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새번역)라고 말한 바 있다. 바울이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극히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한 한 사형수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바울의 복음은 부끄러워할 만한 어리석은 소식이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안에 드러났으므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처럼 로마서 1장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주현절의 단골 본문인 마태복음 2장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 마태복음 전체에 유대적 색채가 짙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또한 마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상실이라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유대적 응답의 한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또 다른 응답의 형태는 미쉬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5 그러나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사상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가 이방인을 하나님의 종말 백성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뒤, 사방에서 많은 이가 몰려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을 것이라 예견한다. 인자가 영광 가운데 와서 보좌에 앉는 장면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인자는 모든 민족들(πάντα τὰἔθνη, 판타 타 에트네), 즉 모든 이방인들을 양과 염소를 가르듯 나눌 것이며(바울서신에도 자주 쓰이는 ‘에트네’라는 단어는 ‘민족들’ 혹은 ‘이방인들’로 번역 가능하다.) 그 가운데 한 편의 무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온 민족들/이방인들에게로 파송하며 그들을 제자 삼고 세례를 베풀며 가르치라고 명한다. 주현절의 핵심 본문 중 하나인 마태복음 2장은, 바로 이방인을 향한 종말의 구원 계획과 복음의 선포가 이미 아기 예수의 나타나심 가운데 선취되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께 꿇어 경배한 이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한 자신의 의로우심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셨다. 이러한 묵시적 메시지를 선포하는 로마서 1장 16-17절은 주현절의 의미를 깊고 풍성하게 한다.
그리스도,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증거
그러나 이제 율법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 의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생겨나는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으니까요.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다다르지 못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판결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죄로부터 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은 죄덮는제물(화목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죄 덮음은 믿음을 통해 얻어지며 그분의 피 덕분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들을 못 본 체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꾹 참고 계시다가 지금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기초한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하고자 하신 것입니다.(롬 3:21-26)
이미 바울이 1장에서부터 전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묵시적인 나타남에 관해 로마서 3장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로마서 3장 21-26절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방식과의 차별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 의는 율법과 무관하게 “환히 나타났다.” 곧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인간적인 어떠한 수단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새롭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언을 받는다. 곧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건지셨던 의로운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반향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새롭고 결정적인 구원 행위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이며, 그것은 믿음을 창조해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17)
로마서 3장 21-26절을 『새한글성경』의 번역으로 읽어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표현의 반복이 눈에 띈다. 21절에서는 파네로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그것을 표현하지만, 25절과 26절에서는 독특하게도 엔데익시스(ἔνδειξις)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사실 이 단어는 감추어져 있던 것이 나타난다는 추상적 의미보다는 표적, 증명, 증거 등의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한다. 즉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의를 증명해 보이시는지 말하고 있다.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죄덮는제물”(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증거라고 밝힌다.
새한글성경에서 “죄덮는제물”(화목제물)이라고 괄호를 사용해 번역된 25절의 헬라어 명사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인데, 그 번역과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개역개정에서는 “화목제물”로 번역했고, 새번역에서는 “속죄제물”로 옮겼으며, 공동번역에서는 그냥 “제물”로 표현했다. 흔히 학자들은 바울이 로마서 3장 25절에서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죄를 없애는 수단 혹은 제사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의미로 썼다고 본다. 그런데 칠십인역에서 이 명사는 주로 언약궤의 덮개를 가리킨다. 최근에 미국의 한 학자는 소논문에서 로마서 3장 25절의 힐라스테리온, 곧 덮개를 속죄와 연결시켜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소”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6 그 근거가 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살펴보자.(힐라스테리온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은 한글 번역어 대신 그 단어 자체로 대체했다.)
너는 그 [힐라스테리온]을 궤 위에 얹고, 궤 안에는 내가 너에게 줄 증거판을 넣어 두어라. 내가 거기에서 너를 만나겠다. 내가 [힐라스테리온]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할 모든 말을 너에게 일러주겠다.(출 25:21-22, 새번역)
다음은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는 너의 형 아론에게 ‘죽지 않으려거든, 보통 때에는 휘장 안쪽 거룩한 곳 곧 법궤를 덮은 [힐라스테리온]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일러라. 내가 구름에 휩싸여 있다가 그 [힐라스테리온] 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레 16:2, 새번역)
모세는, 주님께 말씀드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으로 갔다. 그 때마다 모세는, 증거궤와 [힐라스테리온]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곤 하였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민 7:89, 새번역)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힐라스테리온 위에서, 곧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의 뜻을 소통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만약 이러한 그림을 로마서 3장 25절에도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힐라스테리온으로 세우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재진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예수의 피를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바울이 죄를 제거하는 특정한 종류의 구약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명사를 통해서 연결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방식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위에 언급한 소논문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이 단어를 통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궤의 덮개 위에 나타나셨던 방식과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시는 방식을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현절의 맥락에서 이 본문을 읽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같은 사상을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해본다면, 그리스도를 본 자는 그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8-9) 동방교회의 전통을 살려 말하면, 주현(Epiphany)은 곧 신현(Theophany)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되고, 새 생명으로 살기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은혜가 더 커지도록 우리가 죄 안에 줄곧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는 죽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서 살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게 된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그 죽음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받아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분의 부활하심에도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롬 6:1-5)
마지막으로 살펴볼 본문은 로마서 6장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주현절은 그다음 주인 주님의 수세주일과 연결되기에 세례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주현절과 잘 어울린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증언이다. 예수의 세례는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을 선언하고, 그분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임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예수의 세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는 다른 모든 이들과 더불어 연대하심을 의미한다. 물론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세례(다가올 종말을 준비하도록 유대 백성에게 베푼 세례)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시행한 세례(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며,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 안으로 입문함)는 동일한 종류의 세례는 아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세례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로마서와 복음서를 함께 읽는 독자들은 이 바울의 세례 해석을 예수께서 요단강에 있던 다른 이들과 더불어 참여했던 복음서의 세례 이야기와 병치하여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또 다른 의례, 즉 장례와 개념적 혼성(conceptual blending)을 통해 창의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고전 15:29 참고)7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세례를 받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장사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세례와 관련된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진술이다. 사실 예수의 죽음/장사는 세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무엇보다 예수는 물에 빠져서 죽거나 수장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당하고 묻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유대인 독자들이 보기에, 정결을 위해 씻는 의례의 일종인 세례가 가장 부정한 것인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이와 반대로 누군가의 죽음에 접촉한 자는 정결 의식을 거쳐 부정함을 씻어내야 했다.)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묘사하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곧 사망 자체를 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이 역설적인 본문에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 함께 묻힌 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몸의 부활을 고대하며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됨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세례 가운데 솟아나는 새로운 생명은 고난과 더불어 주어진다. 마가복음 10장 38절에서 예수는 다가올 자신의 고난을 세례에 빗댄 적이 있다.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부활에 대한 소망은 오늘 복음을 위해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롬 8:17-18) 가운데 넉넉히 이기게 한다. 이 글의 맨 처음에서 살펴본 디모데후서 1장의 권면은 바로 이 확신을 권면의 형태로 재진술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나타나심, 경배 받으심, 그리고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현절은 또한 예수께서 직접 세례 받으시며 사람들과 연대하신 것을 경축하는 주님의 수세주일로 넘어간다. 로마서 6장은 주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주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옛 존재의 죽음을 긴밀히 연결시키며, 나아가 주님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며 현재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지를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기독교의 핵심 의례로서의 세례는 결코 부수적인 껍데기가 아니며, 복음의 선포와 의례의 실천이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몸을 통해 경험하고 온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의례 가운데 복음 선포가 체현된다. 로마서 6장은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은혜가 구두로만 매개되는 것(복음의 선포)이 아니라 온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 참여하는 의례를 통해서 구체화됨을 상기시킨다.
이번 글에서는 주현절과 주님의 수세주일의 말씀 선포를 위하여 디모데후서 1장, 로마서 1, 3, 6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나타남,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 그리고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에 관해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고려할 수 있는 바울서신 본문을 다루도록 하겠다.
주(註)
1 James F.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3rd edition (Nashville: Abingdon Press, 2000), 61.
2 그러나 문체의 차이를 진정성 판단 여부에 사용하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문체의 차이를 목회서신의 바울 저작을 부인하는 데 사용해온 전통적인 학계의 입장을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반박한 최근 연구로는 Jermo van Nes, Pauline Language and the Pastoral Epistles A Study of Linguistic Variation in the Corpus Paulinum (Leiden: Brill, 2018)을 보라.
3 Jerome Murphy-O’Connor, “2 Timothy Contrasted with 1 Timothy and Titus,” Revue Biblique 98 (1991): 403-418. 해당 연구를 통해 머피-오코너가 디모데후서를 바울 진정서신으로 결론 내린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성 여부에 관해서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 및 디도서의 경우와 분리시켜 따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4 Ernst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in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London: SCM, 1969), 174.
5 Akiva Cohen, Matthew and the Mishnah Redefining Identity and Ethos in the Shadow of the Second Temple’s Destruction, WUNT 2/418 (Tübingen: Mohr Siebeck, 2016). 마태복음을 “유대교 내에서” 탐구하는 최근 학계의 동향은 Anders Runesson and Daniel M. Gurtner, eds., Matthew within Judaism Israel and the Nations in the First Gospel (Atlanta: SBL, 2020)에 실린 소논문들을 보라.
6 Nathan Porter, “Between the Cherubim: The ‘Mercy Seat’ as Site of Divine Revelation in Romans 3.25,”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44 (2021): 284-309.
7 개념적 혼성 이론에 대해서는 Gilles Fauconnier and Mark Turner, The Way We Think Conceptual Blending and the Mind’s Hidden Complexities (New York: Basic Books, 2002)를 참고하라. 로마서 6장의 해석에 개념적 혼성 이론을 적용한 것으로는 Frederick S. Tappenden, Resurrection in Paul Cognition, Metaphor, and Transformation (Atlanta: SBL, 2016), 138; Kai-Hsuan Chang, The Impact of Bodily Experience on Pauls Resurrection Theology, LNTS 655 (London: T&T Clark, 2022), 125를 참고하라. 필자의 입장은 Donghyun Jeong, Pauline Baptism among the Mysteries Ritual Messages and the Promise of Initiation (Berlin: De Gruyter, 2023), 222-227 및 242-244에 조금 더 자세히 논의한 바 있다.
정동현|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텍사스주의 오스틴장로교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Pauline Baptism among the Mysteries: Ritual Messages and the Promise of Initiation이 있으며, 역서로는 『바울, 이교도의 사도』, 『신약학 연구 동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