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역당 선생님>
근현대 제일의 서예가 역당(亦堂) 구회승(具會升) 선생
관은 綾城 자는 永會 호는 亦堂․碧疇․蒼江․竹齋 등이 있다. 1911년 12월 2일 충북 음성군 금왕읍 쌍봉리에서 아버지 諱英書 어머니 忠州池氏의 아들로 출생 좌정승 문절공 諱鴻의 19대손이다. 7세 때부터 한문학을 수학하고 素堂金承㤠․嵋山安寅植․退耕權相老․爲堂鄭寅普 諸名碩에게 사사하였다. 1935년 명륜학원 졸업, 1939년 3월 31일 일본대학교 사회과 졸업, 같은 해 1월 15일 일본태동서도원 공모전에 서예작품을 출품하여 한국인 최초로 입선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겨 한시와 서법과 난죽화로써 청고한 선비의 기풍을 갖추었다.
광복 이후 1947년부터 1950년까지 경동중학교,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청주고등학교 교사, 1958년부터 청주대학교 한문교수, 중등학교 한문교과서 폐지에 반대 운동을 하다가 1959년 교단에서 물러났다.
서울로 상경하여 강동구 길동에서 시문서화와 저술생활을 하실 때 찾아가 해서와 사군자 치기를 개인지도 받으면서 사제지간이 되었다.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 1년간을 학교수업처럼 속성으로 가르쳐주기를 요청하였다.
“서예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亦堂楷書帖』과 『四君子敎本』을 직접 써주시면서 비슷할 때까지 계속 임서만 하라 하셨다.
“서예는 자전거 타기와 같다.”면서
교본이 까맣게 되고 너덜너덜 할 때까지 수 천 번을 써보아도 선생님처럼 되지를 않았다. 예를 들면 사진 ‘우석부군추모비 해설문’에서 ‘之’가 9번 나온다. 복사기로 복사한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정확하게 똑같다. 이렇게 쓰는 서예가가 또 있을까? 선생님께서는 극진히 추생(鯫生)을 사랑하여 주셨다.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엄하셨다. 1년 동안 사사(師事) 받았는데 귀중한 작품을 많이도 받았다.
1. 「靜思齋」를 써주시면서 베란다에 붙여놓고 당호(堂號)로 사용하라 하셨다. 말씀대로 베란다에 액자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김용복 서각가에게 의뢰하여 향나무 대형 현판을 서각하여 현관에 걸어 놓았다. 훗날 청기와 한옥을 지으면 이 현판을 처마에 걸어 놓을 것이다.
2. 「乾坤純和」를 써주시면서 침실에 붙여놓고 금슬 좋게 살라 하셨다.
3. 묵난도(墨蘭圖)는 내실에 붙여 놓고 청상(淸賞)하라 하셨다.
4. 소품 묵난도는 책상 앞에 붙여 놓고 鑑賞하라 하셨다.
5. 「歲寒三友圖」 10폭 병풍을 선물로 주셔서 가보(家寶)로 사용하고 있다. 작고하시기 1년 전인 1983년 세한삼우도를 두 장씩 치셨다. 잘 된 작품은 사손(嗣孫)에게 주고 잘 안된 작품은 추생에게 주셨다.
6. 거실에 있는 대작 「墨竹蘭圖」
7. 서재에 있는 가리개 작품
8. 「友石府君追慕碑文」을 써 주셔서 대룡산 비림에 유명한금석문으로 빛나게 하였다.
9. 「合竹扇」작품. 1983년 호주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동안 은혜의 보답으로 선생님께 무엇을 선물로 드릴까 고민하다가 선비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합죽선이라 생각하였다. 전주 태평동에 살고 있는 무형문화재 이기동 합죽선 명장을 찾아갔더니 감동하여 명품 한 점을 주고 덤으로 소품 한 점을 더 주었다.
이렇게 역당 선생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堂號와 문집을 『靜思齋』로 쓰면서 평생토록 선생님을 흠모하는 제자가 어디 또 있을까?
이역만리 호주에서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1984년 1월 10일 선생님께서 향년 74세로 영면하셨다. 1988년에 귀국하여 둘째 아들 具滋聖(사학자)과 함께 음성군 삼성면 선영에 안장되어 있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곡을 하고 헌주를 하였다. 『亦堂遺稿』 두 권을 받으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읊조려 보았다.
넷째 아들 具滋武(서예가)는 능히 부업을 이어받아 바야흐로 예원에 이름이 적원(籍菀)되었다. 부친의 저서 『亦堂遺稿』를 친필 그대로 간하였다. 이러한 친필 해서와 행서로 된 문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근현대 제일의 서예가이지만 대한민국미술대전에는 참가하지 않으셨다. 매필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개인전을 한 번도 개최하지 않으셨다. 한국서예를 바로잡아 보겠다며 말년에야 국전에 관여하시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2021년 9월. 추석이 가까워지자 조상님과 작고하신 은사님들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역당 선생님 묘소를 참배하고 싶었다. 22년 전에 한 번 가보았으나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안내를 받고자 아들 具滋聖과 具滋武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없었다. 주소지만 알면 혼자서 운전을 하고 가겠다 싶어서 음성군 대소면 출신 남기열(강동구청 공무원)선생과 음성군 향토사학자 김영규 선생에게 주소지를 알아보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분들의 노력으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막내 아들 具滋榮을 찾게 되었다. 공무원으로 퇴직을 하고 성남시 분당에 거주한다면서 6년 전에 삼성면에서 광주시 오포면 한남공원으로 이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9월 8일 직접 나를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지루한 가을장마가 끝난 9월 8일은 청명한 가을 날씨여서 기분이 상쾌했다. 한남공원 양지바른 곳 가족 납골묘에 영면하고 계신 역당선생님께 헌주(獻酒)를 하였다. 평소 좋아하시던 고급 정종보다 더 고급인 죠니워커 불루에다 안주는 사사(師事)할 때 겸상하여 먹었던 반찬 그대로 불고기와 연두부와 도토리묵과 오이깍두기 등을 올려 드렸다. 그리고 『靜思齋 第3輯』과 『亦堂遺稿』 친필 원고와 초고(草稿)를 보여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