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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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김창룡.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을 친자식처럼 생각했다. |
“나라가 망했군! 나라가 망했어! 그런 애국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나?”
이 대통령은 몸을 의자 뒤로 젖힌 채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내가 직접 봐야겠어! 창룡이가 죽다니….”
이승만 대통령은 잠옷 위에 외투를 걸치고 김창룡의 시신이 안치된 통의동 특무부대로 갔다. 이 대통령은 “그래, 내가 수차 몸조심하라 했지 않은가…”라며 애통해했다.
증언자 이대인![]() 이대인씨는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내기까지는 음지에서 일해 온 정보기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면서 “갈수록 흐려지는 안보의식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기무사의 역사에 대해 증언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훌륭했던 역대 사령관으로 김창룡(제5대), 강창성(제17대), 임재문(제31대)을 꼽았다. |
《동아일보》, ‘우리의 특무부대장’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도 김창룡 부대장을 추도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2월 1일 자 사설 ‘김창룡 중장의 순직을 애도함’에서 “김창룡 장군이 우리의 해방 후, 더군다나 전쟁 후에 세운 공적은 여기에 엄숙히 말할 필요조차 없이 짐작하고도 남는다”며 “그의 민첩한 지혜와 전력성은 대외적으로 적에게 두려움을 주어 항시 전전긍긍케 한 바 있었으니 오늘의 방첩전의 철칭을 자랑하게 된 것도 그의 진두지휘 위력의 소치일 것이다”라고 했다.
사설은 “그 저격자가 공산적의 오열(五列)분자이었는지 혹은 우리의 동포 중에서 이단자의 소행이었는지 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세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김창룡 장군은 공산적이 무서워하는 우리의 특무부대장이요, 국내적으로는 정적의 반역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창룡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60년이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악명(惡名)’은 여전하다. 이승만 정권의 사병(私兵), 고문과 조작의 명수, 친일파…. 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 야당지(野黨紙)마저 추도사설을 낸 것은 의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김창룡’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김창룡은 제5대 특무부대장(현 국군기무사령관)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특무부대장=김창룡’으로 기억한다. 그건 무리가 아니다. 전임자들은 대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특무부대장을 겸임했고 재임 기간도 짧았다. 그 기간 중에 군경합동수사본부장 등 다른 직책을 가지고 사실상 특무부대장 역할을 수행한 것은 김창룡뿐이다. 또 특무부대장으로 취임한 후 부대를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김창룡이다. 기무사령부 초기, 즉 특무부대의 역사는 김창룡의 삶이기도 하다.
나가노정보학교 나와
김창룡은 1916년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에서 태어났다. 지금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가 있는 바로 그곳이다. 영흥공립농잠(農蠶)학교를 졸업한 그는 영흥 가다쿠다제사회사를 거쳐 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직원으로 신경(新京·지금의 창춘(長春))에서 근무했다.
1940년 김창룡이 관동군 헌병이 된 것은 자의(自意)가 아니었다고 한다. 성실하며 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한 그를 눈여겨본 만철 상사(上司)가 그를 추천했다. 그는 정보요원 양성소인 나가노(長野)정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유능한 요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거듭났다. 이후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잡는 사상(思想) 헌병이 됐다.
김창룡은 위장·침투와 역공작(逆工作)에 능했다. 거물급 공산주의자 왕근례가 운영하는 잡화점에 취직, 그 밑에서 2년여를 근무하다가 그 일당을 일망타진했다. 이후 철도노동자들 사이에 쿠리(막노동꾼)감독으로 들어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50여 건의 공산당 조직을 적발해 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1월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창룡은 그해 10월 황해도 평산 출신 도상원(都相媛)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 도정호(1903~1930)는 김준연이 이끌던 고려공산청년회(ML당) 조직부장, 조선노동총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獄死)했다. 도정호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이 공산당 때려잡던 김창룡을 그냥 놔 둘 리 없었다. 그는 한 번은 소련 비밀경찰에, 한 번은 요덕 보안서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했다. 1946년 초 김창룡은 삼팔선을 넘었다.
노숙자에서 장교로
서울역 앞에서 거적을 덮어쓰고 노숙하던 김창룡은 1946년 5월, 만주에서 알고 지내던 박기병(예비역 육군소장) 소위와 조우했다. 계획을 묻는 박기병에게 김창룡은 말했다. “나는 공산당에 쫓겨 사선(死線)을 넘어왔소. 공산당을 때려잡으려면 무슨 일을 하면 좋겠소?”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김창룡은 5연대를 거쳐 3연대 정보하사관으로 근무하다 1947년 1월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입교했다. 입교 당시 면접을 본 심사장교 백남권 중위는 일본 헌병 출신인 김창룡을 좋게 보지 않았다. 떨어뜨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김창룡은 고함을 질렀다.
“해방이 되어 조국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일본군에서 배운 군사지식을 쏟아내 헌신하겠습니다!”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제1연대로 배속됐다. 1연대장은 이성가(예비역 육군소장) 소령이었다. 중국군 출신인 이성가 소령은 이념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김창룡 소위를 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해 부대 내 좌익세력을 색출해 내도록 지시했다. 김창룡은 정보과 사무실 내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에 매달렸다.
김창룡은 1947년 9월 경비대 군감(軍監·헌병)사령관 이병주 소령이 남로당 프락치라는 사실을 밝혀 내고 체포했다. 이병주 소령과 그 일당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3월 체포된 남로당 위원장 김삼룡도 이병주가 남로당원임을 확인해 주었다.
군내 좌익의 반격이 들어왔다. 송호성 경비대사령관에게 김창룡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친일파라는 투서가 들어갔다. 광복군 출신인 송 사령관은 김완룡(예비역 육군소장) 법무처장을 보내 김창룡을 조사했다. 김완룡은 송 사령관에게 “김창룡이 일본군에 충성을 바친 것은 사실이나 조선인을 괴롭힌 사례가 없고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확고한 만큼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올렸다.
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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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이 진압된 후 진압군이 포로들을 감시하고 있다. 여순반란을 계기로 국군은 숙군을 단행했다. |
1948년 10월 19일,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할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군내 남로당원인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가 주도했다.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등이 가담했다. 3000여 명의 반란군 병력은 지역 좌익과 합세해 여수·순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9일간의 반란 기간 중에 피아 5000여 명이 죽었다.
여순반란을 겪은 군은 내부 좌익을 색출, 처단하기 시작했다. 숙군(肅軍)의 주역은 육군본부 정보국 3과장 김안일 소령과 김창룡 대위였다. 3과는 후일 특무부대로 발전한다.
김창룡은 몸으로 뛰는 지휘관이었다. 남로당 군사부 연락책 김영식을 체포할 때도 부하들과 함께 삼청동에서 엿장수, 담배장수로 위장해 잠복근무했다. 밤에 김영식의 집을 수색할 때도 김창룡이 있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는 게 없자 김창룡은 벽을 손으로 두들기다 속이 빈 소리가 나는 곳을 발견했다. 이중벽 안에는 비밀문서가 가득했다. 사진틀 뒤에서도 암호로 된 문서가 나왔다.
김창룡은 20여 시간을 매달려 암호를 해독했다. 그가 해독해 낸 문서 중에는 군내 남로당 요원들의 이름, 계급, 군번을 정리해 놓은 것도 있었다.
증거가 있는데도 김영식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김창룡은 김영식의 아내가 아들을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창룡은 김영식을 그의 처갓집인 종로 뒷골목의 중국음식점 한풍우로 데려갔다. 오랫동안 못 본 아내, 갓 태어난 아들을 본 김영식은 눈물을 쏟았다. 며칠 후 김영식은 오일균, 김종석 등 군내 좌익세력의 행적과 은신처 등에 대해 진술했다.
기무사 약사 ● 1947년 6월 1일 조선국방경비대 정보처 발족. ● 1948년 5월 27일 조선국방경비대 정보처 특별조사과 설치. ☞ 안구 조절력을 증가시키는 안경 ● 1948년 11월 1일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과(3과)가 방첩대(SIS)로 개칭. ● 1949년 3월 1일 해군본부 정보참모부 예하에 해군방첩대 창설. ☞ 국내최초 무도수안경 출시이벤트 ● 1949년 10월 20일 육군방첩대(SIS)가 특무대(CIC)로 개칭. ● 1950년 10월 21일 육군본부 직할 육군특무부대 창설. ☞ 노안걱정 이제 그만하자 ● 1951년 5월 15일 김창룡 대령, 제5대 특무부대장 취임. ● 1952년 12월 1일 공군본부 예하 공군방첩대 창설. ☞ 도수없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 1960년 7월 20일 육군특무부대가 육군방첩부대로 개칭. ● 1968년 9월 23일 육군방첩부대, 육군보안사령부로 개칭. ☞ 난 돋보기 안쓴다~!!! ● 1977년 10월 7일 육·해·공군 보안부대 통합, 국군보안사령부 창설. ● 1991년 1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 ☞ 안구 조절력을 증가시키는 안경 |
박정희, 체포 당시 줄톱으로 권총 총번 지우고 있어
이때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박정희 소령도 있었다. 김창룡은 박정희 체포조도 지휘했다. 수사관들이 박정희의 신당동 지하방을 급습했을 때, 박정희는 줄톱으로 45구경 권총에 새겨져 있는 총번을 줄톱으로 지우고 있었다. 나중에 박정희는 암살용으로 사용할 권총을 제공하라는 윗선의 요구 때문에 그랬다고 진술했다.
김창룡은 설득했다. “박 소령은 직접 사람을 죽이거나 부대 물품을 빼돌린 게 아니잖소? 전향하세요. 군 내부 조직에 대해 말해 주시오. 함께 나라를 살립시다.”
김창룡을 아는 이들은 그가 먼저 피의자에게 진술 방향까지 제시하면서 전향을 설득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아는 군내 남로당 조직을 불었다. 그리고 김안일 과장을 통해 백선엽 정보국장을 만나 구명을 호소했다. “국장님께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백선엽은 김안일, 김창룡 등 실무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백선엽은 조사관들의 의견이 모두 같은지 물어본 후 박정희의 구명에 동의한다는 서면을 작성, 서명하도록 했다. 김창룡 등 조사관들은 모두 박정희 구제에 동의했다.
전창희 수사관 등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이들은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리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두 사람이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강직하고 개성이 강하고 빈말을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남들은 그들을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숫기가 없는 것도 비슷했다.
1949년 2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박정희는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불명예 제대했다. 백선엽 등은 그에게 문관으로 정보국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한편 특별조사과는 숙군 중이던 1948년 11월 1일 육군 정보국 소속 방첩대(SIS·Special Intelligence Service・특별조사과)로 개칭했다.
이승만, “창룡이”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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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의 부인 도상원 여사(오른쪽 세번째)와 이대인 전 기무사 준위(왼쪽 세번째). |
김창룡은 1949년 2월 남로당 조직부장 이중업도 검거했다. 이중업을 잡기 위해 남로당 해군책 김창규의 집을 감시할 때는 김창룡의 장모 이고명과 부인 도상원이 어린애를 업고 골목길에서 감시를 하기도 했다. 이중업은 지하에 잠복해 있는 남로당원들을 동원해 도시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매달 10kg의 아편을 북에서 들여와 유통시키려 했다. 이중업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1949년 7월, 일직사관과 함께 형무소를 탈출, 월북(越北)했다.
그해 11월 SIS는 CIC(Counterintelligen- ce Corps·특무대)로 개칭됐다. 김창룡 중령은 잠시 공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전출됐다. 이 무렵 김창룡은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 대통령이 “정보에 빠른 장교에 누가 있느냐”고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묻자 신 장관이 김창룡을 거명했다. 이 대통령은 “내게는 귀관처럼 젊고 멸공으로 남북통일을 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면서 신 장관에게 “김창룡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사람이니 도와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창룡은 2주에 한 번씩 경무대로 들어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가끔 부관 엄재림을 대동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김창룡이 직접 차를 운전했다. 대통령은 다른 군 지휘관들은 “백 장군” “정 총장” 하는 식으로 불렀지만 김창룡은 “창룡이”라며 이름을 불렀다.
대통령과 김창룡은 부자(父子)관계 같았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 직전, 이 대통령이 쓰러졌다. 휴전협상을 둘러싼 미국과의 신경전, 반공포로 석방 등이 노(老)대통령의 심신을 망가뜨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헛소리를 하는 와중에도 김창룡을 찾았다. 경무대로 달려간 김창룡은 대통령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했다. 대통령이 쓰러졌다는 게 알려지면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과 국민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게 뻔했다.
김창룡은 주한미군 CIC 대장과 협의한 후 대통령을 경기도 부천 소사의 안토니 미 야전병원으로 옮겼다. 간(肝) 기능이 많이 손상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김창룡은 미 CIC 대장에게 “미 본국의 육군병원에서 권위 있는 군의관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군은 요청을 받아들여 대통령의 간 수술이 이뤄졌다.
‘한국의 마타하리’ 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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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은 남로당 간부 이강국의 애인으로 미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간첩행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
1949년 10월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대(CIC) 내에 군경(軍警)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김창룡은 본부장으로 임명됐다. 군경합동수사본부는 1950년 1월 조선노동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총책 성시백과 관련자 186명을 체포했다. 김일성의 직접 명령을 받고 남파된 성시백은 1948년 4월 백범 김구 선생을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석하도록 설득한 장본인이다.
3월에는 남로당의 거물 김삼룡과 이주하를 체포했다. 김창룡은 이주하를 직접 신문했다. 이주하는 “나와 함께 북으로 가자”면서 오히려 김창룡을 설득하려 들었다. 김창룡은 “당신은 죽은 목숨이다”라고 일갈했다.
“당신들이 남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죽게 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북한에 있었어도 죽은 목숨이다. 당신들 남로당에게는 김일성이 갖고 있는 군대가 없기 때문에 죽은 목숨이다.”
이주하는 “김일성은 신문 등 언론이 없는 장군”이라면서 “내가 그보다 더 인민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겼다. 6·25 후 남로당이 숙청된 것을 보면 김창룡이 이주하보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성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의 마타하리’라는 여간첩 김수임도 김창룡이 체포했다. 김창룡은 남로당 조직책 이중업이 탈출한 후 그의 월북 경로를 추적하다 미 24사단 헌병사령관 존 E. 베어드 대령의 동거녀 김수임이 연루된 사실을 발견했다. 김수임은 이화여대 출신으로 남로당 간부 이강국(북한 외무성 부상 역임)과 내연관계였다.
주한 미 헌병사령관의 집은 CIC 수사관들이 함부로 수색할 수 없었다. 김창룡은 겨울날 동상에 걸려 가면서 부하들과 함께 베어드의 집을 감시했다. 1950년 3월 5일 CIC는 감청을 통해 김수임이 친구인 시인 모윤숙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CIC 수사관들은 회현동 모윤숙의 집 근처에서 김수임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체포해 육군형무소로 연행했다. 그녀의 집에선 이강국이 보낸 권총 3자루, 실탄 180발, 북한으로 보내려던 기밀서류 등이 발견됐다. 김수임은 그해 6월 15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25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특무부대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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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의 김창룡 특무부대장. 제5대 특무부대장으로 취임해 부대의 기틀을 잡았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김창룡은 6월 28일 오후 늦게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고향인 구미에 내려가 있다가 남침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한 박정희 문관이 함께했다. 대전 충남도청에서 이 대통령을 만난 김창룡은 군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갔다. 김창룡은 부산에서 봉기를 획책하던 서광호, 인민공화당 경남위원장 김동산, 남로당 경남도책 안소주 등을 검거해 후방을 안정시켰다. 9·28 서울수복 후인 1950년 10월 4일에는 경인지역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부역자(附逆者) 체포에 나섰다. 합동수사본부는 간첩행위자 213명, 노동당 입당 이적행위자 1725명, 인민위원회 참여 등 부역자 1만8329명, 기타 사범 2653명 등 1만4844명을 검거했다.
그해 10월 21일, 그때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산하에 있던 CIC가 육군본부 직할 특무부대로 독립했다. 부대는 지금의 서울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에 ‘대륙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었다.
부대는 독립했지만, 부대장은 육본 정보국장이 겸임했다. 김형일 대령(초대), 백인엽 준장(2대), 이한림 준장(3대), 이후락 대령(대리근무), 김종평(후에 김종면으로 개명) 준장(4대) 등이 정보국장으로 특무부대장을 겸했던 이들이다. 이들은 짧으면 13일, 길어야 석 달 정도 근무했으며 특무부대장보다는 정보국장 임무에 주력했다. 1951년 5월 15일 제5대 특무부대장으로 김창룡 대령이 임명됐다. 김창룡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무부대는 1961년 5·16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창설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보기관이었다.
김창룡은 호랑이 머리를 새긴 부대기(旗)를 만들고, 부대가를 직접 작사하는 등 부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만든 부대가(지금의 ‘기무부대가’와는 다름)를 보면,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방첩업무에 대한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1절) 있어서 될 말이냐 붉은 매국노
실뱀이 온 바다를 흐려 놓는다
그물이 한 코라도 상하고 보면
그물이 그물 구실 하지 못하네
살피자 방방곡곡 번개 같은 호랑이
겨레의 눈과 귀다 특무부대〉
김창룡, 노신영이 고시 합격하자 거수경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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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무부대 홍보영화 촬영을 하는 김창룡 대장과 홍성기 감독(오른쪽). 영화감상은 김창룡의 유일한 취미였다. |
이 노랫말처럼 김창룡은 좌익세력이나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호랑이 같았다. 1953년 휴전을 앞두고는 북한 사리원 등에 남파간첩 교육시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미국 공군을 동원해 폭격하도록 했다. 1954년 2월 12일에는 북한의 유격총사령관 남도부를 대구에서 체포했다. 1952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저격을 배후 조종한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의원 김시현을 검거한 것도 김창룡의 특무대였다.
김창룡은 부하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했다. 외출했다가 일반식당을 이용할 때는 운전사와 겸상을 했다. 그럴 때는 계급장을 손수건이나 종이로 가렸다. 운전사와 둘이 나갔을 때는 운전사에게 먼저 식사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차를 지켰다. 부관, 운전사, 당번병, 가정부의 생일은 물론 그들 부모의 제삿날까지 기억했다. 밤늦게 위병(衛兵) 근무를 하는 병사들을 위해 군만두를 사서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김창룡은 외박을 나가는 병사의 군복이 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부대로 들어와서 군수과장을 불러 야단쳤다. “당신은 내 부하를 적(敵)으로 알고 있다. 내 군복은 해져도 괜찮다. 내 부하들은 안 된다!”
사병식당을 먼저 둘러보고 간부식당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우리 부대는 계급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직한 병사에게 소홀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했다. 특무대에 근무하던 노신영(전 국무총리)이 고등고시에 합격하자 김창룡은 “앞으로 장관이 되실 분”이라며 거수경례를 붙였다고 한다.
김창룡을 오랫동안 모셨던 김순기, 임광원, 박대복 상사 등에 의하면 김창룡에게는 사복(私服)이 없었다고 한다. 정복(正服) 1벌, 작업복(전투복) 2벌, 계급장 없는 군용 외투 1벌, 단화 1켤레, 군화 두 켤레가 전부였다.
부하들도 김창룡을 경애했다. 부사관 출신인 김순기씨는 군무원으로 보안사에서 나온 후에는 유가족이 외국으로 이민 간 후 아무도 돌보지 않던 김창룡 무덤의 ‘묘지기’를 자처했다.
통금시간까지 노는 고위 장성 차량 펑크 내
김창룡의 부인 도상원씨에 의하면, 9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남편이 집에서 잠을 잔 것은 채 100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감상이 김창룡의 유일한 취미였다. 인상과는 달리 겁이 많아서 주사 맞는 것을 싫어했다.
당시 군 지휘관들은 대개 30대 중·후반이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출세한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부정부패, 축첩(蓄妾) 등 폐습에 물들기 시작했다. 김창룡은 부정부패를 공산당만큼 미워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 정권처럼 부정부패는 군과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믿었다.
김창룡은 특무부대원들을 동원해 군 고위 장성들을 감시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 올 때까지 고위 장성들이 요정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빠져 있으면 특무부대원들이 차량의 타이어를 펑크내 놓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