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날에 관한 시모음 1)
어느 겨울날의 일몰 /진창진
노을이 붉게 지던 어느 겨울날 오후,
물결도 숨을 죽인 바다 위로 꽃상여 하나 서녘으로 떠가고 있었습니다.
벌건 해그림자가 물결 위에 잔잔히 부서지고,
저녁 해가 수평선에 닿는 순간 하늘도 바다도 숨을 죽이고.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흰 명주 치마저고리에 하얀 코 고무신 단정하게 차려입고,
이 세상 마지막 작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 감은 채 마지막 만찬을 떨걱떨걱 넘기시던 어머니.
막내딸이 왔는데도 겨우 고개만 끄덕이시던,
저녁 해는 천천히 물 속으로 가라앉고,
천근같던, 붉은 노을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 놓은 채,
그 천근같던 숨·소·리……
그해 겨울날 /박영춘
매운 채찍질 문풍지 모질게 때려 울려
바늘구멍으로 매섭게 달려 들어온 황소바람
얼어붙은 자리끼 머리맡에 고꾸라졌다
숨소리 끄트머리에 고드름 맺혔다
화약내 희뿌연 폐허의 산하
내려다보다 못해 하늘도 얼어붙었다
서릿발 밟고 서있는 어린 발가락
배고파 똑바로 설 수 없었다
콩 볶듯 쏘아대는 총알소리
산 무너뜨리듯 터지는 폭탄소리
빛이란 빛은 죄다 어둠에 갇히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생각마저도 아픈 그해 겨울날
문고리가 손바닥 살점을 떼먹었다
허공을 칼질하는 겨울바람
보리밭을 하얗게 덮어주었다
그해 하늘은 무정무심하지는 않았다
배고픈 눈동자 앞에 쑥 쑥쑥 자랐다
보릿겨 개떡, 쑥 범벅, 시래기 죽
어린 뱃구레 채워주었다
그해 겨울날 햇살의 생각 아프다
그해 겨울날 바람의 추억 배고프다
겨울날 /정민기
찬 바람을 둘러쓰고
낙엽은 제 갈 길을 서두른다
하늘을 걷는 새가 토해내는 울음,
언 계절을 쩡쩡 울린다
갈대꽃 흩날리고 포근하게 날아든다
철새가 징검다리를 놓자
햇살이 낮잠 깨어 건너뛴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갈대밭 가에
서 있는 네 머리에서 보인다
겨울날의 동화 /류시화
1969년 겨울, 일월 십일 아침,
여덟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내가 아직 이불 속에 있는데 엄마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넌 아직도 잠만 자고 있니!
나는 눈을 부비며 마당으로 나왔다 난 이제 열살이었다
버릇 없는 새들이 담장 위에서 내가 늦잠을 잔 걸 갖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외박 전문가인 지빠귀새는
내 눈길을 피하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은 이미 그쳤지만 신발과 지붕들이 눈에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 집 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붉은 열매들이 있었다
가시나무에 매달린 붉은 열매들 그때 내 발자국소리를 듣고
가시나무에 앉은 텃새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난 갑자기 어떤 걸 알아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왔다
내 삶을 지배하게 될 어떤 것이,
작은 붉은 열매와도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내 생각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겨울의 마른 열매들처럼
바람 하나에도 부스럭거려야 했다
언덕 위에서는 멀리 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는 얼고 그 위에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붉은 잎들 좀 봐,
바람에 날려가는! 저수지 위에 흩날리는 붉은 잎들!
흰 눈과 함께 붉은 잎들이 어디론가 날려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해 겨울의 마지막 남은 나뭇잎들이었다
겨울날의 단상 (하이얀 그리움) /은파 오애숙
겨울 팔도 눈덮인 산야
설빛 그리움의 넘노는 물결
이역만리 타향에 살고 있어
언제 한 번쯤 가 보련지
늘 가슴속 그리움
한이 되어 있는 심연에
오롯이 피어나는 복수초
이름하여 얼음새 꽃
1월 LA 잔디에 민들레
샛노랗게 피어 날 때면
하얀 눈 속에서 미소짓는
복수초 가슴에 물결치네
숨 가삐 달려 온 세월 뒤
고향산천 향한 짙은 향수
회도라 하이얀 밤 새우며
기억의 뿌릴 맴도는 건
가슴에서 어느 것 하나
흘러 보낼 수 없는 추억들
민들레 홀씨로 젊은 나날이
펑펑 불꽃으로 터지기에
겨울날 /이시영
영하 13도의 연희동 겨울날 아침,
백년추어탕 수족관 수염 난 미꾸라지들이 꼬리를 말아 세운 채 꽝꽝 얼어붙어 있다.
자세히 보니 없는 팔을 필사적으로 내밀어 서로의 목을 따스히 끌어안고 있다.
겨울날 /장석남
1
살구나무에 잎아 다 졌으니 그 잎에 소리 내어 울던 빗발들 어쩌나 그래서 눈이 되어 오나?
진눈깨비 되어 오나?
살구나무 빈 가지의 촘촘한 고독 사이를 눈은 빠져내려서
지난 한해의 빗소리 같은 것도
덮고 있는데
잊고 지낸 젯날 같이
설운
하루 한낮
2
풍경 소리가 나와 친해지더니 이제는
새벽녘만 되면 아예 장단을 친다.
그것은 제 혼자 치는 게 아니고
제 동무들까지 불러다가
주고받는 장단을 친다
새벽별에선지 城에서인지
불러다가 장단을 친다
당신 영혼의 샅의 따스함을 내 어디에 꼭꼭 지니려 함을
알고나 있었는지
3
애인의 눈동자 깊이
구덩이를 파고 자기 심장의 종소리들을 묻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겨울날 /홍수희
나는 당신을 잊겠습니다
그 날의 피 같던 고요, 그 날의 꿈 같던 평화
그것을 모두 벗어버리고
나는 당신을 깨끗이 잊겠습니다
선량을 위하여 바람직을 위하여
여기 물 한 잔을 비웠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상실을 위하여 소유를 앓는
진주를 위하여 고뇌를 앓는
그러한 슬픔은 아니었겠습니까
저기 뜨거운 난로에
물 젖은 수건을 널어놓겠습니다
저기 벌겋게 끓는 화로에
타지 않는 결단을 끄집어 넣겠습니다
당신을 잃으면
빛나는 정의가 활개를 치고
당신을 보내면
그렇지요, 내게는 암담한 순리(順理)가 활개를 치고
그리하여 저기,
이제 막 산고(産苦)의 아픔을 끝낸 겨울 나무 하나
나즉한 휘파람 소리 어렴풋이 들려 옵니다
사랑을 위하여,
나는 당신을 잊겠습니다
설령 영원히 못 잊는다 하여도 하여도
당신을 까마득히 잊겠습니다
순수했던 그 겨울날 /정란희
유독 눈보라에 몸부림쳤던 그 겨울날
떠나간 그 사람의 향기 속에서
소녀의 몸은 모닥불 속의 고구마처럼 익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게 부서지는 눈 밟는 소리에
이날도 꿈속에서 콩콩 울리는 첫사랑을 보았다
밝은 햇빛 속에서 바라보던 거대한 몸집이 다가와
가녀린 그녀를 으스러지게 품속에 껴안아 주었다
동틀 무렵, 사라져가는 그림자 붙잡아봤지만
매정하게 뿌려 치고 담장 덩굴 위로 홀연히 사라진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희망 속에서 오늘도 길을 나선다.
길목을 지나갈 때면, 소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그 사람을 기다렸다
오늘도 만날까 한참을 그렇게 기다렸다. 뒷골목 길에서
오늘은 일부러 그 사람이 걷던 길을 걸어본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치길 바라면서
팔딱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슴속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골목에서 그 사람의 냄새를 음미하며 스쳐 간다
혼자만의 사랑인 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인연을 만나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군대 가기 전, 그녀 가게에 잠깐 들렀다가 갔다
잘 사는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인다고 말을 전해 들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사람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황혼 속에서 할머니가 된 소녀는 오늘도
그렇게 모래사장에서 지난 사랑을 손가락으로 쓰고 있다
첫사랑의 모습을 그리며 오늘도 한밤중의 음악 속에서 시를 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그 사람을 그리면서...
겨울날 편지 /민경대
1
스키장이 하얀 별빛에 더욱 빛날 때
도척면 궁평리 부근 스키장은 더욱 밝고 창백하다
궁평리 늘낮선 얼굴 이름은 모르지만
이웃집 사춘이나 고모같은 사람들
선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이제 콤퓨터 소리가 멎은 태강에서는
더욱더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최고의 기술진들이 만들어 낸다
2
봉재공장처럼 방직공장처럼 옷이나 신발을 만들어 내는
굴뚝산업은 아니지만 4차산업의 깃발이 잠시 머무는 곳에서
마이닝 핀테크의 말은 잠시 사라지지만
이제 차분하게 벤처 사업 허가를 신청하기 위해
눈빛은 더욱더 밝은 스키장 하얀 눈발처럼 고통속에
어제도 하루는 지나고 조용한 사람들이 염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마치 친한 이웃처럼 이곳 궁평리에서는 인간 냄새가 풍기는곳
나는 어제 저녁 한끼를 맛있게 국물까지 다 마시고
비록 카레 오무라이스가 독이 나 물 부린 카레는 못먹었지만
이들과 의 대화에서 인간미를 맛본다
비트코인 이더러움 가격이 다 떨어져 바닥까지 난 상태에서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세상의 기후변화같은 곳
기후변화 강좌가 열리는 시대에 누구를 탓하냐
자신들의 욕심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자하다
잠시 어려움속에 빙글빙글도는 회전목마가 잠시 멈추어 서는 곳에서
우리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자
3
높은 차원의 영시나 어려운 책을 볼수는 없어도
이제 우리는 톨스토이의 부활 한권정도 석영중 교수가 좋아하는 안나카네라 소설이나
김형석 교수의 아직까지 살아 계신 철학책 한권정도는 읽어보자
나는 오늘도 부활 책을 이제 10번은 영어 원서로 읽어 보았다
인생 65살이상을 살이야 이제 그 책의 진면목을 보고 있다
진정한 사회의 부활이 무엇 인지를 말하는 톨스토이의 인간성이 잘 보인다
아침에 겨울편지를 문자로 보낸면서 하루를 맞이 한다.
인생은 참으로 많이 살아보아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출판만 된다면 돈은 5억정도는 빌려준다.
이제 TGM 출판사가 책을 만늗다.
출판 진흥재단 종로 조계종 앞에를 찾아간다.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인가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 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 분만 오시잖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 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 없는 아침이
달겨 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 마디 못하고 갈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는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사람이 사는 것이 남의 피부를 안고 지내는 것이니
찬바람이 항상 인간과 더불어 있어서
사람이 과일 하나만큼 익기도 어려워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낙엽들이 더 많아진다
고난의 잔에 얼음을 녹이며 찾는 것은
그 슬픔이 아니요 겨울 하늘에 푸른빛을 띤 봄이다
그 봄을 바라고 겨울 안에서뱅뱅 돌며
자리를 끌고 한 치 한 치 태양의 둘레를
지구와 같이 굴러가면서
눈과 얼음에 덮인 대지의 하루를 넘어서는 해질 무렵
천장에서 왕거미가 내리고
구석에서 귀또리가 어정어정 기어 나온다
어느 날 목 없는 아침이 또 왈칵 달려들면
이런 친구들에게 눈짓 한 번 못하고
친구들의 손 한 번 바로 잡지도 못하고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