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카로링가 왕조의 문예부흥(756~882)과 브리튼의 부흥(871~899)
이 시대의 사건들에 정치적 연속성을 주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다. 제국의 통치는 중세의 봉건제 돈涇이어졌고, 교회는 샤를마뉴 이후내적인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샤를마뉴 치하의 서방교회는 교회의 관리와 치리에 관한 문제, 수도원 운동의 개혁과 부흥, 각종 교회 건물과 관습, 예배 의식과 예식등의 측면, 기독교의 교리의 측면, 학교 교육의 실시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책임감을 가지고 이교도들을 무력으로 선교하였다.
샤를마뉴의 종말은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고 제국의 약화는 교황의 강화를 의미하였다. 레오 3세 이후 니콜라스까지 7명의 교황들이 교황의 영적권위의 우세를 위해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하였다. 니콜라스는 교회의 약점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의 행동은 명백하고 단순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서유럽의 최고의 위치에 놓이게 하였으며, 교황의 위치는 만민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중앙유럽의 슬라브 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을 찌릇듯하여 교황의 권위는 신앙과 신조에까지 미쳤다. 그의 재위기간 그래서 많은 거짓 칙령들이 나돌았다.
9세기 서구사회가 학문과 독창적 사상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던 楨심적인 인물들은 아달하르드와 왈라가 이끌었던 코르비 사원의 학자들이었다.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의 문제는 수도승 곳곳촉크에 의해 제기되었다. 교회는 그으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를 감옥에 투옥하였다. 예정론 보다 더 오래 끌었고 따라서 당시 학자들에게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성찬식의 성격에 관련한 교리 논쟁이었다. 화체설의 교리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학에 있어서는 이 시대의 풍조와 유리되어 있었다. 브리튼이나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에서 비롯된 각종 사변들은 요오크의 알퀸의 도움 아래 샤를마뉴에 의해 대륙으로 이식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 가운데 현재까지 그 작품이 전해 오는 유일한 존재로 신플라톤주의의 부흥의 대변인인 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가 있다. 그의 기본 명제란 곧 종교란 실제에 있어서는 철학이며, 마찬가지로 철학은 곧 종교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론은 그의 당대인들이 이해하거나 반박하기에는 너무나도 승화된 것이라 당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침략으로 브리튼의 문화 문명은 물론 종교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알퀸을 배출했던 요오크를 } 비롯하여 북학파들은 종족을 감추었고, 무지, 미신, 공포가 만연하였고, 수도사들과 사제들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치태를 보일 때 알프레드가 출현했다. 그의 뛰어난 두가지 업적은 첫째는 정치, 군사적인 공로이다. 그는 데인족을 몰아내고 서부 색슨 왕실을 중심으로 영국인들의 힘을 모아 국가를 건설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민들 가운데 학문과 교육을 진흥시키고, 성직자들의 도덕을 개혁시켰으며, 종교 조직과 규율을 다시 세우고 종교의 모습을 되찾아 이를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