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동, 서방 교회의 분열(882-1081)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발생한 포티우스시대의 제 2차 분열까지도 외형적으로는 9개월 후 총대 주교의 퇴위와 함께 연결되었다. 교리 및 교회 정치에 관한 결정들은 양 교회의 참석 하에 세계 종교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소집은 콘스탄틴 시절과 마찬가지로 동방 황제들이 담당하였으나 항상 로마 교황들의 사후 동의를 받고는 하였다. 1054년은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너무 오랫동안 흘러오던 기독권의 동․서방 교회는 서로 공개적으로 서로의 상이점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분열을 정당화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동․서방 교회는 거의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처럼 되었다.
갹섯1藪肄멎3세의 등장과 함께 속칭 도색 정치(포르노 크라시)가 시작되어 거의 60년 동안만을 가르키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무능과 부패와 실패로 만연하였다.교황의 자리는 귀족의 놀이개로 전락하였다. 이 새의 전형적인 타락의 모습과는 달리 클루니 사원이 생기게 되었다.
독일 황가는 종교 문제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였으며 최소한 처음에는 교황들의 부정 부패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실질적인 독일 국가의 창시자인 오토 1세는 교황직을 국제적 위치로 올려 놓았다. 당시 프랑크와 영국은 국가를 위협하는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활은 교회 생활에서도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라임스 대주교 아달베로 와 켄터베리대주교 둔스탄은 교회 내의 혼란과 성직 매매 족벌주의 도덕적 타락, 수도원의 나태 및 탐욕 기타 이들 국가들에게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던 부정 부패들에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오토 3세의 사망과 함께 교황청에 대한 제국의 고삐도 늦추어졌다. 이러한 로마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는 이 시기에 약간의 진보를 경험하였다. 비록 전쟁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으나, 최소한 g의 기사도를 통해 이를 기독교화 하고자 하는 노력이 행하여 졌다.
어느 사회 기반보다도 동방 교회의 경건과 헌신을 대변하고 있는 수도원 운동은 이 시대에 그 세력과 영향력의 절정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을 통한 새신자의 획득이나 혹은 기독교 영향권의 확대 역시 눈부신바 있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황제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있었지만 이 때문에 교회의 이익이 훼손 당하지는 않았다. 비잔틴 통치자들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만큼이나 전통 신앙의 수호에 전력하였다. 로마누스 레카페누스황제때 한동안 독립을 유지하던 교회는 다시 국가에 종속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제국이 영토를 넓힘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 이처럼 헬라 기독교가 급성을 이루었던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면 러시아의 개종을 손꼽을 수 있다. 처음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 가운데는 키에브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태후 올가였다. 또한 러시아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올가의 손자였던 블라드미르라할 수 있겠다.
샌1세기 중반 경 새로운 지역을 향한 기독교의 확장은 일단 중지되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미 고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최종적 분열의 구실로 양 교회가 제시한 종교적 이유들은 사실상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 였고 또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것이기도 했다. 분열을 낳게 한 장본인들은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마이클 세룰라리우스이었는데 세룰라리우스는 동방 교회를 제국 정부로부터 독립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불가리아 대주교가 작성한 선언문을 출판시키고 공개장을 교황에게 발송하므로 이 결과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분열 직후 동․서방 교회에 발생한 영향들은 거의 동일하였다. 동․서방 교회들은 자신의 영향권 네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제한과 감독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방 교회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관해 일단 성공을 거둔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