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공원 박영효·영혜옹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철종의 서4녀 영혜옹주와 금릉위 박영효 묘역(좌측) 전경. 우측은 후손들의 묘역입니다. |
영혜옹주[永惠翁主, 철종 10년(1859)~고종 9년(1872)], 철종과 후궁 숙의범씨(淑儀范氏)사이의 딸이다. 1863년 철종이 죽은 후 모친과 함께 궁궐 밖에 나아가 살았다. 처음에 영숙옹주에 봉해졌다가 1866년 영혜옹주로 바뀌었다. 고종 9년(1872) 4월13일 도사 박원양(朴元陽)의 아들 금릉위 박영효(朴泳孝)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만인 7월4일에 죽어서 후손을 얻지 못하였다. 고종은 박영효에게 집 한 채를 내리고 정1품 종친의 예로 녹봉을 주었다. |
▲ 박영효의 묘는 부산 다대포에 있었는데, 후손이 가산 탕진 후에 묘지를 팔아서 모란공원으로 이장(1972년)했다고 합니다. |
박영효[朴泳孝, 철종 12년(1861)∼1939년],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潘南), 아버지는 공조판서 박원양(朴元陽),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고종 9년(1872)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 실학, 특히 북학파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
▲ 석곽 우측에 태극기의 제작이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선상에서 태극기를 창제하였다고... |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 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
▲ 박영효 묘역 우측 하단에는 박영효의 아들/손자/증손자 석곽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습니다. |
1883년 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순경부‧치도국을 설치하여 신문발간과 신식경찰제도의 도입, 도로정비사업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은 폐쇄되고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으나 그의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
▲ 후손 묘역 전경 |
1884년 12월 일본의 군사적 지원 약속 하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를 숙청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본국 정부의 집요한 송환기도와 일본정부의 냉대로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
▲ 박영효의 아들 박일서 묘역 |
1888년 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하여 13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그해 8월 귀국하였다. 그 뒤 조선정부에 친일세력을 부식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왕실과 이노우에 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역모를 음모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 박영효의 손자 박찬범 묘역. 1958년 손자가 다대포의 묘역을 팔고 바로 개장 후 화장을 했다고... |
그 뒤 상소를 통하여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를 통하여 그의 소환서용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또한 고종과 수구파대신들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므로 무산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1900년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가 발각되어 궐석재판 끝에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의 특사조칙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군부내의 반양위파와 통모,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
▲ 박영효의 증손자 박형우 묘역 |
1910년 국권이 늑탈된 뒤 일제가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는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
제25대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1831 ~ 1863]
정비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 [1837 ~ 1878]
서1남 왕자(王子) [1854 ~ 1854] (귀인 조씨 소생) |
모란공원 묘역 안내도 |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위치도 |
모란공원 초입 시작 부분 주변에 차를 세우고 빨간선을 따라가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분들의 묘역을 두루 둘러볼 수 있습니다. |
모란공원 위치도 |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606-1 |
지도 우측 상단의 A 지점에 마석 모란공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 IC들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