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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30. 대민(주일낮)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눅7:11-17)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모든 인생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본향이 있어야 합니다. 본향이 있어야 외롭지 않습니다. 본향이 없는 자는 더욱 외롭고 쓸쓸한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의 삶을 경주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주하는 자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결승점이 있어야 끝까지 달릴 수가 있습니다.
달리는 사람에게 결승점이 없다면, 즉 목표가 없다면 그 경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동반자가 없는 여행은 더욱 쓸쓸합니다. '경주자'는 지도자가 있어야 더 좋은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할 사람이 없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진정 고독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형제보다 나을 수 있고 가까운 어느 이웃 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평생지기입니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무요 동반자요 지기입니다. 이같은 친구가 귀한 것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그 귀함이 진가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요나단은 그 누구 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이 더욱 빛납니다.
사람의 인생길은 어디로 가는 길보다 훨씬 멀고 험난합니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들이 숱합니다. 그 길을 무사히, 행복하게 가자면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여행의 동반자(同伴者)가 있어야 합니다.
‘상호 간에 모든 것을 공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좋은 동반자’의 조건입니다.
‘좋은 동반자’가 취할 행동은 아마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친구 지간에는 아무런 대가도 계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의지하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동반자 같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같이 아파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희,노,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지란지교 같은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인성에서 일어난 장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의 풍습에 의하면 장례에 모든 동네 사람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사정을 아는 동네 사람들이라면 더욱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치 동반자와 같이 그 장례 행렬에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1.장례에 함께 한 사람들(11-12)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모든 사람은 세상에 올 때 어머니의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눈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첫 음성을 울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눈물로 보냄을 받는 존재들입니다. 둘러선 자녀들과 식구들과 친구들의 눈물로 북망산으로 갑니다.
요즘의 장례는 산업화 시대가 되어 모두 기계적으로 합니다마는, 옛날 시골에서 장례는, 온 동네가 몇날간 그 집을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사람이 병들어 가고 죽는 것은 사람으로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병상에 누워계시고, 돌아가시고 하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밥맛이 없어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길은 모든 사람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 일들은 피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본문12절에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누가는 이 여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권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아들이 있어야 했고 남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아들도 없습니다. 장례가 나도 도와 줄이 애도할 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 성의 많은 사람이 함께 장례 행렬을 따랐다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마을의 사람들도 젊은 아들의 죽음에 많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장례식과 같은 상황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을 향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하게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흔히 말한 것처럼 천수를 다하고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문의 과부의 독자처럼 젊은 나이에 죽기도 합니다. 어떤 죽음은 호상이라고 하면서 슬퍼하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장례를 치르지만 어떤 죽음은 과부처럼 슬픔과 절망만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다양한 죽음의 현장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죽음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래 살고 죽었든 젊은 나이에 죽었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산자들이 죽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있다’라는 입장에서 죽음의 상황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자가 장례식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찾아가 조문하고 통속적인 말로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과부 아들의 장례식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과부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상황에서는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결국 장례식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됩니다. 단지 과부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함께 해주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이처럼 과부 아들의 장례식 현장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로가 되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장례식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처럼 공평한 것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똑같이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빈손 들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같고 죽음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겁쟁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가 있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을 보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가는 것이 결혼식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잔치집에 가야 할 경우 기쁨으로 잘 가지만 초상집에는 별로 기분이 나지 않고 가더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가게 됩니다. 가서도 적절히 위로할 말이 없어 민망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출생하는 것은 모두에게 의미가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각 사람의 인생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면 각 사람의 인생을 보고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람이 어차피 죽는 것인데 죽을 때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 교회에서 어떤 분은 죽을 때 어떤 분은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알고 보니 평소에 전도를 열심히 해서 수많은 영혼을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죽었는데 성도들이 별로 찾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기만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그 죽음이 쓸쓸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욕망을 버리고 헌신하며 산다면 우리의 죽음은 가장 영광스런 시간이 됩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성도들과 자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환란을 만난 성도들을 자주 찾아가야 합니다. 슬플 때 울어주고 기쁠 때 웃어줘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장례식때는 참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시간만 나면 슬픔당한 사람, 부모 잃은 사람, 입원한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장례식에 참여하여 함께하여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2.죽었던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13-15)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드라마(drama)는 인생의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그리고 이별이나 만남 등 파란곡절을 극으로 꾸며 감동과 교훈을 주는 연극 기법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동적인 사건을 보며 '드라마틱(dramatic)하다'고 경탄합니다. 이와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이 갈릴리의 한 성읍 '나인'이라는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인 성문으로 들어오실 때, 마침 묘지로 향한 어느 장사 행렬을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잃고 장사를 지내기 위해 나서는 나인성의 과부에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고, 어떤 손길도 그녀를 따뜻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인자하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명의 이적을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처럼 쏟아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픔을 당한 어머니를 향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고는, 죽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고 하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죽은 청년의 생명을 다시 창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을 때, 매장하러 가는 도중에서 죽은 청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이 과부가 처한 것과 같은 슬픔의 상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인생의 불행과 슬픔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불행과 슬픔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슬픔에 처한 인생들을 인자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가슴으로 품어 주시 면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우리 인생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말씀 하십니다
본문에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를 잘 보시기를 바랍니다. '시신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향해 말씀하시면서 마치 산사람에게 하듯 말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죽었다는 것이나 살았다는 것이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던 시신이 벌떡 일어나 앉고 말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향해서도 산 사람처럼 대화하시고 말하니까 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은혜가 되는 구절은 15절입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살아난 아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어미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죽은 자를 향해서 “일어나라!”라는 명령이 가능한가? 죽은 자에게 명령을 한다고 해서 그 명령이 수행될 수 있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이 단순히 동정과 위로에 그치지 않고, 슬픔을 기쁨으로, 통곡을 환희로, 좌절과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생명과 부활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 슬픔과 통곡, 좌절과 절망이 사라졌습니다. 슬픔에 잠긴 나인 성이 그 이름대로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죽었던 과부의 독자가 관에서 일어나 앉아 사람들에게 ‘내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운구행렬이 축제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잃어버린 과부의 꿈과 희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과부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눈물을 쏟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길 때 나의 상처를 싸매고 고치고 회생시킬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의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천국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우리 사람을 불행케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고 모든 것을 헛되게 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은 죽음에 대하여 손을 대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온 인류가 가는 죽음의 행렬을 바꾸기 위해서 역사 속에 뛰어들어 오셨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을 살리셨는데 나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입니다. 사실은 죽었던 청년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과부의 처지에 외아들을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여인까지도 살려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는 예수님, 사람의 생사까지도 좌우하시는 권능으로 구원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죽은 청년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과부의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 과부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이 없습니다. 또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죽은 청년을 살려달라고 아무도 예수님에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독자를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것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을 살려준 것은 그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깊은 생각이나 연약함까지 아시고 깊이 동정하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만이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 입니다.
3.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낸 사람들(16-17)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슬퍼하는 여인에게 위로를 주셨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인가 엘리야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메시야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가족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권능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 마음이 슬픔으로 젖어갈 때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시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걱정하지 마시고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16절에 보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영광을 돌린 내용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큰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자도 외아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렙다에 사는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수넴에 사는 어떤 부인의 외아들을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까지 포함하면 모두가 여인으로서는 최고의 슬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슬픔과 절망에 있는 그들에게 임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는데 왜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기뻐하고 찬송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찬송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은 먼지와도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깨달았을 때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을 자신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기쁨과 함께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성도입니다.
흔히 옛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름과, 여인의 태와, 무덤의 열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만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가 말씀 한마디로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예수님을 큰 선지자라고 불렀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 소문은 즉시 온 유대와 사방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소문의 내용은 나인성 과부를 만나신 예수님께서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영광스러운 소문이 퍼졌는데 이것이 누구때문인가 하면 바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은혜받은 내 소문이 퍼지면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를 받고, 복을 받고, 성공을 해도 이것 때문에 내 자랑스러운 소문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나야 합니다.
질병의 치유는 예수님 사역의 거점과 외부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치유의 사역을 통하여 사역지를 확대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하여도 이러한 사역을 행하시기 원합니다. 나를 가르치시고, 나에게 복음을 선포해 주시고, 나를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선포하심과 치유하심을 통하여 변혁된 존재, 변혁된 삶,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나의 삶이 될 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받은 은혜가 소문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소문의 확대를 원하십니다.
이 소문이 나를 통해 불신자들에게 퍼져나갈 때 예수님은 그곳을 통치의 영역으로 삼아 가십니다. 가르치고, 선포하는 입술의 고백은 나중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의 자연스런 소문이 예수님의 사역 방법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은혜가 밖으로 넘쳐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 속에 치유를 받는 자라면 그 은혜가 소문으로 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하여 사역지를 확대해 나가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낸 사람들이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1.장례에 함께 한 사람들(11-12)
2.죽었던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13-15)
3.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낸 사람들(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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