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비비정에 가다.
유옹 송창재
가을이면 어디 간들 멋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아직은
만산홍엽은 아니지만 천고마비이다.
북적거리며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유명지 보다는 이름없는 곳을 좋아한다.
아직 만추는 아니어서 단풍은 볼 수 없지만
가을이 나를 그대로 두지를 않아 오늘도 역마가 되었다.
예전에는 가을 초입에 태풍이 밀려와 완숙기에 이른 과일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의 밑거름으로 다시 회귀하고,
논바닥의 나락들은 쓰러져 있는데도 일손이 부족하여 묶지도 못했는데…
다행히도 올 가을은 피해는 없다.
이럴 때 가을 구경을 하겠다고 아침에 애니를 데리고 나와 어두워서 들어가니…
평일에는 복지관에서 공부를 하지만, 공휴일에는 집에만 있기가 아까워서...
바쁜 이웃 보기가 미안해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추석을 시발점으로 선유도를 기점으로 부안의 신석정 문학관, 고창의 서정주 문학관을 돌았고 오늘은 가까운 삼례 비비정의 낙조를 보기로 하였다.
비비정은 이름 만큼이나,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다.
비비정은 이순신의 이야기를 지닌 정자 이름이다.
두어번 둘러 본 이곳은, 폐쇄된 옛날의 만경 철교위에 만들어 놓은 열차형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 야외 휴게실등 제법 다양하게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야외 휴게실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흐르는 강물을 보고, 곧게 뻗어있는 철로 레일을 따라 머릿속의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건너편 철교위로 열차가 달린다.
작지만 예쁜 문학열차에서 동심의 어린여행을 한다.
언제나 낮에 들러서 비비정의 예쁜 낙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낙조를 볼 예정으로 저녁녘에 들렀다.
오늘은 바람이 있기는 하지만, 화창한 아주 밝은 날이었다.
오히려 비바람이 지난 훗날이라 햇볕이 더 좋았다.
이런 날이면 틀림없이 낙조는 아름다울 것이고, 또 열차안 갤러리를 운영하는 페북 친구도 볼겸 늦은 오후에 나선 것이다.
역시 비비정의 가을은 소소하게 거기 있었다.
낙엽이 날려 강물에 흐르는 것은 나중에 볼 일이고, 오늘은 저녁 노을을 기다린다.
약한 연무속에 해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낙조는 공기가 약간의 습기와 먼지를 머금고 있어야 더 멋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 본 화창하고 건조한 낙조와는 어딘지 다른 느낌이 왔다.
눅눅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의, 촉촉한 낙조였다.
타는 듯한 핏빛 여운을 남기며 강물을 끓여 올릴 듯한 노을을 보고 싶었는데…
하늘을 온통 붉은 여운으로 물들이기를 바랐는데,
오늘은
그런 날은 아니었다.
서서히 내려서며 물속에 잠기는 노란 해덩어리가 점점 붉어지며 가라앉을 때, 소리라도 지르고 싶던 가슴도 그속에 함께 넣어 수장시켜 버리고 싶었는데...
그 속을 조금 남겨두고,
돌아 나오는 길에 눈길이 다시 간 그곳에 붉은 강이 보였다.
다시 돌아서 기대 바라 보았다. 한참동안!
나가는 길이 어둡다고 일찍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목소리가 등을 밀어,
그믐 밤이 가까워지는 달을 올려보고 뒤로 돌아섰다.
낙엽이 강바닥에 날리는, 더 가을 깊은 보름달 밤에, 조용히 앉아 달을 보리라.
첫 저녁의 비비정 노을이었다.
초가을 저녁 비비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