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장 8절부터 솔로몬의 책의 ‘본론’이 시작됩니다. 잠언 1장 8-19절은 ‘첫 번째 권면’입니다. 잠언은 악한 자와 함께하지 말라는 호소로 교훈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잠언은 출발부터 실제 사람의 삶과 문제를 다룹니다. 친구를 사귀는 일. 돈벌이 및 악한 집단이 제안하는 힘에 대한 유혹은 일상적 삶의 어려움에 직면한 청년에게 큰 유혹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는 실제의 삶과 실제의 유혹에 대하여 솔직하게 전하여야 합니다.1) 잠언은 지혜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는 형식으로 전달합니다.2)
1. 죄인들의 유혹(enticement)에 동의하지 맙시다.
잠언 1장 8-9절에 “너는 훈계를 듣고 율법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그것들이 너의 머리에 은혜의 화환이고 너의 목에 목걸이들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듣는다는 말에는 “순종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잠 1:8).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듣는다는 말에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성경에는 들으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적극적으로 찾아가야만 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환경에 자기와 자기 가족을 데려가야 합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죽게 됩니다. 솔로몬은 그 아들에게 들을 것을 명령하였는데 딸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죽지 않고 구원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혜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좌파 선생들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 무관심합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손자 손녀 세대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데 단순히 세대 차이가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무슨 사상을 배우는지 무관심하면 이와 같이 됩니다. 학교에서 좌파의 사상을 주입받고 좌파의 사상이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생각이 옳으며 윗세대의 생각이 틀렸다고 믿는 것입니다.
7절에서 지식과 지혜의 처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선생들은 지식과 지혜의 처음이 없는 자들이며, 이런 선생들에게서 배운 자녀들은 윗세대와 반대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어린이와 젊은이는 지혜의 훈계를 들어야 됩니다. 지혜와 지식의 훈계를 들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주입된 사상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지혜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전교조 좌파 선생들이 어린이와 젊은이의 생각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일주일에 40시간씩 성경과 반대되는 사상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주일에 40분씩 성경을 듣는 것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학교의 선생들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다 맡기고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지혜의 훈계를 들을 수 있는 참 교회에서 지혜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녀로 인하여 고심하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도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참된 지혜니 성경의 훈계를 들어야만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성경의 훈계를 듣게 하여야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진리의 훈계를 듣게 하지 못하면 실패한 부모입니다.
‘열심히 벌어서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냈으니 내 할 일 다 하였다’며 ‘앞으로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며 어리석고 미련한 부모의 생각입니다.
정말로 자녀에게 지혜의 훈계를 들으며 자라게 최선을 다하였습니까?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인도하여서 지혜의 훈계를 듣게 하였습니까? 만일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국어, 영어, 수학을 공부하여서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목표입니까? 오직 자녀가 어떤 학교에 들어가 좋은 성적을 얻는 것에 관심 있습니까? 그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며 지혜의 훈계를 들으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가 지혜의 훈계를 듣도록 환경을 조성하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업 성적만 좋은 자녀들로 기르다가는 눈물을 흘리는 날이 도래합니다.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이 관심사가 된다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어야 됩니다.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부모가 그때에 가서 ‘내 할 일 다 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무책임입니다. 정말로 자녀들에게 지혜의 훈계를 듣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까?
여기 “훈계(discipline)”(무사르)는 “훈련”, “징계”로 번역됩니다. “가르치고 경계(警戒)함”을 뜻합니다.
“경계”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여 단속함”입니다. “옳지 아니한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게 주의하게 함”입니다. 잘못한다면 혼내고 벌주는 징벌로써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훈계는 참된 교회와 그 교회에서 배운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내세를 믿는다면 자녀들의 학업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학교에 보낼까’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이 좋은 교회에 다니면서 지혜의 훈계를 듣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버리다”는 단어(나타쉬)는 “버리다”, “거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들에는 “포기하다”, “버리다”는 단어(forsake)로 번역되었는데 지혜의 율법을 버리거나 거부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은 지혜의 훈계를 듣고 지혜의 율법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하며, 단순히 자기 어머니의 율법이 아니라 지혜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가 지혜롭지 못한데도 그것만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의 근본이 없는 불신 부모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훈계를 듣고 율법을 버리지 아니하여야만 하겠습니다(잠 1:8). 이는 훈계와 율법이 은혜의 화환이고 목걸이들이기 때문입니다(잠 1:9).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어머니의 율법을 버리지 않으면 영예를 누립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지혜의 율법은 율법주의를 뜻한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에는 생명이 없고 율법주의자들은 겉모양을 꾸미기에만 바쁜데 바리새인들과 록펠러 및 록펠러 2세를 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어머니의 율법을 배웠지만, 그것은 율법주의였습니다. 크리스트교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크리스트교는 성령입니다. 심령이 성령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령에 성령이 없는 자들은 겉모양만 꾸미기에 바쁩니다. 이것을 한자어로 “외식(外飾)”이라고 합니다. “밖을 꾸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어로는 “위선”으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페인트를 칠한 무덤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색을 칠하였지만 그 속에는 썩은 시체와 뼈들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이렇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록펠러에게 율법주의를 가르친 완고한 여자였습니다. 존 데이빗슨 록펠러 2세 곁에는 이런 완고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록펠러 2세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누나인 에디스는 나중에 분방하게 사는데 어쩌면 반발일 것입니다.3) 율법주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바른 길을 벗어날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으며, 그는 165cm의 키에 이맛살을 찌푸렸으며 엄숙한 얼굴을 가졌습니다.4) 율법주의로 교육을 받으면 엄숙한 사람이 되는지 아니면 반발로 자유분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1) 록펠러 2세는 자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록펠러 2세는 아버지에게 자선사업의 결재를 얻어내었습니다.5) 록펠러의 자선은 세금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재단을 세우고 재단에다가 기부하면 세금을 안 내어도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가 재단 대표가 되면 세금 없이 재산이 자기 자녀에게로 상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속세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상속세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누진세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상속할 때에 가나안의 왕이 아브라함의 재산을 반 떼어 가지 않았습니다.
2) 록펠러 2세는 교육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남부교육위원회는 록펠러 2세의 재력이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록펠러 2세의 집에 모인 자들이 일반교육위원회(GEB)를 만듭니다.6)
오늘날의 교육은 주입식 교육입니다. 달달달 외워서 시험 보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운 지구과학, 우주과학이 맞아?’라며 의문을 품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옳다고 수용하고 달달달 외워야 점수가 높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으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백신을 맞으라고 매스컴으로 교육하면 백신에 대한 아무 의심 없이 위험한 mRNA 백신을 맞는 것입니다.
3) 록펠러 2세는 의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의학연구소를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프레더릭 T. 게이츠 목사의 의견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게이츠는 의학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고 록펠러에게 건의했습니다. 록펠러가 의학연구소 계획을 실천에 옮긴 것은 1900년이었습니다.7) 록펠러 2세는 1911년에 사회 보건국을 창립했습니다.8)
1965년 의학연구소는 록펠러대학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르는 자들은 이것을 록펠러의 자선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9) 그러나 록펠러 의학연구소는 인류를 죽이는 독들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록펠러 2세는 그의 어머니의 율법을 버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나, 그에게는 생명이 없었으며 그는 종교상의 형식주의의 삶을 산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이 형식주의자일 뿐입니다.
잠언 1장 10절에 “죄인들이 넓힌다면 원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넓다(enlarge)”라는 말(파타)은 “꾀다”, “유혹하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유혹을 2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첫째는 본문이 말씀하는 바처럼 함께 악을 행하자는 유혹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피에 매복하며 결백한 자에게 숨길 것이라. 그들을 저승처럼 생명에 삼키고, 완전하게 구덩이의 내려가는 자들처럼. 우리가 귀중한 재물의 모두를 발견하며 우리의 집을 전리품으로 채우며. 너의 제비를 떨어뜨리며, 하나의 주머니가 있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치 맹수처럼 매복하여 있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삼킵니다. 그들은 결백한 자의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였다가 삼킬 것을 계획합니다. 이것은 저승이 사람을 삼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이 죄인들은 그에게 죄 없는 자들을 산 채로 삼킬 것을 제안합니다.10)
죄인들은 죄 없는 자를 죽이고 취한 재물을 “전리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기에 약탈품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전사들이 아니라 강도들입니다.
죄인들의 유혹의 또 한 가지는 ‘너 자신에게 잘될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mRNA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그들은 이런 유혹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90%가 넘는 사람들의 몸속에 소위 ‘mRNA 백신’이라는 을 독약을 주입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길에 가지 말며 그들의 보도로부터 억제하여야만 합니다.
폭력배들과 생활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잠 1:15).11)
왜냐하면 그들의 발은 그 악에게 달리고 피를 흘리기에 서두름입니다.
날개의 주인의 모두의 눈에 그 그물이 헛되이 흩뿌려지기 때문입니다.
폭력배들과 생활을 같이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2가지로 말합니다.12)
여기 “날개의 주인”이라고 번역한 말은 “새”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물”은 새를 잡기 위한 그물입니다(잠 1:17).
날짐승도 그물 쳐놓은 것을 알아채고 거기에 날아들지 아니합니다.13)
2. 우리는 우리의 귀를 지혜에게 주의시켜야 합니다.
잠언 1장 20-21절에 “지혜들이 외부에 외치며 광장에 그 음성을 주며. 그녀가 소란한 것들의 머리에 부르며 성읍에 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장 22-33절에 “단순한 자들은 언제까지 단순한 것을 사랑하고 경멸하는 자들은 경멸을 탐내고 바보들은 지식을 미워할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나의 영(spirit)을 부을 것이며 나의 말을 알게 할 것이라. 내가 부르고 너희가 거부하며, 내가 나의 손을 폈고 주의하는 자가 없고. 너희가 모든 나의 조언을 무시하였고 나의 비난을 원하지 아니하였노라. 나도 너희의 재난에 웃겠으며 너희의 공포가 들어올 때에 조롱하겠노라. 너희의 공포가 폭풍처럼 오는 때고 너희의 재난이 태풍처럼 가져오겠고, 고난과 고민이 너희에(upon you) 오는(come) 때라.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것이고 내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나를 부지런히 찾을 것이고 그들이 나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야훼의 경외를 선택하지 아니한 까닭이며. 나의 조언에 원하지 아니하였고 모든 나의 비난을 경멸하였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들의 길의 열매로부터 먹고 그들의 계획들로부터 만족하리니. 단순한 자들의 변덕은 그들을 죽이고 바보들의 평온은 그들을 파괴하고. 나에게 듣는 자는 안전에 머무르고 악(惡)의 공포에서 평온한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죄라는 사실을 몰라서 죄를 범하였다고 지옥 형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영생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주다”는 “소리 내다”라고 번역되었는데 지혜는 조용히 말하지 아니하고 외치고 목소리를 높여서 크게 말합니다. 지혜는 외딴 곳에서 말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말합니다.
지혜가 소란한 것들의 머리에 부르며, 성읍에 이야기합니다(잠 1:21). “소란한 것들”은 “떠들썩한 거리들”(noisy streets)로 번역되었습니다.
“머리”는 최상급이니, “가장 높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14)
“소란하다(be in an uproar)”(하마)는 모음을 바꾸면 “성벽”이며, 이러한 독법은 70인경의 독법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지혜는 “성벽들의 정상(top)”에서 소리치고 있습니다.15)
지혜는 그 성읍 안에, 성문들의 출입구들 안에 그 이야기들을 합니다. 지혜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서 연설합니다.
지혜가 사람들을 불러 초대하였고(call) 사람들은 거부하였으며 지혜가 그 손을 폈고 주의하는 자가 없었습니다(잠 1:24).
사람들은 지혜의 조언하였음에도 지혜의 조언을 무시하였고 그 비난(rebuke)을 원하지 않았습니다(잠 1:25).
사람들은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지혜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16)
또한 지혜도 그들의 재난(calamity) 때에 웃을 것이고, 지혜도 그들의 공포의 오는 때에 조롱할 것입니다(잠 1:26).
지혜는 그들의 재난 때에 비웃고, 그들의 공포 때에 조롱할 것입니다. 그들이 지혜를 거부한 결과, 그들의 재난 때에 지혜도 돕지 아니합니다. 지옥에서 도와 달라고 외쳐 봤자 그를 구원하여 줄 존재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일생’입니다. ‘일생’이라는 말은 한번 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험하고 나서 아는 것은 기회가 지나갔기에 너무나 늦습니다. 경험하기 이전에 인생을 살아보기 이전에 미리 알고 대처하여야 합니다.
어른들 말씀이 많은 점에 옳은데 인생을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미리 경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합니다. 경험자들의 조언을 잘 귀 기울여 들을 때에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경험하고서 결정한다면 늦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듣지 아니합니다. 겸손히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지금 내가 끌리지 아니한다고 어른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아니한다면, 나중에 내가 끌리고 그 가치를 알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때가 많습니다. 부모님들이 잔소리하는 이유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놀고 싶다고 놀면, 나중에 공부의 필요를 깨달을 때는 늦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키지 아니하여도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공부를 예로 들었지만, 공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항들에도 적용됩니다.
인생을 앞서 경험한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인생을 미리 알아야 하며, ‘할머니는 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죽은 후에 있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죽고 나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너무 늦으니까 죽기 전에 알아야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많은 예언자를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뒤의 세계를 미리 알고 사는 날 동안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니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사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가서 돈 벌고 잘사는 것보다도 저 세상에서의 운명이 어떤지를 미리 알고 대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지혜로우면 자신의 마지막을 이해하는 것입니다(신 33:29).17)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을 이해할 수 있어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시편 19편 7절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돌아오게 만들며,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한 까닭에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니(시 19:7), 사람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 지혜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지키고 행하는 행위입니다.
시편 111편 10절에 “야훼의 경외함(fear)이 지혜의 처음이며 그것들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좋은 통찰력이 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fear)이 지혜의 처음입니다(시 111:10a, 잠 9:10).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뜻합니다.18)
“경외(敬畏)”는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여 두려워하는 것인데, 상대를 공경하여 실수는 없을까 두려워하여 처신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때에 지혜의 처음이 없는 자며, 그가 세상의 관점에는 지혜로워도 그는 영원한 멸망을 선택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경외를 선택하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에 발견하지 못하니, 재난과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1) Duane A. Garrett, 『NAC 잠언·전도서·아가』, NAC 성경주석, 황의무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82-83.
2) 목회와 신학 편집부 엮음, 『잠언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32.
3) Peter Collier and David Horowitz, 『록펠러가(家)의 사람들』, 함규진 옮김 (서울: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4), 111-114.
4) Collier and Horowitz, 『록펠러가(家)의 사람들』, 117.
5) Collier and Horowitz, 『록펠러가(家)의 사람들』, 140.
6) Collier and Horowitz, 『록펠러가(家)의 사람들』, 141-142.
7) 18아향여름내지-31.pdf
8) Collier and Horowitz, 『록펠러가(家)의 사람들』, 148.
9) 18아향여름내지-31.pdf
10)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15.
11)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18.
12)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19.
13)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20.
14)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26.
15)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26.
16) 김정우, 『잠언』,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132.
17) 김회권, 『신명기』, 한국장로교총회창립 100주년기념 표준주석, 484.
18) Nancy L. deClaissé-Walford, Rolf A. Jacobson and Beth LaNeel Tanner, 『NICOT 시편』, 강대이 역 (부흥과개혁사, 2019), 1016.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백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