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인간실격>을 읽고
202314486 오승훈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의 삶의 궤적이 저자 다자이 오사무 본인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의중을 조금씩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다 완독하고 몇 가지 정보를 찾아본 지금 이 <인간실격>이란 책은 주인공 요조의 입을 통해 작가의 삶을 향한 한 맺힌 통곡처럼 들렸다. 다자이 오사무는 네 번의 자살시도와 마지막의 선공적인 자살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된 평범한 삶이 왜 유독 그에게는 그토록 힘들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 인간실격은 소설의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실화인지 모호한 탓에 책내용의 전반이 실화와 같게 느끼는 착각을 일으킨다. 심리에 대한 심층적인 묘사나 깊이있는 표현이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것도 독자로 하여금 마치 실화처럼 느껴지고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하는 데 한 몫 한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가의 삶이 주인공의 것과 여러모로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요조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내적도피를 선택한다. 타인과 구별되는 본인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그 자아를 앞세워 드러내고 인정받는 동시에 그의 원래의 자아를 감추고 지킨다. 이러한 내적도피의 원인은 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다름’이 혼란과 부끄러움의 연우가 되었고, 이내 두려움으로 변하고 결국 자기학대로 이어지게 된다. 요조가 스스로 인간실격이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 대해 느끼고 있는 두려운 감정 때문인 것이다.
작가 오사무의 삶 또한 자기학대와 자기 모순적인 태도로 인해서 우울감에 잠식됐다. 그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넉넉한 식사를 하는 것을 죄악시 여겼다. 그러던 중 다자이 오사무는 그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빠져들게 든다. 평등을 주창하던 마르크스주의가 그의 자기혐오와 부끄러움을 한 꺼풀 벗겨내 준 것이다. 그는 매우 적극적으로 마르크스 운동을 펼치고 도왔으며, 자신의 집을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맏형이 마르크스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다자이 오사무는 3년간의 좌익 운동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삶의 편린만으로도 그가 인간실격의 처음에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라고 적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보통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책에서 주인공과 저자가 느낀 그 두려움의 실체는 바로 '인간들은 나와 다르다'는 점이었다. 요조와 오사무에겐 그 내성이 없었기 때문에 바이러스 가득한 이 세상이 그토록 힘들었고, 그렇기에 그의 삶이 그렇게 치열하고 처절한 게 아니었을까?
그의 소설들은 종전 후 삶의 방향성 혹은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던 당대의 청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극단적 허무주의 문학이야말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지만 전체주의에 희생되는 개인의 입장에서 )당시 일본 국가의 패망을 눈 앞에서 생생히 목격한 일본청년들의 허망함을 달래줄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이었던 셈이었다. 추락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주제로한 인간실격은 당시 젊은이 들을 위한 눈높이 맞춤형 공감과 처절한 위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