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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생 80주기 추모 다례재
6.29는 전두환이 국민 앞에 항복한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두환의 호헌주장을 철폐하라던 6.10 민주화 시위는 1926년 순종황제의 안산일에 시작된 6.10만세사건과도 묘하게 겹친다.
전두환은 직접선거가 아닌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제를 명시한 헌법을 유지하려다가 민중의 저항에 부딛혔다.
629는 6.10 만세사건 주동자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만해 한용운이 조국 광복을 1년 남짓 남겨두고 입적한 날이기도 하다.
어제는 만해 한용운 입적 80주기를 추모하는 모임이 자하문 밖 세검정 흥선대원군의 별장 근처에서 있었다.
한용운은 창덕궁 앞에서 유심사라는 불교 잡지사를 운영하다가 당신이 공약삼장을 적어넣었던 삼일운동으로 옥살이를 했고 그후 사직동에서 살다가 총독부를 등지고 성북동 산골짜기 심우장에서 말년을 지낸 후 입적하였다. 환갑축하 모임도 총독부 순사들 몰래 연락해서 청량리 청량사에서 18명이 조촐하게 모였었는데 그 사후 80주년 추모제는 비록 성밖에서 치루어진 것은 전과 같았지만 모임의 규모는 전혀 다른 큰 규모의 행사였다.
이 자리에는 유일한 혈육인 따님 한영숙 여사는 참석하지 못하고 외손주가 유족대표로 참석했다.
대통령과 여당 당대표가 화환을 보내고 국회의원 너댓명이 왔다가 축사후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총총 자리를 떴는데
다른 분들은 모르겠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 곽상언 의원의 명함만 받아왔다.
우리에게는 일제에 항거하다가 감옥에만 서너번 다녀온 올곧고 강직한 독립운동가요 사상가요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시대의 불교계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인 스님이자 가난한 사람이었던 그를 왜들 그렇게 대대적으로 추모하는 것일까? 불교계와 독립운동 세력들 그리고 조선일보 방사장으로부터 계속 후원을 받으면서도 노환을 치료하지 못하게 가난했던 건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고종 순종황제의 어진을 그리고 역대 제왕 어진과 당대 최고위 관리들의 초상화도 그리면서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전 이상범과 심사에 참여하는 등 조선화단을 이끌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당 김은호의 가난한 삶과도 무관하지 않았었다.
이런 배경은 만해 한용운을 50년 가까이 보필하고 한용운전집을 남기는 등 귀중한 일을 많이 했던 해어 김관호 선생의 기록으로 단편을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7월 12일(양력 8월26일) 만해(1879-1944) 화갑연 친필 유묵
1939년 7월 12일(양력 8월26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3.1독립운동의 적극적인 첫 움직임은 제1차대전이 끝난 후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가 하면 신익희 윤치영 이광수 등이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일으킨 것을 기폭제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시기가 왔음을 간파하고 시기를 보고 있다가,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함으로써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의 천도교 측 중진들이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이끌어가게 되었는데, 이후 천도교계 15명이 먼저 움직였고 105인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컸던 개신교계에서 이승훈 등 16명, 불교계 2명이 추가되어 33인의 민족대표를 꾸렸다.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서 퇴계로 명동성당까지의 길을 ‘삼일로’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역사를 기록하는 이름이다.) 천주교에서는 고종(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에 대한 감정과 105인 사건에 저질렀던 영향으로 불참하게 되었다.
천도교인이었던 최린은 친한 친구인 불교계의 한용운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였는데 불교계는 사정에 의해 두 사람만이 참여하게 되었다.
< 105인 사건이란(안악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1911년 안중근의 사촌동생 가톨릭신자 안명근 야고보가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보고받은 명동성당 ‘뮈텔’ 주교가 총독부에 이 사실을 신고하여 명동성당의 해결 난제였던 일본인과의 토지분쟁을 해결한 바가 있는데, 이후 일제는 이 사건을 확대 왜곡시켜 개신교 탄압으로 개신교도 수백명을 체포하고 105인을 구속 기소하여 재판에 넘긴 사건이다. 이때 개신교도인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망명하여 이 사건의 전모를 미국사회에 알리며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
만해선생 송수첩
1939년 기묘년 7월12일(양력8월26일) 벽초 홍명희 등은 청량리 북쪽에 있는 천장산 청량사에 삼일독립운동을 처음부터 기획 주동한 발기인 중에 살아있는 권동진 오세창 등의 지인들을 초청하여 한용운 의 회갑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다.(손병희는 감옥에서의 고문으로 병에 걸려 1922년에 일찍 사망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맨 처음 기획단계에서부터 독립선언서 작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주도한 인물이고 최남선 이광수 등은 3.1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한용운은 친일로 변절한 이 사람들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만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갑연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모인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 등 열여덟 명이 만해의 회갑을 함께 축하하고 나서 각자 한 구절씩 축수의 의미로 한시를 짓고 해어 김관호(1906~ 한국고미술협회 감정위원인 김영복 김선원의 스승 )가 사온 서화첩에 18명의 필적을 남기게 되었다.
만해선생 송수첩은 이당 김은호(1892~1979)가 표제를 쓰고 첫장에 송수만년 그림이 실려있으며 그 뒤에 연장자 순으로 우당 권동진, 위창 오세창 석정 안종원 박광 등의 축시가 실려있으며 맨 마지막 장에는 만해 한용운의 화답시가 실려있다.
만해선생 송수첩
KBS - TV쇼 진품명품에서 공개된 <만해선생송수첩> 우로부터 김은호 권동진 오세창 ...
만해선생송수첩 폭당 280*263mm
만해 한용운의 회갑일(1939년 7월12일(양력 8월26일)) 청량사에서 삼일만세운동의 동지 후학 등 18명이 모여, 18명이 송수첩에 즉흥 한시를 한 수씩 지었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황제 붕어 이전 부터 기미 독립운동을 함께 기획했던 최린과 만해 한용운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함께 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왜 이 자리에 최린은 초대받지 못했을까? 이완용까지 만나가면서 3.1독립만세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기획했던 최린은 나중에 일제로부터 중추원참의라는 작위를 받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한용운은 최린의 집앞에 찾아가 내친구 최린이 죽고야 말았다며 크게 곡을 하고 이후로 최린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며 만나지 않았고 ,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한 육당 최남선도 일제로부터 중추원 참의라는 벼슬을 받아 일제에 부역을 하게 되었으며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데 한용운은 어느 자리에서든 그들이 인사를 해와도 내가 아는 최남선은 예전에 이미 죽어서 장송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아는 체도 하지 않는가 하면 문학적 교류로 끔찍하게 가까이 하던 춘원 이광수도 집에 오려하면 호통을 쳐서 돌려 보내곤 하였다.
이렇게 아무리 친하던 친구라도 변절자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던 강직한 성품을 가진 만해였기에, 회갑연이라고 해도 권세가며 호사가들이 모이는 것은 원치 않았으며 일제 헌병과 밀정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연락한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옥살이를 했던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 동료 18명 만을 청량사에 초대하여 조촐하게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송수첩은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가 맨 앞에 먼저 글을 써서 장수를 축하해주고 후세에 그날의 의미를 전하는 서첩인데, 당시에 가장 유명한 서예가이자 3.1독립운동을 기획단계에서부터 함께한 민족대표33인이었던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 선생(1861~1947)과 위창 오세창(1864~1953) 선생이 그 자리에 있었던 시화첩인데도 불구하고, 30년이나 어린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작품이 송수첩 표지의 표제자와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한용운 선생이 이당을 신뢰했던 만큼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생각과 만해선생송수첩을 만든 사람들의 생각이 이당을 확실하게 신뢰했다는 증표일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위창 오세창 선생 등은 본래부터도, 약관의 나이에 임금의 어진도 여럿 모셨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서 자신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으며 옥살이를 함께했던 젊은 이당은, 스승인 심전 안중식 선생이 고문 끝에 옥에서 옥사하신 것을 보았고, 본인도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 '요시찰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가면서도 왕실의 일이라면 거역하는 일이 없었고 기꺼이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를 그린 인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세창은 이당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화실인 낙청헌을 구입하도록 도움을 주고 그 화실에 낙청헌이라는 당호를 지어준 당사자이기도 하다. 또 한용운의 심우장이라는 편액을 써준 것도 오세창이기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일본에서 초빙해온 일본인들만 심사위원을 하고 있을 때부터 일본인 화가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큰 상을 여러 번 타는가 하면 나중에는 추천작가가 되어 심사에도 참여하여 선전에서 제자들과 조선인 화가들을 지켜줬으며 1936년에는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여 일제로부터 조선화단을 든든하게 지켜오고 있는 젊은 이당을 그만큼 확실하게 믿어주고 아꼈었던 것이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입장에서는 이당이 고종황제를 직접 알현하며 어진까지 그렸는데, 그 아버지 같이 따뜻하게 대해주던 고종이 독살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게 된 김은호의 비참한 충정을 품은 채 남보다 앞장서서 독립신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던 젊은 마음을 십분 이해했었다. 게다가 한용운이 아직 감옥안에 있을 때 이당 김은호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고문으로 인해 병보석 출감을 한 후에 일본 순사의 감시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자신의 유심사에 활동자금을 몰래 제공하고 있던 것을 고마워 했었던 것이다. 한용운이 감옥에서 옆방의 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빌미로 손가락에 철사를 묶고 잠시 억류를 당했을 때 옥중에서 읊었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읊은 옥중시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이당이 정확히 외우고 있는 것을 한용운이 놀랐던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돈독했었다. 목숨을 걸고 3.1운동을 함께 기획한 친구 최린과 최남선 이광수 조차도 변절하였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사람으로 보지도 않을 만큼 지조가 굳은 만해였다는 것을 알고 보면, 그 당시 이당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1937년 금차봉납도가 세상에 알려진 2년이나 시간이 흐른 후 1939년 여름의 일이라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시점이다. 친구 최린 최남선은 변절자라고 비판하였지만 젊은 이당은 근본이 변절하고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모임과 조선화단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본인이 오욕을 감당하고 스스로를 희생시킨 화단의 교육자요 애국자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대우해주던 한용운이었다.
이당 김은호 송수만년松壽萬年(1939년 만해선생 청량사 회갑연 축수그림)
첫 페이지 '송수만년'
이당 김은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후 만해가 아직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본래 만해 선생이 창덕궁 돈화문 서측 대동상업학교 앞에서 운영하던 유심사惟心社에 본인이 들어가 살면서 만해가 출옥할 때까지 유심사를 지켰고, 유심사가 문을 닫은 이후에도 만해의 작품활동이나 독립활동 자금 마련에 꾸준히 도움을 주고 있었으며 비밀결사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된 후에도 꾸준히 만해에게 자금을 후원하였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한용운의 심정을 잘 알던 해어 김관호이기에 스승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믿음하에 기꺼이 '만해선생송수첩'의 표제와 첫 장에 이당의 작품을 남기게 했던 것이다.
두번째 페이지 ' 卍 '
우당憂堂 권동진(1861-1947 향년 87세)도 동향출신에 동갑인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를 이끈 지도자이며 3.1독립운동을 기획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데, 1905년 손병희가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같이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순종황제 장례 때인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105인사건'으로 핍박을 받았던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8·15 해방과 좌우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격동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가 당시 회갑연에서는 연장자 자격으로 만(卍) 자를 먼저 써서 남겼으며
민족대표33인 독립운동가 憂堂 權東鎭의 화갑서 만(卍)
세번째 페이지 壽者相
역시 3.1 독립운동을 기획단계부터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으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이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써서 우리나라의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서화역사와 작품을 정리하고, 만해의 성북동 심우장의 현판을 써준 위창 오세창 (1864-1953) 선생이 전서체로 수자상壽者相(불교에서 목숨은 하늘이 정해서 내려주는 것이다.)을 써서 오래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장수를 기원했다.
민족대표33인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 축서 만해선생 환력 내 기묘중원 '수자상壽者相'
네번째 장에는 서예가 석정 石丁 안종원安鍾元(1874~1951)이 쓴 '득기묘방'
일곱번째 장에는 박광朴洸 (1882~?)이 '만법귀일'이라고 썼다.
여덟번째 장에는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1888~1968) 가 만해선생 축시를 남겼다.
벽초 홍명희의 만해 찬시
맨 마지막 장에는 만해 선생이 앞에 쓴 15명 지인들의 축하에 대한 화답으로 답시를 썼다.
1939년 7월 12일(8월26일)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만해(1879-1944) 친필 유묵
만해스님은 이 회갑연 5년 후 1944년에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세수 66세로 입적하였다.
만해 한용운 말년의 거처 심우장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도로명)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우) 02879 만해 한용운 심우장 사적 550호
소화 10년 3월 25일, 경성부 사직동 141번지에 살던 만해 한용운은 성북정 222-1번지로 이주한다.
2019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심우장
2019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심우장은 이곳에서 선생님과 교류한 인물들 가운데 심우장의 건립에 관련된 사람들과 심우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분들 위창 오세창, 취산 김구하, 석정 안종원, 우당 유창환,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이당 김은호, 운허 용하, 원광 경봉, 청남 오재봉, 강석주, 효당 최범술 등 독립운동가와 문화예술인 20인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만해 한용운의 성북동 심우장
80주기 다례재 축하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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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만해 한용운 선생님과 이당 김은호 선생님 사이에 그런 깊은 유대관계가 있었음은 처음 알았습니다.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글이네요.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을 역사적 사실들을 오늘에야 처음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