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숨은 이야기
미아리 고개에 육중한 물체가 굉음을 내면서 내려왔다. 대포를 맞아도 끄떡없다는 북한 탱크
국군은 6월27일 밤까지 인민군을 완강하게 저지했으나, 홍릉 방면으로 진출한 탱크 2대로 인해,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돈암동에서 탱크를 목격한 강문봉 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적의 전차가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진격하지 않고, 미아리 고개에서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를 파악하지 못한 총장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시영 부통령과 채병덕 총장, 육군본부 참모들이, 한강대교를 넘자마자 다리가 폭파되었다.
6~8시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너무 일찍 폭파한 것이다.
이에 6개 사단, 4만 4천 명은 중장비도 버린 채 도보로 후퇴했다.
50대 이상의 차량이 한강에 빠지고 500명이 사망했다.
지휘관의 오판으로 병력과 물자수송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폭파 책임자인 최창식 대령을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폭파되었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통행이 가능해서,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원수 만만세'
좌익들은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집집 마다 인공기를 걸었다.
학생들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쳤다.
인민군이 한 청년을 잡아, 군중들에게 반동분자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자 바로 총살을 했다. 이게 인민재판이다.
21일에는 붉은 완장(先發隊)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6, 25는 노 대통령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며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