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동지는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은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날이 지나면 하루 낮에 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중국 진나라에 공공이라는 사람에게 골칫덩어리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짓날 공공의 말썽장이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데 죽은 아들이 그만 역질 귀신이 되었다. “역질”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지금은 예방 주사를 맞으면 걸리지 않는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들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작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자 공공은
내 아들이었다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다하여 아들이 생전에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써서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짓날에는 동지팥죽 또는 동지두죽(冬至豆粥)ㆍ동지시식(冬至時食)이라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어 끓이는데 이 단자(새알심)는 맛을 좋게 하기 위해 꿀에 재기도 한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려 천신(薦新)에 예를 하고 여러 그릇에 나누어 퍼서
장독, 곳간, 헛간, 방 등에 놓아둔다. 그리고 대문과 벽, 곳간 등에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팥죽의 붉은 색이 잡귀를 몰아내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지 팥죽은 잔병을 없애고 건강해지며 액을 면할 수 있다고 전해져 이웃간에 서로 나누어 먹었다.
팥죽의 새알심은 나이대로 먹는다.
팥죽을 동네 고목에 뿌리면 귀신을 쫓는다고 한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에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팥죽을 쑤어 상가에 보내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상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한 것이며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악귀를 쫓는 축귀 주술행위의 일종이다.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나 재앙이 있을 때에도 팥죽ㆍ팥떡ㆍ팥밥을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짓날에도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짓달에 동지가 초승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동짓날 부적으로 뱀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면 악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또 동짓날 일기가 온화하면 다음 해에 질병이 많아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전한다.
한편, 궁중에서는 관상감에서 만들어 올린 달력을 ‘동문지보(同文之寶)’란 어새(御璽)를
찍어서 모든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 달력은 황장력(黃粧曆) 청장력, 백력 등의
구분이 있었고, 관원들은 이를 다시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풍속은 여름에 부채를 주고받는 풍속과 아울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또한,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전약(煎藥)이라 하여 쇠가죽을 진하게 고아 관계(官桂), 생강, 정향(丁香)
후추, 꿀 등을 섞어 기름에 엉기게 하여 굳힌 후 임금에게 진상하여 별미로 들게 하였다.
그 밖에 고려, 조선 초기의 동짓날에는 어려운 백성들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동지 때는 '동지한파'라는 강추위가 오는데 이 추위가 닥치기 전 보리밟기를 한다.
이때는 땅속의 물기가 얼어 부피가 커지면서 지면을 밀어 올리는 서릿발로 인해
보리 뿌리가 떠오르는 것을 막고 보리의 웃자람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엔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리밟기를 하기도 했다.
동짓날 한겨울 기나긴 밤에는 새해를 대비해 복조리와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복조리는 산죽을 쪄와 사등분으로 쪼개어 햇볕에 말리고 물에 담근 뒤 그늘에서 건조시켜 만든다.
쌀에 든 돌이나 이물질을 가려낼 때 사용하는 복조리는 새해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복을 사라며
"복 조리 사려"를 외치며 다녔다. 대보름이 지난 뒤 팔러 다니면 상놈이라 욕을 먹기도 했다.
복조리를 부엌 부뚜막이나 벽면에 걸어두고 한해의 복이 그득 들어오기를 기원했다.
음력 십일월부터는 농한기다. 이때는 가장들보다 아녀자들이 할 일이 더 많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들기 위한 메주쑤기로 부산할 때다. 무말랭이, 토란 줄기, 호박오가리 등
각종 마른나물 말리고 거두기에 겨울 짧은 해가 아쉽기만 할 때다.
비닐하우스 농가에서는 비닐하우스
골조설치, 비닐 씌우기,
거름내기, 논갈이 등 중노동이 잇따른다.
과거엔 농한기로 쳤지만 비닐하우스의 등장으로 모내기철보다 더 바쁜 농번기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네 기억 속엔 정겨운 화롯가의 추억이 남아 있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어느 집 질화로에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 헤치며 잎담배 피우시며
'고놈 두 눈동자 초롱같애'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은 연신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중략)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 김용호 시『눈 오는 밤에』
겨울밤이면 농부들은 동네 사랑방에 모여 내년 농사에 쓸 새끼를 꼬기도 하고 짚신이며 망태기를 삼기도 했다.
더러 손재주 좋은 이들은 윷놀이와 곡식을 말릴 때 쓰는 멍석, 음식을 보관하는 봉새기, 재를 밭에
뿌릴 때 쓰는 삼태기, 배낭의 일종인 조루막, 풀 베어 담는 꼴망태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졸음이 몰려올 쯤이면 쌈지담배를 꼬실리다가 이내 아낙네들이 삶아온 고구마를 먹으며
마을 소식들이 오갔다. 내년 소작료 얘기며 부당한 물세 때문에 복장이 터진다는 얘기며
안산 너머 닭실골짝 김서방네는 소작료 때문에 논주인과 다투다 부치던 논을 뺏겨 내년
살길이 막막하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밖은 눈이 무진장 내리는데 말이다.
안방에서 동네 아낙들과 고구마에 동치미를 들이키며 바느질을 하다 말고 강부잣집 딸년은
시집가 잘 산다는 얘기며, 양달마을 박서방은 술집 작부와 눈이 맞아 도망을 쳤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때쯤이면 어린 것은 아이스크림 같은 겨울 감홍시를 입이 벌개지도록 칠한 채 먹다 말고
이내 어미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다.
이처럼 겨울나기는 눈오는 밤 질화로에 묻어둔 불씨요 밤알처럼 훈훈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라는 험한 상황이 아름다운 겨울의 낭만을 사라지게 했다.
모진 바깥 세상에 시달린 손을 포근하게 묻을 곳이며 얼어붙은 볼을 감싸 녹여주며
거칠어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정(情)의 원천이던 겨울나기. 쇠죽을 끓여 지글지글
끓던 방에서 밤과 고구마에 동치미를 들이키며 가족끼리, 이웃끼리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따뜻함이 새삼 그리운 시절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읽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