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역사
1. 사진의 시작 - 카메라 옵스쿠라
카메라 옵스쿠라 사진은 19C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시 화가의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한 세부묘사를 보여주는 사진은 그야말로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이러한 사진이 등장하기 까지는 두 가지 과학적 과정을 거쳐서 완성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광학적 속성을 가진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e)이다.
당시 서구 예술가들에게는 좀 더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인 착시가 요구되어졌기 때문에
보다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사진을 등장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화학적 속성으로서의 은염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만들어진 생생한 장면들을 직접 따라 그리지 않고는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나 은염류를 사용하여 상을 고정시킴으로써 영구히 보존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카메라 옵스쿠라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인 BC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가 태양의 일식을 관찰하면서 암상자의 원리에 주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암상자의 원리 즉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와도 같은데 어두운 방(어두운 상자)의 한쪽 벽 가운데에
작게 뚫린 구멍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방 바깥쪽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들 예를 들면 원근감,
다양한 색채, 그림자, 미세한 움직임 등이 구멍의 맞은편 벽면에 거꾸로 맺히는 것을 말한다.
이 암상자에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커지면 커질수록 상은 흐려지고 작아질수록 상이 선명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카메라 조리개 역할과 같은 것으로서 그 구멍을 가리켜 '바늘구멍'이라고 불렀다.
이와같은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에서 바늘구멍의 크기에 의해 상의 이미지가 뚜렷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어떻게 하면 좀 더 사실적이고도 뚜렷한 상을 얻을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초기의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한단계
발전시켜 이탈리아 수학자였던 제롤라모 카르다노(Gerolomo Cardano)가 렌즈를 부착하게 되었다.
이보다 조금 더 발달된 형태는 현대적인 반사경식 카메라를 닮은 것으로 기존의 상자 맞은편에
상이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 상자 윗부분에 젖빛 유리가 씌워지고 그 바로 밑에 45도 각도로
거울을 위치시켜 빛이 렌즈→거울 →반사→유리를 거쳐 상을 맺게 하였다.
렌즈를 이용하면서 화질의 개선은 확실히 이루어졌으나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쓰인 렌즈는 확대경 유리같은 둥근 접시꼴로 깎여진 즉 볼록렌즈(Barbaro)였는데
이 렌지에 의해서 형성된 상을 평면에 그 상의 끝부분이 왜곡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호형으로 깎아 만든 서로 다른 반경을 지닌 두 렌즈의 조합. 즉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로 왜곡되지 않은 정상적인 상을 선명히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암상자 형태로 만들어진 카메라 옵스쿠라는 1657년 카스파르 쇼트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데 초기에
이 카메라 옵스쿠라는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도 될 만큼 큰 방이어서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으나
큰방 형태에서 오두막 형태로, 오두막 형태에서 가마형태로, 천막형태로 그 크기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7C에 이르러 요한 찬에 의해서 운반이 가능한 암상자 형태에 이르기까지
축소되고 18C에 들어서는 다양한 형태와 규격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사진의 효시인 카메라 옵스쿠라는 11C-16C의 숱한 저술에서 카메라 옵스쿠라의 원리와
천문학을 이용한 방법이 소개되었지만 처음부터 사진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이 원리가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계에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1519년에 카메라
옵스쿠라를 드로 잉(drawing)하는데 최초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화가들에게 그림 그리는
도구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당시 화가들에게는 창의적 미를 추구하되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을 기본으로 할 것이 요구되어졌는데
여기서 카메라 옵스쿠라는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표현과 원근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기에
화가들이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카메라 옵스쿠라는 비록 화가들이 아닌 일반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여도
그림이 완성되는 놀라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또다른 드로잉 도구로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라는 것이 있었는데
윌리암 울러스턴(Dr. William Wollaston)에 의해서 1807에 디자인된 것이다.
사용법이 카메라 옵스쿠라보다 어려워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와 카메라 루시다 모두 수많은 미술도구중 하나로서 평면위에 공간과
입체를 재현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어졌다. 특히 서투른 화가들에게 예술적
결함을 메워 줌으로서 현실을 포착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사진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상황을 빛의 활동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위에 고착시키는
것인데 카메라 옵스쿠라에서 사실재현은 가능했지만 그 상을 그대로 고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은염류에 빛을 비추면 급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이용하여 상을 고정시키려는
일련의 노력으로 마침내 사진을 탄생시킬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샘이었다.
은염류에 대한 언급은 13C 알베투스 마그누스, 16C 제오르지우스 파브리쿠스 등이 그 특성에 주목한데서
시작하였지만 사실상 17C에 이르러서 은염류가 검게 변하는 현상 이 관찰되면서 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검게 변화하는 원인을 잘못 파악하였다.
즉 은염류가 변하는 것이 공기나 태양열 태문이라고 생각하고 빛에 영향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8C에 이탈리아의 바티스타 베카리아는 실험을 통해 은염류에 대한 빛의 작용을 밝히는데 성공하였다.
나아가서 은염류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관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우선 연금술사인 크리스토프 아돌프
발두인(Cristoph Adoph Balduin)의 경우 발광물질의 제조를 위한 실험과정에서 탄산칼슘이 질산속에서
용해되어 질산칼슘을 생성하여 이 화합물의 침전물을 증류시 증류기 속에 가라앉은 앙금이 가열되어 빛을
발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 앙금을 '빛의 운반자'라는 이름의 포스포러스(Phosphorous)라 지칭하였다.
이후 1727년 독일의 요한 하인리히 슐체(Johann Heinnrich Schulze)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는 발두인의
실험을 기초로 하였다. 단 발두인은 순수질산을 이용한 반면에 슐체의 경우 질산에 은을 함유하였다.
그러므로 탄산칼슘을 질산은에 용해시켜 만들어진 혼합물을 얻었는데 이 혼합물이 빛에 노출되었을 때는
진한 보라색으로 변하지만 가열했을 경우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공기나 열에 의한 것보다
빛에 의해 변한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혼합 물을 '어둠의 운반자'라는 이름의 스코토포러스(Scotophorous)라 이름을 붙였다.
뒤이어 화학자들은 즉시 슐체의 실험을 반복하였고 18C 말에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상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잠재적인 형태로나마 존재하게 되어 사진이 탄생된 마지막 준비 작업을 실상 끝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2.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wood)와 헬리오 그라프(Heliography)
1) 토마스 웨지우드 (Thomas Wedgwood)
영국태생의 토마스 웨지우드는 카메라 옵스쿠라에 맺혀진 상을 영구히 기록해보려는 일련의 시도를
한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도공의 아들로서 도자기 장식을 위하여 스케치를 하였는데 예술적인 소질이 부족하였기에 어떻게 하면
좀 더 스케치를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 당시 예술가들에게 미술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손으로 그리지 않고서 이미지를 세길 수 있었다.
따라서 카메라 옵스쿠라를 능숙히 다룰 수 있었고 또한 슐체가 발견했던 은염류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응용하여 상을 고정시키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웨지우드는 1800년이 되기 이전부터 빛에 민감히 반응하도록 질산은을 흰 종이나 가죽등의 재질에 입혀
감광성을 부여한 뒤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그 사물의 자취가 네거티브 실루엣으로
만들어내는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종이 등에 네거티브로 표현된 것을 밝은 곳에 놓아두면 금새 모두 검게 변하게 되어 영구적이지는 않았다. 즉 광선으로 형성된 상이 나중에 밝은 곳에서도 변질되지 않고 이미지를 고정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흰 부분이 계속 흰 부분을 유지하지 못하고 검은 부분도 계속 검은 부분을 유지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처음 새겨진 이미지 상을 보존하려면 어두운 암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빛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 정착과정이 웨지우드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결국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 1805년 34세의 나이로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웨지우드의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착과정을 완성시키지는 못하여 완전한 사진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사진의 발명에 큰 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2) 헬리오그라프 (Heliography)
본격적인 사진의 시작을 열었던 사람은 프랑스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ne Niepce)였다.
그는 프랑스에 소개된 석판기법을 접하면서 석판의 가장 큰 특징인 복제를 사람의 손으로 직접 이용하는
불편함을 해결하여 좀더 쉽게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법을 생각하였다.
그는 토마스 웨지우드처럼 사람의 손이 직접 이용되지 않고 단지 태양 빛의 활동만으로 사진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는 연구를 하였고 그결과 웨지우드가 완성시키지 못한 정착과정에서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웨지우드가 사용했던 염화은으로 실험을 하였으나 1817년에 은염류와 마찬가지로 유태의 비투먼 bitumen of judea (역청. 타르의 일종으로 빛에 민감한 아스팔트 형태의 끈끈한 물질)이 빛에 민감하다는
사실과 빛을 받은 뒤에는 기름속에서 녹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하여 상을 정착시켰다.
그 과정을 볼것 같으면...라벤더 기름에 비투멘을 녹여서 백랍판(White Petroleum)에 입혀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밝은 광선이 닿는 곳은 비투멘이 단단히 굳어지고 밝은 광선이 닿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여 네가티브 실루엣을 얻는다.
노출에 의해 상이 형성된 백랍판을 라벤더 기름에 다시 담그면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의 비투멘이
부드러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용해되고 제거되어 상을 정착시킨다. 수세후 건조시킨다.
"르그라의 집 창에서 내다본 조망" (1827년), 니세포르 니엡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상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이 방법을 통해서 얻어낸 사진을
'헬리오 그라프'라하여 태양(Helios)+그림(Graphos)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헬리오 그라프 방법으로 완성된 세계 최초의 사진은 1826년 프랑스 중부의 작은 도시
샬롱-쉬르-손(Chhlon-sur-Saone) 주변의 생-루-드-바렌 소재의 그라에 있는 자신의
별장 작업실 2층 창에서 촬영한 것으로 백랍판 16.5*20cm의 크기로 제작되었다.
이 사진은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 끝에 얻어졌기 때문에 8시간 동안에 해가 움직여서 해가 지나간
자리만 남고 실제 해는 나타나지 않는 장면을 연출시켰다.
니엡스는 태양의 광선으로 빛어낸 이미지를 잡아내고 정착시켜 사진을 보존가능한 상태로까지
완성시키기는 했으나 더나은 사진의 발전을 위하여 연구하던 중에 1829년 12월 4일에 디오라마로
유명한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와의 동업관계를 형성하고 그와 함께 꾸준한 연구를 하였으나 4년뒤인
1833년에 니엡스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채 눈을 감았다.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과 칼로타입(Calotype)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다게레오 타입은 이 방법을 고안해낸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게르라는 사람은 원래 화가로서 스위스 알프스 산과 같은 웅장한 자연을 대형의 투명한 스크린에 그린
그림과 특수한 조명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디오라마의 밑그림을 그릴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1829년 12월에 헬리오 그라프를 완성시켰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의 제안으로
동업관계를 형성하여 사진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니엡스의 죽음으로 동업기간은
4년에 그치고 다게르 혼자서 연구를 계속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업관계를 맺은지 10년이 지난 1839년 12월 7일에야 비로소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처리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러지는 사진으로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헬리오 그라프와는 달리 인간의 눈으로도 관찰하기 힘든 세부 디테일까지도 보여주는
놀라운 사진기법이었다.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파리의 템플큰길"(1839), Daguerre
은으로 도금해서 광택을 잘 낸 구리판을 사용한다. 상자에 요오드 결정체를 담아놓고 은이 도금된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구리판을 적신다. 그러면 [요오드 증기 + 은 -> 요오드화은]이 형성되어
구리판에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광선의 강도에 따라서 요오드화은을 은으로 환원시켜 상을 형성시킨다.
상자에 가열된 수은을 담아놓고 노출시킨 구리판의 은면을 아래로 향하여 수은 증기와 반응하도록 한다.
수은 증기와 반응하면 광선에 노출된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어 상이 생성되나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지 않아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상이 생성된 판을 진한 식염수 속에 담근다.
이 과정을 통하면 더 이상 빛의 작용을 둔감하게 하기 때문에 태양 광선아래 다시 내어 놓아도 변하지 않고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척후 건조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직접 양화방식(Positif direct)으로서 니엡스가 발명했을 당시의 희미한 이미지를
뚜렷히 드러내어 선명도를 높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다게르는 10년전의 니엡스와의 계약관계가 계속 유효하였기 때문에 니엡스와의 발명과는
별개의 발명으로 남고자하여 니세포르 니엡스의 아들 이시도르 니엡스에게 액면가격 1천프랑짜리 주식 4백매를
발매하여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므로써 다게레오 타입은 다게르만의 독창적인 발명으로 남게되었다.
초기의 다게레오 타입은 노출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 시간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나 사람들을
촬영하고 나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주로 건축물이나 풍경등 주로 고정된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사진 촬영에 임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나 가족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하여 초상사진도 제작되었다.
그당시 초상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 앞에 않은 사람들은 10분에서 20분 가량 처음 취한 자세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초상사진이 완성될 수 있었기에 초상사진에 찍히는 인물들은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고 이렇게 어렵게 얻어진 사진들을 보면 고통스런 표정이 가득하였다.
또는 오랜동안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함이 불편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사진을 완성하고자 하여
강한 빛을 인공적인 방법으로 거울로 반사시켜 조명을 주는 방법도 채택되었으나 이또한 조명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초상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게르는 마지막 이 초상문제에 더 이상 혁신적인 개발을 이루지 못하고 1851년에 사망하였다.
1840년 후반에는 다게레오 타입에 세가지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통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비엔나의 피터 프리드리히 포히틀랜더(Peter Friedrich Voigtlander)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다게르의 렌즈보다 22배나 더 밝은 개량 렌즈를 선보였다.
이 개량 렌즈는 독일렌즈(Germn Lenses)라고도 불렀는데 이 렌즈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되어있어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되었다.
두번째 기술개발은 런던의 존 프레드릭 고다드(John Frederick Goddard)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을 요오드화은으로 감광성을 입히는 대신에 할로겐으로 처리하여 빛에 대한 감광도를 한층더
높여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세번째 기술개발은 프랑스의 이쁠리뜨 루이 피조(Hippolyte Louis Fizeau)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에 금염류(도금)로 덧입혀 명암을 풍부하게 만들어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부가적으로 도금을
통해서 표면손상도 덜 되어 견고해졌다.
이로써 가장 취약했던 노출시간은 1분정도로 줄어들어 초상사진이 보다 손쉬워졌고 명암도 탁월하게
표현되는 기술개발에 따라 초상사진관들이 많이 생겼고 그 생산량면에 있어서도 급증하였다.
1840년에서 1841년 사이에는 대도시 위주로 많은 사진관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섰고 따라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은 폭락하고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초상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의 초상사진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에서 출발하였지만 19C에 이르러서는
소아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서 가족사진 또는 초상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더욱 높아졌다.
위에서 살펴본 다게레오 타입의 큰 특징은 빛의 세부묘사가 풍부하여 선명도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고 명암의 대비가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원판이 단 한장으로 끝나서 복제가 불가능 하였고 광택을 입힌 구리판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정 각도로 기울일 때만 잘 보이지 다른 각도에서는 잘 안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판에 은을 입혔기 때문에 가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화되는 판의 두께가 얇아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물론 도금을 통하여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발전이 있기는 했으나 이또한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독한 수은 증기 때문에 많은 사진사들의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단점이 많았지만 다게레오 타입만의 풍부한 세부묘사와 선명도가 훨씬 독보여
제한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다게레오 타입은 소개된 각 나라와 지방마다의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나 미국에서 가장 크게 유행하여 많이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다게레오 타입이 제작된 것에 비하여 원판들에는 만든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현재는
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아마도 판화가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짐작하게 되는데 다게레오 타입과 같이 선명한
사진으로 인해 판화가 더이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판화가 쓰이는 경우는 다게레오 타입이 다른 방법으로는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복제를 위한
수단으로 한 걸음 후퇴하여 판화기법을 도입하였다.
다게레오 타입의 기술적인 특수성에 때문에 또다른 특수성. 즉 미적인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게레오 타입은 현실을 기록하는 기술적인 발명에 불과했다.
칼로타입(Calotype)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술이 발표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에 발표된 칼로타입은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리스어의 '아름다운 그림'이란 뜻을 지닌 칼로타입은 감광처리된 종이를 사용하여 상이 생길때 까지
빛에 계속 노출시키던 방법을 개선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감광성을 띈 종이에 잠상을 맺게하여 나중에
화학처리 과정에서 상을 볼 수 있게하는 것이다.
즉 극소수의 입자만이 직접적으로 은으로 환원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입자들은
현상과정에서 증폭되어 은으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칼로타입의 제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질산은과 옥화칼륨 용액속에 각각 종이를 담궈 옥화은을 형성시킨다.
몰식자 + 질산은을 혼합하여 '몰식자 질산은'이라는 혼합용액에 위에서 적시었던 종이를 담궈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시킨다.다시 몰식자 질산은에 종이를 세척하면 상이 서서히 떠오르게 현상된다.
초에는 취소칼륨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뜨거운 하이포 용액을 사용하여 상을 정착시킨다.
현상된 종이 네가티브를 다른 감광성 종이에 밀착시켜 햇빛에 노출을 주고 인화한다.
지금의 밀착인화와 같은 원리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칼로타입은 1841년 2월 8일자에 탈보트에 의해서 특허를 취득 할 수 있었고
이어 1844년 6월과1846년 4월에 런던에 있던 롱맨 출판사와 브라운 출판사. 그린 앤드 롱맨즈 출판사가
《자연의 연필 The Pencil of Nature》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의 특징은 주로 건축이나 정물 등 움직임이 없는 사물이 많이 실려있으며 또한
네덜란드파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일상에서의 장면들을 주제로 많이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기록위주의 다게르 사진과는 다르게 미를 주체적으로 창출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중에서 <열린문 The Open Door>를 예를들어 보면 집안의 창고문이 열린상태에서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로도 미적감각이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열린문 The Open Door" , The Pencil of Nature Plate VI (1844),
by William Henry Fox Talbot
탈보트에 의해서 고안된 칼로타입을 예술적 형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과 로버트 아담슨(Robert Adamson)이었다.
에든버러의 화가였던 힐과 스코틀랜드의 회화 아카데미 서기였던 아담스는 1843년부터 1848년
아담슨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작업을 하였는데 이들은 사진에 대한 공동작업의 창시자로서
화가인 힐이 구도를 정하고 기술자인 아담스가 촬영을 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들이 공동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스코틀랜드자유교파 설립시 에든버러의 집회에 참석한 457명의
집단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힐에게 맡겨지면서 힐이 이때 사진술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에든버러에서
전문 사진관을 열었던 아담슨에게 도움을 청하여 집단 초상사진을 만들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6년동안의 기간을 통하여 1500점 정도의 음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들의 사진에서는 회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며 또한 사진속의 모델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여 단순 기록성의
사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칼로타입에도 기술적인 개선이 있어왔는데 여기서는 세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첫번째로 종이에 감광성을 입히기 전에 밀랍을 입혀 선명도를 높이는데 공헌 하였다.
그 과정을 볼 것 같으면 금속판에 밀랍을 입힌뒤 금속판에 종이를 눌러 밀랍을 밀착시킨다.
습기를 제거하고 옥화칼슘과 질산은 용액에 각각 종이를 적셔 감광성을 부여한뒤 노출을 시킨다.
그리고 후에 몰식자산 용액으로 현상을 하면 깨끗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기술적인 개선으로는 책이나 앨범등에 사용하기 위한 복제사진의 대량 생산이라는 점이다.
블랑까르 에브라르(Louis Desire Blanquart-Evrard)는 인화시간을 단축시키는 인화지를 개발하였는데
이 인화지를 이용한 사진집에는 <사진앨범 Album Photographique> 과 1852년의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 가 있다.
특히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에서의 사진은 문인이었던 막심 뒤 깡(Maxime Du Camp)이
중동지역을 여행하명서 촬영했던 음화를 인화한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아마츄어였던 막심 뒤 깡이
과거의 여행을 통해 잊고싶지 않은 장면들을 남겨두고자 하는 욕망에서 제작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미국의 고고학자였던 존 그린(John B. Greene)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1854년에<나일강 : 기념비, 풍경, 사진적 탐험 Le Nil : Monumente, Paysages, Explorations Photographiques> 에 나일강 연안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고대 이집트 유적들을
칼로타입으로 제작하여 사진집을 펴냈다는 것이다.
위와같은 칼로타입은 지금의 폴라로이드 방식처럼 은판으로 영상을 정착시키는 은판기법(Plaque Argentee)인
다게레오 타입에서 음-양화기법(Processus Negatif-Positif)인 칼로타입으로 네가티브로된 몇장의
사진의 복제가 가능해져 보통사진의 기점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좀더 들어가 칼로타입의 실용적인 측면을 살펴보겠다.
영국에서의 칼로타입은 1852년이 될때까지 탈보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칼로타입의 자격증 소지자에게만
쓰도록 허용하여 이를 어길시에는 가차없이 고소장이 법원으로 날라갔으므로 거의 실용화되지 못하였고
미국에서의 칼로타입은 미국인들이 즐기던 다게레오 타입을 단정적으로 무시했다는 점과 칼로타입 사용시
영국과도 같은 방법으로 특허료를 지불하는데 반발이 생겨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홍보가 부족하기는 했으나 다게레오 타입처럼 번들거림이 없어
고상하게 보인다하여 많이 애용하였다.
또한 칼로타입은 운반면에서나 조작면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그 과정이 쉬운 편이었고 색체반응에도
탁월한 특징이 있으며 완성된 사진에 색덧칠도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게레오 타입처럼 은염류를 입힌 판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사용하여 비용이
절검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콜로디온 습판법 (Collodion Wet-Plate) 콜로디온 습판
1851년에 개발된 콜로디온 습판법은 영국의 조각가였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에
의해서 고안되어 1851년부터 젤라틴 건판이 나오기 시작한 1880년에 이르기까지 사진계를 장악했다.
처음에는 초상사진가들이 사진을 찍기위해서 칼로타입을 응용할 경우 특허료를 지불해야만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점차 콜로디온 습판 프로세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들이 부각되어 인기를 누렸다.
칼로타입에서 쓰였던 종이류가 선명성 부분에서 뒤지자 종이 대신에 유리를 사용할 생각을 하게되었고
이어 유리판에 은염류를 접착시킬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달팽이의 끈끈한 점액질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으나 최초로 성공을 거둔 것은 계란 흰자위인
알부민(albumin)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이 알부민을 이용하는 방법은 1847년에 니엡스의 조카인 끌로드 펠릭스 아벨 니엡스 드 생 빅토르(Claude Felix Abel Niepce de st Victor)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한가지 단점이라면 빛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져
자연적으로 노출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또는 노출시간은 짧게 하는 대신 현상과정에서 현상시간을 늘려줌으로써 만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알부민은 빛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져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다만 건축사진과 같이
고정된 상 앞에서 긴 노출시간을 주어 완성하는 사진에서 주로 이용되었다.
새로 발견된 것이 콜로디온이라는 재료인데 이것은 알콜과 에테르에 니트로셀룰로스를 녹여만든 점액질 용제이다. 이것은 원래 인체의 손상된 피부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의학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콜로디온은 빠른 시간내에 건조되어 방수막을 띤 막을 형성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젖은 상태에서는
점액질이지만 건조하게 되면 단단하고 투명해졌다.
따라서 유리판에 유제를 바를때 손가락과 손목을 매우 유연하게 움직여 알맞은 시간조절로 콜로디온이
마르지 않고 골고루 퍼지도록 해야했으며 콜로디온이 건조해지기 전 축축한 상태에서 노출과 현상과정을
끝내야만 했다.
따라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으려면 완전한 암실을 형태가 바로 옆에 밀착되어 있어야 했다.
특히 야외촬영을 나갈때는 사진을 찍는 장소마다 암실 전체를 운반해야 하는 수고를 치뤄야만 하나의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로디온 습판은 다게레오 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복제 가능성과 칼로타입에서 이룰 수 없었던 정밀함 이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랜동안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다음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하는 과정이다.
이 방법으로 얻어진 콜로디온 습판은 네가티브 - 포지티브를 만드는데 모두 사용되었다.
콜로디온에 옥화칼슘을 첨가하여 유리판에 입힌다. 유리판을 질산은 용액에 담근다.
은이온과 옥소이온이 반응하여 콜로디온 조직 내부에 옥화은이 생성되어 감광성이 부여된다.
감광판이 축축한 상태에서 카메라에 넣고 노출을 준다.
초성몰식자산 속에서 현상을 한다. 정착, 세척후 건조시킨다.
콜로디온 습판은 이후 크게 세가지로 응용되어 사용되어졌는데 우선 첫번째가 암브로 타입(Ambrotype)이다.
암브로 타입은 콜로디온 습판에 의해 형성된 상을 양화로 전환시키는 방법으로 은의 침전 상태는 밝고
그림자 부분은 투명한 음화의 상태에서 뒤쪽에 검은 종이 같은 것을 대면 양화로 보이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 방법은 1839년에 존 허셜경이 주목하면서 연구되었고 결국 1854년이 되어 대중에게 발표되었다.
암브로 타입은 다게레오 타입과 같은 광택을 지니고 있었으며 제조가 쉬웠으나 콜로디온 습판의
또하나의 응용방식인 틴 타입에 의해서 단명하였다.
콜로디온 습판의 두번째 응용방법은 틴타입(Tintype)또는 메레노타입(Melainotype), 페로타입(Ferrotype)
이라고도 불린 방식으로서 콜로디온에서 쓰였던 유리대신 종이처럼 얇은 금속판에 감광제를 바르고 검은색을
칠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 방법은 해밀턴 스미드(Hamilton L.Smith)에 의해서 고안되어 1856년에 특허를 취득하였다.
틴 타입이 인기를 끈 이유는 초상사진에서 고객이 기다리는 동안에 즉석에서 제작이 가능하였고
표면이 견고하며 다중렌즈 카메라등으로 촬영하여 여러장의 상들이 한번의 과정에서 나올 수 있어
가격도 저렴해져갔다.
그러나 틴 타입 방식으로 찍은 사진들은 주머니에 들고다닐 정도의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초상사진등에서는
많이 이용되었으나 풍경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작아 풍경사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암브로 타입이나 틴타입은 모두 콜로디온 습판을 응용한것으로 콜로디온 습판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영향이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다게레오타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기술은 세번째 응용방식인 명함판 사진이었다.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은 당시 유아사망율이 늘어나고 친구, 친지들의 단명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어 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또는 서부 개척자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에 있는 가족,
친구들을 이어주는 하나의 고리로서 명함판 사진을 찍었다.
명함판 사진은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 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따냈는데 그는 명함판 초상사진을 대량 생산체제로 이끈 장본인으로 렌즈가 여러개 달린
카메라를 이용하여 한장의 음화에 여러개의 포즈를 찍어 인화지를 절단함으로서 여러장의 사진을 완성하였다.
명함판사진은 말그대로 보통 명함과 크기가 비슷하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크기는 4*2.5 인치로 대개 전신상이
제작되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모방이 간단하여 기술자적 성향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사실상 명함판 사진에서는 초상사진으로서의 예술적인 심미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묘한 조명의 효과나 모델이 되는 사람의 자세나 표정등으로 성격을 보여주는 노력없이 단지
기록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 한장한장에 주의를 기울이지않고 상업성을 바탕으로 단지 찍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명함판 사진은 1860년경에 와서는 친척, 친구, 유명인사들의 명함판 사진들을 수집하여
앨범화하는 작업으로 많이 진행되었다.
초상사진 (Portraits)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자 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적 욕망으로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다.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려면 초상화가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초상화의 경우 왕실이나 귀족 등 대개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루이 마예, 에르네스트 마예 형제의 경우 채색 초상사진을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사진 수정작업에 앞장섰는데
그들은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층 엘리트들 대상으로 적극적 상업전략을 펼쳐 성공을 거둔 사람들로서 후에는
황제의 전속 사진가가 되어 황실의 지원을 받아가며 여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게되었다.
초상사진이 본격화되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받은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자 초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다량의 초상화를 그려야했는데 공급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
결국 사진을 이용하에 자신의 모습을 최단시간내에 그려냄으로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는데 다수의
부르주아 집단들의 초상사진을 신분 과시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에 등장한 초상사진의 경우
귀족임을 드러내는 소품들 예를들면 금장식이 되어있는 고급 의자, 커텐등이 필수적으로 이용되었다.
평민들 중에서도 재정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신분에서 한단계라도 끌어올리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초상사진의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가르켜 대중이라 지칭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유아사망율이 증가하고 전쟁터에 나간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오랜시간 혜어져 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상사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명함판 사진의 주요 고객으로 이제 대중들이 되었다.
더이상 지식인, 예술인, 부르주아들의 장식품으로서의 명함판 사진에서 벗어나 대중으로 고객층이 바뀌었다.
따라서 명함판 사진은 여러분야의 사진가들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이익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명함판 사진이란 렌즈가 4개 또는 6개 달린 카메라를 이용하여 한장의 음화에 여러개의 포즈를 찍어
인화지를 절단함으로서 여러장의 사진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디스데리의 경우 단기간의 데생수업만으로 사진업계에 뛰어들었지만 자신의 사진관을 파리에 차리고
얼마되지 않아 대형 사진관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져버리고 상업적 사진가로 남아 황실에서 부터 하층 부르주아까지도
고객으로 삼아 그들의 요구에 따라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진을 제작하여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명함판 사진은 말 그대로 보통 명함과 그 크기가 비슷하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크기가 4*2.5인치로
대개 전신상이 제작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명함판 사진은 모방이 간단하여 기술자적 성향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사실상 명함판 사진에서는 초상사진으로서의 예술적인 심미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명의 효과와 모델이 되는 사람의 자세나 표정등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노력없이
단지 기록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사진 한장 한장에 주의를 기울일 틈없이 단지 찍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함판 사진은 단순한 개인 기록 위주의 사진이었다.
단순한 기록성 초상사진에서 벗어나 예술적, 창조적 초상사진은 대형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랑스의 나다르(Nadar)에 의해서 이룩되어졌다.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Gaspard Felix Tournachon)로서 본래
그의 직업은 신문 풍자 만화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때 풍자 만화가 금지되어 사진가로 전업하였다.
풍자 만화가로 활약할 당시 인물의 성격을 직약적으로 들어내는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야 했기 때문에
풍자 만화가였던 때의 솜씨를 발휘하여 사진을 찍을 때에도 모델이 되는 사람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창조적인 목적으로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당시 초상사진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귀족풍의 화려한 장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지만
나다르의 사진 스타일은 장식이 없이 모델이 무배경 앞에서서 포즈를 잡아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보통의 초상사진 처럼 전신상 위주가 아닌 신체의 3/4정도로 카메라에담아 촬영하는 것이
그의 사진의 특징이었다. 다음의 글은 나다르의 사진촬영에 대한 생각이다.
"사진이론은 단 한시간이면 배울 수 있고 기술적 기술은 단 하루면 익힐 수 있다.
그렇지만 가르쳐서 될 수 없는것은 빛을 읽는 감각이다.
누구도 사진 찍히는 사람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한 인간의 보다 내면적이고 심오한 차원에서 담은 사진을 제작하려면 즉시 그의 정신세계로
뛰어들어가 그의 기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다르는 감각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다.
이처럼 초상사진으로 상업적 사진의 세계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자신의
작품에서도 예술적 심미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업상 뒤지지 않고자 많은 양의 초상사진을 제작하면서
사진의 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당시의 사진관들과 경쟁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희생시켜 상업적 사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육성하였다.
또한 나다르는 실험정신이 매우 강했던 사람으로 초상사진 작업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가지 새로운것을 추구하였다.
그중에서도 초상사진에 인공 광원인 전기조명을 도입하여 촬영한 최초의 사진가들중 하나로 남기도 했으며
또 1858년에는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최초로 공중 촬영을 시도하여 파리를 촬영하여 공중사진의 길을
열어놓은 장본인 이기도 하다.
또한 1861년에는 파리시의 지하묘지인 카타콤(Catacomb)과 하수도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다르 부인 The Photographer's Wife" (1853), by Nadar
초상사진에 있어 또하나의 길을 넓힌 사람은 영국의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이다.
그녀가 카메라를 처음 잡은 시기는 그녀의 나이 48세때 딸과 사위로부터 한대의 카메라를 선물받으면서 부터였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사진기를 잡는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들이었는데 카메론의 경우는 아마츄어로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그 열정만큼은 프로들 못지 않았다.
카메론 사진의 특징은 나다르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포착하여 사진에 새긴다는 점이고
또한 여성으로서 부드럽고 아름다움보다는 힘과 박력을 중심으로 사진촬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카메론의 초상사진에 모델들의 개성, 특성을 살려 촬영할 수 있는데에는 모델이 되는 인물들이
그녀의 가족이나 주변의 친구, 친지들로 이루어져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메론과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밀접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초상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모델이 되는
인물들의 성격을 평상시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깊은 애정과 이해, 통찰등이 이루어졌으므로
사진속에 그들의 특성이 뭍어나올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찍은 초상사진을 보면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수 있을 것이다.
또한 1867년에 찍은 토마스 카라이(Tomas Carlyle) 초상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역동적인 힘과 박력이
그녀 사진의 특징이다.
"허버트 듀크워드 부인 Mrs. Herbert Duckworth" (1867), by Julia Margaret Cameron
그리고 카메론이 추구했던 사진 기법으로는 사진에서 초점을 흐리게하여 주변을 뿌옇게 하여
선명하지 않은것을 도입했었는데 그것은 기술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대하는 효과를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해진 방법이다.
이것은 초상사진 뿐만 아니라 활인화라 불렸던 시대극적 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즉 가족이나
친구들이 카메라 앞에서 문학작품에서의 한 장면을 연출해 보이는 것을 통해 회화를 모방한 감상적
사진을 통해서 선명하게 처리하기 보다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카메론이 이러한 사진 기법을 도입하여 회화적 느낌을 부여한 것은 사진의 초점을 흐리게
함으로써 고상함을 불어넣어 예술적 측면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작업으로 카메론의 초상사진은 현존하는 초상사진들 가운데 가장 품위있고
인상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마도 카메론에 대한 이러한 평판들은 그녀가 상업적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함으로써의 사진제작이 아니어서
돈의 제약을 떠나 사진촬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침으로서 가능했던 것같다.
즉 카메론에게 있어서 사진은 수입원이 아니었고 예술적 표현수단의 하나로 밖에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사진 (War Photography)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단지 귀향하는 군인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거나
시나 문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간접적 경험에는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사진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가장 생생히 느낄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진의 가장 큰 특징인 선명함과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전쟁 상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처음 전쟁을 기록한 것은 1855년 크리미아 전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후 1861년 미국의 남북전쟁, 1936년의 스페인 내란과 중일전쟁, 이어서 제2차세계대전,
1950년대의 한국전쟁, 1965년 베트남전쟁 등이 일어날 때마다 사진은 이용되어왔다.
초기에는 전쟁을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낭만적인 장면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인간이
벌여놓은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장면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각종 포토 저널리즘들이 생겨나면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독자들에게 전쟁 상황을 어떤한 설명이나 글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한다.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Roger Fenton)
로저 펜튼은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크리미아 전쟁에 파견되어 전쟁을 제일 먼저
광범위하게 사진으로 보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법률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진가로 전업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다.
그가 사진가로 명성을 얻고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초기에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할 당시 기본 바탕은 콜로디온 습판법을 고안했던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의 방법을 지켰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수정을
가하여 감광처리 함으로써 유명해져 대영 박물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면서 부터이다.
펜튼이 대영 박물관 사진가로 제직시 그의 탁월한 사진 솜씨가 인정받아 1855년에 발발한 크리미아 전쟁의 현장
사진을 제작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영국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전쟁터에
가족이나 친지들을 내보내고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펜튼 사진에는 흔히 전쟁사진에서 보아왔던 참혹한 시체들이나 공포스런 공격장면 보다는
광할한 평원과 치료를 받고 있는 병사, 제복입은 사관이나 민간이의 초상사진 등이 대부분이어서
비극적인 전쟁을 표현하기 보다는 대개 낭만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펜튼의 크리미아 전쟁 당시의 사진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촬영한 사진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해
보이는 전쟁터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타임즈지에서도 그를 표현하기를 「현대 군대의 뒤를 추적했던 이 사진가는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 널려 있는 정물이나 병사들의 휴식을 담아내는데 만족했다.」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광할한 평원에 밋밋하고 매우 단조로워 보였던 그 사진들도 사실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제작한 사진이었다.
더욱이 펜튼이 사용한 사진법은 콜로디온 습판법이었기 때문에 모든 암실장비와 약품들, 그리고 몇백장에
이르는 유리 감광판들과 카메라를 늘 소지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마차를 이용하여 암실을 차려놓고 폭탄이
투하되고 있는 전쟁상황 속에서 이동하며 사진을 제작하였다.
암실 마차의 크기가 적의 목표물이 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웬만한 열성이 아니면 사진을 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전쟁에서의 매튜 브래디(Mathew B. Brady)
Chaplain conducting mass for the 69th New York State Militia encamped at Fort Corcoran, Washington, D.C., (1861) by Mathew B. Brady.
미국의 남북전쟁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튜 브래디이다.
브래디는 당시 유명한 초상 사진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1861년에 발발한 남북전쟁에
순전히 브래디 개인의 투자에 의해서 남북전쟁에 가담하여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
심지어 사진사까지 브래디 자신이 고용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
티모시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조지 바너드(George N. Barhard)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브래디는 자신이 고용한 사진가들을 신임하지도 않고 그들이 직접 찍은 음화조차도
소지하지 못하게 하여 불화가 생겨 가드너와 오설리반은 브래디와 결별하는 등 그의 작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을 보면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로저 펜튼이 보여주었던 낭만적인 전쟁사진과는
달리 폐허가 된 전쟁터에 나뒹구는 시체들, 상처를 입은 군인들의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 폭탄이
휩쓸고간 자리, 치열한 전투장면들을 위주로 냉혹한 전쟁터를 한껏 표현하였다.
사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초기만 하더라도 사진가나 예술인에게 있어서 전쟁터는 하나의 좋은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 생각할 만큼 여유로웠으나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에서는 그럴만한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의 특징이라면 콜로디온 습판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선명도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명확하고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공포스러운 전쟁터의 분위기를 사진의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참혹한 전쟁에서 낭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촬영해 로저 펜튼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래디 역시 폭탄과 총소리의 괴음이 들리는 전쟁터에서 콜로디온 습판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사진장비를 실은 마차로 전쟁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역사적 현장을 목숨걸고 사진으로 제작하였다.
브래디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자신이 제작한 전쟁사진을 판매하려 하였으나 예상밖으로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끔찍했던 전쟁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는 상황아래 당시 전쟁 상황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는
사진은 더 이상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브래디 자신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인 투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진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한 개인의 의지로 한 시대의 중요한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을 이루는 공로를 세운 셈이다.
19C 예술사진 (19C Art Photography)
1839년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에 의해서 고안된 다게레오타입이
사진으로써 최초로 실용화된 이래로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 발전되었다.
그 하나는 실용적인 목적으로서의 기록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인 표현으로서의 예술사진이다.
특히 예술사진에 대한 언급은 1850∼1870년대에 걸쳐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 얻어낸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는 부류는 물리적 연계가 사진예술의 특수성이라 생각하고 그런 특성을 바탕으로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디테일한 세부묘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진이 또하나의 산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부류는 작가의 손이나 정신에 의해서 직접 제작되지 못하고 기계적 자동성에 의존하여
하나의 이미지가 세겨진 사진, 그리고 인화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사진이 기록성과 예술성으로 나뉘어져 별개의 것으로 발전되는 가운데 1853년 무렵부터
사진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록이나 회화를 위해 쓰여지는 도구로써의 사진은 인간의 이상을 표현하지 못하고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시간에 대한 표현을 나타내지 못하여 더이상 예술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 당시 예술로서의 의미를 부각시켰던 표현은 회화적 기법을 도입하여 단순히 즐기는 것 보다
교훈적이고 정신을 맑게 순화시킬 수 있는 표현을 하기 바랬던 것이다.
즉 "전혀 사진같지 않다."라는 평을 받는 것이 곧 예술사진으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진의 본래 특징보다는 화가가 그린 한편의 그림같은 사진이 유행하였다.
그림같은 사진을 제작하는 방법중 하나는 여러장의 음화를 따로 따로 촬영한뒤 한장의 인화지에
한꺼번에 조합하여 인화하는 방법인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와 이중노출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문학작품의 한장면을 연기자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활인화(Tableaux Vivants)나
소인극(Amateur Theatricals)과 같은 것을 사진으로 제작하면서 작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연출하여 여러장의 음화들을 조합인화로 짜맞추어 갔던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여 고상함을 나타낸다든지, 입자를 거칠게 하여
회화와 같은 표현을 한다든지, 톤을 변조시켜 회화를 복제한 것 처럼 만드는 것을 예술로 여기고 있었다.
귀스타브 르그레
1856년 파리에서 극적인 바다풍경 사진으로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의 효시가 되었다.
이 사진은 여러장의 음화를 중첩시켜 인화한 것으로 하늘에 노출을 맞춘 음화, 파도에 노출을 맞춘 음화,
바다에 노출을 맞춘 음화등 완벽한 하나의 사진을 만들어냈다.
오스카 G. 레일랜더 (Oscar Gustave Rejlander)
귀스타브 르그레가 조합인화의 효시였다면 오스카 G. 레일랜더는 조합인화를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레일랜더의 조합인화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57년에 완성된 <인생의 갈림길 The Two Ways of Life>
이란 제목의 사진인으로 내용인 즉, 중간에 현인이 서있고 양옆으로 두 청년을 주축으로 한 청년은 고요,
자비, 종교, 근면, 미덕이 표현되어 있는 길쪽으로 향하고 있고, 다른 한 청년은 현인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망기, 죽음, 자살, 도박, 술 등의 쾌락쪽으로 향하고 있는 조합인화 사진이다.
한장의 사진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상 30장의 음화를 따로 떠로 제작하여 짜맞추어 나간 것이다.
사실 <인생의 갈림길>은 1857년 맨체스터에서 열릴 전시회 목적으로 제작하였는데 이 전시회는 19C에
가장 중요한 기획물 중 하나였으므로 예술적 작품만이 전시가 가능하였다.
그 당시 일반 사진은 기록성 중심의 진실재현을 하거나 또는 회화를 도와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류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서 일반 사진으로는
맨체스터 전시회에 출품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의 갈림길>에서와 같이 교훈적인 내용과 정신 순화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예술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1860년에 제작한 <시련 Hard Times>은 최초의 의도적 이중노출 사진으로 남겨졌다.
시련의 내용은 얼핏보면 가난한 집안의 병든 아내와 아들 옆에서 고민하는 남편의 모습이지만 사실
남편의 머리속에는 다른 여인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사진이다.
이러한 레일랜더의 사진들은 현재에 와서야 회화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진의
예술성이 인정되는 과정에 있어서 당연히 필요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의 갈림길>은 영국 왕실에 판매된 최초의 사진작품이 되었고 그것은 영국인들의 사진에 대한
가치관을 아주 높여주었으며,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인생의 갈림길 The Two Ways of Life" (1857), by Oscar Rejlander
헨리 피치 로빈슨 (Henrry Peach Robinson)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헨리 피치 로빈슨은 1852년부터 사진작업을 하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1858년에 제작한 <임종 Fading Ways>로
이 사진 역시 조합인화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임종'은 총 5장의 음화로 구성된 조합인화 사진으로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한 소녀를 부모들이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출에 의해서 표현되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진의 기록성, 진실재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어져 있어
대중들을 더욱 슬픔에 잠기도록 한 작품이다.
로빈슨이 활동했던 당시 회화를 모방한 사진만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로빈슨 역시
최고의 회화적 효과를 지닐 수 있도록 화면을 배치하는 방법, 고상함을 유지하기 위해 주제에 적용할
법칙 등의 중심으로 1869년에 「사진에서의 회화적 효과. Pictorial Effect in Photography」를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예술사진을 제작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로빈슨은 사진 제작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최종구성을 위해서 미리 회화적으로 스케치하고
그 스케치한 내용에 따라 모델이 포즈를 잡고 사진을 따로 따로 촬영하여 한꺼번에 조합하는 사진.
즉 조합인화 방법을 사용하여 사진을 제작하는 것을 즐겼다.
"임종 Fading Away" (1858), by Henry Peach Robinson
자연주의 사진 (Naturalistic Photography)
1880년대에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에 의해서 새로운 운동이 펼쳐졌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주의 사진이다.
당시 사진계에서는 회화적 사진만이 예술로서 인정을 받았고 대부분의 사진가들이 회화적 수법에 따라
사진을 제작(합성사진, 이중노출, 일상생활에서의 감상적 관점, 경직된 포즈의 사진관 사진 등의
작위적 사진을 말함.)되었던 상황에서 사실적 사진으로 승부수를 걸고 그때까지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최초의 운동을 펼쳤다는데에 의의가 있다.
자연주의 사진은 말그대로 사진을 보았을때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즉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야가 전적으로 고르지 않기 때문에 사진촬영에서도 사람의 시야와 같이
한 부분에 촛점이 정확히 맞으면 앞, 뒤로 어느정도 촛점이 안맞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인위적으로
카메라에서 시야 주변을 다소 흐릿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희미한 초점이 사진에 있어서 전체적인 조화를 깨뜨리거나
지나치게 눈에 띌 정도면 오히려 해롭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수선화 채집 Gathering Water Lillies"(1886),
by Peter Henery Emerson
사람의 눈에 자연적으로 맺히는 상처럼 사진도 그렇게 보이도록 하자는 에머슨식의 자연주의 사진은
오스카 G. 레일렌더(Oscar Gustave Rejlander)나 헨리 피치 로빈슨(Henery Peach Robinson)을
선두로한 '회화주의적 사진'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회화주의 사진을 단지 사진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라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회화로 전락시켜버리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따라서 회화주의에서 흔히 쓰였던 방식들 예를들면 합성사진이나 이중노출 또는 조명과 의상 등으로
꾸며진 장면을 연출하는 것, 완벽한 사진을 만들기 위하여 수정을 가하는 것, 경직된 포즈의 사진관
사진 등의 방식을 일제히 배격하고 사람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사진에 있어서 예술성과 사진의 크기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확대인화하는 것도 비난을 했다. 그렇다면 에머슨이 내세운 자연주의 사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장비를 단순화 시키고 사진을 회화로 전락시켜 버리는 모든 방식을 거부하고
단지 사람의 눈에 맺히는 상과 같이 최대한도로 비슷하게 보이도록 카메라의 기능을
집중시켜 인위적 조작없이 정직하게 표현하자는데 있다.
이와같이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에머슨의 대표작으로는 1886년에 촬영한
<수선화 채집 Gathering Water Lilies>가 널리 알려져 있다.
<수선화 채집>의 사진을 보면 1880년대 작품이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현재에도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선화 채집>는 자연주의 사진을 다룬 음화 가운데서도 첫번째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으며 또한
후의 많은 자연주의 사진보다도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강력히 주장했던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은 1891년에 가서는 사진은 더이상 예술이
아니고 '과학과 예술의 시녀'라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굳혀 자연주의 사진을 철회했다.
결국 자연주의 사진을 강렬히,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것 만큼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입장을
180도 바꿔 자연주의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술 전체에 대한 입장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술은 더이상 과거의 아름다운 예술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가운데서도 가장 낮게 평가해 버리고 말았다.
사진은 카메라에 의해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만 조정이 가능하거나 현상, 인화단계에서의 차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작가의 개성자체를 보여주기 어렵고 매우 한정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은 결국 에머슨 자신의 혼동속에서 일관되지 않은 주장을 펼쳤지만
자연주의 사진은 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에게 영향을 주어 스트레이트 포토를
탄생시키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또한 신세대 사진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사진 고유의 특성에 기초한 예술로서의 사진을
탐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데 더 커다란 의의가 있다.
포토 캠페인 (Photo Campaign)
전쟁으로 부터 시작된 다큐멘타리 사진은 역사적 사실성에 입각하여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전쟁이 종결되자 서부개척에 잠시 눈을 돌려 일련의 사진활동이 있었으나 곧 일상의 사회생활을 주제로한
다큐멘터리에 역점을 두었다.
포토 캠페인도 이 중 하나로서 당시 미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민 가족들은 상당한 문제거리로 등장하였다.
이는 정책적으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서 시각언어인 사진을
이용하여 설득하겠다는 것이 포토 캠페인 운동이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크게 두사람으로 꼽히는데 그들이 바로 자곱리스(Jacob Riis)와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이었다. 이들의 사진활동은 포토 캠페인을 가장 잘 대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또한 그 결과에 있어서도 사회개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므로 이 두사람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자곱 리스 (Jacob Riis) 1890∼1976
19c말경 덴마크 태생의 신문 기자였던 자곱리스(Jacob Riis)는 사회개혁을 위해서 사진을 이용한
최초의 사진가로 알려져있다.
1849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1870년 미국으로 이민와 뉴욕에서 슬럼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후 여러 신문사에서 유명 인사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사건 신문기자로 전전하다가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자기 주변을 둘러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폭로하고자 하나의 도구로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원래는 이들 소름끼치는 상태에 대해 글을 써서 도시보건성 공무원에게 호소하기도 했으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글보다 가장 호소력을 담은 시각언어인 사진을 선택하여 마침내 빈민굴과 셋방 건물 내부의 상태들을
사진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또한 사진이외에 1890년에도 <또다른 절반의 삶은 어떠한가 How the Other Half Lives>와 1902년의
<빈민가의 전쟁 The Battle with the Slum>이라는 제목의 저서들도 출간하여 사회개혁 운동의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그의 사진은 사회개혁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와 열악한
환경의 공장, 질병이 만연한 건물, 꽉차 넘치는 학교 등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이 사진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깨우기에 충분하여 집과 교육에 관한 복지 법률과 어린이 노동금지법을
입법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행하였던 일련의 사진작업이 예술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기 보다는 사실적 증거에 입각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진을 다루었기 때문에 뉴욕 슬럼가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선명하게
보이게하고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인간적인 짙은 이해와 감동이 담겨져 있어 여론에 불길을 당겨 정책적인
변화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사진으로서 정책적 변화를 일으킨 예는 리스가 처음이었으며
그 결과 리스를 슬럼가의 해방자, 복지 향상주의자라 불리었다.
"이탈리아 넝마주의의 집 Home of an Italian Ragpicker" (1888),
by Jacob Riis
루이스 하인 (Lewis W. Hine) 미국, 1874∼1940
본격적인 미국 다큐멘터리의 창시자로 불리는 루이스 하인은 1874년 위스콘신의 오슈코슈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을 나왔고 1901년에 윤리문화 학교의 과학 강의를 위해 뉴욕시로 와서 그곳에서 교재
보조자료로서 카메라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최초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엘리스 섬에 도착한 곤궁한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헤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곤궁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카메라 사용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아동 노동 조사위원회의 의뢰에 따라 사회 복지의 시점에서 아동 노동실태를 촬영했는데 후에
그의 사진은 아동 노동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주로 사회적 상황, 특히 어린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에 관해서 깊이 염려하여 20c초 미국 사회에 만연된
폐습을 개혁자들에게 사진을 증거로 제공하기 위하여 상황을 기록하였느데 그가 주로 촬영한 대상이 되는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면방직공장, 펜실바니아의 탄광소, 사탕무우밭과 통조림 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공업화 과정에 의해서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는 아동이나 그밖의 노동자들이 위축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촬영하였다.
미국내의 소년노동의 실태를 조사에 있어서의 예로서는 소년들이 서부의 석탄광산에서 노동하였으며 노동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석탄의 유독한 가스로 호흡기 질병과 철로레일에 위험이 계속되었다.
또한 남부의 목화공장에서 오전 6시경부터 호후 6시까지 힘든 일을 하였다.
안전표시판에 있는 경고문도 해독하지 못하고 위험한 기계에 의해 손이 절단되기도 하는 악조건에서
노동을 하면서 기껏해야 몇 푼의 돈으로 많은 식구들의 생활에는 여간 힘이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촬영에 임하였다.
특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의 복지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일터였던 비참한 노동 착취공장,
쓰레기통 더미에서 놀고 있는 철부지, 이주민들의 주거지가 될 지저분한 주택, 뉴욕시에 흉직하게
산재되어 있는 슬럼에 전락한 사람들 속에 직접 뛰어들어 자신의 주관적입장에서 강력하고 즉각적으로
납득될 만한 비판하게 되었다.
이 사진들은 인간기록(Human Documents)로 발행되었는데 그의 사진은 사회적 의미와 매락을
즉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후 그의 활동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고 1932년에는 <일하는 사람들 Men at Work>라는
사진집이 발행되었다.
이 사진집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세계 최고의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102층 빌딩
걸설현장(미국 뉴욕시 33번가로 부터 38번가에 걸친 부지 1931년에 완성)을 완공하는 그날 까지
노동 현장을 추적하여 촬영했다.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온 사진가로서의 하인은 촬영 방법에 있어서 아주 당당했다.
자신의 카메라에 들어오는 장면들로 부터 은밀히 찍지 않고 대형 뷰 카메라를 들고 일하고 있는
어린이들 속에 들어가 촬영하기도 해 고용주로부터 돌팔매질을 받기도 하고 사진기가 파손당하는 등
곤란을 겪는 등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일련의 작업들을 변함없이 행하였다.
"캐롤라이나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소녀 Girl worker in Carolina cotton mill" (1908),
by Lewis Hine
리스와 하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살면서 당시의 미국 사회적 현실에 눈을 돌려 그 현실에
감추어져 있는 모순의 근원, 특히 피지배자 계급으로서 국민들의 괴로운 생활 실태를 사진에 의한
캠페인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바우하우스 ( Bauhaus, 1919 ∼ 1933 )
20세기에 들어서 인류는 역사상 참혹했던 전쟁이 발발하였고,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이전의 어느시대 보다 더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단적인 시기를 살아오는 동안 예술가들의 감수성 역시 과거와는 다른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성과는 바로 추상미술의 등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20세기 전반기에 현대
추상미술을 발화시킨 작가들을 논함에 있어 바우하우스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각의 다양화와 함께 실험적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부류가 등장하였는데
이에 바우하우스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3월 20일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에 의해
독일의 바이마르시(Waimar)에 국립종합조형학교(Das Staatiches Bauhaus)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Bau'는 독일어로 건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시사하듯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분야의 총제적 조화를 꿈꾸었던 조형예술가들의 실험장이자 교육기관으로서의 조형예술학교였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조합적 조형학교로서 단지 하나의 전문인을 양성하는 곳은 아니었다.
공예, 디자인, 건축,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통합한 교육기관으로서 여기에 사진도 한 분야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형식주의와 만드는 사진의 근원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로피우스가 기초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선언과 강령을 볼 것 같으면
첫째로 예술과 생활을 융합하기 위해 건축을 중축으로 하는 제예술의 통합이념.
둘째 조형활동에 있어서 수공작을 중시이며 여기에 1923년
세번째 목표인 실용성을 기초로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통합이 부가되었다.
수공작을 중요시한 초기의 바우하우스에서는 기계기술과의 대결을 회피했으나, 전후 산업계의 눈부신
발전과 부흥은 바우하우스로 하여금 기계 기술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혁시켜 놓았다.
이러한 과제의 새로운 해결에 대해서 기하학적인 추상미술의 합법칙성은 잘 어울렸다.
그 뿐만 아니라 추상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장식이나 개성적 표현에서 해방되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전형미를 가능하게 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시에서 시작하여 뎃사우, 베를린으로 이사하며 결국 1933년 7월까지 14년에 걸쳐
운영되다가 독일의 Nazi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되기 전까지 약 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내었다.
폐교가 된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는 우선 대부분의 교수가 유태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라는 것으로
반 독일적으로 생각하였고, 또 실험적 모더니즘의 사고는 공산주의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폐교되자 이곳에 모여있었던 많은 미술가들은 프랑스, 미국, 스위스 등지로 저마다 뿔뿔히 흩어졌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남긴 발자취는 후대의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오늘날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할
선구적인 커다란 유산이다.
FSA (농업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1935∼1942
미국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신경제정책이었던 뉴딜정책(New Deal)의 실시를 위해 대공황기
속에 처해있는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한 부서의 명칭으로서 농업안정국 또는 FSA라 불렸다.
1930년대에 세계적인 경제공황이 불어닥치자 당시 농림부 차관이자 콜롬비아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렉스포드 테그웰(Rexford G. Tugwell)은 곤경해 처한 농부들의 재정적 지원을 해주기 위한 임무를 띤 기구의
우두머리로 세워졌고 터그웰은 그의 제자였던 로이 스트라이커(Roy E. Stryker)를 이 기구에 가담시켜
시각매체를 활용하여 지원하고자 농업안정국 산하에 사진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스트라이커에게는 미국 농민의 힘겨운 생활상을 심도있게 보도할 사진촬영 계획을 지휘할
임무와 역사분과의장의 임무가 주어져다.
그의 지휘아래 운영된 FSA의 사진단은 도로시어 랭(Dorothea Lange),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러셀 리(Russell Lee),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stei), 벤샨(Ben Shahn) 등과 같은 뛰어난
사진가들을 채용하여 사진부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공동작업을 펼쳤다.
이 사진단들이 주로 촬영한 농민들의 모습은 대개 소작인이나 소작농, 모래폭풍과 가뭄으로 인해
황폐된 대평원 지역의 여러 주로부터 피해 나온 이주민들의 문제들과 또 영세 농민의 경제적 문제들로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42년에 전쟁으로 인하여 FSA의 프로젝트가 종결되었을 당시 의회 도서관에는 무려
272,000점의 사진이 수집되어 방대한 다큐멘터리 컬렉션을 만들었다.
이러한 FSA 컬렉션은 당시의 사회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문예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결국
그것은 발흥하고 있는 포토 저널리즘과 시각적 의사소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주된 목표는 스트라이커가 하나의 길을 제시하였지만 본래 사진가가 아니었던 스트라이커는
장비나 기법을 비롯한 문제와 시각적 스타일 등은 각자 사진가들이 정하도록 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그는 사진에 있어서 초점, 필터, 분위기 등은 사진이 영상언어로 쓰이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있다.
이때의 사진은 그 주제가 특이하였고 묘사된 사건들을 담은 뉴스 사진이 거의 없었으며 질적으로나 기술적,
미학적으로나 모두 높은 수준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여러 서적과 잡지, 영화, 텔레비전 등에서 제한없이 널리 이용되어 우리에게 감흥을 불어넣는데
현재에도 프린트를 원할 경우에는 워싱턴 미국 의회도서관 등 공적기관에 콜렉션되어 있어 소정의 비용만
내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FSA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진작업에 임했던 사진가들의 활동모습을 보면...
워커 에반스 (Walker Evans)
이 기구에 고용된 최초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약 1년6개월에 걸쳐 FSA를 위해 활동하였다.
FSA에서 커다란 활약을 했던 남부를 여행하면서 토지의 조건을 기록했고 소작인의 곤궁한 처지와 그들의
가옥과 소유물, 그들이 일하는 방법, 수확한 농작물과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회 그리고 가계들을 위주로
기록하였다.
워커 에반스가 찍은 대부분의 대상은 누추한 빈민들 이었으나 그의 해석은 항상 위엄에 넘치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직접적인 정면시각으로 사진을 찍어 솔직하고 리얼리티한 방식으로 보여지도록 하였는데 에반스는
곤궁한 농민들의 생활상을 파악하고자 인물위주보다 그들이 생활상이 반영된 공간을 위주로 촬영에 들어갔다.
도로시어 랭 (Dorothea Lange)
다큐멘터리 사진에 한 획을 그은 랭의 사진세계는 주로 FSA에서 보여준 방식으로 끝까지 고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맡은 FSA에서의 주제는 이주 농민들로서 이를 가장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1936년작인 <Magrant Mother 이민 노동자의 어머니>이다. 이주 농민들의 생활과 그 상태를 기록한 사진으로 이주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주하며 생활하는 불쌍한 어머니가 텐트 속에서 어린애에 둘러싸인 모습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노동자의 삶과 얼굴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사진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의 기록과 정서적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책적인 이유로 시작된 다큐멘터리 기록적 사진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의 진실을
느낄 수 있도록 감동적인 해설서였기 때문이다.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 랭의 사진세계는 한 시대의
사건들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사진을 보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게해준다.
"떠돌이 이주민 어머니 Magrant Mother" (1936),
by Dorothea Lange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estein)
1935년에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최초의 사진가로 고용되었다.
1936년 오클라호마의 진흙 구덩이 지역으로 여행하던 중 그가 촬영한 것은 오클라호마 주의 키마론 군으로서
바람의 침식으로 인해 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아마도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자 가장 유명한
사진은 <모래폭풍 Dust Storm>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가 촬영한 모래폭풍 사진의 결과는 워싱턴을 설득시켜 침식과 한발이 강타한 대평원 지역에
정부의 원조를 보내도록 하는 뜻깊은 일을 한 것이다. 그는 또한 국토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기억될 만한 사진들을 찍으며 보냈다. 그중 <하얀 두개골 Bleached Skull>이라는 작품이 있다.
로드스타인은 미국인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의 가치를 확고하게 믿고 과거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도록 정부가 지속적인 지원으로 그 일을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밖에도 벤 샨(Ben Shahn), 러셀 리(Russell Lee), 칼 마이던스(Carl Mydans), 존 베이천(John Vachon),
매리온 포스트 월코트(Marion Post Wolcott), 잭 델라노(Jack Delano), 폴 카터(Paul Carter),
디어도어 정(Theodor Jung)등의 여러 사진가들이 활동하였다.
그래프 저널리즘(Graph-Journalis) 시대
인류는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이중 현대에 들어와서 미디어(매체)의 역활은 한층 중요한 영역으로 우리 생활 전반에 자리잡고 있다.
신문, TV, 영화, 통신수단을 활용한 대화 등 다양한 매체 중에서도 시각매체의 하나를 이루는 사진을 통해서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문화, 논설, 미술, 교육, 영화, 연극, 과학, 스포츠, 행사 등을 접하게
됨으로서 인간의 시각을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들의 구미를 충족시켜
줌으로서 문자를 통하여 '읽는 것' 보다는 시각매체를 통하여 한눈에 '보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보는 것'을 통하여 느끼고 이해하므로서 그 시대나 사회나 문화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어져 사진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그래프 저널리즘의 시대가 193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발돋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프 저널리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처럼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발맞추어 인쇄술과 복제술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룩될 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의 스테픈 헨리 호간이 발명한 하프톤의 제판술은 1897년에 이르러 본격적인 활자와 함께
사진을 인쇄할 수 있게되어, 이후부터 인쇄 매체를 이용하여 사진 보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8년을 전후해서는 독일에서 「베르리너 일루스트리르테 자이퉁」이란 주간 사진신문을 발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사진화보잡지인 「뷰(Vue)」를 발간하였다.
이와같이 유럽에서의 사진 저널리즘의 시도는 미국을 깨우치고 자극하여 「라이프(Life)」, 「루크(Look)」
등의 화보잡지가 창간되어 그야말로 그래프 저널리즘의 시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그래프 저널리즘들은 편집자와 사진기자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제(테마)가
결정되면 이를 면밀히 분석하여 어떠한 유형의 사진이 해당잡지에 요구되는지를 사진가에게 이해시켜
이를 토대로 촬영이 진행된다.
사실 말이 공동작업이지 편집자의 의도데로 요구하고 또한 이에 주제에 가장 합당한 사진을 엄중히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사진가와의 의논없이 편집자 독단적으로 행하는 것이 관례처럼 행해졌다.
작품의 선택, 레이아웃, 그리고 알기 쉬운 문장으로 갭션이 붙어지는 것 까지 모두가 편집자의 손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유기적으로 촬영한 듯한 관점으로 다루었다.
훗날 이러한 유통방식에 불만을 품은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을 인정받고자
매그넘(Magnum)이라는 새로운 사진유통체제를 형성시키기도 한다.
「 라이프(Life) 」
「라이프」는 그래프 잡지로서 1936년 11월 23일에 창간호를 발표했다.
「라이프」는 뉴욕의 타임(Time)사에서 발간된 것으로 타임사는 「라이프」가 발행되기 이전에 이미
뉴스 전문잡지인 「타임(Time)」을 1923년 3월에 발행하였고, 경제 전문지인 「포춘(Fortune)」을
1930년에 발행한 경험이 있었다.
「라이프」는 창간호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의 몬타나주 포트맥 부근에 건설중인
거대한 인공댐 사진을 표지로 하고, 제1면에는 제왕절개로 탄생한 아기의 사진이 <라이프는 시작되었다>라는
제목을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38만부를 발행하였고, 이후 제2호는 41만 5천부, 제3부는 46만부,
제8호에 이르러서는 창간호의 두배에 이르는 76만부에 육박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하였다.
「라이프」의 창간의 참으로 시기 적절한 때에 탄생된 그래프 잡지라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경제 불황과 함께 세계대전이 눈앞에 다가옴을 예감한 대중들의 위기 의식은 물론
글로 읽기도 하지만 눈으로 직접 한인하겠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이에 발맞추어 대량으로
사진인쇄도 가능케 됨으로서 주된 방향은 뉴스성에 두고 진행시켰던 것이다.
즉 세계각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해설한다는 포부아래 발행된 그래프 잡지이다.
「라이프」소속의 여러 사진가들 가운데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사진가는 유진 스미드(W. Eugene Smith)로
그 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함으로서 세계적인 사진가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유진 스미드의 대표작으로는 <시골의사>, <알버트 슈바이쳐박사>, 1951년 <스페인촌>, <조산부>,
1952년 <촬영중인 찰리 채플린>, 1624년 < 자비로운 슈바이쳐>, 1972년 <일본의 수은병> 등이 있다.
이중 <스페인촌>은 1951년 4월 9일자의 「라이프」에 17점이 게재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의 삶에 관한 일련의 사진으로서 그 마을의 진정한 분위기와 마을 사람들을 촬영한 것이다.
그의 사진을 보면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도보다는 다만 인간의 사랑, 행복,
평화를 확신하고 자신의 애정을 곁들여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유진스미드가 「라이프」지를 통해서 보여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포토 스토리(Photo-Story)
형식으로 발표한데 있다. 이는 기존의 단사진으로는 복잡 다양한 인간 생활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껴 몇 장의 사진을 나열하고 엮어서 하나의 주제나 스토리를 표현하는 형식이다.
단지 독립된 사진들의 나열만으로 그친다면 이것은 연작사진이 될 것이나 하나의 이야기
문장으로서의 역할을 사진이 한다는 의미에서 포토 스토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포토 스토리는
포토 저너리즘의 기본적인 형식으로 채택하고 있을 정도로 하나의 사진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유진 스미드는 성격이 곧고 고집도 센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결국 이러한 성격때문에
「라이프」와 결별하게 되었다. 유진스미드의 의도와는 다르게 편집자에 의해서 자신의 작품이
곡해된다고 생각하여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라이프」를 떠나 프리랜서로 활약하였다.
재정상의 이유로 「라이프」는 1972년에 자진 폐간되었다.
이는 또다른 영상매체인 TV의 등장으로 많은 광고 수입이 격감되었기도 하고, 다른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이후 1978년에 월간지로 변신하여
복간되었으나 내용이 예전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 이전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다.
"스페인 마을 Spanish Village" (1850),
by W. Eugene Smith (in LIFE April 9, 1951)
「 루크(Look) 」
「루크」는 1937년 1월 5일에 창간호를 발표했다.
사실 「라이프」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발표준비는 먼저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라이프」가 발표되고 대중들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했기때문에 의도적으로 발표시기를 늦추었을 뿐이다.
「루크」는 처음에 월간으로 발행하다가 5월이후부터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월2회로 격주간 발행하게 되었다.
창간호는 40만부가 발행되었으나 10일만에 매진되는 흥행을 거두어 최종적으로 83만 5천부가 발행된 셈이다.
제2호는 1백만부를 넘어섰고, 제18호에 가서는 2백만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라이프」보다 앞선 기록으로 비록 「라이프」가 주간발행에 비해서 「루크」는 격주간 발행이었지만
그래도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주된 방향에 있어서도 「라이프」와 「루크」와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라이프」의 경우 추구한 방향이
주로 뉴스성 위주였다면 <루크>에서는 뉴스성보다는 대중에게 감동을 위주로 인기거리 기사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설정에 있어서 잘 진행시켜 왔으나, 전쟁 후에는 대중들이 잠시 외면하는 터에 새로이
내셔널 홈 매거진(National home magazine)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점으로 인하여 다시금 활력을 되찾고 대중들의 반응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다.
1972년 재정사어의 이유로 「루크」의 화려한 활동은 폐간을 맞았다.
「라이프(Life)」, 「루크(Look)」는 당대 최대의 그래프 저널리즘으로 자리매김하여 수많은 저널리즘이
그래프 저널리즘으로 전화하여 약 1년동안에 Photo-History, Picture, Peak Photo, Now and then 등이
창간되어 매월 2천부가 넘는 Picture Magazine 열풍이 일어나 그래프 저널리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매그넘 (Magnum)
현대사진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집단이 있다. 1936년에 창간된 <라이프(Life)>와 그 보다
11년후에 1947 <매그넘(Magnum)>이 있다.
매그넘(Magunm)이란 단어는 라틴어로 '크다' 또는 '샴페인을 담는 큰 술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집단은 미국과 유럽의 뛰어난 보도사진가들로 구성된 자유 사진가 집단으로, 소속 회원들의 사진을
각 언론사에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창설된 국제적인 사진통신사이다.
<매그넘>의 소속 보도사진가들은 대전 후 세계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꼽히고 있다.
<매그넘>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출신의 앙리 까르띠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로버트 카파(Robert Capa),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데이비드 시모어(David Seymour) 등
세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이들이 <매그넘>을 창설하게된 동기는 1936년으로 창설되기 10년전쯤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모두 파리의 어느 신문사에 사진기자로 시험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을 하여 우연히
어느 술집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가족전 (The Family of Man)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25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행사가『인간가족전 The Family of Man』이다.
이 대대적인 사진전의 총괄 책임을 맞은 사람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스타이켄은 1947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 일을 맡았는데 그가 제임기간 중에 진행된
행사가『인간가족전』이고 행사의 총괄적 기획과 편집을 맡게되었다.
사실 제1차,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쟁사진들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개최한적이 있었으나 별로
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 동안 세계대전을 두차례나 겪으면서 전쟁이라는 처참한 상황을 기억저편에서라도 떠오르지 않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 전쟁사진들은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애초에 전쟁방지 의식이 커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전쟁상황을 잊고자 하던 시대였고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기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빨리 인식하고 "인간은 하나"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사진을
만국의 언어(Universal Language), 시각적 국제어(Visual Esperanto)로 인식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가족전 』은 2년여 정도에 걸쳐 준비하였는데 전세계의 남녀, 아마추어, 프로, 유명사진가,
무명사진가를 막론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평가하여 200만장의 사진을 모아서 그중 1만장을
프린트하고, 최종적으로 503장을 선정하였다.
이는 68개국의 사진가 273명의 작품으로 세계각지의 사람들의 생활공간이나 환경은 각기 다양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한 가족이라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선별하는 과정을 거쳤서 1955년 1월 26일을
기점으로 개막되어 5월 8일까지 4개월에 걸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인간이 태어나고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고 살다가 늙어서 죽는 인간사의 반복을 「인간가족전」은
영상언어로 보여준 것이 성공의 열쇠였던 것이다.
이 전시회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뉴욕뿐만 아니라 세계 85개 도시에 걸쳐 순회 전시회를 가져
약 7백만명이 관람했으며 이중에는 물론 한국에서도 1957년 경복궁 미술관에서 전시된바 있다.
『인간가족전 』의 내용을 볼 것 같으면, 40개의 작은 테마에 따라서 나뉘어져 우주창조, 사랑,
결혼, 출산, 육아의 순서로 발전하여, 인간과 환경과의 화해와 갈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밖에도 다양한 인간생활의 단면과 아울러 질병과 죽음의 과정을 보여준다.
평범한 인간사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 같지만 다시 고독, 종교, 전쟁, 굶주림 등을 표현하고 다음으로
수소폭탄의 폭발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두려움을 강조면서 국제연합총회의 장면이 뒤를 잇는다.
그 다음 테마는 세계 각국 부부들의 기념사진이 반복적으로 중첩시켜 나타내고, 가장 마지막에는
아래에 제시된 유진스미스의 사진으로 스미스가 세계제2차대전시 부상을 딛고 일어나 처음 촬영한
<낙원뜰에 이르는 길 A Walk to Paradise Garden>을 통해서 두 아이(유진스미드의 자녀)가 숲을
빠져나가 미래의 길로 향한다는 느낌을 주는 미래지향적인 사진으로 대막을 장식한다.
따라서 「인간가족전」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장보다는 비록 불신과 소외 속에서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작은 소망의 불씨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제작형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전시방법과는 차별화시켜 영상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원래 종래의 사진들은 낱장사진을 기본으로 한 미적인 요소를 추구하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
「라이프(Life)」나 「루크(Look)」지 등을 통해서 미적인 요소 보다는 사실의 전달이라는 요소를 더욱
중점적으로 함에 따라 좀더 대중에게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서 엮음사진(Series Photo)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래프 잡지들의 엮음사진들을 전시회에 응용한 그 첫번째가『인간가족전 』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래프 잡지들의 경우 대개 5, 6장의 사진들을 엮는 것으로 그쳤으나,『인간가족전 』에서는
하나의 테마아래 503장의 사진들을 읽어나가듯이 엮음으로써 엮음사진보다 더 큰 개념의 군사진이나
복수사진의 개념이 새로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평면적으로 엮은 영상언어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자 전시방법에 있어서도 특이한 점을 보인다.
예전의 일상적인 전시회처럼 일렬로 벽에 걸어서 전시하던 고전적 방법을 한단계 응용하여 영상적 문맥의
전개방법을 써서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 방법은 새로 시도된 전시방법으로서 벽면, 천장, 지면을 모두 이용하여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터널을 통과하면서 사진을 보는 느낌을 주어 색다른 묘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후에「인간가족전」은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 전시공간에서 보여주었던 감동만큼은 느낄게 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입체적 효가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엿보인다. 이처럼 시각적인 효과를 계산해서 독창적인 전시를
모색한 「인간가족전」은 하나의 새로운 제작형식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인간가족전 전시장면
이처럼 대량의 사진을 전시함에 있어서 그 제작형식이나 전시방법 자체가 스타이켄 한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개인 사진전이 아니었다. 이는 집단제작의 형식을 띄는 독특한 형태의 전시회로 참여한
사람들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가서 부터 시작하여 무명의 아마추어까지 다양하였다.
다만 스타이켄이 이전시의 기획을 맡고 총책임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전시장의 설계는 건축가 폴 루돌프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40개의 작은 테마별 전체의 서시는
시인 칼 샌드버그가 책임을 맡았다.
또한 사진의 중간마다 역사상 유명인의 명언이나 신화나 성서의 문구등을 삽입하여
또하나의 효과를 노린 사람은 도로디 놀맨 여사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손이 동원되어 오랜시간에 걸친 노력끝에 공동제작된 전시회가 「인간가족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