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클리셰(Cliché)에 대하여
늘푸른언덕
제대로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강의를 업(業)으로 삼고 살아가는 전문가들이 제대로 강의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교회의 목사님들도 설교의 홍수시대를 맞아 공감 있는 설교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며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문화 예술 창작인들에게도 이러한 어려움은 마찬가지로 존재합니다.
늘 새로움을 창작하여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갈수록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지능과 창의력을 추월하는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우월성은 커녕 차별성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판에 박힌 말들과 다양한 창작물, 설교와 강의는 더 이상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서서히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리라 예상됩니다.
게다가 이 시대는 너무나 똑똑하고 기대감이 높은 대중들로 들끓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에서부터 감각이 살아계신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공통적인 소통의 채널로 자리 잡은 것이 SNS(Social Network Service) 문화입니다.
홍수처럼 쏟아내는 SNS 상에서의 수많은 말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댓글 문화가 있습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고인의 부고 소식에 대하여 받자마자 따발총 쏘듯이 무한 복제되는 조사(弔辭)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란 표현입니다.
가정의 경사를 알리는 결혼식 모바일 청첩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단 청첩장이 뜨면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판에 박힌 인사말이 있습니다.
‘결(화)혼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연중행사로 주고받는 상투적인 시절 인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런 인사가 결코 잘못되었거나 성의가 없다고 지적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진열하는 이러한 판에 박힌듯한 상투적인 인사가 생각보다는 그렇게 당사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누가 보냈는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차라리 개인 톡으로 짧게 축하나 위로를 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판에 박힌 말,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의 뜻으로 쓰이는 클리셰(Cliché)는 프랑스어로 원래의 뜻은 인쇄 연판(鉛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쇄소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를 위해 그때그때 조판하는 수고를 덜도록 조판 양식을 지정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같은 의미의 영어식 표현으로는 ‘Streotype’이란 말도 혼용하여 씁니다.
이 판에 박힌 문구란 의미의 클리셰(Cliché)는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하긴 한데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느라 닳고 닳아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사람의 진심을 담기에는 너무나 얇아지고 영혼이 없어진 말처럼 치부되어 받는 이로 하여금 그다지 감사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대표적인 조의 뜻으로 표현되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일상의 클리셰 외에도 몇 가지 습관적인 말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가령,
젊어 보이네요
미인이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다 잘 될 거야
언제 밥 한 번 먹어요
다음에 연락할게
최선을 다해봐
열심히 해
....
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예를 들어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을 습관처럼 날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만...) 이 말은 상대방과 밥을 먹을 의도가 없다는 뜻을 달리 나타내는 애매한 표현입니다. 판에 박힌 습관적인 말이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듣기 거북한 표현으로 사회적 거물들이 자주 사용하는 역겨운 클리셰가 하나 있지요. 뇌물수수나 정치 사회적, 법적으로 큰 죄를 지은 거물들이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언론의 카메라 앞에 서서 늘 상투적으로 뱉어내는 표현입니다만...
성실히 조사 받겠습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얼핏 듣기엔 감동적이고 처음에는 측은한 마음마저 듭니다만 그 말 뒤에 숨은 허위와 진정성이 결여된 속마음은 듣는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 사실입니다. 진심으로 사죄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라면 적어도 그런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표현을 한 번 쯤 바꾸어 보는 것을 조언합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이러한 판에 박힌 클리셰들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례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대부분의 막장드라마의 클리셰로서 ‘주인공의 기억상실’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극적인 상황에서 교통사고나 커다란 충격을 통하여 일단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절박한 노력을 통하여 하나하나씩 또는 기적적으로 기억을 다시 찾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감동(?)의 장면입니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클리셰는 신데렐라 역할로 등장하는 주인공에 대한 ‘출생의 비밀’ 장면입니다. 이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역시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친자 확인을 위한 유전자 감식’ 장면입니다. 정말 보기가 역겨울 정도로 자주 등장하며 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가차 없이 채널을 돌려버리게 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되어버린 드라마나 영화의 공식적인 클리셰는 주인공의 네버 다잉(Never Dying)입니다. 즉,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대원칙이며 죽더라도 마지막 엔딩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 슬픔과 감동의 여운을 진하게 연출하는 시나리오 공식과도 같은 클리셰입니다.
한때 기업이나 단체 연수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강사 K 모 교수는 그의 특유의 감성 해학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유명한 소통 전문가 강사였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도 이 분을 초청하여 소통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90분간의 강의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게 푹 빠져 몰입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코칭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면서 기업체 강의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이 분의 강의를 벤치마킹하기 위하여 다양한 강의 콘텐츠를 수십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 세상이 열리면서 이 분도 유튜브 채널을 열고 강의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전혀 새로움이 없어 더 이상 구독하기를 멈춰버렸습니다. 그 배경에는 이 분의 강의가 너무나 뻔한 진행과 틀에 박힌 감성코드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처음 듣는 청중들에겐 무한한 감동과 웃음을 선사하는 것을 보면 강의에도 분명한 클리셰가 존재함을 느끼게 됩니다.
특유의 웃음 코드로 한때 오랫동안 안방극장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장수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가 더 이상 신선한 소재로 시청자들의 웃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쉽게 폐지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 역시 식상하고 뻔한 웃음 코드의 개그로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웃음을 통한 공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웃음 코드에도 틀에 박힌 클리셰가 존재하며 이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준 안타까운 사례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틀에 박힌 말들과 영적인 클리셰들이 있을까 묵상해 봅니다.
일단 우리들의 신앙의 삶에서 즐겨 사용하는 일부 표현들을 모아봤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봉사/교육/훈련 요청 시) 제가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바빠서) 다음에 할게요!
기도할게요.
당신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 원합니다.
통회하고 회개하오니…
죄인입니다.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영적인 신실함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단어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을 습관처럼 사용하면서 주의 자녀들로 자처하는 우리들이 입버릇처럼 사용하고 있는 영적인 이 말들이 과연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저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이 영적인 말들 중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타성처럼 입에 붙은 판에 박힌 언어들도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성령의 힘에 이끌리어 나의 마음이 열리고 내 입술이 진정성을 담아 이야기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만 때로는 판에 박힌 영적인 말과 습관적인 기도로 허울좋게 무장하고 있지나 않은지 솔직하게 돌아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과 마음이 삼위일체 되신 주님처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오늘의 화두 클리셰의 의미에 비추어 점검해 봅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고 헌신하는 신실한 주의 식구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과 예배가 익숙해지고 편해짐에 따라 어쩌면 그것이 판에 박힌 의식처럼 전락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되고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받으실까 생각할 때 화들짝 정신이 들기까지 합니다.
지난 주말 이러한 영적인 클리셰에 신앙적 도전이 되고 새롭게 신앙을 점검하게 된 두 가지 소중한 경험을 나누며 오늘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에피소드 1
지난 금요일 저녁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목회자들과 교회의 장년 성도들이 경기도 광주 소재 광림 수도원에서 열리는 우리 교회 여호수아 청년들의 여름수련회에 응원과 격려차 다녀왔습니다.
청년들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Brothers”란 주제로 영적인 여름수련회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찬양과 예배, 친교와 성경공부, 세미나, 팀 빌딩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미래의 교회를 이끌어갈 주역들이 땀과 눈물이 성령의 임재로 범벅이 되어 감동의 시간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을 독려하고 응원하려던 장년 성도들이 오히려 그들의 영적인 열정과 뜨거움에 동화되어 큰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들의 수련회를 경험하면서 이런 특별한 여름수련회가 아마도 매주 습관처럼 드려지는 예배와 일상의 기도생활 가운데 자칫 빠질 수 있는 영적 클리셰를 뿌리뽑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에피소드 2
다음은 제가 몸담아 섬기고 있는 저희 교회 찬양대에서 경험한 귀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찬양대는 즐거움과 성실함으로 매주 정결한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이번 여름에 특별한 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것은 늘 습관처럼 악보를 펼쳐놓고 부르던 찬양에서 악보를 외워서 부르는 소위 암보(暗譜) 찬양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처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주일 동안 일상에서 다음 주에 올려드릴 찬양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틈틈이 가사를 음미하며 외우는 열심을 내며 성도들과 하나님 앞에서 성공리에 암보 찬양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은혜와 감동이 몰려오는 놀라운 예배를 경험합니다. 일주일 내내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올릴 찬양을 준비하며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접하게 됩니다. 그 감동이 그대로 곡조가 있는 기도의 찬양을 통하여 예배당에 울려 퍼지고 하나님께 오롯이 흠향될 때 감동으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악보를 보며 찬양하는 기존의 판에 박인 영적 클리셰를 바꾸는 순간 새로운 영적인 깨달음이 열리고 감동이 전해지는 살아있는 벅찬 예배를 경험하는 귀한 순간이었습니다.
첫댓글 생각해보면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받아들였던 코로나19가
단지 부정적인 영향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파괴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판에 박힌 삶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또 다른 긍정의 기회를 선물했습니다.
판에 박힌 말로 대치되는 클리셰의 의미와 우리삶 속에 습관처럼
뿌리박힌 다양한 모습들을 돌아보고
나아가 영적으로도 각성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늘푸른언덕>
아무리 세상이 변화되어
일상적인 클리세로 인사를 주고받는 형식적일지라도 , 나 자신 만이라도 "진실되게 살아간다"는 자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