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 바닷속게 잠긴 조선의 가수 - 윤심덕
조선의 가수 윤심덕.
뛰어난 미모와 가창력으로 인해 그녀에겐 많은 남자들이 따랐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단 한 사람, 김우진이란 남자였다.
그가 유부남이었기에 윤심덕이 치러야 했던 숱한 곤욕과 지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의 우리 사회상을 생각할 때 그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시련을 감내했다. 그리고 그 감내의 결과는 마지막, 죽음의 일본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으로 향하는 여객선 갑판 위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사랑을 나누다 검
푸른 바닷속으로 멀고 먼 이별 여행을 떠난다.
조선 역사상 인기 있었던 노래
1920년 당시 최고의 인기 가요는 <사의 찬미>였다. 그 인기는 5,60년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훨씬 압도했다.
사랑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얻거나 모두들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우울한 식민지
지배 하의 백성들에게 <사의 찬미>는 암울하나 사회의 저변에 깔린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곡이었다.
윤심덕은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여자였다. 돈도 명예도 다 싫다고 외치며 오직 사
랑하는 유부남 김우진과 한평생 살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였다. 그러나 왜 현해탄 검푸른 바
닷속으로 죽음의 여행을 떠나야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그녀가 우리 땅에서 많은 남성 편력과 유부남과의 불륜 관계로 지탄을
받았다고도 하고, 또 폐병을 앓고 있었다고도 하고 , 또 일본에서 취입한 레코드가 사실 별
로 반응이 없자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다.
1923년 8월 3일.
연락선 도쿠슈마류는 부산을 향해 검푸른 물살을 헤치며 침하게 나아갔다. 모두들 잠든 사
이 두 사람은 갑판 위에서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다가 검푸른 바다에 눈길을 보냈다. 바다가
자꾸 손짓 하며 두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윤심덕은 일본에서 레코드 취입을 끝낸 노래 <사의 친미>를 조용히 부르기 시작했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며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
우는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새벽 어둠에 잠겼던 바다도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우는 듯 파도를 일렁였다. 노래가 끝나
자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파도에 휩쓸려 먼 바다고 사라졌
다.
두 사람이 이렇게 현해탄 바다 한가운데까지 오는 데는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
김우진은 목포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구마모토 현립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역극 학도였다. 그는 동경 유학생 등의 연극 단체인 동우회를 조직하여
국내 순회 공연에 혼신을 바치고 당시 유행처럼 번진 신극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총망받
는 극작가였다.
두 사람은 일본 동경에서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 만났다. 말이 별로 없고 조금은 수줍음을
타는 김우진과, 키가 늘씬하게 크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윤심덕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장래가 유망한 성악가와 젊고 능력 있는 극작가의 만남.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
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이었다.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윤심덕
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김우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
다. 성격적으로 다소 내성적이었던 김우진은 미녀 윤심적의 끈질긴 구애에 손을 들고 말았
다. 맘에 드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람이든 일단 갖기로 생각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그녀는
사랑의 부나비가 되어 김우진의 가슴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당시 윤신덕은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 졸업 기념 공연에서 제국극장 경영주의 눈에 띄었
다. 사장은 매달 150원의 출연료를 주겠다며 전속 계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윤심덕의 대
답은 '아니오'였다. 주위의 친구들이 놀랐고, 그녀 자신도 놀랐다. 그토록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여자로서 동경의 제국극장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출세가 보장된 것과 다를 바 없었지
만, 그녀는 김우진이라는 한 남자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과감히 일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부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뜨거운 사랑
1921년 7월 9일부터 8월 18일까지 약 한 달간 22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동경에 유학온 고
학생들의 학비 마련과 회관 건립 기금 모금을 위하여 순회 공연을 떠났다.
부산, 김해, 마산, 경주, 대구, 목포, 서울, 평양, 진남포, 원산 등지를 거치며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랑을 불태우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했다.
그 후 윤심덕은 귀국해 초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목포에 내려가 있던 김우진에게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보내지만 그녀의 편지는 한 번도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었다. 중간에
서 누군가가 편지를 가로챈 것이다. 윤심덕에게는 소식 없는 김우진이 첫째 걱정이요, 가족
의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의 노릇이 두 번째 걱정이었다.
그녀는 눈만 뜨면 음악회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기회만 있으면 레코드 취입에 열을 올렸
다. 게다가 방송 출연까지 하며 장안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 김
우진은 포근한 가정 생활에 만족을 하며 그녀를 잊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돈 버는
것도 짜증이 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든 게 힘이 들었다.
많은 한량들이 미모의 여가수에게 추파를 던졌고 중매가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동
대문 갑부 이용문이란 사내와 가깝게 지냈다.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
게 퍼져 있었다. 결국 윤심덕도 돈 앞에서는 약해진 것일까.
그러나 윤심덕은 욕심이 있었다. 돈만 있으면 꿈에 그리던 이태리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생
각이었다. 그러나 이용문과는 곧 헤어졌고 또 다른 남자들과의 염문이 끊이지 않고 나돌았
다.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일종의 스타에 대한 스캔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윤 선생. 가수 활동을 그만두던지 학교를 그만두던지 하세요."
교육계의 반발이 심했다.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 땅에 머물며 노래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전 하얼빈으로 떠나겠습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을 끝내 감수하지 못하고 그녀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하얼빈으로 떠났다.
김우진과의 사랑을 뒤로 한 채.
1년 6개월 뒤 뒤늦게 사라진 윤심덕을 찾기 위해 김우진 역시 하얼빈으로 향했다. 그러나
윤심덕은 이미 서울로 떠난 뒤였다. 김우진은 낙담하여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다시 만나 오랜만에 해후를 풀며 사랑을 불태웠다. 그들은 여관을 전
전하며 사랑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떠로이 생활을 했다. 그녀는 '토월
회'와 '백조회'로 옮겨다니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살림은 나아지지 않고 갈수록 형편
없었다. 더 이상 서울에서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으로 가는 게 어떻겠어요?"
"일본?"
김우진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결심이 서 있는 듯
했다. 김우진 또한 견디기 힘든 생활고를 걱정하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곧 호구지책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행히 윤심덕은 오사카 닛토 레코드
회사에서 <사의 찬미>를 비롯해 10편의 노래를 취입할 수 있었다. 노래의 반주는 동생 윤성
덕이 맡았다.
동생 윤성덕은 그녀가 레코드 취입을 끝내자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이화여
전을 나온 성덕은 클리 클럽의 지휘자로 서울에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동생을 미국
으로 보낸 윤심덕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레코드 취입을 해서 받은 돈으로 주머니
사정도 좋아졌다.
"목포 오빠."
그녀는 김우진을 그렇게 불렀다. 김우진은 밝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오빠,. 우리 다쿄서 시모노세키까지 해안선을 따라 여행을 해요."
"돈이 많이 들 텐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 모두 써 버리자고요."
"배표는?"
"우리가 멀고 먼 곳으로 가는 표, 그건 사야죠."
두 사람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음껏 사랑을 누렸다. 죽음 앞에
선 연인들처럼 그들은 정열을 아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현해탄에 던진 사랑
김우진은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는 <사의 찬미>를 경청했다. 윤심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1926년 8월 45일 새벽 4시. 두 사람은 그동안 사랑했던 과거를 떠올
리며 눈물지었다. 그리고 서로 부둥켜 안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제 서울에 돌아가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의 사랑을 나눌 힘도 없었다. 이
대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검푸른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파도는 두 사람을 휘감고 먼 곳으로 설어갔다. 그들의 사랑 뒤에 따
라올 세속의 비난과 조소를 뒤로 한 채.
'더 이상의 비난과 조롱은 싫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그곳으로 가자. 영원한 사랑을 찾
아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사랑을 위해 윤심덕은 죽음을 택했다. 그녀가 현해탄에 몸을 던진지
어언 70여 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수 윤심덕의 정열적인 사랑 이야기는 신화처
럼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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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세계를 움직인 미녀들의 신화(4장) 2. 현해탄 바닷속게 잠긴 조선의 가수 - 윤심덕
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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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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