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열 번째 - 3)
(거제∼부산, 2023년 12월 16일∼17일)
瓦也 정유순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어젯밤을 의탁하고 남파랑길을 역(逆)으로 창원시에 통합된 마산과 진해를 거쳐 부산으로 향한다. 과거 경상남도 마산시는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영역이 되었다. 마산은 역사적으로도 창원부의 영역이었으며 1899년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칭되었고, 1914년 마산부의 영역을 마산합포구 구시가지 일대로 축소시키고 잔여지역을 창원군으로 분리시키면서 창원과 분리되었다.
<창원시 지도>
마산지역은 남해안에 접한 항구 도시로 일본회사의 한국법인이나 수출 위주의 중소기업 업체들이 많이 있었으며, 수출자유무역지역 덕분에 1980년대까지는 잘나가는 도시였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통합 직전까지는 도청소재지인 구 창원시에 밀리게 된다. 전성기에는 경상남도 최대도시로 군림하여 부산시와 함께 부산·경남의 양대 도시로 꼽혀서 ‘부마(釜馬)’라는 약칭으로 <부마고속도로>가 있었고, 1979년에는 <부마민주항쟁>이 있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 네이버캡쳐>
구 마산은 인구 증가와 감소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14세기에는 진주성과 합포성이 경쟁했고, 18세기 말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마산포와 합포성이 경쟁했으며, 19세기에는 마산포와 일본인 조계지인 신마산이 경쟁하더니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새로 진해항을 개발하며 또 정체기를 겪는다. 그러다 일본으로의 물동량 관문이 되면서 19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급성장 하다가 2010년 7월에는 창원시로 다시 통합된다.
<마산항 - 연합뉴스>
그리고 옛 마산(馬山)은 1960년 3월 15일에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열사(金朱烈烈士, 1944∼1960)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자행한 3·15부정선거에 항거도중 행방불명되었는데, 27일 째인 1960년 4월 11일 마산항부두 인근에서 최루탄이 두 눈에 박힌 채 떠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자유당정권의 독재와 만행이 타도되었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마무리 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김주열 열사 - 네이버캡쳐>
바로 김주열이 실종되었던 날 시위 중 경찰이 최루탄을 시위대를 향해 쐈는데 경찰이 쏜 최루탄이 맨 앞에서 시위를 하던 김주열의 눈에 박힌 것이었다. 경찰은 몰래 시신에 돌을 메달아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27일 만에 밧줄이 풀리면서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이걸 본 마산시민들은 분노하여 극에 달한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마산경찰서 소속 박종표였다.
<김주영열사와 4·19혁명 - 연합뉴스>
박종표(朴鍾杓, 1914년∼?)는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을 한사람들을 모지게 고문했던 악질 경찰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다. 8·15 광복 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검찰은 공민권 3년 정지라는 가벼운 형을 구형했다. 근데 그마저도 재판부는 아예 무죄를 선고하면서 풀어줬다. 당시 박종표는 재판정에서 과거를 반성했지만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할 때 무차별 발포명령을 내린 인물이다.
<김주열열사 시신인양지점 - 내이버캡쳐>
더 나아가 김주열이 죽었다는 소식을 확인하자 시신을 지프차에 싣고 마산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 가에서 큰 돌을 여러 개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4·19혁명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시신유기와 최루탄발사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5·16쿠데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그 후 다시 7년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 경찰을 그만둔 후 부산에서 식당업을 하면서 동료경찰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설만 있지 그의 행방은 모른다.
<전북 남원의 열사 김주열 묘>
창원시 진해구는 구 경상남도 진해시다. 언제부턴가 해마다 봄이 오면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경상남도 진해(鎭海)의 벚꽃 소식부터 전한다. 그곳에서는 벚꽃 축제가 열려 전국에서 상춘객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진해역 앞 중앙광장을 중심으로 8개의 도로가 방사(放射)형으로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순간 일본의 욱일기가 오버랩 되면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烙印)이 우리 가슴 한복판에 아주 깊게 각인되어 있다.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타리>
욱일기(旭日旗)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위에 욱광(旭光, 아침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퍼져 나가는 햇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1870년 일본제국 육군 군기로 처음 사용했으며, 일본어로는 ‘교쿠지쓰키(きょくじつき)’라고 한다. 태양 주위로 16개의 햇살이 퍼지는 문양이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햇살의 수가 4개나 8개, 12개, 24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889년에는 일본제국 해군의 군함기로도 사용됐다.
<16조 욱일기 - 네이버캡쳐>
특히 8줄기 햇살의 욱일기는 구 일본 해군 장군기(將軍旗)였다.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육군과 해군에서 군기로 전면에 내걸리면서,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로 알려져 있다. 이에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육해군이 해체되면서 욱일기의 사용도 일단 중단되었다.
<8조 욱일기 유군자위대기 - 네이버캡쳐>
하지만 1954년 창설된 육상자위대(자위대기)와 해상자위대(자위함기)는 욱일기를 군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 육상자위대는 일본 국기인 태양 문양 주위에 8줄기 햇살이 퍼지는 욱일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해상 자위대는 16줄 햇살이 그려진 욱일기를 사용한다. 독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문양 사용이 엄격히 금지된 것에 반해, 욱일기는 현재도 침략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파 또는 스포츠 경기 응원에서 사용된다.
<독일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그럼 어떻게 하다 진해 한복판에 욱일기가 새겨져 있을까? 이는 물론 일본제국이 저지른 만행 때문이다. 원래 이 지역은 전답으로 이루어진 곳에 10여개 마을이 분포한 웅천(熊川)이라는 곳이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전승 기념으로 이곳에 해군기지를 만들면서 세워진 계획도시로 햇살이 8개로 나타나는 구 해군장군기의 모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진해(鎭海)다.
<진해 중원로타리>
<중원로타리>
당시 시가지가 조성되고 나가야(長屋)라고 불리는 일본식의 2~3층 연립 주택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당시 그 명칭을 따서 당시 제황산 동쪽의 해안의 명칭을 “나가야 해안”으로 지정하여 진해는 본격적으로 해군도시의 중심지로서 개발하였으며, 당시 나가야 해안을 중심으로 동부 쪽에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건설했다.
<진해항>
<진해항에서>
또한, 일본 해군은 러시아와의 대마도(對馬島) 해전에서 승전을 기념하고자 제황산 정상을 깎고 그 자리에 승전기념탑을 세웠다. 당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탄 일본 해군 기함 미카사의 마스트(mast)를 형상화한 탑이었다. 이 탑은 해방 이후 한참이 지나서 철거됐고 1967년 그 자리에 백두산함의 마스트를 형상화하여 높이 28m인 9층 규모의 진해탑을 세워졌으나, 바닥 부분과 계단, 배수로는 옛 것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진해탑>
진해탑이 있는 제황산(帝皇山, 110m)은 원래 이름이 부엉등 혹은 부엉산이며 봉우리를 두엄봉이라 불렀다. 광복 후에 임금이 날 명당이라고 하여 제황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봉우리에 진해탑과 제황산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진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일본인들은 봉우리가 투구 같은 형상이라 하여 <카브토야마(甲山)>라고도 불렀다. 이 당시 도로명과 동명에 일본 문화적 요소를 가미했고, 일본의 관습상 벚꽃까지 가로수로 들여와 심었다.
<제황산>
해방 이후 일본의 국화라며 주민들이 벚꽃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2년 국내 식물학자들에 의해 진해에 많이 있는 벚꽃은 제주도가 원산지인 왕벚나무로 밝혀지면서 벚나무 살리기 운동에 들어갔다. 이후로 진해에는 가로수를 비롯해 공원, 산지를 포함해 모두 30만 여 그루의 왕벚나무가 자라 세계에서 제일 많은 ‘벚꽃 1번지’가 되었고, 봄기운이 무르익어 가면 진해는 전국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가 되어 해마다 벚꽃 축제가 열린다.
<진해 벚꽃>
벚꽃은 일본강점기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관상용으로 인기가 많다. 특히 바람에 꽃잎이 눈과 비처럼 쏟아지는 광경은 장관이다. 이러한 품종은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에 널리 보급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심어진 대부분의 벚나무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단순히 일본에서처럼 벚꽃을 즐기기 위해서 심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고 벚나무를 심고 동물원을 만든 것은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다.
<벚꽃>
<야마타카 진다이자쿠라>
https://blog.naver.com/waya555/223306245477
첫댓글 등제감사합니다.
마산김주열열사.3.15부정선거.
남원에 김주열열사묘가있는것으로봐서,남원과김주열이무슨인과관계가있는모양인데?
진해벗꽃과군항제는 크면서많이듣던예기다.
...15박장춘...
김주열 열사의 고향이 남원으로
이모가 남원에 사셔서 마산상고로
유학을 갔다가 변을 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