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에 관한 시모음 29)
너에게 가고싶다 /송영희
산등성이 노을로 아름다울때
너를 추억한다
어둑 어둑 해 넘어갈때
가로등 하나 둘씩 피어나면
너를 향한 내 마음도
고운옷 입고 피어난다
겨울비 추적 추적 내리는날은
그리운 마음 빗줄기에 싣고
너의 뜰에 소나기처럼 내리고 싶다
한줄기 바람으로 머물고싶다
회색빛 하늘이 열리고
첫눈이 선물처럼 내리는날엔
내 마음은 흰눈이 되고
바람이 되어
순백의 세상에서
다시 한번 너를 꿈꾸어본다.
겨울비 /박고은
애타고
그립고
보고파
남몰래 숨겨둔 열정
비구름 피어
그대의 뜨락에
그만 떨구는 빗방울
외면치 말고
온 몸으로,
그대
받아주실래요
겨울비 /박재성
예전에 둘이 걷던 길
가로등 하나
그리고 빈 가슴
홀로 우는 밤
겨울 너도 우니
겨울비 /김복수
누가 뭐랬나? 저리도 구시렁거리게
칭찬보다는 잔소리를 더 많이 듣는
부엌어멈 삼돌네처럼
겨울비가 밤새 구시렁거리며 내린다
시인은 말 한다
하얀 눈이 펑펑 내려야 겨울이라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야 겨울 같다고
그런데
누가 겨울비를 반길까
누가 귀를 열고 경청을 할까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하고
욕은 바가지로 먹고
내가 그랬다
너도 그랬다
그러나 자고 나 봐야 안다
저 미끄러운 눈길을 밤새 누가 다 치웠는가를
불러라 불러보아라
구시렁거림은
너에 한 많은 노래다
너에 슬픈 노래다
겨울비 /박상희
겨울비 내리는 밤은
창 너머로 들리는 이야기가 길다
가로등 불빛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겨울이라 우기는 12월의 첫날
마지막 남은 잎사귀를 떨어뜨리며
미워서가 아니라고 정녕 아니라고
뚝뚝 흐르는 눈물들을 애써 다독이며
그냥 시간들이 자꾸 가버린 거라고
흐르는 것은 빗물이라고 빗물이라고
달래며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밤이 깊도록 들린다
다소곳이 잠을 청해보지만
처마 끝 떨어지는 빗물
가을을 보내는 젖은 소리가 서럽다
긴긴 시간들의 정만큼이나
그리움으로 서러움으로
밤이 깊도록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겨울비.
겨울비 오는 날이면 그대가 애타게 그리워 /한려수
차가운 겨울비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며
창문 밖 어둠 저편에서 내리고 내립니다
그대가 너무나 그리워
겨울비 오는 어둔 창가에 앉았습니다
빗소리는 내 마음을 울리고
바닥에 떨어져 들리는 소리는
내 가슴을 아프게 때립니다
헤어진 지 이리 오랜데도
여전히 그대는 내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도 하고
이렇게 울리기도 하고
이렇게 그리움에
절절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겨울비가 오는 날이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대 생각으로
그대가 너무나 그리워
가슴 죄어오는 애달픈 마음에
차가운 겨울비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저절로 흐르고
이런 날이면 가슴이 아파 와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언제 그대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이 사라질까요
오는 겨울비가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겨울비가 오는 날이면
그렇게 절절하게 생각나는 그대가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차갑게 계속하여 내리는 겨울비에
가슴이 계속하여 아파 옵니다
마치 끝없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비같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날 삼켜
겨울비 오는 창가에
움직임 없는 망부석같이
불 꺼진 방안
홀로 어둠 속에 앉아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나브로 흐르는 눈물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흘리고 흘립니다
겨울비는 내리고 /박숙경
대한을 앞에 두고 비 오신다
신파조에 적반하장을 버무린 말들이 둥둥 떠다닌다
구체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냥 뭔가가 슬퍼지는 그런 시간이랄까
어제는 소용없는 말을 얼마나 했는가
지금은 또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가
무언가 알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이미 세상은 깊은 강물의 소용돌이
강물도 때로는 돌아보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불행하지 않았으니 잘 살았다
내가 나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누군가를 다독여주는 빗소리엔
바흐의 무반주 첼로음이 잘 어울리는 날이다
겨울비-5 /소순희
돌아갈 곳도 없다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이 나이 먹고
빈 길에서
오는 비 맞으며
고향의 푸른 보리밭에 내릴
잠언인지
자꾸만
자꾸만 귀를 기울인다
비 내리는 겨울 풍경 /(宵火)고은영
후두두
빗소리에 점점 민감해지는 마음
할 일 없이 멀거니
창가에 얼룩져 내리는 빗물을 보면
수많은 얼굴이 잡힐 듯 멀어져 가는 일이다
음산한 거리 정처없이 가물거리는
혼미한 그리움만 우산도 없이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는 일이다
흘러가는 사람들 어깨마다
질긴 눈으로 앉은 비에 젖은
고독을 만나는 일이다
겨울 비는
음산할수록 적체된 가슴에
끝없는 기다림의 전율로 다가와서
뼛속마다 끈적이는 골수들이
흐물흐물 녹아
그리움의 강물로 흐르는 일이다
온몸에 피 톨 들이 남김없이 일어서서
낡은 기억에 흑백 필름을
파스텔톤으로 물들이고
안개비처럼 천천히 스며들어
영혼마저 외롭게 젖어 가는 노스탤지어다
겨울비 /장지원
겨울비
촉촉이 젖어드는 가슴
들창 넘어 그리움
파랗게 살아나는 미련의 싹들
그 그리움이
무심히도 방치된 허무의 날들
설익은 사랑의 일탈일까
새가슴 젖어 차갑게 얼어붙는 깃털
손질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빙산의 일각이 될 것 같은
겨울 새 한 마리
겨울비 /윤중호
冬安居 중인 겨울 산길에 헛디뎌 미끄러지며
스님딸이 머무는 절집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는 일흔 살 노인, 우리 어머니.
겨울비 /이정란
출항을 준비하던 선박이 자기 가슴에 닻을 꽂는다
횟집에서 회를 먹던 나로 보이는 여자가 자기를 찾으며 운다
그 여자를 밖에서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그 여자로 보이는 내가 손짓하자
빗줄기가 손가락을 녹여버리고
엉거주춤 걷는 소년의 엉덩이를 때려 오줌을 누인다
갑자기 길어진 자기 혀에 걸려 파도는 말을 잃고
바다를 두부처럼 잘라 짐칸에 싣고 택배 차가 떠난다
모래성에서 무희들이 줄지어 나오더니 해변을 들어 옮긴다
하얀 마스크에 모자 쓴 남자가 나타나 두리번거릴 때 장막처럼 바다가 닫힌다
남자가 마스크를 벗자 펄럭이는 장막에 얼굴이 가 달라붙는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자기 팔을 꺼내 얼굴을 맞힌다
화살을 맞으며 울부짖고 있는 시퍼런 돌고래 등 위로 하늘이 흘러내린다
빛 없는 별들이 자해하듯 화살에 목을 꽂자 빛 가진 별들이 서둘러 별빛을 짜 먹인다
빨간 눈알을 뽑아 던지며 별들을 위협해 내쫓는 건, 등대
겨울비 /이재환
하늘이
얼굴색 변하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하늘도
아주 슬픈가 보다
온종일
눈물이 그칠 줄 모르네
우산에
떨어지는 눈물이
그대의 눈물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리고 아프다
계속 눈물 흘리는 거 보니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이제는 진정하고
눈물 뚝 했으면 좋겠다.
겨울비 /정민기
어제 떠나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신사의 모습으로 머리에는 중절모를 쓰고
레인코트를 입고 내려오고 있다
비처럼 내리기 위해 우산을 쓰지 않았는데
다만, 우산 대신 중절모가 바람에 날려
머리 위에 잠시라도 떠 있으면
근사한 우산이 될 텐데, 하고 웃어넘긴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손끝이 순식간에 젖었다
어제 떠난 사람들이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지어가며
석회라도 되는 듯 빳빳하게 굳어 있다
낙엽도 떠나가는 쓸쓸한 거리에는 빗소리만
온종일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어서 추상적이다
재현할 수 없는 이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실연당한 사람처럼 어떤 신사는 뒤돌아서서
휑한 등을 보여주고 있다
상영 중인 영화처럼 공중에 붕 떠서 내려오는
신사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끼니도 거른 겨울바람이 바다를 떠나 울고 있다
카페 창가에 앉아 액자인 것처럼
창밖 겨울비를 바라보면서 뜨거운 마음을
단숨에 들이켜지 못하고 홀짝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