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진다.—고린도 후서 12:9. 사도 바울은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서 자신이 한 모든 일이 스스로 해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성령을 통해 바울이 박해와 투옥을 비롯한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봉사의 직무를 완수할 수 있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바울의 젊은 동료인 디모데 역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긴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의 요청에 따라 회중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기 위해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4:17) 디모데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아무도 그대의 젊음을 얕보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권고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4:12) 그리고 이 시기에 디모데에게는 육체의 가시 즉 “자주 앓는 병”이 있었습니다. (디모데 전서 5:23) 하지만 디모데는 여호와께서 강력한 성령으로 그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형제들을 섬길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디모데 후서 1:7. 「파21.05」 21면 6-7항 |
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진다. —고린도 후서 12:9. my strength is made perfect in weakness. Barnes' Notes on the Bible My strength is made perfect in weakness - That is, the strength which I impart to my people is more commonly and more completely manifested when my people feel that they are weak. It is not imparted to those who feel that they are strong and who do not realize their need of divine aid. It is not so completely manifested to those who are vigorous and strong as to the feeble. It is when we are conscious that we are feeble, and when we feel our need of aid, that the Redeemer manifests his power to uphold, and imparts his purest consolations. Grotius has collected several similar passages from the classic writers which may serve to illustrate this expression. Thus, Pliny, vii. Epis. 26, says, "We are best where we are weak." Seneca says, "Calamity is the occasion of virtue." Quintilian, "All temerity of mind is broken by bodily calamity." Minutius Felix, "Calamity is often the discipline of virtue." There are few Christians who cannot bear witness to the truth of what the Redeemer here says, and who have not experienced the most pure consolations which they have known, and been most sensible of his comforting presence and power in times of affliction. 반즈의 성경 주석 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진다. - 즉, 내가 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능력은 성도들이 스스로 약하다고 느낄 때, 더 완전하게 나타난다.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활기 있고 힘이 센 사람에게는 약자에 비해 완전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우리가 원조의 필요성을 느낄 때, 구원자는 지탱할 힘을 발휘하고, 가장 순수한 느낌으로 위로를 전달한다. 그로티우스는 고전 작가들로부터 이 표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개의 유사한 구절을 수집했다. 플리니, vii. 서한 26은 "우리가 약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강할 때" 라고 말한다. "재난이 있을 때, 미덕의 기회를 나타낸다." 고 세네카는 말한다. 퀸틸리안은, "모든 마음의 무모함은 육체적 재앙에 의해 깨진다." 고 하였고, 미니티우스 펠릭스는, "재난은 종종 미덕의 규율일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구세주가 말하는 것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순수한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으며, 고통의 시기에 그의 위로와 힘을 대부분 의식하게 된다. |
비단 기독인 뿐만 아니라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들이 핍박을 받아 어려움에 처해질 때 강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자신의 마음이, 의로운 일에 대한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핍박하는 자는 그 의를 핍박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이겨 나갈 때,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미래에 보상 받을 것이 확실해진다는 생각이 자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정신의 세부적인 작용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쉬운 말로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으로 믿게 된다.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작용은 마찬가지로 일어나는데, 그것은 자신이 믿는 바가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어떤 종교를 빙자하는 무리가 일어나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 그들을 강력하게 단속한다면, 그 세가 꺾이는지 아니면 잠시 수그러드는 듯 보이지만 다시 흥왕하게 되는지로 판가름된다. 이것은 악이 선을 이길 수 없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종류의 종교가 서로 다르더라도 그것이 박해를 이기고 존속된다는 것은 비록 가르침의 내용이 다를찌라도 각자의 진실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불교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과 기독교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진실성을 나타냄으로써 누가 더 올바른지를 입증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논쟁하여 시비가 판단될 수 없다. 또한 사회적으로 사이비 신흥 종교처럼 보이는 교파들이 일어날 때, 정부는 법질서라는 차원에서 단속할 것은 단속해야 하겠지만, 기성 교단들의 교인이 그러한 종파에 가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자신들이 옳음을 진실한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교회가 부패함으로써 결국 개혁 세력이 신흥 교파로 등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신흥 교파들이 개혁의 물결을 타고 한동안 세를 확장하다가도 그 진실성의 한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다시 기성 종교의 길을 걷게 되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19세기에 일어난 세계 신흥 3대 종파는, 안식일 교회, 모른몬 교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다. 이들은 100년 이상을 흥성하다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풀 꺾이고 기성 종교의 길을 걸을려고 모색을 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진실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장 진실하고 참다운 종교 조직은 그 신앙 공동체 자체 내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 3대 종파들은 처음에 훌륭한 흉내를 내었지만 그 역량이 미달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룰 새로운 조직을 창설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단 2:44).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이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
질문:
1 종교 또는 종파 간의 시비는 이론으로 입증되는가?
2 참 조직의 특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