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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 가 : H.AK
* 창작실 : 주목시즌작가
* 제 목 :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편 수 :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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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Original Title : 이브의 선택[Eve's Choice]
writer by. H.AK
copyright(c)2008 All rights reserved by 한라에이케이 다음공식카페 H.AK
: 본 작품은 동일 이름을 가진 1938년도 作 영화와는 별개의 스토리 임을 알려드립니다
# Prologue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찾아온다. 반딧불 같은 전구로 가득한 거리와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세군
의 종소리. 에는 듯한 추위에도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든 사람들의 발소리는 왈츠처럼 경쾌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
는 호박색 초롱으로 장식한 맞은편 카페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코트를 벗고 따뜻한 머그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사람들의 표정은
뭉근하게 끓인 크림 스프 같았다. 이렇게 추울 줄 알았으면 목도리라도 챙겨오는 건데. 버스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차가운 코트 깃
에 얼굴을 묻고 빨간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를 빠르게 건넜다. 멀리서 나의 아파트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리본아. 오늘 내가 케이크를 몇 개나 구웠는지 아니?"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통조림을 뜯는 소리에 황록색 눈빛의 고양이가 조르르르 내 발치로 달려왔다. 그의 이름은 리본. 햇수로
는 5년 째 나의 작은 아파트에서 머리를 맞대고 사는 덩치 큰 동거인이다.
"자그마치 스무 개나 구웠어! 으, 올해도 주문이 얼마나 많은지……."
"니야아아아아옹~"
"고양이 군. 이건 너랑 나의 밥줄이 달려 있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라구!"
나는 하루 종일 굶은 리본이 캔에 머리를 박고 먹는 것을 바라보면서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면 한 살을 더
먹게 될 테고, 지금보다 용감해 질 일만 남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으레 연말이 오면 사람들은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기 마련이 었
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 의미없는 일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클라이막스가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고모님의 추천으로 유명한 빵집에 취직하게
되었고 근 2년 동안 밤낮으로 좋아하는 케이크와 쿠키를 실컷 구워 왔다. 매달 적당한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왔고 작업 환경에 커
다란 불편이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언제나 눈망울이 아름다운 리본이 현관에서 나를 반겼다. 내 인생은 하루 하루가 똑같은
틀에 찍혀 나오는 쿠키 같은 것이었다.
이런 나를 제외하고 남들은 연말까지 모임에 참석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앞집 여자는 아침 댓바람부터 풍
성한 모피코트를 입고 집을 나서지 않나, 윗집 사는 꼬마네는 연말 파티를 하는지 사람들의 소리로 왁자지껄 했다. 거기다가 하나
밖에 없는 친구 조지아나는 남자친구와 연말을 보내기로 했단다.
"따분한 크리스마스면 어떠니."
리본이 내 무릎 위로 뛰어올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따분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런 생활
이 좋았다. 허기진 속을 달래기 위해 컵누들을 먹으면서 내셔널 지오그라피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인 벤젤리아와
함께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정열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는 아빠였다. 지금 야자수 트리 위에 얹을 장식으로 오렌지를 별
모양으로 깎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나에게 가지고 싶은 선물이 없냐고 물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선물이에요? 됐어요."
["널 혼자 두고 와서 맘이 편치 않아서 그래……. 옛날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갖다 줬다고 사흘 밤낮을 울던 애였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자라 버렸는지 모르겠구나."]
아빠는 언제나 이런 주책없는 멘트를 나에게 날리곤 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말도 안 돼!"
["아마, 일곱 살 즈음인가 그랬지. 대문 앞에 산타 할아버지만 보라고 커다랗게 카드도 썼잖니!"]
"됐어요. 아빠. 통화료 많이 나올 텐데 이런 이야기할 거라면 이제 끊자구요."
["이브야. 그래도 가지고 싶은 선물 하나 쯤은 있을 거 아니니?"]
"생각나면 전화 할게요."
["그래~ 그럼,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렴. 사랑한다. 알러뷰."]
식어버린 컵누들 맛은 맹맹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부터는 죽을 만큼 가지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으면서 가지고 싶은 물건을 떠올렸다. 인터넷 쇼핑 카트에 담긴, 딸기향이 첨가된 신제품 강력 왁싱 크림이나 더 많
은 쓰레기를 담을 수 있는 쓰레기통이라 던가. 물건이 아니라면 주머니 속을 따뜻하게 데워 줄 연인의 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
지만 뭐니 뭐니 해도 괜찮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작년보다 따뜻하게 보냈으면 됐지."
하는 나의 소망이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1.
: 아가씨, 요즘 산타들은 썰매 안탑니다
내가 일하는 '로티로아' 는 주인인 영감님(우리는 모두 그를 그렇게 부른다)이 삼대 째 가업을 이어서 운영하고 있는 빵집이다.
영감님은 워낙 손재주가 없는 터라 직접 빵을 만들지는 않지만, 이 지역에서 인심 좋고 빵 값이 저렴하기로 유명해서 사람들의 발
길이 끊이지 않는다. 빵 맛은 변해도 인심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의 철학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빵 한 개
를 사도 덤으로 얹어주는 것이 많으니 손님 입장에서는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정오쯤 되면 알바 생은 미리 식혀 놓은 치즈 머핀들을 비닐에 포장하느라 바쁘고, 빵집 주인인 영감님은 전화 주문을 받다가 지
쳐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존다. 나는 뜨겁게 달궈진 오븐에서 황금빛으로 부풀어 오른 케이크 시트 여섯 개를 꺼냈다. 반죽이 묻
어나지 않은지 이쑤시개로 빵을 찔러보니 만족할 만큼 폭 하고 들어갔다. 누구라도 지금 내 얼굴을 봤으면 열기가 아니라 흥분으
로 뺨이 달아올랐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을 것이다.
딸랑. 손님이 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대량으로 주문한 '썰매를 탄 산타' 케이크 장식들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
겨울에는 펭귄과 산타를 데코한 것이 인기가 좋았었는데 올해는 어떨는지. 버튼을 누르자 구석에서 휘핑 기계가 정신없이 돌아가
기 시작했다.
"이브씨. 손님이 오셨어요. 잠깐 나와 주셔야겠는데요?"
크림이 완성 됬나 찍어 먹어 보는데 알바생이 작업실에 고개를 배꼼 내밀고 나를 불렀다. 나는 행주로 대충 손을 훔치고 카운터
로 나갔다. 영감님의 난처한 표정을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연회색 모직 코트를 입고 온 남자는 20대 중반정도 되어
보였는데 피부가 깨끗하고 눈이 맑아서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 같은 분위기다.
"제가 어제 여기서 생크림 케이크를 샀는데 먹다가 반지가 나왔습니다!"
"예에!?"
남자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반지 하나를 꺼냈다. 플라스틱 딸기 모양 장식이 달린 뽑기용 반지였다. 영감님이 의심스러운 눈초
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는 작업할 때 반지를 끼지 않아요. 혹시 다른 데서 나온 게 아닐까요?"
"당신 것이 아니라면 반죽에 섞여 들어왔겠지요. 변상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변상이라니요……."
"돈으로 받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다시 주문했으면 합니다. 전화번호와 주소는 여기 있구요."
반듯하게 접힌 메모지가 카운터 위에 놓였다. 영감님은 벌써부터 주문받은 주소를 노트에 적기 위해 펜을 찾고 있었다. 반죽할
때 반지가 섞여 들어올 리가 없다. 거짓말인 게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남자는 뻔뻔하게도 케이크가 진열된 냉장고를 걸으며 나에
게 말을 걸어왔다.
"올해 케이크 컨셉은 모두 썰매를 끄는 산타네요?"
"네. 작년에 산타로 데코한 케이크들이 많이 나갔거든요."
"아……. 생각하니 조금 웃기네요. 요즘 누가 썰매를 타고 다닙니까?"
입 꼬리가 올라갈 때마다 남자의 왼쪽 뺨의 보조개가 살포시 들어갔다 나왔다. 나는 알바생에게 오븐에 넣어 두었던 밀크 쿠키를
빼 내오라고 시키고 카운터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창 밖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빨간색 포르쉐 스포츠카가 서 있었다. 얼
마나 튀었으면 차를 제외한 일대의 건물과 차들이 엷은 무채색으로 느껴질 정도.
"당신은 썰매를 안타더라도 산타는 타겠지요."
나는 남자가 가져온 쿠키 한 봉지를 계산하면서 대답했다.
"아가씨. 요즘 산타들은 썰매 안탑니다."
"그럼 21세기에는 뭘 타고 다니나요? 비행기? 제트기?"
"아주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죠."
"그것도 빨간 색으로요?"
나는 포르쉐가 세워져 있는 바깥으로 눈짓을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웃긴 것은 분명 그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빙고 하고 대답했
다는 것이었다. 남자가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간 사이에 나는 주문을 받은 노트를 확인했다.
12월 20일. 미스터 로렌스. 썰매 대신 산타와 빨간색 자동차가 데코 된 크리스마스 케이크 .
물론 케이크를 가지러 오는 날 케이크 값을 지불하겠다고 쓰여 있다. 노트에서 고개를 들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포르쉐에 자
동차에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잠시 벙찐 얼굴로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현란한 스포츠카의 주인은 다름 아닌 바로
미스터 로렌스, 그였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Original Title : 이브의 선택[Eve's Choice]
writer by. H.AK
copyright(c)2008 All rights reserved by 한라에이케이 다음공식카페 H.AK
: 본 작품은 동일 이름을 가진 1938년도 作 영화와는 별개의 스토리 임을 알려드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2.
: 이번 크리스마스는 저와 함께 보내주셔야 겠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로렌스씨가 케이크를 받아가기로 한 12월 20일 날 이었다. 나는 평소 때와 같이 간단하게 콘프레이크로 아침을
때우고 현관에서 목도리를 감으면서 아파트를 나섰다. 멀리서 아파트 경비원인 제이콥씨가 굵직한 시가를 입에 물고 도둑고양이
들이 엎어 놓은 쓰레기통을 치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매일 아침 귀찮을 법 한데도 그는 한번도 그것을 그냥 놔두는 법이 없었다.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그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날도 추운데 일찍 나오시는 군요. 이브씨. 오늘 식빵은 몇 시쯤 나옵니까?"
"음, 지금이 여덟시니까 아홉시 되기 전에 찾아오시면 될거에요."
"그렇군요. 그럼 이따 뵙죠. 좋은 하루 보내도록 해요!"
"네! 아저씨두요."
혹한 추위에 거리에 있는 모든 집들의 창문은 칸칸이 하얗게 서리가 번져있었다. 마치 그 모습이 냉장고에 꽁꽁 얼려둔 화이트
초콜렛 같았다. 아침을 먹으면서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던데. 5단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호언장
담 하던 윗집 꼬마에게는 굉장한 소식일 거다.
거리는 한산했고 설사 넘어지더라도 나를 비웃을 사람은 없지만 되도록이면 새로 산 부츠를 신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걸었다. 사거리 모퉁이를 돌자 로티로아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장난감 가게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캐롤송이 들려오고 있었다.
징글벨. 징글 벨. 징글 올 더 벨. 여기까지 속으로 따라 부르자마자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몸의 중심이 뒤로 기울었다. 마치 보이
지 않는 실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말도 안 돼. 넘어질 리가 없다구. 하는데 까지 생각이 들었는데 아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하셔야죠! 머리라도 다치면 어쩔 뻔 했어요!"
"로, 로렌스 씨!?"
"괜찮으세요?"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보다 단단한 팔뚝으로 로렌스씨가 내 허리를 받치고 있다는 것에 놀라 있었다.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서 횡설수설 소리쳤다.
"잠깐만요!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여기 계시죠?! 그리고 전 넘어지려고 한 게 아니……."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위험해 보이셨는데요?"
"도대체 뭐가 위험해 보이……. "
"보세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건너편 도로에 내 목도리가 떨어져 있었고 오른쪽 부츠의 굽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딛고 있
는 곳을 뺀 모든 인도가 빙판으로 덮여 있는 게 아닌가. 이 쯤 되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Oh my god!"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겪을 때 하느님을 부르짖죠! 빵집에 나가시는 건 틀리신 것 같은데 저랑 어디서 커피 한 잔이라도?"
"커, 커피요?! 구두굽이 부러지고 목도리가 날아가도 제 일은 해야지요. 주문이 얼마나 많이 밀려있는데요!"
"오늘 프랑스의 커다란 제과점에서 파티쉐로 일하시는 알프레드씨가 로티로아에 찾아오실 겁니다."
그는 영감님의 둘도 없는 사촌이지요. 휴가를 내신 모양인데 당신 대신 케이크를 구울 겁니다. 하고 로렌스씨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더 말씀 드려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가더라도 오늘 손님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손님이 없으면 매출도 없을 거고, 그럼
불쌍하신 영감님은 형편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밖에 없겠죠?"
"당신 마음대로는 안 될 거에요."
"아니, 될 겁니다!'
내가 절뚝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자 그가 우악스럽게 내 팔을 낚아챘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나는 소스라치면서 벗어나
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로렌스씨의 선량한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내 입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왜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저는 신의 사도니까요."
정말 단단히 미쳤군. 신의 사도라니, 자기가 천사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나는 로렌스씨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두어 발자국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뭔가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로 사람을 다루는데 굉장히 서툴거든요."
"……."
"한 방 맞으시고 좀 주무세요. 그리고 나서 모든 걸 설명해 드릴 테니."
철컥. 로렌스 씨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권총이었다. 으악.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오기도 전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런
데 아픔은 없고 눈앞에 보라색 구름들이 아른아른 거리더니 전신이 나른해 지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남자야. 케이크에서 반지
가 나왔다고 우겨댈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가 타고 있던 빨간색 포르쉐 자동차는 자연스럽게 케이크에 장식된 썰매 타
는 산타의 복장으로 이어지고 불그스름한 그의 아랫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요즘 산타들은 썰매 안탑니다.'
내 이름은 '이브(Eve)' 이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날이 12월 24일이 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어쨌든 누
구에게 이름과 생일을 어필 하면 좀처럼 잊혀지는 일이 없다. 어렸을 때 이브가 뱀에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은 여자라는 것
을 교회에서 배우고 나는 집에 울면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찌나 속이 상했는지 나는 성경책에는 이브 말고 예쁜 이름도 많은데
왜 이렇게 지었냐구요! 하고 소리치면서 두 시간 동안 거실에서 몸부림을 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뜨개질을 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시던 게 기억난다. 네 아빠는
네가 남자였어도 이브라고 지었을 게다. 그만 울고 간식이나 처먹어라. 그 한마디에 나는 눈물을 뚝 그치고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고구마 맛탕을 맛있게 먹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그 땐 참 위로가 되었었다.
나는 가끔 운명이야 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비껴갈 수 없는 숙명 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내가 어떻게 태어나든 간 나는 '이브' 라는 이름을 짊어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가씨,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세요!"
지난 밤, 케이크를 만드느라고 뭉쳐 있던 근육들이 풀려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향해 눈
을 껌벅였다. 미스터 로렌스씨가 쏜 총을 맞고도 나는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이마를 만져 보고 옷자락을 보아도 피가 튄 흔적은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아줌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내질렀다.
"으아악!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이건 뭐에요!"
"저는 미세스 킴이고, 여긴 도련님의 저택이고 이건 크림 스프지요."
그녀는 스프가 올려진 쟁반을 내 무릎 위에 올려 주고 스푼을 손에 쥐어주었다.
"산타 건(Santa - Gun)에 맞으시고 이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계신 분은 처음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깐 몽롱해졌다가 일상생
활로 무리 없이 복귀하시거든요. 벌써 주무시느라고 반나절이 꼬박 지났네요!"
"네? 반나절이 지나 버렸다구요? 지금 몇 시인데요?"
"3시네요."
"말도 안 돼! 4시까지 주문 받은 케이크가 여섯 개나 있다구요! 빨리 나가 봐야겠어요! 외투 어딨죠?"
침대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하얀색 프릴이 잔뜩 달린 잠옷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볼을 힘 있게 꼬집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얼얼한 느낌뿐이었다. 내가 옷을 찾아서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이 분명 일어나자마자 나가실 거라고 옷은 다 숨겨 놓으라고 하셨지요."
"당신들 뭐에요?! 혹시 날 납치해서 어디에 팔아넘길 수작이었다면 꿈도 꾸지 말라구요!!"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도련님이라면 팔아 넘기 실 수도 있겠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 쪽 팔에 걸치고 있던 와
인색 나이트가운을 손수 나에게 입혀 주고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생각보다 친절하신 분이랍니다."
"로렌스씨는 지금 어디 계시죠?"
"집무실에 계실거에요. 오른쪽 복도로 나가셔서 세 번째 방입니다. 참, 노크는 잊지 말아주세요!"
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서야 나는 이 저택이 얼마나 으리으리한지 깨닫게 되었다. 고풍스러운 양탄자가 깔린 복도 중간 중간에는
장식용 촛대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고 난간 아래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한 응접실이 펼쳐져 있었다. 나팔이 부는 천사
들로 조각 된 거대한 문 앞에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어서 오세요! 처음에는 죽었는지 알고 의사까지 불렀답니다. 그런데 쿨쿨 잘도 잠이 드셨더라구요?"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일이죠?"
"그래서 몰래 이브씨 꿈을 들여다보았어요."
로렌스 씨는 조심스럽게 나를 집무실 한 켠에 마련해 둔 소파로 데려갔다.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것은 이 사람의 취미인가. 내 말을
듣는 척 마는 척 하면서 그가 따뜻한 레몬티를 내왔다. 머그컵을 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나는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 졌다.
"꿈에서 호호백발 할머니 한 분과 이브라는 이름이 싫어서 울고 있는 소녀가 있더군요. 고구마 맛탕은 맛있게 드셨나요? 저도 어
렸을 때 할머니가 자주 해주셔서 먹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어떻게 제 꿈을 읽을 수 있죠?"
"그야, '꿈 읽기' 는 산타 수업 과정에 필수 교과목이니까요."
산타 수업 과정이란 말에 나는 잠시 로렌스씨를 벙찐 얼굴로 바라보았다. 검은색 뿔테 너머의 그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나에게 다
가와서 내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있으면 아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꿈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로렌스씨."
"네?"
"그 말씀은 지금 당신이 '산타' 라는 건가요? "
"빙고!"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면서 로렌스 씨가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도시는 우유처럼 뿌연 안개
에 휩싸여 있었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라면 지금 나대신 프랑스에서 오신 알프레드씨가 케이크를 굽고 있겠지. 지금 당장 전화를
해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이들은 일생에 한번은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을 산타를 통해 받게 되어있어요. 그게 우리 산타들의 임무이기도 하구요. 지금까지
한 번도 선물이 잘 못 전달되거나 받지 못한 아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행정 업무상 엄청난 일이 터졌어요."
"선물을 못 받은 아이가 있던가요?"
"네. 받을 수 없는 선물을 계속 원했기 때문에 산타는 그것을 선물 할 수 없었고 그 아이의 선물은 계속 다음 해로 보류가 되다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렸죠. 이런 경우에는 어른이라도 선물은 줍니다만……."
로렌스씨가 뿔테를 콧등 위로 올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까까지 없던 파일이 들려있었다. 언뜻 보기에 파일 철
가운데에는 'EVE' 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선물을 아직까지 받지 못한 아이가 나는 아니겠죠."
"빙고! 이브씨, 죄송스럽지만 아무래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저와 함께 보내 주셔야 겠습니다."
"……."
"그것도 아주 따.뜻.하.게. 말이죠."
그는 빨간색 펜으로 파일 아래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치면서 환하게 웃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Original Title : 이브의 선택[Eve's Choice]
writer by. H.AK
copyright(c)2008 All rights reserved by 한라에이케이 다음공식카페 H.AK
: 본 작품은 동일 이름을 가진 1938년도 作 영화와는 별개의 스토리 임을 알려드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3.
: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은 신뿐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타의 업무란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굴뚝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가서 양말 주머니에 선물을 넣는 것을 생각
한다. 하지만 로렌스씨에게 들은 21세기에 접어든 산타의 업무는 보다 치밀했다. 하루에도 산더미처럼 배달되는 아이들의 편지를
손수 감정하고 분류한 후(아이들의 필체에서 느껴지는 진실성과 산타가 직접 방문해서 본 아이의 꿈, 1년간의 행실이 모두 반영된
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가!), 파일 철에 꼼꼼히 기록한다. 아이가 원하는 선물이 실현 가능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크게 중요
한 요인이 되는데 실현 가능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음 해로 보류가 된다. 물론, 나처럼 어린 시절을 평생 실현 가능하지 않는 것을
꿈 꿔 온 아이들은 더러 어른이 되어서도 선물을 받기도 한단다.
"사랑스런 아이들이 산타에게 쓴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것도 임무 중에 하나랍니다. 어서 쓰세요!"
"저 보고 답장을 쓰라구요?"
"아뇨. 답장은 산타인 제가 쓰지요. 이브씨는 답장할 편지의 주소만 옮겨 적으시면 됩니다."
내가 산타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크리스마스 따뜻하게 보내기' 다. 내가 물어보는 것을 모두 대답해 주면서 로렌스씨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엄청난 량의 편지들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물론 낡은 만년필과 먹물 잉크도 잊지 않았다.
"편지에 주소를 옮겨 적는 것도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기'의 일보인가 보죠?"
"당근입니다. 매년 심심하고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내 오셨잖아요."
"이걸 한다고 해서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지도 않은데……."
"하다 보면 괴로움 속에서 또 다른 행복을 찾으실 거에요. 확신합니다."
미스터 로렌스씨가 허공에 손을 휙하고 흔들자 그가 서있는 반대편에 멋진 마호가니 책상과 푹신한 의자 하나가 허공에서 뚝 떨
어졌다. 글쎄, 이 쯤 되면 로렌스씨가 커다란 곰으로 변해 버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편지를
내려놓고 아이들이 삐뚤빼뚤하게 쓴 집 주소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책상 귀퉁이에는 내 손을 거쳐 간 수 십장의
편지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그러다 문득 소파에 웅크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본이 떠올랐다.
"로렌스 씨. 주소 쓰는 일도 좋지만 우선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로티로아에 결근하는 이유도 얘기하지 못했고 아파트
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는데 밥도 챙겨 줘야 하거든요."
"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미세스 킴이 로티로아에 전화해서 캘리포니아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고 말했으니까요.
고양이 리본군은 지금 침실에서 맛있는 다랑어 캔을 먹으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알면 알 수록 무섭네요! 그걸 또 언제 알아 낸 거죠?"
"산타의 일이 뭐 대단한 건가요. 저는 이브씨가 매 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어떤 속옷을 입는 지도 알고 있어요."
프릴이 잔뜩 달린 쪽이 더 좋은데 주로 밋밋한 장식의 분홍색을 선택하시더라구요. 하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얼굴이 화르륵 달
아올랐다. 로렌스씨의 얼굴은 장난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기분 나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 하겠습니다. 보고 싶어서 본 게 절대 아닙니다!"
"……."
"이브씨가 태어난 날 부터 죽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기억은 나지 않으시겠지만, 당신이 유치원을 다니
던 다섯 살 때 제가 그 유치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답니다. 같이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도 했었지요."
"그걸 저 더러 믿으라구요?"
"이걸 보세요!"
로렌스씨가 뒷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을 때 나는 여러 번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는 어렸을 때의 나였고 그 옆에서 내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 고 있는 사람은 로렌스 씨였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우리 산타들은 다음해 9월까지는 무기한 휴가라서 다들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곤 해요."
"그럼 당신은 도대체 몇 살이에요?"
로렌스씨는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봐야 20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똑한 콧날과 선량해 보이는 깊은 눈매가 그랬다.
어쩐지 유치원 선생님이 잘 어울리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더니만. 어릴 적 내 기억의 잔상 속에는 아직도 그가 남아있던 것일까.
"나이를 세는 것을 잊어버린 지는 꽤 되었습니다. 신이 저를 버리지 않는 이상 평생 죽지 않을 테니까요. 숫자를 세는 것은 무의미
한 일이죠."
"좋으시겠어요. 천년만년 사시니까요."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앙칼지게 받아쳤다.
"오늘을 대충 살아도 내일이 또 있는데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도 드시겠죠. 저도 백 년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
는다는 것은 만큼 괴로운 일은 또 없어요. 이브씨가 천년만년 살아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
"어쨌든 제 무례함은 잊어 주세요. 귀여운 여자를 보면 자꾸 장난 치고 싶어진다니까요?"
로렌스씨는 웃으면서 나를 의자 앞에 앉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전에는 몰
랐던 달달한 초콜릿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아주세요."
"신기해서 그럽니다.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예쁜 여자로 성장하다니……. 신은 정말 위대하시네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산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지 알려주세요. 아까 저한테 쐈던 총은 뭐죠? 그리고 요즘 시대에도 굴
뚝을 통해서 선물을 배달하나요?"
"그 이야기는 저랑 저녁식사라도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집무실에 있는 낡은 괘종시계는 정확히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자 속이 쓰
릴 듯이 배가 고파왔다. 옷장에서 트위드 재킷을 꺼내 걸치면서 그는 방으로 돌아가면 미세스 킴이 내 옷을 침대에 올려놨을 거라
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문을 열자 다랑어 캔을 비우고 느긋하게 잠이 든 리본 옆에 옷가지들이 따뜻하게 덥혀 있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바깥으로 나가자 빨간색 포르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렌스씨의 에스코트를 받아 차에 올랐다. 차 안은 히
터로 따뜻했고 등받이가 푹신해서 당장이라도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안전벨트를 착용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요즘 산타들은 썰매를 안탄다고 하시더니. 정말이네요."
"하늘을 나는 썰매는 인간들의 항공기술이 발달하면서 없어진 지 한참 되었습니다. 덕분에 일자리를 잃은 순록들만 알래스카에
서 멋진 휴가를 보내게 되었죠. 걔들은 참 인생 편해요."
"세상에. 정말 하늘을 나는 루돌프가 있어요?"
"차라리 산타가 있냐고 다시 한 번 저에게 물어보시죠."
로렌스 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차를 끌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들이 모두 흐릿한 잔영처럼 내 시야를 휩쓸고 지나갔다. 방금
전 까지 우리가 있었던 저택은 구름 같은 안개 저편으로 멀어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아빠는 내가 낯선 남자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뭐라고 하실까. 하얗게 김이 서린 차장에 손끝을 대자 로렌스씨가 말했다.
"산타가 되었지만 아이들의 소원을 모두 들어 줄 수 없다는 게 참 슬픕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은 신뿐이에요. 자책 하지 마세요."
"이브씨."
"네……."
"미안 합니다. 지난 몇 백년간 최선을 다해서 신의 업무를 수행해 왔지만 당신의 선물만큼은……. 대부분의 문제거리들은 신께서
쉽게 답해주시지만, 당신 소원은 신께 간청해도 되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눈이 그제서야 바다를 담은 청록색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싫어서 나는 창밖을 보는 척 이
마를 창에 가져다 대었다. 이유도 없이 가슴이 울적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공기를 환기 시키는 게 좋겠어요 하고 말하면서
그가 내 쪽의 창문을 열어 주었다.
뺨이 얼얼해질 정도의 추위. 차가운 공기 위에 뜨거운 숨을 잔뜩 뱉어내고 나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
했다.
“어차피 나는 그 소원이 이루어 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요."
로렌스씨의 씁쓸한 미소도 잠시 포르쉐는 불빛이 밝은 자그마한 레스토랑 앞에서 멈췄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Original Title : 이브의 선택[Eve's Choice]
writer by. H.AK
copyright(c)2008 All rights reserved by 한라에이케이 다음공식카페 H.AK
: 본 작품은 동일 이름을 가진 1938년도 作 영화와는 별개의 스토리 임을 알려드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4.
: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로렌스씨와 내가 찾은 '베아트리체' 는 테이블이 열 개도 되지 않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테이블 사이는 사람 한 명 다니기에도
비좁아 보였고 의자를 뒤로 밀 때마다 옆 테이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렇지만 입구에서 부터 깔려 있는 고풍스러운 빨
간 양탄자와 레스토랑 여기저기에 놓인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느껴지는 이 정겨움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자리가 꽉 차있는 것 같은데 식사를 할 수 있을런지 나는 조금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딸랑. 로렌스씨는 빈 카운터로 가서 작은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몸집이 산만한 남자가 허겁지겁 나왔고 그를 보자마자
별안간 커다란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이런! 미스터 로렌스씨! 이게 도대체 얼마만 입니까!"
얼마나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한지 나는 메인 홀에 달린 샹들리에를 조심스럽게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 쓴 높은 요리모
자를 벗고 남자는 가냘픈 몸매의 (요리사와 비교했을 때 그러했다) 로렌스씨를 사랑스러운 강아지처럼 껴안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50년 전이 었지요? 다른 산타들에게 그간의 성과를 들어 보니 대단하시더라구요!"
"얼굴을 보니 그 동안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아무렴요.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서 수입이 짭짤합니다. 이 작고 귀여운 숙녀 분은 누구신가요? 아, 혹시 이 분이……."
남자의 커다란 얼굴이 나에게로 불쑥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로렌스씨의 뒤로 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브씨. 인사하세요. 이쪽은 베아트리체의 수석 요리사 체이스씨에요."
"반갑습니다. 이브……라고 합니다."
“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브씨. 예전에 로렌스 씨에게 종종 이야기를 들어왔었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를요?"
체이스씨는 윙크를 찡끗 하더니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두꺼운 커튼 뒤에 숨겨 놓은 테이블을 꺼내 비어있는 창가 쪽에
근사한 자리 하나를 만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정식 A 코스 두 개를 시키고 로렌스씨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말을 하
는 것 보다 들어 주는 편이 좋은 나는 이럴 경우 어쩔 줄 모른다. 어쩌면 좋지. 나는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는 제가 먼저 말을 꺼낼까요?"
"옛?"
"이브씨는 생각 읽기가 참 편해요. 별로 집중을 하지 않아도 술술 들려오니까요."
"세상에. 그럼 지금까지 제가 하는 생각을 다 들으셨어요?"
"아뇨. 사고와 말이 일치하는 아이들의 경우에만 확실하게 들리지, 보통 어른의 생각은 안 들려요."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그가 부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창가에 있는 커튼에 장식한 노란 전구에
비춰 묘한 느낌을 불러왔다. 반짝이는 식기를 앞에 두고 나는 앞으로 로렌스씨 앞에서는 엉뚱한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어른인데 어떻게 생각을 읽을 수 있었죠?"
"그야……. 이브씨가 워낙 아이 같으니까 선명하게 들렸나 봐요. '아이들의 생각 읽기'도 산타 수업과정에 필수과목이거든요. 불편
하실 테니까 앞으로는 읽지 않겠습니다."
"그럼 거짓말을 하면 단번에 알아차리실 수 있겠네요."
잘 들리던 생각이 안 들릴 테니까요 하고 내가 묻자 로렌스 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체이스씨의 자랑이라는 크리
스마스이브 A 코스가 테이블 위에 펼쳐 쳤다. 으깬 감자와 샐러드 엄지 반만 한 피클조각, 메인 요리인 양심 스테이크 위에는 알
수 없는 연초록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코스라고 하기에는 단촐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고기를 작게 잘라 입에 넣는 순간 나는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혀끝으로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칠맛 나는 부드러움이 느껴진 것이다.
"산타를 관두고 몇 백년간 요리에 매진하셨다고 하더니 맛이 대단하네요."
"체이스씨가 산타라는 사실이 더 놀라운데요?"
"그런가요?"
"로렌스씨.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산타라고 하면 할아버지를 떠올리지 당신 같은 젊은 남자를 떠올리지는 않는
다구요.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솔직히 말해 보세요. 케익에서 나왔다는 반지는 거짓말이었죠?"
"네~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
으깬 감자를 포크에 가볍게 얹으면서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의외로 침착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케이크를 받으러 가는 날, 한 번
에 납치해 오는 걸로요."
"그 말을 하시면서 웃는 저의가 뭐에요?"
후후후. 로렌스씨는 작게 웃으면서 글쎄요 하고 말했다. 딸랑. 자리가 꽉 찼는데 카운터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장을 입은 커다란 덩치 사내 셋과 일곱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소년 한 명이 보였다. 소년은 블론드 머리를 단발로 잘
랐는데 그 아래에 보이는 커다란 눈은 멀리서도 푸른 사파이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주방에서 나온 체이스씨의 커다란
고함소리가 다시 한 번 레스토랑을 뒤 흔들었다. 로렌스씨는 이미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밀드레드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소년의 손짓에 덩치가 큰 사내들은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체이스씨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핏기가 없이 하얗게 질린 것이다. 나는 재빨리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고 그건 로렌스씨도 마찬가지였다. 하
지만 체이스씨가 소년을 데리고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왔을 때는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냅킨으로 입 가장 자
리를 닦아내며 로렌스씨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스승님."
"오~ 이게 누구신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 미스터 로렌스 아닌가?"
"알래스카에 감금 당하신 걸로 압니다만……."
"오늘 아침에 석방되서 첫 비행기를 타고 이렇게 돌아왔다네. 자네가 그렇게 아꼈던 댄서( - 1939년까지 산타가 이끌었던 순록 8
마리 중 한 마리로 가장 우아한 암컷으로 알려져 있다)가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더군."
"돌아오지 않으셔도 됐을 것 같습니다."
그는 냅킨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나도 덩달아 핸드백을 챙겼고 그 순간 소년의 달콤한 음성이 울
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교회의 종소리처럼 성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잘 지냈나 확인해 봐도 되는 가?"
소년이 손을 까닥 하자마자 로렌스씨의 몸이 의자 아래로 휘청거리다 비스듬하게 허공에 멈추었다. 카운터로 돌아간 체이스씨가
손을 이마에 짚고 '또 시작이시군…….' 하는 말을 내 뱉자마자 소년이 로렌스씨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어린 소년의 사랑스러운 키스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놀란 고양이 처럼 등
의 잔털이 바짝 곤두섰다.
"호오.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었구만, 로렌스."
"제발 이런 짓은 그만 하시죠."
"흐음, 이 아가씨가 공무집행에 걸림돌이 되는 셈이로구먼. 도대체 무슨 선물을 달라고 했기에 우리 사랑스러운 제자를 곤욕스럽
게 만드시는 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은 내 앞에 와 있었고 나에게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청량한 눈빛을 담고 있는 그 눈망울을 보자마자 나는
일순간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조차 혼미해 지기 시작했다. 내 주변을 메우고 있는 공기들이 따뜻한 양수
처럼 변했고 몸은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가벼웠다.
"전혀 아프지 않네. 단지 입맞춤을 할 뿐이야."
하지만 정신이 들었을 때 내 입술이 닿아있는 곳은 누군가의 손 등이었다. 소년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로렌스씨를 노려보
았고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냅킨으로 손바닥을 닦고 있었다.
"입맞춤은 제자의 방해가 없을 때 따로 하도록 하세."
"스승님!"
"나는 밀드레드 테일러라고 하네. 사람들은 성경에서 나를 종종 '인간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상냥한 마음의 천사 라파엘' 이라고 부
르곤 하지."
거짓말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손을 뻗어 악수하고 있는 소년은 성경에 나오는 대천사 라파엘이란 말인가. 내 소개를 하기도 전에
로렌스씨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 나를 이끌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바깥에 나왔을 때 나는 의자
에 벗어 놓았던 코트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렌스씨. 레스토랑 안에 코트를 두고 온 것 같아요."
"내일 시내에 가서 새것으로 사 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겠어요. 겉은 저래 보이지만 잘못 걸리면 아마 뼈도
못 추릴 겁니다."
"아까 스승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삐빅. 포르쉐 자동차에 불이 들어오고 로렌스씨와 나는 동시에 차에 올랐다. 불빛이 반짝이는 레스토랑이 멀어졌을 때 쯤, 그는
전보다 난폭하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다란 빛의 꼬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었죠. 나는 일개의 천사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다릅니다. 신의 권한을 모두 이용해서라도 인간들
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려고 해요."
"그게 뭐가 잘 못 됐다는 거죠?"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지나치게 선량한 것이 문제에요. 우연히 교회를 지나가다가 어떤 남자의 소원을 들어주
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소원은 하늘에 닿을 만큼 키가 크는 것이었고 스승님은 그대로 그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대로라면 정말 엄청나게 키가 자랐겠네요?"
"네. 자그마치 2m 50cm 나 커버렸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산타의 업무를 수행할 때, 어떤 꼬마가 가장 가지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
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가지는 것' 이라고 말하자 실제로 그렇게 이뤄 주었었어요. 세상 모든 장난감들이 그 집에 배
달되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님은 부부싸움 끝에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건은 수 백 수 천 가지가 넘는다구요. "
모든 것은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하고 로렌스씨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분이 알래스카로 감금 당한 모양이군요."
"이브씨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승님이 어떠한 말로 유혹을 하더라도 절대 넘어가시면 안돼요."
"지나친 걱정이시네요. 그건 그렇고 아까 그 키스는 뭐죠?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라파엘님의 장기 중 하나죠. '천사의 키스'는 상대방의 기억과 상흔을 모두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꼼짝 없이 당했네
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로렌스씨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Original Title : 이브의 선택[Eve's Choice]
writer by. H.AK
: 본 작품은 동일 이름을 가진 1938년도 作 영화와는 별개의 스토리 임을 알려드립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5.
: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오늘은 12월 21일, 크리스마스 5일 전이다. 로렌스씨의 얘기에 따르면 산타의 업무는 대개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계속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밀린 업무를 반드시 끝내야 한다니. 나는 오전 내내 책상에 앉아서 아이들이 보낸
편지의 주소를 옮겨 적었고 로렌스씨도 부산하게 방을 드나들며 파일들을 정리했다.
가끔 미세스 킴이 와서 간식을 놓고 갔다. 향이 좋은 헤이즐넛 커피라던가, 손수 구운 초코칩 쿠키 같은. 온갖 서적을 뒤지면서
쿠키와 케이크를 만들었던 나도 모르는 생소한 재료들이 첨가된 것도 있었다.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언제
나 킴은 잠깐 들어왔다가 바람처럼 집무실을 나가곤 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나도 로렌스씨도 편지작업을 모두 마칠 수
없었다. 나는 주욱 기지개를 키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스한 겨울 햇살에 전나무 가지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으면 로렌스씨의 저택이 어디쯤에 있는지 전혀 감히 잡히지 않았다. 뒤뜰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울창한 산림이 조성되어 있었고 멀리서 보이는 주택들은 마치 깨알 같아서 집이 산 중턱쯤에 어중간하게 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반대 편 나무 위로 뻐꾸기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직도 편지는 한참 남았군요. 다른 일을 좀 처리하고 해볼까요?"
"편지 작업 말고도 아직 뭐가 더 남았나요?"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게끔 사람들의 기억을 수정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빨리 끝내면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조용하게 보낼
수 있을 거에요. 식사가 준비 된 것 같으니 내려갑시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로렌스 씨의 말대로 식사 준비가 모두 마쳐진 상태였다. 접시에는 따뜻한 비프스튜가 바구니에 한 가득 들
은 여러 종류의 빵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치즈바게트를 입에 물었다. 로렌스 씨는 마치 아빠
가 아침 식사 중에 신문을 펴보는 것처럼 미세스킴이 가져온 양피지들을 하나하나 펴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굴뚝 검사라도 하러 가는 거죠?"
"예전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굴뚝 검사 보다는 사람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죠. 한번 보실래요?"
그는 친절하게도 보고 있던 양피지 조각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 위에는 정말 작은 글씨로 '오전 10시 32분 미스터 제이씨가
2층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로 향한다.' '오전 10시 35분 제이씨가 오렌지 주스를 한잔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가는 동안 그의 아내
앨리스는 쓰레기봉투를 버리기 위해 뒷문을 나선다.' 등이 난잡하게 써 있었다. 일종의 지령 같았다.
"아이들이 산타를 믿지 않게 되면서 시스템 자체에 큰 변화가 찾아왔어요. 물론, 도시 전역에 설치된 CCTV도 한 몫을 했구요. 그
래서 요즘은 선물을 전달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부모님, 또는 친척들의 기억을 일부 수정 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과정은 당해 보셔서 아시겠죠?"
로렌스씨가 갑자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는 바람에 나는 흐힉 놀라면서 스튜 접시를 엎을 뻔 했다.
"아하하하. 앞으론 이브씨한테 이런 장난은 하지 말아야겠네요. 이건 산타 건(Santa -Gun) 이라고 합니다. 총알 대신 기억을 수정
하는 기체가 뿜어져 나오는데 흡입하면 제가 상부에 주문한 대로 기억이 수정됩니다. 신기하죠?"
그의 손가락 끝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쓰인 투명한 총알이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연기들
이 꿈틀대고 있었다. 총알을 권총에 장전하면서 로렌스씨는 총을 들고 멋진 시범을 보였다. 펑! 입으로 효과음을 냈을 때 나는 가
슴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머, 멋지네요. 그런데 제가 굳이 동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같이 가주셔야죠."
"선량한 사람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브씨의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남자랍니다. 업무를 본다고 해서 제게 남겨진 책임을 져버릴 순
없지요. 따라오지 않으신다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쯤 되면 미스터 로렌스씨의 진심이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총구멍을 코앞에 두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승낙 했
다. 산타 건(Santa-Gun)을 맞고 어젯밤 꾸었던 악몽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
"이브씨. 그 전에 부탁 하나만 해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아무래도 우리 둘 다 밤을 새더라도 편지 작업은 끝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산지기 맥스씨께 편지를 갖다주시면 그 분이 주소를
배끼는 것을 도와주실 거에요. 저택 뒤 쪽에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오두막이 나와요. 해주실 수 있죠? 저는 이브씨가
올 때까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네. 네. 이것도 따뜻하게 보내는 것의 일부겠지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그와 나는 편지가 잔뜩 든 상자를 안고 바깥으로 나왔다. 날씨는 더 없이 화창해서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는데 전혀 눈이 올 것 같지 않네요."
"올해 일기예보는 100% 틀릴 겁니다."
"네? 그럼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됐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눈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기도가 훨씬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눈이 오면 교통체증
도 늘 테고 외출도 불편해지니까요."
"그래도 꼭 눈이 내렸으면 좋겠네요. 위층에 사는 꼬마 한 명이 굉장히 기대하고 있거든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어떻게요?"
"우리의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려보죠."
로렌스씨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회색 목도리를 풀어서 나의 목에 감아 주었다.
"돌아오시면 당장 시내에 가서 코트를 사드릴게요. 맥스씨 댁까지 멀지 않으니까 목도리만 있어도 춥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로렌스씨."
목도리에 코를 묻으니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아이였다면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을 지도 모르겠다. 귀
찮아하더라도 이내 목마를 태워서 기분 좋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줄 테니까.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어도 그는 분명 사려 깊은 사
람이었다. 나는 초록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거진 숲 속으로 살포시 발을 내딛었다. 뒤를 돌아보니 로렌스씨가 가볍게 손을 흔들
고 있었다.
오솔길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단화의 밑창으로 느껴지는 자갈돌의 단단함과 청량한 겨울바람, 낙엽이 썩는
향긋한 냄새. 오솔길 옆에는 아직 얼지 않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오히려 그에게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
얼거리며 박스를 들은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평소에 나라면 페스트리 튜브에 생크림을 한가득 넣고 주문받은 케이크를 장식하느라 정신이 없을 시간이겠지.'
크리스마스 날까지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지쳐 돌아온 나를 상상해 보았다. 담요에 몸을 돌돌 말고 추위에 떨다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캐롤송에 취해 잠이 든 나의 모습이 쉽게 머리에서 그려졌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부터 나는 조금 더 따뜻하게
하루를 보내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먹어 본 것도 먼 옛날이야기 같았다. 혼자 산다면 스스로를 챙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하고 남은 빵들을 모조리 챙겨 주던 영감님의 느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맥스씨! 로렌스씨의 부탁으로 찾아왔습니다! 안 계세요?!"
내가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산 중턱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산의 저녁은 더 빨리 찾아온다고 했던가. 어디선가
쩌억 쩌억 나무들이 갈라지는 소리에 새들이 푸드덕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무 밑동에 덩그러니 찍혀있는 도끼 자국을 바라보았
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맥스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아무래도 빨리 내려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로렌스씨의 일도 돕기로 했는데.
기다림에 지친 나는 오두막 문간에 자그마한 메모와 편지가 담긴 두 개의 박스를 내려놓고 다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
란 노른자 같은 해는 산허리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이 길이 맞나?"
올라올 때는 한 길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거기다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울창한
나뭇가지 때문에 평소보다 시야는 몇 배나 어두웠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엄습해 오자 이마에 얕은 식은땀이 서렸
다.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던 나무들도 그림자에 가려 기괴한 모습으로 나의 목덜미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로, 로렌스씨는 지금쯤이면 내가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아챘겠지."
스스로 하는 말을 우습게 여기면서 나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를 생각보다 많이 신뢰하게 되
었던 것이다. 헛웃음이 자꾸 입술에서 비집고 나왔다. 나는 뒤를 돌아 낮달이 걸린 산을 올려다보았다. 내려온 지 꽤 되었기에 다
시 올라가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였었나. 엄마와 단 둘이 숲 속을 산책 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어 버렸
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 했지만 모르는 숲길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는 즐거워했다. 덤불을 뒤지다가 산딸기를 발견했
었고 다람쥐 두 마리가 개울가에서 물을 먹는 것도 목격했다. 이내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에 완벽하게 적응한 우리 둘은 금세 산에
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 때 느껴졌던 엄마의 보드라운 손의 촉감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었다.
'어차피 나는 그 소원이 이루어 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요.'
로렌스씨는 내가 한 거짓말을 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라는 그 말이 떠오르자, 눈물이 꾸역꾸역 눈을 비집고 나왔다. 지
금 내 옆에 엄마가 있었더라면 나는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유쾌하게 산을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로렌스씨의 체취가 묻어있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나는 깊고 어두운 숲 속 한 가운데에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 멈춰서서 어둠을 바라보았다. 오롯한 외로움이 온 몸 가득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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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 가 : H.AK
* 창작실 : 주목시즌작가
* 제 목 :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편 수 :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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