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아에서 가져온 정용섭 목사님의 요한계시록 묵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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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요한계시록 (64)
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어린 양 혼인 잔치의 마지막 장면은 엽기적이라 할지, 그로테스크한다고 할지, 아주 특이합니다. 한 천사가 새들을 불러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모든 이들의 살을 먹게 했다는 겁니다. 그 천사는 특이하게도 태양 안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태양이라는 뜻의 헬리오스(ἡλιος)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태양신으로 불린 아폴론이 더 유명합니다. 요한이 이런 그리스 신화를 염두에 두고 천사가 태양 안에 서 있다고 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천사의 권위가 지상의 모든 권력을 능가한다는 의미는 분명해 보입니다.
천사는 새들을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이라고 외쳤습니다. 새들에게는 사람들의 살을 먹는 잔치이겠지요. 9절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영어 성경은 우리말 성경이 넓은 의미로 잔치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δεῖπνον을 실제적인 식사 모임을 가리키는 supper라고 번역했습니다. wedding supper, great supper 등등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는 마지막 만찬이 Last Supper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그들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찬 예식만이 아니라 실제로 밥을 함께 먹는 과정까지 그들 모임의 구성 요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예배에서는 성찬 예식이 소홀하게 다뤄집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 전통이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모든 전통을 고수해야만 하는 건 아니나 정체성에 속하는 전통은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나마 공동 친교 식사 모임이 있다는 건 다행입니다.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8절부터 새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끔찍한 명령이 내립니다.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자’는 실제로 모든 사람을 가리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아마 후자겠지요. 어쨌든지 새들이 사람의 살을 먹는 풍경은 끔찍합니다. 우리가 볼 때 끔찍할 뿐이고 새들에게는 평범한 일이겠지요. 티베트 불교 전통이 있는 어느 지역에서는 승려가 죽었을 때 조장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승려의 시체를 토막 내서 독수리의 먹이로 내주는 겁니다. 사실 매장이나 화장이나 조장이나 근본에서는 큰 차이는 없습니다. 매장은 박테리아가 시체를 먹이로 삼는 방식이고, 화장은 불이 시체를 땔감으로 삼는 방식이니까요.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새들이 모든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말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의 말과 행위가 무의미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겨우 새들의 먹이가 될 뿐인 그들의 논리와 겁박과 유혹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 조언입니다.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지금 요한은 계속해서 묵시적 환상에 사로잡혀서 글을 쓰는 중입니다. 묵시적 환상이라는 표현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세계관으로 비칠 겁니다. 하늘 보좌, 무저갱, 용, 짐승, 천사, 천군 등등이 등장하니까요. 비록 신화적인 용어가 사용되기는 하나 묵시적 환상은 아주 분명한 역사 인식이고 세계관입니다. 글쓰기 형식은 신화적이나 내용은 역사적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로마 제국의 역사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난폭한지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법체계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가 오히려 참된 승리자라는 사실도 내다보았습니다. 묵시적 세계관이 선악 이원론, 또는 영육 이원론에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듯이 선과 악의 대립과 충돌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물론 하나님께 있는 거지만요.
여기 19절에서 다시 등장하는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입니다.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는 세상 마지막 때 신랑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좌하는 천군들입니다. 이 두 세력의 전쟁이 똑같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멸절시키는 실제 전쟁은 아닙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은 국가주의와 무력을 앞세워서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각종 불이익을 주고 죽이기까지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그 박해 상황을 돌파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전쟁이 아닐는지요. 자본주의라는 우상숭배에 굴복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곧 전쟁 아니면 무엇이 전쟁이겠습니까. 비폭력 반전운동 역시 전쟁입니다. 성 소수자가 세상에서 배척당하지 않도록 도우려면 전쟁에 임하는 결기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별로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선한 싸움’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딤후 4:7) 롬 12:21절에서 바울은 악과 대항해서 전쟁을 벌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이 19절에서 말하려는 핵심도 바울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세상 짐승과 임금과 군대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리 모질게 대하더라도 백마를 탄 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길 힘을 주실 테니까 근심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쉽지 않겠으나 어떤 경우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야겠지요. 그러려면 신앙의 깊이와 용기와 지혜가 정말 필요합니다.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리면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힙니다. 그들이 더는 악한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짐승은 ‘무저갱’(계 11:7)에서 올라온 세력이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악한 무리입니다. 계 13:1절 이하에는 짐승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며 그 뿐에는 열 왕관이 있고 머리에는 신성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도 이미 앞에서 나왔습니다. ‘용처럼 말을 합니다.’(계 13:11) 말을 잘하는데, 사람을 미혹에 떨어지게 합니다. 계 16:13절은 ‘거짓 선지자의 입’을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동일 선상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들은 개구리처럼 온갖 화려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던 자’입니다.
짐승이라 불리는 그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 못은 지옥입니다. 예수께서도 예상외로 지옥에 관해서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여러분은 실제로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실제로는 없으나 메타포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누가 지옥에 가나요? 교회에 다니는 우리는 모두 천국에 가나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일부 사람을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거나 잘못이 크다는 이유로 지옥에 보내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들이 잘못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만드실 수는 없을까요? 이 질문에 완벽한 대답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벌을 받아서 극심하게 고통당하는 장소로 보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천국과 대립하는 개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세계야말로 가장 끔찍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끔찍한 곳에 대한 표상이 지옥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없음’이 지옥입니다. ‘유황불 붙는 못’이라는 표현은 사해 인근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왔겠지요.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검에 죽는다거나 모든 새가 나머지 사람들의 살로 배를 불린다고 표현한 19절은 섬뜩한 느낌이 정도입니다. 표현만 그렇지 실제로 그 문장이 가리키는 의미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층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탄 자’의 검에 나머지가 죽는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심판받는다.’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전히 진리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다음과 같은 히브리서 4:12절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 바로 앞 18절에서도 언급된 ‘새가 그들의 살을 먹는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후의 승리가 담보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로마 제국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부러워하지도 않겠지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사는 것 같으나 본질에서는 비슷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두려워할 만한 현상들이 많고 부러워할 만한 자랑거리들 역시 많습니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 돈의 위력만 봐도 됩니다. 가난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부자를 부러워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연민을 느낍니다. 돈이 신입니다. 젊은이들의 결혼과 출산 기피 현상도 이런 시대정신으로 인한 게 아닐는지요. 그리스도인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야 하기에 이런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살지는 못합니다. 이런 상황을 개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이라는 표현을 다시 주목해보십시오.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돌로 빵을 만들라는 마귀의 요구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 4:4)라는 신 8:3절 말씀을 인용하여 대응하셨습니다. ‘말씀’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생명의 힘입니다. 비유적으로 시인들은 시작(詩作)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시가 자기를 찾아오는 경험입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솔로몬의 영광으로 들꽃을 따라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돈이 신처럼 숭배받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 굴복당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진다고 해도 일용할 양식은 그분께서 허락해주시며, 그 일용할 양식만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해질 수 있는 사실을 실제로 아는 거니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이 시대정신에 저항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