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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2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2010 대한민국 우표전시회 개최 대한민국 우표전시회, 29일부터 코엑스서 개최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본부장 남궁민)는 '2010 대한민국 우표전시회'를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코엑스(COEX) A홀 A1에서 개최한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539232
2010 대한민국 우표전시회 * 기 간 : 2010.7.29.(목) ~ 8.2.(월) 5일간 * 장 소 : COEX A홀 A1 (구 태평양홀 제1전시실) * 주 최 : 지식경제부 우정사업본부 * 주 관 : (사)한국우취연합, (재)한국우편사업지원단 * 후 원 :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2008 - 미국 항공우주국(NASA) 창립 50돌 지구밖 탐구 반세기 관심은 예전만 못해 NASA 29일 창립 50돌 옛소련과 경쟁하며 함께 발전 1957년 10월4일 옛소련이 인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 발사에 성공하자 전세계는 경악했다. 가장 당황한 냉전의 맞수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 창설법안에 서명한 게 이듬해 7월29일, 지금부터 꼭 50년 전의 일이다. 우주를 향한 탐험에서 미-소 간의 경쟁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원초적 호기심 못잖은 자극제였다. 나사가 창설된 지 채 3년이 안 된 1961년 4월, 러시아는 첫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태운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며 또다시 한발 앞섰다. 나사는 20여일 뒤 앨런 셰퍼드를 태운 프리덤 7호 발사에 성공하며 추격에 나섰다. 존 에프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60년대 말까지는 달에 가야 한다’고 다그치며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1969년 7월20일 인류는 달에 첫발을 내디뎠다.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은 달 표면에 미국 성조기를 꽂았다. 미국의 ‘역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이륙 직후 폭발하는 악몽을 겪기도 했지만, 나사는 미국의 경제·군사적 이해 속에서 지금껏 인류의 우주탐험을 이끌었다. 나사가 한해 우주 연구에 투자하는 예산은 170억달러에 이른다. <사이언스> 최신호에서 오로라의 신비를 밝혀낸 것도 나사였다. 현재 나사는 2020년까지 달에 다시 우주인을 보내고, 달을 전진기지 삼아 화성에 유인 탐사선을 보내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50돌을 맞은 나사도 도전에 직면해 있다. 현재 27년의 ‘고령’인 우주왕복선들은 2010년이면 운행을 중단한다. 달 탐사를 위한 새로운 왕복선을 제작할 여력이 없어, 향후 5년 정도는 자체 왕복선 없이 지내야 할 상황이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물자를 보급하는 데 러시아의 소유스호를 빌려야 할 형편에까지 이르자, 나사는 일본이 개발 중인 무인 우주화물선 에이치티브이(HTV)의 구입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달에 우주인을 다시 보내는 연구를 5년간 미루고 그 예산을 교육 분야에 투자하기를 희망하는 등 정치·사회적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우주 연구의 방향을 놓고 ‘유인 탐사’와 ‘무인 탐사’ 사이의 갈등도 있다고 분석했다. 다수의 과학자들은 유인 탐사에 쓰이는 현행 예산을 로봇 등 무인 탐사에 쓰면 기후·지질 연구 등에 훨씬 더 유용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받는 유인 탐사 없이 앞으로 우주 개발을 이끄는 것은 힘들다는 반론도 팽팽하다. ‘구글 어스’처럼 우주과학 기술의 상업적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오는 10월 게임 디자이너 리처드 개리엇은 우주 공간에서 의약실험 등 상업적 가치가 있는 연구를 할 예정이다. 러시아는 물론, 중국도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설 50돌을 앞두고 나사의 마이클 그리핀 국장은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곧바로 장부에 수치로 정산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며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이 현재의 나사를 가능케 했음을 상기시켰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 2008-07-27
2004 - '영원한 마라토너' 손기정展 개막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孫基禎)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올림픽 108년, 그리고 손기정’ 전시회(동아일보사 연합뉴스사 공동주최)가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막됐다. 다음달 1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서양화가 강형구(姜亨九·50)씨가 기획한 것. 그는 지난 40년간 모은 사진자료와 유족에게서 받은 사진자료 등 약 1000여점을 두 가지 테마로 전시하고 있다. 제1전시관엔 ‘손기정이 달려온 길, 그리고 베를린 올림픽’이란 주제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 선생이 활약한 모습부터 2002년 11월 15일 사망 직전까지의 모습이 자세히 나열돼 있다. 당시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손 선생이 직접 모아 둔 기사 자료도 원본 그대로 볼 수 있다. 특히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뒤 시상대에 선 손 선생의 상의에서 일장기를 지운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원본 신문인 오사카아사히신문 1936년 8월 23일자도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번에 전시된 자료 중에는 베를린 제패 10주년이었던 1946년 8월 9일 서울 덕수궁에서 김구 선생 주재로 재현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장면 등 미공개 사진 20여점도 포함돼 있다. 또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민족의 제전’을 만든 레니 리펜슈탈 감독(작고)이 마라톤 부분만 편집해 생전의 손 선생에게 선물한 23분짜리 동영상물도 상영된다. 제2전시관에는 ‘아테네에서 아테네로’란 주제로 제1회 아테네올림픽부터 2000 시드니 올림픽까지의 사진 자료가 전시돼 있다. 강형구씨는 “큰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죽음과 동시에 잊혀져 가는 손 선생을 기리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손 선생이 이룬 대업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강씨는 전시관에서 ‘사이버 손기정 기념관’ 건립 후원금을 모금한다. 1인당 3만원, 전체 모금 목표액은 4500만원. 기념관은 www.손기정.com과 http://marathon1936.com에 세워질 예정이다. 문의 02-734-9567∼8(인테넷으로도 가능)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조선닷컴 2004/07/29 19:23 http://www.donga.com/fbin/output?f=css&code=cs_&n=200407290432
1994 - 영국의 화학자 도로시 호지킨(Hodgkin, Dorothy) 사망 호지킨 [Hodgkin, Dorothy, 1910.5.12~1994.7.29] 영국의 화학자. 1964년 비타민 B12의 구조를 결정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28~3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그녀는 복잡한 거대분자의 X선 연구를 했다. 그후 1932~34년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동 연구자와 함께 단백질인 펩신에 관한 최초의 X선 회절사진을 얻었으며, 얼마 후에 스테롤에 관해 조사했다. 그녀는 1934년 튜터로 옥스퍼드대학교로 돌아갔으며, 1960~77년 왕립학회의 교수, 1970년 브리스틀대학교의 명예총장, 1977년 옥스퍼드 윌프슨 칼리지의 펠로를 지내고 옥스퍼드대학교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1942~49년 그녀는 페니실린의 구조분석에 관해 연구했다. 또한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가장 복잡한 비단백질 화합물인 비타민 B12의 X선 사진을 최초로 찍었으며, 1948년에 마침내 비타민 B12의 원자배열을 완전히 결정했다. /브리태니커
1988 - 5공비리특위, 1차 조사대상 30건 확정 [어제의 오늘]1988년 5공비리특위, 1차 조사대상 30건 확정 ㆍ87년 민주항쟁의 구체적 성과물 1988년 6월27일 구성된 ‘5공비리 특별위원회’는 87년 민주항쟁의 구체적 성과물이었다. 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든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야 3당은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과 함께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 권력형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통과시켰다. 5공특위는 7월29일 여야 간사 합의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각종 비리, 부정축재 의혹 중 1차 조사 대상 30건을 확정했다. 확정한 조사 대상은 비리·의혹의 종합백화점과도 같았다. 일해재단의 설립배경과 자금 조성이 주요 조사 대상이었다. 전씨의 재단 출연기금 20억5000만원의 출처 및 578억원의 기금 조성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는지 등이 조사 안건이었다. 전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의 새세대육영회심장재단과 관련해선 236억원의 찬조금 조성 과정 및 성금 지출 과정의 부정축재 의혹이 도마에 올랐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7-28 18:09: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7281809055&code=100100&s_code=ap005
1983 - 인구 4천만 돌파 역사속의 오늘-1983년 인구 4천만 돌파 1983년 7월 29일 우리나라의 인구는 4천만 명을 넘어섰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조국 근대화의 걸림돌이 된다며 1962년 시작한 가족계획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에 처음 조사됐을 때 우리나라의 인구는 1천900만 명이었다. 그 이후 전쟁으로 인해 잠시 감소현상을 보였을 뿐, 한국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1960년 2천450만, 1970년 3천200만, 1980년 3천800만, 1990년 4천200만, 2000년 4천600만, 현재 4천800만 명)해 왔다. 그에 맞춰서 가족계획 표어·포스터도 그 내용을 달리 했다. 1960년대 ‘3·3·35 운동’, 1970년대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낳아 잘기르자’, 1980년대 ‘둘도 많다’, 1990년대 ‘아들바람 부모세대 짝꿍없는 우리세대’….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저출산 현상이 급격하게 나타나자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오히려 자녀낳기를 독려하고 있는 것. ‘한 자녀보다는 둘, 둘보단 셋이 더 행복합니다’는 이를 잘 나타내주는 표어다. 한 주간지 기자가 "계획 없는 가족계획의 후유증"이라고 표현할 만도 한 듯. 출산기피 현상 확산에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매일신문 2005년 07월 2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5886&yy=2005
1983 - 영국의 영화배우 데이빗 니븐(Niven, David) 사망 니븐 [Niven, David, 1910.3.1~1983.7.29] 영국 배우. 스코틀랜드 출생. 윌리엄 니븐 장군의 아들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다가 1935년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단역으로 출발하였으나 분명하고 신뢰감을 주는 배우로 빠르게 알려졌으며, 특히 가벼운 희극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플렌더(1935)》 《도즈워스(1936)》에서 처음 단역을 맡았으며, 《새벽 순찰(1938)》 《폭풍의 언덕(1939)》에서 비로소 주연을 맡았다. 그 밖에 《광채(1935)》 《80일간의 세계 일주(1956)》 《분리된 식탁(1958)》 《나바론 요새(1961)》 《나일 강의 살인사건(1978)》 《핑크 팬더의 저주(1983)》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yahoo
1981 -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와 결혼 1981년 7월 29일 영국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가 결혼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의 맏아들인 찰스 왕세자는 영국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971~76년 해군 소속으로 여러 곳에서 근무했다. 이후 '영 잉글랜드 스쿨'의 유치원 교사로 있던 다이애나를 만나 1981년 약혼을 발표했다. 결혼식은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1982년 첫 아기인 웨일스 공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왕자가, 1984년 둘째 헨리 찰스 앨버트 데이비드 왕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활발한 자선활동으로 언론의 초점이 된 다이애나는 찰스와 불화가 깊어지면서 결국 1992년 공식 별거에 들어갔고, 1996년 합의이혼했다. 1997년 다이애나는 연인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브리태니커
- 이창호 (공중전화카드)
1975 - 한국의 프로 바둑 기사 이창호(李昌鎬) 출생 이창호 [李昌鎬, 1975.7.29~ ] 바둑인. 바둑천재로 불리며, 10대 중반부터 정상권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9세 때 조훈현의 제자로 바둑계에 입문, 1986년에 입단했다. 1989년 KBS바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해 세계 최연소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1991년 국내 14개 프로 타이틀 가운데 7개를 석권, 스승 조훈현을 앞섰다. 1995년에는 15개중 14개를 석권, 프로 바둑으로서는 세계 최다관왕에 올랐다. 특히 이때 상금 랭킹 면에서 최고인 기성위와, 전통과 권위 면에서 최고인 국수위를 조훈현으로부터 쟁취함으로써 정상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1994년 7단에 오른 데 이어 1996년 한국기원의 결정으로 9단으로 특별승단하여 최단기간내 9단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브리태니커
1974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 탄핵결의안 2항 채택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부터 1975년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에서 시작하였다. 그 이름은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Headquaters)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닉슨은 각종 정치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2년간 대통령 직에 머물러 있었으나 1974년 8월, "스모킹 건"(smoking gun; '확증'을 의미함)이라 불리는 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그의 마지막 측근들도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서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위키백과
[워터게이트 사건 일지] 1974.09.08 -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닉선 전 대통령 사면 1974.08.09 - 닉슨 대통령 사임 1974.07.30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하원 소환명령 거부 관련 탄핵결의안 3항 채택 1974.07.29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권력 오용 및 취임선서 위반 관련 탄핵결의안 2항 채택 1974.07.27 - 하원 법사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조사방해 관련 탄핵결의안 1항 채택
1970 - 영국의 지휘자, 첼리스트 존 바비롤리(Barbirolli, John) 사망 바르비롤리 [Barbirolli, John, 1899.12.2~1970.7.29] 이탈리아 계 영국의 지휘자, 첼로 연주자.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바르비롤리(Giovanni Battista Barbirolli)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4세 때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나중에 첼로로 바꾸었다. 10세 때에는 트리니티음악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여러 차례에 걸쳐 추진됨으로써 우리 나라의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었다. 우선 많은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나고 수출도 해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도로와 항만, 그리고 발전소 등을 만들고 과학 기술의 개발에 힘써 많은 성과를 올렸다. ...
- 참의원 개원기념 (1960.8.8 발행) 1960 -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참의원) 선거 1960년 6월 15일 확정된 제3차 개헌(내각책임제)에 따라 `국회의원선거법`이 새롭게 개정돼 6월 23일 공포되었고 이전의 민의원은 해산됐다. 허정 과도정부는 새 `국회의원선거법`에 의거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할 선거를 1960년 7월 29일에 실시했다. 이로써 1952년 제1차 개헌(발췌개헌)을 통해 입법화된 후 한국전쟁과 자유당의 장기집권 등으로 인해 한번도 구성되지 못했던 양원제 국회가 구성됐다. 투표율은 84.3%였다. 선거결과 233명의 민의원 당선자중 민주당이 175명으로 압도적 다수가 당선됐고 자유당이 2명, 사회대중당이 4명, 한국사회당, 통일당, 기타단체가 각 1명, 무소속이 49명 당선됐다. 참의원은 58명의 당선자 중 민주당 31명, 자유당 4명, 사회대중당과 기타 단체가 각 1명, 무소속이 20명이었다. /조선
1958 - 미 항공우주국(NASA) 설립 [책갈피 속의 오늘]1958년 NASA 설립법 통과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지름 58cm, 무게 83.6kg에 불과한 이 인공위성으로 ‘우리가 과학기술 분야의 선두’라는 미국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 놀라움에 동그래진 눈 뒤에는 핵무기를 실은 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소련의 우주개발 행보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항공우주 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리기로 했다. 오늘은 미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1958년 7월 29일 의회는 NASA 설립을 명시한 ‘국가 항공우주법’을 통과시켰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57 - 국제원자력기구(IAEA) 발족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53년 제8회 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창해 1956년 70개국의 서명을 받아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제기구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957년 7월 29일 발족됐다. 주요기관으로는 총회와 이사회를 설치했다. 주요임무는 1.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위한 연구개발과 실용화를 장려 원조하고, 물자-설비시설의 공급에 있어서는 가맹국 상호간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나아가서는 필요한 독자적인 활동업무를 한다. 2.물질 업무 설비 시설을 제공한다. 3.과학 기술에 관한 정보교환을 촉진한다. 4.과학자 전문가의 교환이나 훈련을 장려한다. 5.제공한 원조가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지 않도록 보장조치를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대해서도 적용한다. 6.보건 안전상의 기준을 설정하고, 요청이 있으면 이것을 국가간의 약속 또는 1국의 활동에 있어서도 적용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조선
1953 - 뉴질랜드의 비행기 발명가 리처드 피어스(Pearse, Richard) 사망 피어스 [Pearse, Richard William, 1877.12.3~1953.7.29] (참고) [역사속의 인물] 발명가 리처드 피어스 1903년 오늘 뉴질랜드 티마루에서 '세계 최초' 기록이 하나 만들어졌다. 농부 발명가인 리처드 피어스(Richard William Pierse·1877~1953)가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를 띄웠다. 집에서 혼자 만든 비행기는 강변에서 28m까지 상승, 수백m 거리를 날았다. 그 유명한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 9개월 앞선 일이다. 그러나 '최초'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목격자만 있을 뿐,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피어스가 자신의 발명품을 돈벌이에 쓰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로 끝낸 것도 또 다른 이유다. 피어스의 비행기는 현대의 비행기 디자인과 무척 닮았다. 라이트형제는 複葉機(복엽기·2장의 날개를 상하로 배치한 비행기)였지만 피어스는 單葉機(단엽기·주날개가 하나인 비행기)였다. 이·착륙용 바퀴는 삼각형 자전거 바퀴를 썼고 날개는 대나무 뼈대와 아마포로 만들었다. 엔진은 15마력 정도였다. 생전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사후에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최초 발명자로 인정받았다. 고향인 테무카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3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442&yy=2009
한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1948년 7월29일, 제14회 올림픽이 런던에서 개막됐다. 2차대전으로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이었다. 한국을 비롯, 15개 신생국이 처음 참가한 것과 달리 전범국 일본ㆍ독일ㆍ이탈리아는 초청받지 못했다.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 출전한 대회는 1948년 1월 30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막된 제5회 동계올림픽 경기대회입니다. ^.@)
1946 - 전승(戰勝) 연합국 대표 21개국 파리서 국제평화회의 개최 파리강화회의 제2차세계대전 뒤 1946년 7월 29일부터 10월 15일에 걸쳐 연합국 21개국과 독일군 진영에 소속되었던 이탈리아·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루마니아 사이의 강화회의. 1946년 7월 31일 강화조약 초안을 발표하였는데, 관련국들의 정치불안으로 조인이 늦어져 1947년 2월 10일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포기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옛 유고슬라비아·프랑스·그리스에 영토를 할양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국경지대인 트리에스테를 자유지역으로 하여 1948년 국제연합(UN)의 통치 아래 두도록 하였다.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에, 다뉴브 강 서쪽 연안의 일부 토지를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하였다. 루마니아는 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었으나 남(南)도브루자를 헝가리에 양도하고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를 옛 소련에 양도하였다. 핀란드도 옛 소련에게 국경지대 일부를 양도하고 핀란드만 해군기지 조차권(祖借權)을 인정하였다. /파란-사전 http://dic.paran.com/dic_ency_view.php?kid=19506600&q= %C6%C4%B8%AE%B0%AD%C8%AD%C8%B8%C0%C7
1921 - 히틀러, 나치스당 당수 선출 1921년 7월 29일 뮌헨에서 열린 나치스(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특별 당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543표대 1표차로 당 제1위원 당수에 선출됐다. 대회전에 히틀러는 다수파방식과 의회적인 절차를 모두 폐지하고 당수를 정점으로 한 엄격한 명령-복종의 원칙 '지도자 원리'를 확립하고 당의 구성을 바꿨다. 이로써 히틀러는 나치스의 독재자가 됐고 이후 그의 결정은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 1932년 7월 31일 총선거에서는 나치스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고 1933년 1월 30일에는 마침내 독일 수상에 취임해 전세계가 전쟁과 학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조선
1907 - 영국의 포웰 보이스카우트 창립 [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英포웰 보이스카우트 창립 베이든 포웰(1857∼1941)은 깜짝 놀랐다. 그의 책 ‘정찰활동 지침서’가 런던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을 보고서다. 야외에서 정찰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실용적으로 쓴 책이 그렇게 인기를 모을 줄은 몰랐다. 그 책은 포웰이 아프리카에 있을 때 낸 책이었다. 그는 기병대 장교로 아프리카에서 수년을 복무하고 1903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열렬한 독자층은 교사와 청소년단체 직원이었다. 이들은 청소년이 야외에서 활동하기에 앞서 꼭 읽어야 하는 책으로 ‘정찰활동 지침서’를 꼽았다. 이 얘기를 들은 포웰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청소년 야외활동 단체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다. 포웰은 19세 때부터 군 복무를 했다. 그는 몸에 밴 단체생활과 엄격한 규율, 신체훈련과 야외 체험 등 군대 경험이 청소년에게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했다. 1907년 7월 29일 포웰은 보이스카우트 창립을 선언한다. 영국 브라운시 섬에서 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면서다. 사흘 뒤 세계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캠프가 개최됐다. 국제 정세의 불안이 계속되던 때 사람들이 ‘소년 군대’에 매혹된 것은 당연했다. 보이스카우트는 빠르게 세를 불려나갔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가 앞 다퉈 보이스카우트 지부를 만들었다. 1910년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나라에 보이스카우트가 생겼다. 그해에 포웰의 동생 아그네스가 걸스카우트를 만들었다. 2005년 현재 154개국 2800만 명이 보이스카우트 회원으로 등록됐다. 한국 보이스카우트의 역사도 길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구국 청소년운동을 목적으로 창설된 조선소년군과 조선소년척후대가 전신이다. 1924년 두 단체가 통합됐다가 강제 해산됐고 1946년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했다. 보이스카우트 활동에 군인 정신이 어느 정도 스며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영 방식이 지나치게 군대와 닮아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래서 군대를 연상시키는 계급 구분이라든지 깃발 행진 같은 군대풍 행사를 없앴다. 자연과 호흡하는 야영생활이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소년들의 교류 같은, 장점이 될 만한 활동을 더욱 활성화했다. 포웰은 훈련담당교관들에게 소년들과 절대로 성적 접촉을 하면 안 된다고 당부했고, 단원들에게는 가능한 한 성욕을 절제하라고 가르쳤다. 포웰이 남색(男色) 취향이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보이스카우트의 인기를 시기한 일부의 억측으로 추정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닷컴 2006-07-29 03:1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729/8334826/1
- Theodore Roosevelt
- William Howard Taft
1905 - 美·日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어제의 오늘]1905년 美·日 ‘가쓰라 - 태프트’ 밀약 ㆍ필리핀은 너희가, 조선은 우리가 1905년 7월29일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필리핀 방문 길에 일본에 들러 가쓰라 다로(桂太郞) 총리를 만난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필리핀의, 일본은 조선의 이권을 나눠갖는 일을 서로 묵인해주기로 밀약을 맺는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동서양의 두 식민제국은 이렇게 이권챙기기로 의기투합했다. 밀약의 내용은 “일본은 필리핀을 공략하지 않는다”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미국·영국의 상호 이해가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는 것이 극동의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미국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 전 해 러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은 자치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질서있게 통치한다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 말한 바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과 밀약을 맺은 일본은 8월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해 청나라와 조선에 대한 이권을 나눠가졌다. 이렇게 한반도 지배권을 열강들로부터 공인받은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5년 뒤에는 아예 강제 병합했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7-28 18:52: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7281852041&code=100100&s_code=ap005
1905 - 제2대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Hammarskjöld, Dag) 출생 함마르셸드 [Hammarskjöld, Dag, 1905.7.29~1961.9.18] 스웨덴의 경제학자, 정치가. 옌셰핑 출생. 웁살라대학교와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33∼1936년 스톡홀름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그후 재무부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여 1947년부터 외무부에서 근무하였다. 1951년 외무장관이 되었으며, 1953년 국제연합(UN) 제2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57년 재선되었다. 재임기간(1953∼1961) 동안 6·25전쟁을 비롯하여 헝가리동란·중동분쟁 등의 해결을 위해 진력하였다. 1961년 9월 콩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로 가던 중 북로디지아(잠비아)의 산중에서 항공기사고로 죽었다. 1961년 죽은 뒤에 노벨평화상이 추증되었다. /naver
1905 - 미국의 영화배우 클라라 보(Bow, Clara) 출생 보 [Bow, Clara, 1905.7.29~1965.9.27] 미국의 여배우. 뉴욕 브루클린 출생. 미인 콘테스트를 거쳐 할리우드에 들어가, 단발머리와 짧은 스커트로 쾌활하고 경박한 여자역을 맡았다. 1920년대 후반의 새로운 성적 매력을 지닌, 말괄량이로도 불리는 여배우 타입으로 출연작 《그것 It》(1927)의 원명 그대로 ‘이트 여배우’로 불리며 인기를 모았다. 대표작으로 《날개》(1927) 《함대 입항(艦隊入港)》(1928) 등이 있다. /na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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