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7월16일(토)맑음
장욱진 화백의 이야기를 읽다. 내가 장욱진이다. 나는 장욱진이었고 장욱진이며 장욱진이 될 것이다.
장욱진, ‘자화상’, 1951, 개인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장욱진, ‘밤과 노인’, 1990, 개인소장.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제공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장욱진) 자신의 육신을 다 써버린 1990년 12월 어느 날 장욱진은 오후 훌쩍 세상을 떠났다. 실로 장욱진다운 죽음이었다. 마치 죽음을 예견한 듯, 사망한 해에 그린 자전적 작품 한 점(‘밤과 노인’)이 남아있다. 굽이굽이 굴곡진 산등성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위에서 우왕좌왕 까불대는 젊은 시절의 자화상 하나가 그려져 있다. 1951년 ‘자화상’의 배경이었던 허허벌판은 아니고, 이제는 자그마한 초가집과 기와집도 몇 채 지어졌건만, 이 모든 풍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염 난 흰옷의 노인이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2022년7월17일(일)맑음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非詩能窮人, 비시능궁인
窮者詩乃工. 궁자시내공
시를 써서 시인이 가난한 게 아니라
좋은 시는 가난한 시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오후 3시에 미국 출장 중인 지월거사에게서 전화가 와 불안을 상담해 주다.
<히사마쯔 신이치 선사의 가르침에 대해서>
히사마쯔 신이치(久松 真一, Hisamatsu Shin'ichi, June 1889~1980): 일본 선사, 선불교학자, 니시다 키타로의 제자. 일본 임제종 묘심사에서 선수행. 공안 투과. 교토대학 교수 역임, 하바드대학 명예박사. 묘심사 부속 암자 春光院에서 스즈키 다이세쯔와 자주 대담하다. 칼 융과 대화 나누다. 융은 Self를, 신이치는 無心을 대론하다. 한국의 서옹선사(임제대학 재학 중)와 서로 교류했다.
묘심사 선원에서 좌선하던 시절
1. The Guiding Principles for Attaining Awakening, April 8, 1944
We vow to attain our purpose: the flourishing of the awakened way.
깨달음의 성취로 이끄는 안내 원칙. 1944.4.8
우리는 깨달음의 도(보리도)를 발전시킨다는 목적을 이룰 것을 다짐한다.
①We are determined to attain awakening to the ultimate, great way through critical study and struggling practice, and thereby to participate in the honored work of creatively revitalizing the world.
결정코 우리는 비판적인 공부와 애쓰는 수행으로 궁극의 큰길을 깨닫는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영예로운 일에 참여한다.
②Determined to attain awakening, we will never fall into narrow conventionalism concerning religion and thought, nor turn to a facile and superficial following of others. Rather, we will penetrate to the depths of reality and give rise to free and spontaneous activity which is wondrously responsive to any need.
깨달음을 얻기를 결심할지언정, 종교나 사상의 좁은 관습주의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손쉽고 피상적인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차라리 실재의 깊은 곳을 꽤 뚫어 어떤 요구에도 놀랍게 반응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행동을 일으킬 것이다.
③Determined to attain awakening, we will guard against the impotence of onesided academic study and the blindness of onesided struggling practice. Thus, with study and practice as one, we will directly proceed into the great way.
깨달음을 얻기를 결심할지언정, 단편적인 학문연구의 무능함과 수행 일변도만 강조하는 맹목성에서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공부와 수행을 하나로 보면서 큰길로 곧바로 나아갈 것이다.
④Under circumstances favorable or not, we will maintain an unswerving determination for awakening, and will expect make this awakening flourish by participating in its activities without fail.
상황이 좋든 나쁘든, 우리가 깨달음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지속하며 깨달은 활동에 빠짐없이 참여하면 자신의 깨달음이 빛나게 되리라 기대한다.
2. The Vow of Humankind, January 22, 1951
Calm and composed,
awakening to our true self,
being fully compassionate humans,
making full use of our abilities according to our respective vocations,
discerning suffering both individual and social, and its source,
Recognizing the right direction in which history should proceed;
joining hands as kin beyond the differences of race, nation, and class.
With compassion, vowing to bring to realization humankind's deep desire for emancipation,
let us construct a world is true and happy.
인류에 대한 맹세, 1951.1.22.
차분하고 태연하게
우리의 진정한 자기에 대해 깨어나
전적으로 자비로운 인간이 되어
자기 맡은 직분에 따라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개인적인 고와 사회적인 고통, 그리고 그 원인을 분별하며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깨달아
인종과 국가, 계급의 차이를 넘어 한 가족처럼 손을 잡고
자비로써 해탈을 향한 인류의 깊은 열망을 실현할 것을 맹세한다,
진실로 행복한 세계를 건설하자.
3. What is FAS?
The acronymFAS in the name of our society refers to the three inseparable dimensions of our existence: self, world and history. "F" stands for the Formless self, "A" for taking the standpoint of All humankind, and "S" for creating Supra-historical history. FAS is the expression of our ardent desire, prayer and vow to awaken to our true self, the original nature of every person. Based on this genuine self-awakening, we vow to discern the grave crisis in the modern world and its source, and thus without discrimination of any kind join hands together and recognize the right direction in which history should proceed, creating world history and constructing a world which is true and happy. To accomplish all this we take as our basis clarifying and solving problems without any one-sidedness, through a thorough uniting of study and actual practice.
FAS란 무엇인가?
우리 모임의 이름으로 쓰이는 FAS라는 약자는 인간존재의 불리할 수 없는 세 가지 차원을 나타냅니다. F는 無相의 자기 Formless self를 나타내고, A는 전 인류적 All humankind 관점을 견지한다는 뜻이며, S는 초역사적 역사 Supra-historical history를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FAS는 모든 사람의 본래적 특성인 진정한 자기를 깨달으려는 열렬한 열망이며 기도이며 서원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자아-각성에 기초하여 우리는 현대 세계의 심각한 위기와 그 원인을 통찰하기를 다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차별 없이 손잡고,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분간하고 세계 역사를 창조하여 진정으로 행복한 세계를 건설할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공부와 실제 수행을 완벽하게 하나로 만듦을 기초로 하여 문제를 규명해내고 해결할 것입니다.
4. 단 하나의 관문:
Hisamatsu says in Ultimate Crisis and Resurrection, one of his most important studies:
Our actual way of being, no matter what it may be, is a particular one, that is, it is something. So long as it is anything, it is a self that is under some kind of definition and bondage. Above all, we must be awakened to the Self that is not restricted by anything. Suppose that standing will not do nor will sitting; feeling will not do nor will thinking; dying will not do nor will living; then what do I do? Here is the final, Single Barrier against which one is pressed in order to be transformed, and through which, in being transformed, one penetrates. Zen has hitherto had innumerable ancient cases or koan, not only the traditional "1700 cases." All of them can be reduced to this Single Barrier.
히사마쯔는 <궁극적 위기와 갱생>에서 말한다,
존재의 실제적 방식은 그것이 어떤 모습을 취하든, ‘특별한 것’이며 ‘어떤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 한 그건 어떤 의미와 속박에 처한 자아(self)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어떤 것에도 제약되지 않는 자기(Self)에 대해 깨어나야 한다. 서 있어도 안 되고 앉아있어도 안 된다,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다, 죽어도 안 되고 살아도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마지막 단 하나의 관문이다. 이 관문에 부딪혀 변화되도록 압박을 받아야 하며, 거길 통과하면 변하게 된다, 그러면 그는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선에서 지금까지 1,700 개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옛이야기와 공안이 있다.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유일한 관문으로 좁혀진다.
6. 전법과 인가에 대해서:
Because the Dharma isn’t apart from the Self, it can’t be obtained from the outside.
[ …]
법이란 자기와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바깥에서 얻을 수있는 게 아니다. [...]
If our way of obtaining the Dharma leads us to value certification our paper, it will have less worth than toilet paper. True certification occurs only when we realize that the Dharma goes beyond attainment, that we are the True Self. But we tend to get caught up in things, forgetting that the Dharma isn’t something we receive from others. Ask yourself: who certifies whom? The Self does it to the Self. There is no other type of certification. Nevertheless, certification tends to get off the track and become something fixed apart from us. The transmission of the Dharma becomes a mere form, which prevents the Dharma from being transmitted in the true sense. Contemporary Zen people need to think seriously about this.
법을 얻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종이로 된 증명서(소위 인가증명서)의 가치를 따져보자면 화장지보다도 가치가 없을 것이다. 법이란 얻음을 넘어선 것이며 그건 진정한 자기라는 걸 깨달을 때 진정한 증명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 일에 붙잡혀 있기에 법이란 타인에게서 받는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걸 망각한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누가 누구를 증명한단 말인가? 자기가 자기를 증명할 뿐이다. 그 외에 다른 종류의 증명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명서란 게 옆길로 빠져 우리에게서 별도로 떨어진 어떤 고정된 물건이 되어버렸다. 법의 전승(傳法)이란 다만 하나의 형식이 되었는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이 전승되는 것을 막아버린다. 현대 선 수행자들은 이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Chapter 14, The Meaning of the Founder’s Coming from the West
-14장, 서양에서 온 창시자라는 의미
The Dharma is independent of all sutras, of all words.
[ …]
To treasure these words after Buddha’s death and say that they are his central teaching is to exhibit ignorance of the basic fact that the Dharma is independent of words. The Dharma is living in the present. New expressions and teachings may – and indeed must – emerge from it one after another.
[ …]
One who truly lives in the Dharma does not become entangled in words from Sakyamuni’s “golden mouth”.
– Chapter 15, The Three Vehicles Twelve Divisions of Teachings
법이란 모든 경전, 모든 언어로부터 독립해 있다. [...]
부처님 돌아가신 후 부처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 부처님께서 바라시는 핵심이라 말하는 것은 법이란 언어를 떠나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법은 지금 현재에 살아있다. 새로운 표현과 가르침은 정말로 ‘살아있음’으로부터 차례차례 나와야 하는 것이다. [...]
진실로 법에 사는 사람이라면 석가모니의 금구에서 나온 말에 걸리면 안 된다.
-15장, 삼승과 12분교
2022년7월18일(월)비
In a striking metaphor, one of the most powerful I have seen in all of Buddhism, Tsongkhapa refers to existence in samsara as being in an iron cage, shackled, blind, in a river—a torrent, actually—in the pitch black of night. Can you imagine how terrifying that would be? On a starless night, in an iron cage, being tumbled down a river. Sheer panic! If you were on the shore with a flashlight and saw someone in this situation, how could you respond with anything other than a massive, spontaneous outflow of compassion—“How can I help you?” Here Tsongkhapa is using the metaphor of the tumbling cage to say, “That’s how it is, folks—that’s what it’s like to be in samsara.
~ B. Alan Wallace - Stilling the Mind
내가 본 불교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놀랄만한 비유 가운데 하나는 쫑카파 대사가 윤회하는 존재란 칠흑 같은 밤 족쇄가 채워진 채, 눈먼 상태로 쇠창살로 된 새집에 갇혀 급류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다. 별 하나 없는 밤, 쇠창살에 갇혀 강물에 뒹굴면서 흘러간다. 그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완전한 공황 상태! 당신이 손전등을 가지고 언덕 위에서 이런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본다면-저 사람을 어떻게 돕지?-라는 큰 자비심이 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을 보이게 되리라. 여기에 쫑카파 대사는 굴러가는 새장의 비유를 들면서 “여러분, 이게 현실이에요. 윤회라는 게 이와 같아요.”
-앨런 월래쓰-마음을 고요히 하기
敎學相長: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친다.
事上磨鍊: 일이 있는 현장에서 공부하고 수양한다. 일하는 과정에서 배운다. deep learning이다. 왕수인은 반란 진압 전쟁을 하면서 제자를 교육하고 자기 수양을 계속했다.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은 중국 명나라의 정치인·교육자·사상가이다. 양명학의 창시자, 심학(心學)의 대성자로 꼽힌다. 호(號)는 양명(陽明),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저서 전습록(傳習錄)
溪邊坐流水, 계변좌류수 시냇가 앉아 흐르는 물 보고 있으니
水流心共閒; 수류심공한 흘러가는 물 따라 내 마음도 한가롭구나
不知山月上, 부지산월상 산 위에 달 뜨는 줄 몰랐는데
松影落衣斑. 송영낙의반 소나무 그림자 옷에 비춰 어른거리는구나.
-산중에서 제자들에게(山中示諸生, 산중시제생)-왕수인
<왕수인을 평한다>
사람들은 왕수인이 일하는 현장에서 실용적인 지혜를 구사하며 수양하는 태도(事上磨鍊, 사상마련) 즉, 지행합일을 칭찬한다. 그럴 듯도 하다. 또 선불교의 행동주의(소위 조사선의 살활자재)를 실천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는 良知良能, 致良知(양지양능, 치량지)를 철학적 기반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성선설, 본래완전성(불교에서는 불성론, 선종에서는 본래성불, 유학에서 심성론)을 믿고 가르친다. 心卽理, 萬物皆備於我心(만물개비어아심)이다. 내 마음에 곧 천지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고, 만물이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이건 心造萬有論的(심조만유론)인 唯識性(유식성)이다. 더구나 양지양능을 일상에 발휘하여 활발발하게 살아가자고 하면 이는 선종이 지향하는 頓悟成佛이며 平常心是道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왕수인이야말로 隨處에 作主하고 立處에 皆眞하여, 卽事而眞하는 理事無碍道人처럼 보인다. 그런데 왕수인이 세상에 뛰어들어 일이 벌어지는 현장 가운데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수양을 논한다고 하면, 그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어떤 사회적 질서를 수호하려 했는가? 그는 명나라 황제가 다스리는 봉건신분제도와 계급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는 민중의 입장에 선 것이 아니라 기득권 권력자의 입장에 서서 반란을 진압하고 관리를 감찰하고 민중을 다스렸다. 물론 제한적이나마 사회적 정의를 조금 실현했다. 그는 청백리로서 민사상 형사상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했으며 개인적으로 착복하거나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인간 불평등에 고뇌하거나 계급차별를 고민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체제순응적이었으며 오히려 체제수호적이다. 그의 實事求是 정신은 결국 공무수행(그는 반란을 진압하는 장군이었으며, 그것은 임명직이었으므로, 공무원 신분이었다)에 필요한 임기응변적인 지혜라는 것이지, 사물의 空性을 통찰하는 반야가 아니다. 그의 현실참여의 동기가 중생을 향한 자비인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출세 지향적인 공명심이 개입되었는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가 보리심의 서원을 실천하는 보살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는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는 공무집행에 유능한 世人이었을 뿐이다. 백번 양보하여 그가 이룩하려던 세계질서를 완성했더라도 그건 外王內聖(외왕내성, 밖으로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안으로는 성인의 덕을 갖춘다)을 실현하는 왕도정치, 그리고 대동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 전에 모색하던 세계구원의 한 방책으로 염두에 두었던 전륜성왕이란 이념에도 못 미친다. 설사 전륜성왕이 되어 세계를 법에 따라 통치하더라도 근원적 차원에서는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없음을 깨달아 출가를 단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왕수인이 기껏 자기 심중의 염원을 실현했다 치더라도 민중의 구제는 요원한 일이다. 결국 왕수인이 내세운 구호와 깃발은 화려했지만 泰山鳴動에 鼠一匹이었다. 태산을 움직일 듯이 요란한 소리가 나긴 났는데, 알고 보니 쥐새끼 한 마리가 찍찍거렸을 뿐이다. 물어보자. 반란 진압을 위한 전쟁을 수행한다는 명분에서 그가 가담한 살상에 대한 과보는 어찌할 것인가? 왕수인의 양지가 살생보를 이겨낼 수 있을까? 양명학이 중생을 구제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침 정진 끝난 후 대중스님 가운데 50대 여섯 분은 코로나 백신 4차 접종을 하러 마을로 내려간다. 오후에 자율정진하다. 정광 선덕스님이 정여, 의화, 임전스님을 불러 차모임을 가지다. 거기에 참석하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지혜의 책>이 배달되었다.
2022년7월19일(화)흐림에서 맑음으로
붓다프로젝트 한 권을 정여선덕스님께 드리다. 불암사 백중기도 회향 법문자료를 교정하여 완성하다.
*염약거(閻若璩, 1636~1704)는 중국 청초의 고증학자,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에서 書經(서경을 예전엔 尙書라 했다)이 사실은 동진(東晉)의 매색이 날조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유교 경전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를 타파했다. 그러기에 정조는 고증학을 싫어했다. 정조는 주자학적 복고주의를 지향했다. 이런 책이 존재한다는 걸 다산 정약용은 그 책이 나온 지 100년 후에 알게 되었으니 조선의 최고지식인 조차도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에 얼마나 어두웠는지 알 수 있다.
*대진(戴震,1724~1777):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강희제의 황실도서관)의 찬수관(贊修官). 기일원론. 인욕긍정론. 정통관학(正統官學)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기(氣)일원론의 철학을 확립함으로써 상층의 권력자에게 억압된 하층 사대부나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2022년7월20일(수)맑음
새벽 58.7kg. 오후 산행 다녀와서 59.1kg. 정여 선덕스님이 붓다프로젝트에 감명을 받았다면서 100권을 사서 법보시해야겠다고 하시다.
<사옹편언(簑翁片言(사옹편언)>
유구국(琉球國, 류우쿠우, 현 오키나와) 채온(蔡溫, 사이온, 1682~1762, 사상가, 문인)이 세상물정 모르는 스님을 은근히 조롱하는 글을 썼다. 여기서 스님은 말 그대로 불교승려를 뜻하기보다는 세상 이치를 달통한 것처럼 말은 잘하나 막상 실제로 눈앞에 난관을 만나면 무능하여 속수무책인 성리학자와 양명학자를 싸잡는 범주로 쓰였다. 중국 본토에서 인의와 명분을 논하던 명나라가 만주족에 무릎을 꿇는 꼴을 보고 동아시아 각국의 지식인들은 기존의 주리론적인 세계를 비판하면서 기일원론적 세계관으로 나아갔다.
林間有寺(임간유사)한데 : 숲 사이에 절이 있었는데
簑翁負鋤而過其門(사옹부서이과기문)이라 : 사옹(도롱이를 걸친 노인)이 ‘가래’를 짊어지고 그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僧見之曰(승견지왈) : 승려가 이를 보고 말하기를
老人負鋤不亦重乎(노인부서불역중호)아 : 노인께서 ‘가래’를 짊어지고 가는데 또한 무겁지 않습니까?
翁曰吾所負者鋤也(옹왈오소부자서야)인데 : 노인이 말하기를, 내가 지고 가는 것은 농기구인 ‘가래’인데
豈謂之重(기위지중)이요? : 어찌 이것을 무겁다 하십니까?
僧所負者物也(승소부자물야)인데 : 스님이 짊어진 것은 ‘천지만물’인데
其重無窮(기중무궁)이라 : 그 무게는 한량없습니다.
何不捨物而負鋤(하불사물이부서)인가? : 어찌하여 ‘천지만물’을 버리고 ‘가래’를 짊어지지 않습니까?
僧不能應(승불능응)이라 : 스님이 능히 응대하지 못했다.
[감상]
여기서 사옹(簑翁)이란 도롱이를 걸친 노인인데, 도롱이는 오늘날의 비옷이다. 비 오는 날 논밭을 살펴보기 위해 외출할 때 도롱이를 걸친다. 사옹이 어깨에 가래를 짊어지고 가다가 스님을 만났다. 가래는 자루가 긴 삽을 말한다. 논이나 도랑에 물길을 내거나 논둑을 만들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스님이 가래를 어깨에 메고 가는 사옹을 보고 무겁지 않냐고 묻는다. 늙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을 해야하는 노인에 대한 연민심에서 나온 인사를 겸한 평범한 말이다. 그런데 사옹은 예사 인물이 아니어서 농부가 가래를 지는 일은 다반사이거니와, 스님이 짊어진 천지만물이 오히려 한없이 무겁지 않겠느냐며 힐문한다.
무슨 까닭으로 스님이 천지만물을 짊어졌다고 쏘아 부치는가?
스님은 짊어지고 있는 천지만물을 버리고 가래를 짊어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농부가 가래를 짊어진 것은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상의 다반사이다. 도는 일상에 모두 드러나 있다. 평범한 것이 비범한 것이다. 平常心是道, 평상심시도, 일상적인 용심이 바로 도이다. 사옹은 ‘일상 이대로 진실’임을 보여준다. 반면 스님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일상의 평범함을 떠나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하기에 천지만물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걸로 희화화된다. 도학자들이 보였음 직한 그런 짓이 사옹의 눈에는 달 속의 떡이요 시상가첨으로 보인다. 屎上加添시상가첨이란 딴 사람이 싼 똥 위에 다시 내 똥을 싼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학설이나 이론에다 다시 나의 이론이나 언설을 덧붙이는 꼴이니 똥 냄새가 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사옹이 은근히 비꼬면서 뱉는 말에 눈 밝은 스님이라면 어떻게 대꾸해야 하겠는가?
何不捨物而負鋤(하불사물이부서)인가? 어찌하여 ‘천지만물’을 버리고 ‘가래’를 짊어지지 않습니까?
僧曰, 汝不知有乘境底人, 能捨物捨鋤而淡然, 然後 要物負物, 要鋤負鋤, 捨負自在, 平常無事.
승왈, 여부지유승경저인, 능사물사서이안연, 연후 요물부물, 요서부서, 사부자재, 평상무사.
스님이 가로대, 당신은 경계를 자유롭게 타고 가는 사람이 있음을 아느냐?
그런 사람은 물건도 버리고 가래도 버리고 담담하게 지내다가, 물건이 필요하면 물건을 짊어지고, 가래가 필요하면 가래를 짊어진다. 버리고 짊어짐에 자유로우니 일상에 아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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